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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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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잡록/산을물로보지마라2

5. 대지에 귀를 기우려라_황우석 사태를 보며

by 靑野(청야) 2016. 9. 17.

5. 대지에 귀를 기우려라

<흐르는 강물과의 대화>

부처의 속세명인 ‘고타마 싯다르타’를 고타마와 싯다르타 즉 깨달은 자와 수행자로 나누어 수행자 싯다르타의 깨달아가는 과정을 소설화한 헤르만 헷세의 ‘싯다르타’,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러도 ‘싯다르타’에서 읽은 ‘강(江)’과 대화하는 삶’ 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감동으로 살아 있다.

[싯다르타는 부처인 고타마의 가르침이 사변적이라며 홀로 고행의 길을 계속 떠난다. 그는 여러 고행의 행로중에서 언젠가 자신을 건네주었던 뱃사공과 함께 지내게 되면서 그에게서 ‘ 흐르는 강(江)’과 대화하는 삶’ 에 대해 배운다. 이윽고 그 자신이 뱃사공이 되어 살아가던 싯타르타는 살아온 역정속에 뿌려진 세속의 인연들에 연이여, 삶이 얽히면서 고뇌하고 방황하게 되나, 결국은 세속적인 일들의 구별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깨달음을 얻고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궁극적 진리를 터득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요즘은 나루터가 교통의 요지라면, 늘씬한 철골이나 세멘트 구조물의 다리가 가로질러거나, 하다못해, 통통거리는 동력선이라도 운행되어. 주변의 풍경을 즐기는 여유는 고사하고, 이런 저런 생각할 시간마저도 뺏겨버리는 그런 각박한 세상일텐데……

강을 건너가고 건너오고자 하는 온갖 군상의 사람들을, 햇볕이 쨍쨍 내려 쬐는 한낮이나, 구름 낀 흐린 날, 비오는 날이나 바람부는 날에도, 쉬임없이 묵묵히 노를 저어 실어 나르는 뱃사공.오직 나루터를 왔다갔다하는 일견 단조롭게 보이는 뱃사공의 삶에서 싯다르타는 깨달음의 경지를 읽는다.

흐르는 강물!.

강물은 땅이 생긴 데로, 바람이 불면 부는 데로, 비가오면 비가 오는 데로 내맡길 뿐 스스로 내세우지 않는다. 햇볕이 쨍쨍 더운 날이나, 차가운 밤바람에도 끊임없이 흘러만 갈 뿐, 흐르는 물은 말이 없다. 오직 흘러 갈 뿐이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나 권세가도, 무일푼의 거렁뱅이도, 산者나 死者들의 온갖 모습과 그들의 애환을 간직한, 헤일 수 없는 사연들이 배에 실려 나루터를 왔다갔다

하지만, 평화로운 흐름으로 포근하고 고마운 뱃길을 여는 경우도 있고, 순수하고 깨끗함이 오염되고 썪고 악취나는 물질로 가득차는 경우도 있고, 세찬 격류로 바뀌어 세상을 휘몰아치는 그런 격한 모습도 보이지만, 그 모든 것은 주변여건이나 환경이 그리 만들 뿐, 흘러가는 강물에 무수히 생겼다가 사라지는, 결국은 강물로 돌아가는 포말일뿐. 강물은 스스로 말없이 흐른다. 인생도 결국 그와 같은 것, 대자연의 포말일 뿐

<대지와의 대화를>

초여름이면, 회사의 정원구석구석, 잔디밭에 웬 이름모를 잡초가 그렇게 많이 솟아나는지! 뽑아도, 뽑아도 때가 되면 밀물이 밀려오듯 솟아났다. 파릇파릇 잔디속에서 새싹이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며칠이 지나면 제법 큰 잡초로 무성히 자랐다.

어느 해, 초여름 문득 느끼는 바가 있어, 내 혼자 매일 점심시간 전후에 잔디밭에 쪼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몇 달을 계속했는 데…..

우리 회사의 정원은 인근에서 제법 유명하다. 부서마다 공장관리구역이 정해져 있는 데, 내 관할조직이 사무실과 식당의 중간에 위치한 이 정원을 관리하기로 되어 있었다. 넓은 잔디밭에, 벗꽃나무, 동백, 모과나무 및 대나무숲이 제법 구성을 이루고 있는 데, 식당을 들락거릴 때마다 이 정원의 소로로 다녀야 했다.

“ 이 더운 데, 뭐하는 겁니까?” 지나가는 상사, 동료, 부하들이 하나같이, 이 더운데, 땀을 뻘뻘흘리며 뭐하냐고 난리였다.

“보시다시피 잡초 뽑고 있소!, 며칠만 신경 안쓰면 잡초밭이요. 잡초밭”

하루 이틀도 아니고 끝없이 점심때만 되면 잡초를 뽑고 있으니, 어떤 때는 나의 행동이 궁금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미안점도 있을 터이고, 한 사람 두 사람 나와 같이 잡초뽑는 데 동참을 하기도 했다. 헌데, 2-3일을 같이 하는 친구가 없다. 때악 볕에 쪼그려 궁상을 떠는 게 영 마땅찮는 데, 지 놈들 보다야 쬐금 높으니, 모른 체 할 수도 없고.

“…님, 제초제를 확 뿌려버리면 될 터인 데” (뭘그리 궁상맞게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아야 하능교?). 은근히 불만섞힌 건의다.

어느 더운 날, 몇 사람을 불러, “점심먹고 나오면서 잡초를 뽑자”고 약간의 거부할 수 없는 명령조(?)로 다구쳐서 작업을 시작했다.

“자네 집이 어디야?”
“oo동oo아파틉니다”
“집에 뜰 있어?, 없잖아?”
“예? 아예! 있을리가 없지요”

“그랑께, 니는 나한테 감사하고, 잡초를 뽑아라. 생각해봐라, 니 평생에 뜰과 정원이 있는 고상(?)한 집에 언제 살아보겠노? 더구나, 뜰에 난 잡초를 뽑는 경험을 언제 해보겠노? 잡초를 뽑는 것이 일이라 생각하지 말고, 모처럼 ’대지와 대화’ 한다고 생각하거라.

대지의 기운은 대지에 가까이 갈수록 느끼기 쉽다. 니 아파트에 화초 키워봤나? 화초가 말이야 5충이하에서는 아무렇게나 가꾸어도 그런대로 잘 자라지. 헌데 5층이상이 되면, 어딘지 모르게 화초에 윤기가 사라지고, 진드기나 벌레가 잘 달라 붙고, 여간 관리 잘 안하면 비실비실한다고!. 이게 무슨 징존지 아나? 地氣! 大地의 氣運을 못받아서 그런게야. 더구나 아스팔트로 포장을 해놓으니, 地氣가 힘을 쓰겠어?

사람도 마찬가지라네. 그러니, 쪼그리고 앉아서 잡초를 뽑는다고 용을 쓰면, 점심먹고 운동도 되고, 지기도 흠뻑받고, 뭐니뭐니해도 ‘대지의 속삼임’ 도 들을 수 있고, '대지와 대화' 도 나누고....”

“대지의 속삭임, 대지와의 대화요? “
“그래 대지의 속삭임!, 대지와 대화”
“???”

“생명을 탄생시키고, 유지하고 가꾸는데는 빛과 열, 물과 공기, 그리고 토양이 필요하다. 토양은 자양분을 제공하고, 물과 공기을 제공하고 순화시키고 순환시키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지. 빛이란 태양에서 오는 것이고, 열이란 태양에서 오기도 하고, 대지가 내품기도 하고…. “

“모든 생명의 요소들이 대지속에 녹아 있다. 빛마저도 대지에 열과 초록으로 녹아들어 있잖니?, 모든 것은 대지속에서 나온다. 생명의 근원이, 생명의 탄생이, 생명이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대지에서 나오지 않나? 무엇보다도 니가 딛고 서 있는 토대가 대지니라. 사람들은 대지위에 살면서, 모든 것을 대지에 위탁하면서, 애써 먼 하늘만을 처다본다. 발밑에, 발바닥 밑을 내려다 보는 데 소홀한다.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일을 고통이라 생각한다. 먹고 살기 위한 방편뿐이라 생각한다. 오로지 돌아가 묻힐 곳을 걱정할 때만 대지를 생각한다네”

"대지는 모든 것을 품고 있다네, 그리고 모든 것을 생명들에게 베푼다네, 부단히 베푼다네. 때로는 꽃으로 때로는 잡초로, 때로는 낙엽으로....우리 인간들이 제잘난 맛에만 살고 느끼고 듣지를 못할 뿐이지, 아니 지금의 인간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뿐이지....

깨달아라, 그걸 깨달아라. 잡초를 뽑는 게 아니라 잡초를 뽑는 것은 방편이고 대지가 주는 메세지로 부터 깨달음을 구하라."

‘ ???, (무신 소릴 씨부리는 건지, 날이 더운데, 쭈그리고 앉아서 주물락거리드니만 살째기 맛이 갔나?)’ 뜨악한 표정들이다. 애써 나와 같이 지속적으로 잡초를 뽑는, ‘대지와 대화’ 를 즐기는 친구가 없다. 어느 날, 조경을 담당하는 아저씨가 남의 깊은(?) 속도 모르고, 매일 고생(?)하는 게 안타까웠던지, 미안해 했던지, 아무튼, 잔디 깎는 기계로 밀어버리는 바람에, 점심때만 되면 하던, 대지와의 대화는 중단되어버렸다네.

<대지에 귀를 기우려라>

‘대지에 엎어진 자 그 대지를 딛고 일어서라’

는 말이 있다. 대지에 쓰러지면, 오뚜기 처럼 일어나라는 그런 뜻이다? 하지만 이 경구의 진정한 뜻은 대지에 쓰러진 자여, 대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라. 니가 대지로부터 태어나서, 대지를 떠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더냐? 언제나 대지를 딛고서 세상을 주름잡는다고 폼잡지 않더냐?

하지만, 니는 대지의 진정한 의미를, 가치를 모르는 도다. 이왕지사 대지위에 엎어졌으면, 대지의 속삭임에 귀를 기우려 보거라라. 오뚜기 처럼 일어나서 무의미한 인생을 거듭 재생하려하지 말고 한 순간을 살드래도 니가 대지로부터, 대지의 아들과 딸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결국은 대지로 돌아가는 인생의 메커니즘, 이 메커니즘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대자연의 섭리를 다시 생각해라. 그리고 겸손해라.

'이 세상은 경이로 가득차 있고 인생은 그 경이를 하나하나 찾아서 경험해 나가는 과정이다'

'사람들은 물위를 걷는 것을 기적이라 하지만, 땅위를 걷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기적이다'

라고 여러 先覺者들은 말한다.

길가에, 발끝에 채이는 풀잎하나하나에도 이런 대자연의 섭리가 녹아있다. 인간만이, 개개의 인생만이 결코 선택된 게 아니다. 대자연의 섭리로 피어나는 모든 것들, 모든 생명들이 아름답지 않고 경이롭지 않는 게 없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고자 함일게다.

사람들이 이루고자하는 것이 무엇이더냐? 부귀? 명예? 그런 사람들도 있을 거이고, 에이 속되다! 난 일하는 재미, 일로서 이루는 성취감땜에 무언가를 이루고자 한다. 겸사겸사 부귀도, 명예도 얻어면 더욱 좋고….이런 부류도 있을 거외다.

내가 보건데, 사람들은, 만물은 우찌우찌하여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탄생하여 성장과 쇠퇴, 소멸의 과정을 밟아가는 자연일 뿐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태어나서 소멸되는 즉, 죽는 과정일 뿐.

‘이 세상이 경이롭지 않는 게 없다’, ‘땅위를 걷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기적’ 이라는 것을 깨닫는 다면, 이 세상은 새롭게 보일 테다. 내가 태어나서 죽어가는 과정이 인생일진데,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룬다는 것이 이보다 더한 경이와 기적을 이루겠는가?

인생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발견과 발명의 즐거움은 새로운 활력을 제공해 주기도 할테고, 이미 인생자체가 경이고 기적이라면, 그 위에 새로움을 추구하는 노력은 더 없는 활력이 될 뿐만아니라. 인생에 여유로움의 두께를 두텁게 할 게다. 하지만, 대자연의 섭리를 파헤치고, 이를 인류에 유익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과학자나 기술자들의 목적이어야 할 터이지 싶은데, 왕왕 과학과 기술 자체가 목적처럼 되어버리는,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고 뒤바뀌기도 하는 우를 범한다.

작은 분야에서는 과학과 기술은 그 자체가 목적일수 있겠지만, 인류의 문명의 진보에 영향을 주는 과학과 기술이라면은 과학과 기술은 목적성 보다는 수단에 충실해야 한다. '인류 문명의 진보'라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하고, 이 목적을 항상 염두에 두고 처신해야 돨게다.

황우석 사태를 보면서, 당사자들의 처신뿐만아니라, ‘서울대조사위원회’ 나 검찰의 수사결과가 사실관계의 규명에만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슴이 안타까울 뿐.

문명이 발전할수록, 기계화되어 갈수록 세상은 점점 석유냄새나고 각박해질게다. 그런다고 우리 인간들이 기계화될 수 없슴이니, 그럴수록 살아가는 주체들이, 대자연의 소리에 귀를 열고, 대지의 메시지에 마음을 여는 자세가 필요하리라.

오늘날 평범한(?) 우리 같은 인간들은 두말할 것없을 것같고, 과학기술자들입네하는분들일수록 ‘흐르는 강물과 대화’, ‘대지에 귀를 기우리는 자세’가 더없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살다보면, 대지에 엎어지기도 하리니, 차제에, 가만히 누워서, 대지의 속삭임에 귀를 기우려 보기도 하여야 하리. .

아마도 황우석 교수팀들은 기꺼이 ‘싯다르타’의 고행의 여로를 나서거나 대지에 씨뿌리고 가꾸는 촌부의 자세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드네. 곧 봄이 올 것이네. 이 때를 놓치면 그마저 失期하지 싶네. 그런 자세와 처신이 필요한 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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