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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수상잡록/산을물로보지마라2

4. 초원의 율법_황우석 사태를 보며

by 靑野(청야) 2016. 9. 17.

4. 초원의 율법

아프리카의 초원의 풍경을 경험해 보았는가?

끝없는 초원에 온갖 짐승들의 낙원, 평소에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세상이, 어느 순간 약육강식의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맹수는 표효하며 날뛰는 데, 힘없고 어린 짐승들에게는 지옥이 따로없다, 무리들의 생존을 위한 결사적 몸부림, 아우성속에 속절없이 맹수들의 표적으로 꺼꾸러진다.

비단 힘없는 짐승뿐만아니다. 맹수들끼리도 서로 어르렁거리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 힘을 잃은 맹수의 육질은 어린 짐승들과 다름없는 먹이감일 뿐이다. 먹이감을 만들기 위해, 먹이감을 피하기 위해 강자와 약자간에 쫒고 쫒기는 생존을 위한 전쟁터, 만들어 놓은 먹이감을 더 많이 차지하고, 뺏고 뺏기는 강자간의 투쟁.

동물의 마음(?)은 '본성'과 본성을 둘러싸고 있는 '여유'로 구성되어 있다. 동물의 여유라니? 맹수는 포만감이 그득할 때 여유를 부린다. 인간들처럼 비축을 위한 준비를 따로하지 않는다. 배고프면 다시 전장터를 누비면 될 터이다. 이 때는 약한 동물들도 여유로워진다. 먹이감에서 해방되고 두려움에서 벗어난 그들만의 여유로움이다.맹수의 눈에서 살기가 사라지면, 이들은 맹수의 사정권내에서도 두려룸없이 여유를 즐기기도 한다. 이 때는 초원은 평화롭기 다시없는 낙원이 된다.

하지만, 서서히 맹수의 여유가 사라지면, 본성이 들어난다. 일순간에 평화는 깨지고 '약육강식'의 처절한 현장으로 돌변한다. 약한 동물도 여유가 사라지고 생존을 위한 본능이 최고도로 발휘된다.약육강식의 법칙은 천둥처럼 수시로 초원을 뒤흔든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런 아프리카 초원의 우리에게 던지는 메세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정녕 초원에서만의 약육강식인가?

인간의 마음은 어떤가? 인간의 마음의 구조는 '본성'을 가장 은밀한 안쪽에 두고, 동물과 달리, '자존심'이라는 게 그 주위를 감싸고 있다. 자존심이 센 사람은 좀 두꺼운 자존심이라는 껍질로 싸고 있을 터이나, 어찌어찌하여 자존심이 상하면 쉽게 본성이 노출 되고, 이렇게 되는 경우에, 속되게 말해서 자존심을 건 투쟁을 벌인다.

자존심의 바깥은 '자부심과 긍지' 가 감싼다. 자부심과 긍지가 큰 사람은 좀체 자존심을 건 투쟁을 하지 않는다. 어지간한 도전에도 자부심과 긍지가 훼손되지 않으면 도전에 응하지 않는 다. 주변에서 보기에 그릇이 큰사람, 통이 큰사람등으로 비춰진다.

헌데, 이런 자부심과 긍지가 무너지면, 자존심이 노출되고, 이 자존심마저 지키려고 발버둥치다 결국은 본성이 다 까발려지고, 본성을 다치는 경우를 본다. 이판사판 싸움박질이 이 형국이다.

그리고, '자부심과 긍지의 바깥으로는 '여유로움'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이런 여유로움은 동물의 여유로움과 물론 다르다. 인간의 여유로움은 자존심과 자부심 및 긍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여유로움은 인간의 품성을 향기롭게 한다. 모든 선행은 여유로움에서 나온다. 여유로움이 큰사람은 '대인'이고 귀감이 될만한 인물로 존경받기도 한다.

허나, 이런 여유로움도 점차 빛을 읽게 되면 사람이 조급해지고 점점 소인배로 돌아가게 된다. 여유로움이 어찌어찌하여 거두어지면, '자부심과 긍지'를 내세우며, 애써 여유로운 체한다. 하지만 자부심과 긍지가 여유로움은 아니다. 자부심과 긍지가 밥먹여주나? 이 정도 되면, 자부심과 긍지는 발바닥까지 까발려 졌다고 봐야 할터. 이 때는 자존심으로 한동안 버터보기도 한다. 하나, 이 자존심마저 무너지고 나면, 그 대로 인간의 본성이 들어나게 된다.

마치 여유로움을 잃고, 약육강식의 전장에서 표효하는 동물들과 진배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잖는가? 동물은 동물인데, '사회적' 이라는 의미는 인간만이 자존심과 자부심을 느끼고 가꿀수 있는 동물이라는 의미일 게다. 어디, 소나 말이 자존심이 있다면, 한줌밖에 안되는 인간의 손목의 힘에 그렇게 힘없이 끌려다니겠는가? 확 뿔로 받아 묵사발로 맹글거나 뒤발로 뭉개버리고 말지.

본성에 바탕을 둔 동물의 여유, 반면에, 자존심과 자부심을 바탕에 둔 인간의 여유, 여기서 동물과 인간의 구분이 시작되지 않을까? 그러므로 자부심과 긍지, 여유로움이 사라진다면, 인간세상은 짐승들의 세상과 무엇이다를 것인가?

황우석 사태를 지켜보노라면, 관련된 모두나, 직간접으로 피해를 본 자들이나, 이익을 본자들 모두가 인간의 여유로움이 사라지고, 자부심과 긍지도 내팽게치고, 이제 전장은 자존심의 대결로 옮겨붙은 형국이다.

'거봐라, 너 땜시 나 얼마나 피곤했는 지 알어? ㅎㅎㅎ 이제야 내 존심 좀 살리겠구나."

'무슨 소리, 니 땜시 나 공든탑이 이 모냥이되었네. 니는 죄 없냐? 죄로 말할것같으면 나보다 니가 더하면 더하지, 아이구 억울해. 허나, 나 반드시 다시 쌓을 낀게, 누고봐, 너 그 때는 궁물없어! "

"흐흐흐 이참에, 저아제들 뿌리를 확 뽑아버리자, 초원의 무법자를 이참에 들어내고, 나 좀 기펴면서 살자, 그 동안 구겨진 자부심도 복원하고, 자존심도 살리고..."

요즈음의 세상은 문명이라는 그럴듯한 이름하에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초원과 다름없는 세상! 사람의 모습, 거짓 여유로움으로 한 껏 21세기 만물의 영장입네하여도, 그 행동거지들은 초원의 하이에나와 진배없네. 먹고 먹히고, 뺏고 뺏기고...

분명 오늘의 이 모습은 힘이있는 포식자와 힘이없는 피식자로 구분되는 초원의 모습이네 . 강약은 인간의 기준으로 보는 관점일 뿐. 초원에 약육강식이라는 법칙만이 적용이 되는 세계였다면, 포식자를 제외한 피식자들은 모두 멸종 되어야 맞지 않나? 하지만 그렇지않다. 자연은 포식자에게도 피식자에게도 어느쪽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지구상 가장 강력하였던 포식자 공룡도 멸망하지 않았던가? 당시의 공룡의 먹이밥이였슴직한 무수한 약한 동물들도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며, 공룡의 횡포에서 살아남질 않았는가? 우리 인간도 그렇게 살아남은 피식자의 하나일게다.

공룡의 멸망은 우리에게 그러한 메세지를 보낸다.약육강식만이 초원의 법이 아니다. 인간에게 왜 이성이 있는 것인가? 축복받은 능력을 부여잡고도 왜? 자멸의 길을 가려하고 있는 것인가? 대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는 힘의 균형 즉 공생의 길이다. 공생하지 못하는 생태계의 종은 지구상에서 사라질 뿐이다. 그게 자연의 섭리일 테다.

황우석 사태를 지켜 보노라면,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TV특집방송에 소개됨직한 저 초원에서 벌어지는 처절한 동물들의 이전투구, 약육강식의 현장이 오버랩되는 게 무슨 심사일까?

어차피, 사태는 자연의 진정한 섭리에 따라 정리 될 테다. 인간들이 대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듯한 방향으로 발버둥 친다해도...

황우석 사태의 당사자, 국민 모두들! 우리는 인간이외다

초원의 약육강식의 법칙을 떨치고, 자연의 섭리을 가슴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대자연의 메세지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

이제, 우리모두 여유로움을 가질 때다.

가장 큰 여유로움은 우리가 자존심을 버리고

이기적인 자부심과 긍지를 버리고

우리의 본성마저 버린다면,

텅빈 마음속에 순수만이 가득하리라,

그리되면, 모든 것은 여유로움으로 되돌아오리니,

과학이고 기술이고

그위에 뿌리를 내리고 문명의 꽃을 피워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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