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구조와 그릇
아프리카 초원을 상기하자!
동물의 마음(?)은 '본성'과 본성을 둘러싸고 있는 '여유'로 구성되어 있다.
동물의 여유라니? 맹수는 포만감이 그득할 때 여유를 부린다. 인간들처럼 비축을 위한 준비를 따로하지 않는다. 배고프면 다시 전장터를 누비면 될 터이다. 이 때는 약한 동물들도 여유로워진다. 먹이감에서 해방되고 두려움에서 벗어난 그들만의 여유로움이다.맹수의 눈에서 살기가 사라지면, 이들은 맹수의 사정권내에서도 두려룸없이 여유를 즐기기도 한다. 이 때는 초원은 평화롭기 다시없는 낙원이 된다.
하지만, 서서히 맹수의 여유가 사라지면, 본성이 들어난다. 일순간에 평화는 깨지고 '약육강식'의 처절한 현장으로 돌변한다. 약한 동물도 여유가 사라지고 생존을 위한 본능이 최고도로 발휘된다.약육강식의 법칙은 천둥처럼 수시로 초원을 뒤흔든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런 아프리카 초원의 우리에게 던지는 메세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정녕 초원에서만의 약육강식인가?
인간의 마음은 어떤가? 인간의 마음의 구조는 '본성'을 가장 은밀한 안쪽에 두고, 동물과 달리, '자존심'이라는 게 그 주위를 감싸고 있다. 자존심이 센 사람은 좀 두꺼운 자존심이라는 껍질로 싸고 있을 터이나, 어찌어찌하여 자존심이 상하면 쉽게 본성이 노출 되고, 이렇게 되는 경우에, 속되게 말해서 자존심을 건 투쟁을 벌인다
.
자존심의 바깥은 '자부심과 긍지' 가 감싼다. 자부심과 긍지가 큰 사람은 좀체 자존심을 건 투쟁을 하지 않는다. 어지간한 도전에도 자부심과 긍지가 훼손되지 않으면 도전에 응하지 않는 다. 주변에서 보기에 그릇이 큰사람, 통이 큰사람등으로 비춰진다.
헌데, 이런 자부심과 긍지가 무너지면, 자존심이 노출되고, 이 자존심마저 지키려고 발버둥치다 결국은 본성이 다 까발려지고, 본성을 다치는 경우를 본다. 이판사판 싸움박질이 이 형국이다.
그리고, '자부심과 긍지의 바깥으로는 '여유로움'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이런 여유로움은 동물의 여유로움과 물론 다르다. 인간의 여유로움은 자존심과 자부심 및 긍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여유로움은 인간의 품성을 향기롭게 한다. 모든 선행은 여유로움에서 나온다. 여유로움이 큰사람은 '대인'이고 귀감이 될만한 인물로 존경받기도 한다.
허나, 이런 여유로움도 점차 빛을 읽게 되면 사람이 조급해지고 점점 소인배로 돌아가게 된다. 여유로움이 어찌어찌하여 거두어지면, '자부심과 긍지'를 내세우며, 애써 여유로운 체한다. 하지만 자부심과 긍지가 여유로움은 아니다. 자부심과 긍지가 밥먹여주나? 이 정도 되면, 자부심과 긍지는 발바닥까지 까발려 졌다고 봐야 할터. 이 때는 자존심으로 한동안 버터보기도 한다. 하나, 이 자존심마저 무너지고 나면, 그 대로 인간의 본성이 들어나게 된다.
마치 여유로움을 잃고, 약육강식의 전장에서 표효하는 동물들과 진배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잖는가? 동물은 동물인데, '사회적' 이라는 의미는 인간만이 자존심과 자부심을 느끼고 가꿀수 있는 동물이라는 의미일 게다. 어디, 소나 말이 자존심이 있다면, 한줌밖에 안되는 인간의 손목의 힘에 그렇게 힘없이 끌려다니겠는가? 확 뿔로 받아 묵사발로 만들거나 뒷발로 뭉개버리고 말지
본성에 바탕을 둔 동물의 여유, 반면에, 자존심과 자부심을 바탕에 둔 인간의 여유, 여기서 동물과 인간의 구분이 시작되지 않을까? 그러므로 자부심과 긍지, 여유로움이 사라진다면, 인간세상은 짐승들의 세상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요즈음의 세상은 문명이라는 그럴듯한 이름하에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초원과 다름없는 세상! 사람의 모습, 거짓 여유로움으로 한 껏 21세기 만물의 영장입네하여도, 그 행동거지들은 초원의 하이에나와 진배없네. 먹고 먹히고, 뺏고 뺏기고...
분명 오늘의 이 모습은 힘이있는 포식자와 힘이없는 피식자로 구분되는 초원의 모습이네 . 강약은 인간의 기준으로 보는 관점일 뿐. 초원에 약육강식이라는 법칙만이 적용이 되는 세계였다면, 포식자를 제외한 피식자들은 모두 멸종 되어야 맞지 않나? 하지만 그렇지않다. 자연은 포식자에게도 피식자에게도 어느쪽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지구상 가장 강력하였던 포식자 공룡도 멸망하지 않았던가? 당시의 공룡의 먹이밥이였슴직한 무수한 약한 동물들도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며, 공룡의 횡포에서 살아남질 않았는가? 우리 인간도 그렇게 살아남은 피식자의 하나일게다.
공룡의 멸망은 우리에게 그러한 메세지를 보낸다.약육강식만이 초원의 법이 아니다. 인간에게 왜 이성이 있는 것인가? 축복받은 능력을 부여잡고도 왜? 자멸의 길을 가려하고 있는 것인가? 대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는 힘의 균형 즉 공생의 길이다. 공생하지 못하는 생태계의 종은 지구상에서 사라질 뿐이다. 그게 자연의 섭리일 테다.
어지럽게 전개되는 황우석 사태를 바라보노라면 ,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TV특집방송에 소개됨직한 저 초원에서 벌어지는 처절한 동물들의 이전투구, 약육강식의 현장이 오버랩되는 게 무슨 심사일까?
어차피, 사태는 자연의 진정한 섭리에 따라 정리 될 테다. 인간들이 대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듯한 방향으로 발버둥 친다해도...
초원의 약육강식의 법칙을 떨치고, 자연의 섭리을 가슴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대자연의 메세지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
우리 모두 여유로움을 가져야 한다..
가장 큰 여유로움은 우리가 자존심을 버리고
이기적인 자부심과 긍지를 버리고
우리의 본성마저 버린다면,
텅빈 마음속에 순수만이 가득하리라,
그리되면, 모든 것은 여유로움으로 되돌아오리니,
과학이고 기술이고
그위에 뿌리를 내리고 문명의 꽃을 피워야 하리라.
일에 대한 화두
*일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가?
*우리는 왜 그 일을 해야 하는가
*그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일이란, 백과사전적으로는 [일상생활에서는 인간의 능동적인 모든 활동]을 가리킨다라고 쓰여 있다.,
전문가입네 하는 사람들에게 ‘일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어떤 이는,
[물리적으로는 물체에 힘이 작용하여 그것을 움직였을 때, 힘이 물체에 일을 하고, 물체는 외력(外力)으로부터 일을 받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고무줄을 잡아당겼을 때, 외력은 고무줄에 대하여 일을 하고, 고무줄은 인장력(引張力)에 의한 일을 받았다고 한다. 또 높은 곳에서 물체가 낙하하는 경우에는 중력이 물체에 일을 하고, 물체는 중력에 의한일을 받게 된다. 일은 역학적으로 힘을 작용해서 이동한 거리를 곱(스칼라곱)해서 계산을 한 양의 에너지로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 에너지는 운동에너지, 열에너지, 탄성에너지등 .... 많은 에너지가 있다….
에너지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데, 일보다 폭넓은 개념으로 서로 일과 에너지간에 변환이 가능하다. 또한 물체가 에너지를 갖는 상태로는 저장을 할 수 있지만 힘의 경우에는 순간적으로 작용한 다고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에 물체에 힘이 작용했다면 이는 순간적으로 작용을 한 것이지 에너지처럼 저장을 할 수는 없다] .
모르긴 몰라도, 대충 이런 식의 설명일터이다. 하지만,
물체에 작용하는 힘이 자연스런 자연현상의 일부 예컨데, 태양이 지구를 태양주변을 돌게 하고 사계절의 꽃이 피게 작용하는 류의 자연현상도 일이라 할 수 있는가? . 시적이고 비유적인 표현아 아닌, ‘태양이 일을 한다’, ‘바람이 일을 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자연현상의 결과는 인간의 능력과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빚어내기는 해도, ‘작은 인간의 지적판단과 거기에 능동적으로 부응하는 육체적,정신적 활동’ 의 결과로부터 얻어지는 의미와 가치에 비하겠는가?
높은 곳에 고인 물이 어떠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아래로 쏟아져 내려오면서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었다면, 우린 이를 위치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바뀌면서 일을 하였다고 말하는 데, 물리적으로 결과만을 높고 볼 때는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 때, 높은 곳에 고인물이 위치하도록, 고인물이 흘러내리도록, 흘러내린 물이 목적하는 결과를 얻게 작용하도록…. 이런 인간의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의지와 활동이 개입되었다면, 유의미한 일이라 할 수 있지만, 순수하게 자연의 지각운동이나, 풍화작용, 결과로 그리되었다면, 이는 전혀 조정되지 않는 자연현상일 뿐, 유의미한 일이라 말할 수 없을 게다.
그래서 ‘인간사회를 구성, 유지.발전시키는 데, 인간자체의 존속과 성장을 이루는 데있어서, 의미있고 창조적이며 능돌적인 인간 또는 인간들의 정신적, 육체적 모든 활동’들만을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의 대상은 자연일 수로 있고, 인간일 수도 있고, 상상속에 이루어지는 고도한 정신만의 작업일 수도 있다.
물론 앞서의 예처럼 인간의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육체적, 정신적 활동의 결과로 자연현상이 일의 결과로 변환되도록 한다면, 자연현상도 휼륭한 일의 소재일터다.
어쨌튼, 당연히, 인간들의 육체적. 정신적 관심과 할동이 이루어지는 모든 분야는 일의 터전이 된다.
일에는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육체적. 정신적 활동이 부정적 결과로 귀결되는 나쁜 일, 낭비적인 일도 있고, 현재보다 부가가치를 더 크게 창출하고, 현재의 여건을 보다 좋게 개선시키는 긍정적인 결과를 얻는 그런 일도 있을 게다.
스스로에게 만족과 행.불행을 가져다주는 개인적인 일, 고도한 과학과 기술의 세계를 탐구하고 새로운 것을 발명하는 일도 있을 게고 심오한 정신세계의 작용을 통해서 인간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그런류의 일도 있을 터이다.
기업에서의 일이란?
‘기업의 존립하도록, 기업의 경영이념을 향하여, 그기업의 사회적 책임등을 달성하도록 하는 그 기업의 구성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신적,육체적 제반활동’을 말할 게다.
‘일을 잘못한다’ 는 것은 결국은 기업이 존립가치를 허물어뜨려, 기업을 망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기 위해서 우린. ‘일을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을 잘한다’는 것. 기업에서 일을 잘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기업의 존립과 경영이념이 구현, 사회적 책임을 달성하고 지속시키는 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그 일을 해야 하는가?’
‘그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부단히 의문을 가지고 생각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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