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知識과 智慧
'너 자신을 알라 '
소크라테스가 求한 파르테논 신전에서 내린 신탁이나,
'참 나, 나의 본성을 깨달아라'
佛家에서 수행의 단골 화두로 삼는 부처의 가르침들이 하나같이 '나'를 걸고 넘어진다(?). 어찌보면, 자신이 자신을 가장 잘 알지 싶운데, 선인들이, 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자신부터 알아라'고 다구치는 형국이니 보통 인간들이라면 이게 좀 짜증스런 일일 것인가? 존심도 상할터이고...
'나'가 모여 ‘우리’가 되고, ‘우리’가 모여, ‘사회’가 되고, ‘국가’가 되고, ‘인류 집단’이 되니, '나'를 안다는 것은 '나'의 문제일 뿐만아니라, ‘우’리의문제, ‘사회’의 문제,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제일터이다.
'아는 것이 힘' 이라는 데, 속된 말로 ’알아야 면장을 하지’ 하는 데, '안다 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앎은 '知', 知識이고. ‘智’’는 智識 또는 智慧일 터이다.
知識의 반대는 무지이나, 智慧의 반대는 어리석음이다. 넓은 의미로 지식이란 사물에 관한 개개의 단편적인 실제적(實際的) ·경험적 인식을 뜻하고, 엄밀한 뜻으로는 원리적 ·통일적으로 조직되어 객관적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 판단의 체계를 말한다. 지식이란 ‘보편타당한 이치’인 진리 그 자체일 수 있고, 그 과정에 이르기 까지의 제반정보인 과학적 지식이거나, 자신이 지향하는 직업이나 관심분야에 대한 전문지식, 생활속에 다양한 직.간접경험에서 얻어지는 일상적 지식등이다.
일반적으로 상식이란 애매하고 부동적(浮動的)이며, 지식은 명석하고 확정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지식과 상식 사이에 뚜렷한 금을 긋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상식의 순화(純化)에 의한 지식도 있으며, 반대로 과학적인 지식으로서, 그것도 상당히 고도(高度)의 지식이 상식화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지식은 ‘사실적 영역’ 이다. 지식은 머리속에 축적되고, 머리속에서 나온다. 지식이 풍부하다는 것은 그래서 머리속에 든게 많은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요즈음, 조기교육이다, 교육열풍이다 해서 어링 아이들 머리속에 억지로 쑤셔넣는 것은 머리속에 든게 많은 사람을 만들고자하는 욕구와 욕망의 발로일 테다.
반면에, 지혜란 ‘깨달음의 영역, 비유적 영역’ 이다. 그래서 ‘지식은 가르칠수 있어도 지혜는 가르칠수 없다’ 고 한다. 이는 직접적으로 지혜를 가르질 수없거나, 직설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 말일게다. 지혜는 그래서 비유적으로 가르치고, 마음속에 깨달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고승대덕의 선문답이나,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하는 데는 ‘敎外別傳’이라하여 직접적인 표현은 삼가하고 오직 고도한 은유적, 비유적 표현만이 전하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머리속 지식적 사고로는 너무 단순할 뿐만 아니라, 말장난 비숫하게 들릴 게다. 하지만, 산으로 대표되는 ’靜’ 의 본질, 물로 대표되는 ‘動’ 본질을 갈파하고 본질은, 본성은 변함없는 데,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의 변화에 따라, 산과 물이 형상과 현상을 달리한다는 고도한 깨달음을 은유적,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일 터이다.
‘지혜는 마음속에 축적되고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경구가 있다. 지금은 마음속에 든 지혜가 없어도, 떵빈 마음속에 오히려 지혜가 스며들기 더 없이 좋다. 어리석음이 가득한 마음이라면, 지혜가 스며들기 그만큼 어려우리라. ‘어리석음을 비우면, 그 빈 마음속에 깨달음을 채운다면 이 만한 복이 어디 있겠는 가?
‘탈무드의 지혜’, ‘솔로몬의 지혜’, ‘성현들의 말씀들’ 이 모든 지혜들은 하나같이, 비유적 경구로 가득차 있다. 이는 지식의 전달이 아닌 지혜를 고양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一字無識의 시골의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식에게 베풀어주는 가르침이 어디 知識이겠는가? 이런 지식이라면, 배운 자식에 어디 당할 손가? 과학적 지식으로 대표되는 소위 이론적 지식은, 아무리 모여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하여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해답을 주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다. 온몸으로 경험하고 체득한 나름대로의 인생의 섭리를 사랑을 통하여 아낌없이, 당신들의 몸을 살르면서까지 자식에게 전하고자하는 것 그것이 어머니의 지혜이로다. 단지 받아드리는 자식이, 머리속에는 든게 많으나, 마음속에 어리석음이 가득하여 채우지 못할 뿐이지.
요즈음처럼 문명을 이루는 데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기인한바 크다는 것은 부인 못한다. 지식은 그 과학과 기술을 이루는 데 기반체계라 할 수 있다. 허나 지식은 올바른 지식도 있고 잘못된 지식도 있다. 지식은 언제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지식이 잘못 발휘되는 사례를 우리는 고금을 통하여 무수히 겪어오고 있다.
하지만 ‘지혜는 언제나 善하고 유익하다’. 선하거나 유익하지 않으면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식이 유익하게 작동하게 하는 지침이되고, 기준이되고 나침반이 되는 데는 지혜의 역할이 크다하겠다. 인간의 마음속에 지혜가 깃들수록, 마음속에 깃든 지혜의 경지가 높을수록 비로소 지식은 향기를 그 만큼 발한다. 지혜가 인간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바탕위에서 지식이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지혜는 시공을 뛰어 넘어 인간의 마음속에서 인간이 인간이게 하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널리 인간에 유익하게 하라’는 우리 민족의 ‘홍익인간’의 이념도 고도한 인간 지혜의 발현의 염원일 게다.
황우석 사태를 보면서, 지혜가 결여된 고도한 지식의 추구가 어떤 결과로 귀결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무척 교훈적 사례라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는다. 이러한 깨달음이 지식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크나큰 경종의 영원한 울림으로 작용할 때, 이번 교훈은 그야말로 지혜로운 수습이 될게고, 앞으로 더 큰 성취를 위한 기반으로 , 이 문명을 선도하고, 참여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전화위복이 될 게다.
‘21세기는 지식기반사회’하 하느데, 우리 모두 곰곰이 이 문명의 미래를 성찰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수단들을 선하고 유익하게 사용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과학자는 과학의 영역, 기술자는 기술의 영역에서, 사업가는 기업활동의 영역에서…..지혜의 아름다움', '지혜의 힘'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다.
‘아는 것이 힘’ 이라는 것은 ‘지식적 앎’이 아니라 ‘지혜로운 앎’이 여야지 싶다. 대덕고승을 모셔 과학기술에 종사하게 할 수 없으니, 속세의 우리가, 명색이 과학자, 기술자입네하는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지혜로움에 다가가는 노력을 기우려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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