40도 C 가까이 오르내리며 기승을 부리던 한여름 더위도 어느듯 물러가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차거운 기운에, 계절따라, 귀엽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주변 언덕과 화단의 갖가지 화초들도, 꽃잎은 떨어지고 잎과 줄기마저 허물어져 서늘한 바람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생을 마감하는 중이다.
<찬기운에 물무궁화 꽃잎이 애처롭게 버티고 있다>
아직 남아 있는 한낮 햇살의 따가움도 서산으로 해만 기울고 나면, 싸늘한 기운으로 바뀌는 밤공기때문에 본채는 멀리한 체 황토방 구들을 자주 찾게 된다.
<겨울(2월)부터, 늦은 봄까지 골뱅들며 지은 황토방앞
30~40m앞을 분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침 안개가 자욱하다>
지구의 지축이 기울어져, 태양빛에 실려오는 열을 조금 더 받고 덜받은 차이로 일어나는 자연현상, 이는 지구탄생이래 수십억년동안 지구 생물의 생사여탈을 절대적으로 지배해왔다.
열(熱)은 물질의 생성과 소멸뿐만아니라 모든 생명의 탄생과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기세등등하던 햇살이 한풀 꺾여가는 것을 느끼며 온도와 열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 우주에서, 물리적으로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온도인 '절대0도'는 즉 0 K, 섭씨 영하273.15도이다. 이상태에서는 물질의 열에너지, 운동에너지가 0으로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다고 한다.
우주는 차거워 지고 있다, 현재 우주의 평균온도가 켈빈단위로 2.7K, 섭씨 영하 약270.4도로 켈빈단위 절대0도로 부근까지 차거워 졌지만, 다행이 아직 절대0도는 아니다.
미항공우주국(NASA) 고다드우주비행센터의 존 C 매더박사와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조지 F 스무트교수는 미국의 ‘코비’(COBE)라는 인공위성이 관측한 결과를 바탕으로 우주의 정밀한 온도 분포 지도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 지도에서 우주의 온도가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 온도변화로 인한 대폭발로 우주가 탄생했다는 ‘빅뱅’ 우주론의 결정적 증거로 제시했다.
우주는 지금도 팽창하고 있고, 이는 지구의 온도가 내려간다는 증거다. 이들은 지금도 우주의 온도는 식어가고 있으며 현재 우주평균온도는 영하 270도 정도라는 사실을 밝혔다. 다행히, 우주공간은 진공상태라 열이 전도될 매질이 없기 때문에 열을 잃는 속도가 굉장히 느리다고 한다.
두사람은 우주의 온도를 측정해 우주의 기원을 밝힌 공로로 2006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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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면 고란희의 놀이터가 된 우리집 초가을 야경>
절대0도가 있다면, 절대고온은 없는 가? 열에너지가 더 이상 높아질 수 없는 고온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떤 상태인가?
이제는 그늘보다는 따스한 햇볕이 내려째는 양지를 찾아, 야외 쉼터를 옮기며, 부질없는 상상이 발동한다
'절대고온', 약 1.416 x 1032 K, 이는 '빅뱅이후 플랑크시간까지의 나타난 온도'이다, 현대과학에서 이보다 더 뜨거운 것에 대한 추측은 무의미하다고 간주한다. 즉, 플랑크시간 이후에는 이 온도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플랑크 시간'은 10-43 초이다. 이는 빛이 플랑크길이 즉 10-35 미터를 지나는 시간이다. 빅뱅이후 플랑크 시간까지 그 찰라의 시간 동안, '절대고온' 상태 이때는 무질서도(엔트로피)가 극한에 이르는 것이다.
이보다 더 높은 온도가 존재할 수 없는 이른바 '절대고온'에서는 모든 입자는 분해되어, 소립자와 그보다 더 작은 끈 내지는 에너지 상태로 존재할 것이라 한다.
빅뱅, 플랑크 상수, 플랑크시간, 플랑크길이, 절대고온...현실적으로 와닿지 않는, 와닿을 수 없는, 참으로 이론적이면서 사변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것들이지만, 어쨋튼, 현대 양자역학과 물리학의 이론적, 실증적 결과치들이라니 일반인들로서는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도깨비에게 홀리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이 우주가 운동에너지 0인 절대영도에서 어떤 動因으로 운동에너지가 발생하고, 무질서도가 극한으로 증가하는 절대고온으로 이르렀다가. 다시 무질서도가 줄어들며, 절대0도로 회귀하는, 한 사이클에 거의 무한한 시간이 걸리는 것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라면, 즉 우주의 탄생과 소멸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라면, 한 생명의 탄생과 성장과 소멸은 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런 현상이다.
생명은 , 진화의 결과이든, 창조의 결과이든, 지극히 낮은 무질서도(엔트로피)로 탄생한다. 무질서도가 너무 높으면 생명이 탄생할 수 없다. 생명은 최후의 소멸을 통해, 흙과 공기로 흩어진다, 즉, 무질서도가 높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가 정연한 것은 부자연스런 것이다. 자연은 무질서한 것이 기본이다. 굳이 자연스런 질서를 구한다면, 가장 자연스런 질서는 ['무질서의 극한'의 질서]를 이름에 다름아니다. 극한의 무질서는 절대온도 부근에서 나타날 것이다. 이는, '無爲自然의 道', '함이 없이함'을 이야기하던 노자의 도를 생각하게한다.
생명이 태어나 일생을 마감하는 것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것, 자연이 무질서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 이를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드린다면, 굳이 死後에 대해 연연할 필요가 있겠는가? 死後는 生前의 바램이요 희망일 뿐이다.
얼마전 추석명절을 맞이했다. 성묘와 고향찾기, 제사로 대표되는, 추석을 포함한 명절의 풍속도가 해를 거듭할 수록 크게 변화고 있다한다. 이른바 '신세대의 페미니즘'이 사회각층을 지배할 정도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신세대의 등장으로 페미니즘이 활성화되면서, 제사모시고 귀향 찾던 문화가 점차 쇠퇴하며, 그 기간동안, 대신에, 여행이나 힐링기회로 휴가를 활용한다고 한다.
경제적 환경변화가 신세대를 낳고 신세대의 영향으로 새로운 풍속으로 사회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여러면에서, 신세대는 구시대와 비교불가할 정도로 차이를 보인다. 그들을 新人類(신인류)라 부를 만하다.
신세대, 신인류을 맞이하는 구세대들인 부모들이 한동안 맞벌부부인 아들딸들의 자식인, 자신의 손주들을 돌보는 일에 연연하더니 요즈음은 이마저 점점 기피하는 풍토로 되어간다. 부모들이 전가조긔 생게를 책임지다, 언제부턴가 가사일을 맡아주던 처지로 밀려나더니, 마침내 부모들도 며느리나 딸래집의 가사노동을 탈피하려는 사례가 빈번해진다.
국가의 지원이나, 사회인프라가 갖추어져 가고 있고, 무엇보다도 나름대로 노년의 삶을 살고자 하는 문화가 점차 세를 얻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구세대의 반란이라 할만하다.
아이들은 보육원이나 어린이집으로 보내고, 부모와 자식이 따로사는 현실이 대세가 되었고, 부모가 연로하거나 모시기 어려우면, 요양원으로 보내진다. 효도는 정성과 마음이 아니라, 돈으로 떼우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근자에 문제되고 있는 출산기피도 이런 풍속변화의 영향이 크다. 시간적. 경제적인 문제이든, 여권신장의 시대적 조류이든,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고자, 맞벌이에 바쁜 부부들이 후세를 키울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 사회의 공동체문화의 주류를 형성해 나갈 것으로 생각된다. 유사하거나 또다른 이유로, 조상을 모시고 돌보는 일은 이미 포기하거나 그런 풍속이, 당대에 그칠 공산이 크다. 신인류들이 살아있는 부모 돌보기도 버거운데, 오래된 조상 모시기에 나서겠는가?
세태는 그런 방향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다. 신.구세대들의 반란이 풍속과 문명을 급속도로 바꿔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 종착역을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내가 죽거든 화장하여 山野에 뿌려라'
시대의 변화조류를 읽은(?), 나보다 17세 위의 돌아가신 사촌 형님의 유언이었다. 이른바 묘지에 묻지말고 산이나 들에 뿌려, 초목의 자양분이 되게하라는 '道人의 유언'같은 '유언'이 일상화되는 시대가 가까워 질 것이다. 山野에 뿌리는 데, 법적으로 제약이 있다면, 국가는 시대적 조류를 법적으로 뒷받침해야할 것이다. 이미 조성된 묘소라면, 굳이 이장이나 화장하여 편리한 곳에 봉안하지말고, 그대로 자연화 하는 것이 옳다. 주변 자연과 구별없이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가장 효성스런 길이 될 것이다.
자연은 무질서한 것이 기본이다.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기본에서 재탄생하는 기회가 된다. 초목이 봄이 되면 싹이 돋고 성장하여 때가 되면, 낙화가 되고 낙엽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봄이 되면 다시 생명으로 태어나거나 생명의 자양분이 되어 재탄생하는 것이다.
벌초를 하고, 묘소나, 화장한 뼈가루를 구석진 곳에 봉안해두는 것은 낮은 상태의 무질서도를 유지하여, 자연속의 생명으로 재탄생의 기회을 억압하던 꼴이 된다,
벌초를 하거나, 묘소나 봉안소를 1년에 한두번이라도 찾게 하는 것은 신인류나 그들의 후손들에게 갈등을 유발시키도 하겠지만, 그럴 이유도, 가치도 무의미한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신인류나 그들의 후손들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아서, 갈등하지도 않을 지 모른다. 그만큼 세상의 변화가 빠르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생성과 소멸의 무한한 사이클타임에 비해면, 턱없이 짧은 인생살이지만, 흙과 공기로 돌아가는 것은, 우주의 생성과 소멸프로세스에 녹아드는 것이다. 자연(自然)이 되어, 영생을 하는 것이다.
매년 갱신을 해나가는 나의 유언장에도 기록해 두었다.
'내가 죽거든 화장하여 山野에 뿌려라"
말이 나온 김에, 올해도 유언장을 갱신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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