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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수상잡록/산을물로보지마라2

일의 원리와 자세2

by 靑野(청야) 2016. 9. 17.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의 사전적인 뜻은 “보편 타당한 이치” 일게다.
세상의 이치라는 게,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타당하지 않은 것, 타당하기는 하나 보편적이지 않은 것, 보편적이지도, 타당하지도 않은 일들이 좀 많나?

타당하지 않다는 것은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로 봐야 한다. 항상 그러하고 보편적인 것, 즉, 진리가 되기 위한 요건은 참으로 言外의 까다로운 점이 있을 터이다. 진리란 ‘항상 그러하다’고 판단할 수 있도록 논증이 되어야 할 게고, 그리고 그게 ‘보편적이다’는 것이 누구에게나 인식되어야 할 게다.

그러다 보면, ‘무엇이, 어떤 수준이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 ‘, ‘무엇이, 어떤 수준이 [타당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가? ‘라고 의문을 가져 볼 수도 있겠다.

그런 진리에는 일정한 범위, 조건하에서만 성립하고, 그 범위와 조건을 벗어나서는 진리의 조건이 성립하지 않을 때, 우리는 ‘현상적 진리’ 혹은 ‘상대적 진리’ 라 말할 수 있을 게고, 일정한 범위, 조건이 불변이거나, 항구적일 경우, 즉 어떤 경우에도 진리의 조건이 성립하는 경우에 우린 그런 진리는 ‘궁극적 진리’ 혹은 ‘절대적 진리’ 라고 말할 수 있다.

고대에는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이 진리로 인식되었던 시대가 있었다. 이는 당시로서, 보편적이기기는 하였지만 타당하지 않는 것이였다. 따라서 이는 ‘진리가 아니였다’라고 말할 수 있다. 단지, 당시에는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고, 현상적인 것을 보고 불충분한 인식론적 결론으로 받아드렸기 때문에 ‘보편 타당한 진리’인것처럼 착각하고 살았을 터이다.
사람들은 "진실은 시간이 지나면 바뀌기도 한다" 고 말한다. 갈릴레오 전엔 지구가 평평하다는 것이 진리였다. 그는 거짓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갈릴레이를 재판했던 사람들에게는 갈릴레이의 말은 거짓이고 진리가 아니였다. 그들에게의 진리란, 갈릴레이에 의해서 밝혀지기 전에는 절대적 진리였던 것이다.

‘빛의 속도는 일정하다’ 또는 ‘이 세상에서 빛보다 빠른 것이 없다’는 현대물리학의 기본 명제는 아직까지는 ‘보편타당한 진리’처럼 보인다. 태초나, 태초전후에서, 혹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는 이런 명제가 성립되지 않을 지도 모르지면, 적어도 현재까지 알려진, 이 세상에서는 ‘진리’인 것으로 누구나 받아드린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절대적 진리’임에 틀림이 없다.

갈릴레이-뉴튼-아인시타인계보를 이을 아인시타인 이래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라는 스티븐호킹이, ‘시간은 과거로 거슬을 수 없다’한 적이 있다. ‘시간은 과거로 거슬러 갈 수없는 것이’ 이 세상에서는 절대적으로 성립하는 그야말로 ‘절대적 진리’인 것처럼 이해된다. 더구나 일반인들에서야 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러이러한 조건이 충족되면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갔다오는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는 견해도 나온다. 다시 말하면, ‘시간은 과거로 거슬을 수 없다’ 는 절대적 진리도, ‘어떤 조건하에서는 그렇지 않다’ 혹은 ‘어떤 조건하에서는 그렇다는 상대적 진리’의 영역으로 넘어올 기미를 보인다.

‘생명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는 부처의 가르침은, 모든 생명체에 쒸어진 절대적 진리의 굴레를 지적한 말씀일 게다. 과학이, 생명공학이 발전하면, 언젠가는 육체적으로도 永生을 얻을란가?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니다. 이러저러하면 永生을 얻으리로다?’ 그리되면, 절대적 진리처럼 신봉되는 부처님말씀도 격이 한풀 떨어지지 싶은데?

어떤 경우에도 성립한다는 ‘절대적 진리’는 베일을 볏겨감에 따라, 일정한 조건하에 성립하는 ‘상대적 진리’로 바뀌어가고, 어떤 경우에는 진리가 아닌 즉 보편타당하지 않는 일로 바뀔수도 있다.

이의 역전개 현상도 있을수 있겠다. 오늘 버림받는 이론이 내일이면 빛을 발하고, 진흙속에 묻혀 있던 진주가 세월이 흘러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사례가 무수하다. 학문의 영역에서 묻혀진 진리가 뒤에 들어나서 고고히 빛을 발하는 사례가 허다하다. 갈릴레이를 매도했던 자들의 믿음인 천동설은 거짓으로 들어나고, 역설적으로 갈릴레이의 말은 거짓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는 데, 세월이 흘러 지금은 만고의 진리로 인정받기에 이르지 않았는가?

이와같이, 어제의 사기사건이 오늘에 정의로운 일로 둔갑할 수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이다. 그만큼 인간은 불안전한 존재이기 때문임을 방증한다.

어떻게 보면, 절대적 진리든, 상대적 진리든 원래 그게 없었는 데, 잘 모르니, 우리가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고대의 천동설은 사실은 진리가 아니였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의심의 여지없는 절대적 진리였을 터이듯이
하물며, 삼라만상의 유구한 역사속에 그런 일이 한두건이랴?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러한 지적굴레속에서 헤메고 있는 게 좀만을 텐가? 인간이 모든 것을 알기전에는........

왜그런 현상이 발생하는가? 하면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유한한 생명의 인간이 무한한 세월속에, 무한한 삼라만상의 이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불안전하고, 유한한 생명이기 때문에 인간은 끝없는 진리, 신기루같은 진리탐구를 위한 지적항해를 영원히 계속해야하는 숙명을 타고 났다.

언제까지? 인간들은 그런 숙명을 지고 가는가? 인간이 멸망하거나, 우주가 없어질 때까지 헤멜터이다. 왜 그렇게 오랜시간이 걸릴까? 왜냐하면, 그만큼, 생명의 유한성은 무한에 비해 보잘것없거나, 이 만큼 온 세월이, 이 정도의 세상이 그 만큼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건 논의 본질이 아니므로 더 이상 논의를 발전시키지 않고, 일단, 진리의 사전적 정의를 받아드리기로 한다.

과학과 기술

과학(Science)이란 무엇이고 기술(Technology)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 보면 ‘과학은 자연법칙과 현상들 간의 관계를 밝혀내는 것이며,기술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과학적인 지식을 활용하는 것’이다. 여기에 무언가 차이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정확하게 이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을 듯 싶다.

굳이 구분을 짓자면, 삼라만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에 관련된 것들, 그 구성원의 개개요소에 관련된 것들을 망라하여, 그 구성과 생성, 성장과 소멸의 원리를 밝히는 것이 과학일 터이다. 과학은 그래서 ‘발견적 영역’ 이라 말할 수 있다.
기술이란 과학적 원리를 응용하고 이용히여 필요한 사항을 이루고 구축하는 즉 실행에 옮기는 행위와 결과물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기술은 그래서 ‘발명적 영역’ 인 것이다.

하지만, 과학은 기술적인 응용을 그 전제로 깔고 있으며, 기술 또한 응용을 통해 과학적인 이론 연구로 연결돼 있는 실정이고 보면 구체적으로 어느 단계를 과학과 기술의 경계로 삼아야 할지를 결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인시타인이 상대성이론에서 ‘에너지는 질량에 빛의 속도의 자승을 곱한 것’, 이른바 ‘질량_에너지 변환식’ 을 발표한 바 있다. 자연현상중에 물질 즉 질량과 에너지와 빛의 속도간에 관련된 원리을 발견한 것이였다. 그 후, 이 자연현상의 원리가 이론적 근거가 되어, 오펜하이며등 이후의 과학기술자들에 의해서 원자폭탄이 발명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즉, 아인시타인이 ‘질량_에너지 변환’이라는 자연현상을 발견하고 설명한 것은 과학적 업적이고, 그 후, 이 원리를 이용하여, 비록 인류사에 부정적 결과이지만 순수기술자체만으로 볼 때, 원자폭탄이 발명된 것이나,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 가능하게된 것은 기술적 업적인 것이다.

우주역학과 원리를 파헤치고자 하는 과학은 아무리 이론이 정교해도, 이를 검증하는 데, ‘허블망원경’이나 전파망원경 같은 기술제품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할 테다. 반면에, 허블망원경이나, 전파망원경 같은 기술 제품도, 그들이 탄생하기까지는 무수한 과학적 원리들이 동원되었다

이처럼, 과학과 기술은 상호보완적이다. 과학적 원리는 검증되어야 하나, 그 검증은 기술에 의존한다. 또한 기술은 과학적 원리에 바탕을 두게 마련이다. 과학은 기술과 결합하여야만이 그 가치를 발할 수 있고, 기술은 과학의 원리에 기반을 두어야만 꽃을 피울 수 있다.

근래 들어 급속 발전하고 있는 바이오 등 첨단 분야의 경우 기술개발을 위해 과학 영역에 속하는 새로운 이론을 규명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루가 멀다하고 첨단기술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과학과 기술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한마디로 기술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과학과 과학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기술은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때문에 과학과 기술을 일체의 관계로 보고 과학기술(Science & Technology)로 통용하고 있는 게 세계적 흐름이기도 하다. 이처럼 과학기술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면서 과학자(Scientist)와 기술자(Engineer) 또한 상호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로 볼 수도 있다.

‘기술보호’, ‘지적재산권 보호’라는 말이 있다. 기술의 결과는 보호되는 것이 세계의 추세이다. 독특한 기술적 결과는 ‘발명’ 으로 보호된다. 이러한 발명을 이루는 데는, 어렵사리, 과학적 원리를 실제생활에 응용토록 구현하는 데는 상당한 노력과 자금이 투입되게 마련이다. 이러한 노력에 대한 대가로 발생한 발명에 대해서는 ‘발명특허’ 라는 명목으로 일정기간 그 발명특허가 가져다 주는 권리, 이익을 보장해 준다.

과학적 원리을 거쳐서 이를 응응하는 기술, 그 결과물인 발명과 이 발명에 대해 인정해주는 막대한 권리와 이익, 이는 현대의 과학과 기술이 상호보완적으로 발전하게 된 동인이였던 셈인데, 문제는 막대한 권리와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발명특허선점경쟁’ 이 본인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 과정에서 고양되는 성취욕과 명예욕등과 어울어져 왕왕 무리한 일들을 낳게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부가 추진(推進)하고 있는 대형 국책과제를 비롯 산학연 협력 프로젝트에 과학자(대학과 정부 출연연구소)와 기술자(산업계)가 공동 참여하는 게 관례처럼 돼 있다. 하지만 문제는 과학자와 기술자가 과학기술이란 울타리 밑에서 제대로 융합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우선 과학자는 법칙과 원칙을 발견하고 이를 기술에 응용할 수 있을 지의 여부를 탐색하는 등 정신적 영역에 속하는 활동을 하는 데 비해 기술자는 과학적 방법이나 지식을 기술혁신에 이용하기 위해 물질적 영역에 속하는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이로 인해 연구과정에서의 도덕성과 정직성 등 윤리적 기준에 대해서도 과학자와기술자 간 인식의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또, 과학적 성과와 기술적 성과에 대한 성취욕, 명예욕, 권리와 이권에 관련된 자세가 크게 다르다. 지향하는 목표와 관점이 융화하지 못하는 경우, 조정되지 못하는 경우, 불협화음이 클 수밖에 없다. 과학자와 기술자가 원만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지 못할 경우 연구개발 과정에서 자칫 엄청난 파문을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排除)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줄기세포 논문 조작으로 온 나라를 들썩거리게 한 황우석 사태도 따지고 보면 과학자와 기술자간 불협화음이 빚어낸 상징적 사례로 볼 수 있다. 황교수팀 개개인이, 과학적 원리와 기술적 결과를 활용하는 데, 동상이몽으로 지향하는 자세가 워낙 틀린 참여자들이 분업화, 기술보호란 명분으로 조정되지 않고 .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추진되다 보니 들어난, 사필귀정의 사태라 말할 수 있다.

학계(황교수등), 업계(미즈메디등), 정보, 기관들이 ‘체세포 치환 배아줄기세포’ 라는 그럴듯한 동일한 수단을 활용하여, 나름대로 이질적 목표와 이익을 조정없이 쫓은 거다. 조정의 큰 역할이 팀리더인 황교수에게 있슴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유야 어쨋건, 논문데이터의 조작’과 이러한 조정역활의 부실이, 국민들이 상심하고 황교수에게 실망하는 큰 이유중에 하나일 것이다.
이런 큰 일을 추진하는 소위 전문가입네하는 사람들마저 혼돈속에 허우적거렸으니, 국민들은 발견과 발명, 과학과 기술, 특허선점의 경쟁매카니즘을 이해할 수도, 이해할 리도 없다.

지식과 지혜

'너 자신을 알라 ' 소크라테스가 求한 파르테논 신전에서 내린 신탁이나, '참 나, 나의 본성을 깨달아라' 佛家에서 수행의 단골 화두로 삼는 부처의 가르침들이 하나같이 '나'를 걸고 넘어진다(?). 어찌보면, 자신이 자신을 가장 잘 알지 싶운데, 선인들이, 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자신부터 알아라'고 다구치는 형국이니 보통 인간들이라면 이게 좀 짜증스런 일일 것인가? 존심도 상할터이고...
'나'가 모여 ‘우리’가 되고, ‘우리’가 모여, ‘사회’가 되고, ‘국가’가 되고, ‘인류 집단’이 되니, '나'를 안다는 것은 '나'의 문제일 뿐만아니라, ‘우’리의문제, ‘사회’의 문제,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제일터이다.

'아는 것이 힘' 이라는 데, 속된 말로 ’알아야 면장을 하지’ 하는 데, '안다 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앎은 '知', 知識이고. ‘智’’는 智識 또는 智慧일 터이다.

知識의 반대는 무지이나, 智慧의 반대는 어리석음이다. 넓은 의미로 지식이란 사물에 관한 개개의 단편적인 실제적(實際的) ·경험적 인식을 뜻하고, 엄밀한 뜻으로는 원리적 ·통일적으로 조직되어 객관적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 판단의 체계를 말한다. 지식이란 ‘보편타당한 이치’인 진리 그 자체일 수 있고, 그 과정에 이르기 까지의 제반정보인 과학적 지식이거나, 자신이 지향하는 직업이나 관심분야에 대한 전문지식, 생활속에 다양한 직.간접경험에서 얻어지는 일상적 지식등이다.

일반적으로 상식이란 애매하고 부동적(浮動的)이며, 지식은 명석하고 확정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지식과 상식 사이에 뚜렷한 금을 긋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상식의 순화(純化)에 의한 지식도 있으며, 반대로 과학적인 지식으로서, 그것도 상당히 고도(高度)의 지식이 상식화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지식은 ‘사실적 영역’ 이다. 지식은 머리속에 축적되고, 머리속에서 나온다. 지식이 풍부하다는 것은 그래서 머리속에 든게 많은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요즈음, 조기교육이다, 교육열풍이다 해서 어링 아이들 머리속에 억지로 쑤셔넣는 것은 머리속에 든게 많은 사람을 만들고자하는 욕구와 욕망의 발로일 테다.

반면에, 지혜란 ‘깨달음의 영역, 비유적 영역’ 이다. 그래서 ‘지식은 가르칠수 있어도 지혜는 가르칠수 없다’ 고 한다. 이는 직접적으로 지혜를 가르질 수없거나, 직설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 말일게다. 지혜는 그래서 비유적으로 가르치고, 마음속에 깨달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고승대덕의 선문답이나,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하는 데는 ‘敎外別傳’이라하여 직접적인 표현은 삼가하고 오직 고도한 은유적, 비유적 표현만이 전하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머리속 지식적 사고로는 너무 단순할 뿐만 아니라, 말장난 비숫하게 들릴 게다. 하지만, 산으로 대표되는 ’靜’ 의 본질, 물로 대표되는 ‘動’ 본질을 갈파하고 본질은, 본성은 변함없는 데,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의 변화에 따라, 산과 물이 형상과 현상을 달리한다는 고도한 깨달음을 은유적,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일 터이다.

‘지혜는 마음속에 축적되고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경구가 있다. 지금은 마음속에 든 지혜가 없어도, 떵빈 마음속에 오히려 지혜가 스며들기 더 없이 좋다. 어리석음이 가득한 마음이라면, 지혜가 스며들기 그만큼 어려우리라. ‘어리석음을 비우면, 그 빈 마음속에 깨달음을 채운다면 이 만한 복이 어디 있겠는 가?

‘탈무드의 지혜’, ‘솔로몬의 지혜’, ‘성현들의 말씀들’ 이 모든 지혜들은 하나같이, 비유적 경구로 가득차 있다. 이는 지식의 전달이 아닌 지혜를 고양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一字無識의 시골의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식에게 베풀어주는 가르침이 어디 知識이겠는가? 이런 지식이라면, 배운 자식에 어디 당할 손가? 과학적 지식으로 대표되는 소위 이론적 지식은, 아무리 모여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하여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해답을 주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다. 온몸으로 경험하고 체득한 나름대로의 인생의 섭리를 사랑을 통하여 아낌없이, 당신들의 몸을 살르면서까지 자식에게 전하고자하는 것 그것이 어머니의 지혜이로다. 단지 받아드리는 자식이, 머리속에는 든게 많으나, 마음속에 어리석음이 가득하여 채우지 못할 뿐이지.

요즈음처럼 문명을 이루는 데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기인한바 크다는 것은 부인 못한다. 지식은 그 과학과 기술을 이루는 데 기반체계라 할 수 있다. 허나 지식은 올바른 지식도 있고 잘못된 지식도 있다. 지식은 언제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지식이 잘못 발휘되는 사례를 우리는 고금을 통하여 무수히 겪어오고 있다.

하지만 ‘지혜는 언제나 善하고 유익하다’. 선하거나 유익하지 않으면 지혜가 아니기 때문 이다. 지식이 유익하게 작동하게 하는 지침이되고, 기준이되고 나침반이 되는 데는 지혜의 역할이 크다하겠다. 인간의 마음속에 지혜가 깃들수록, 마음속에 깃든 지혜의 경지가 높을수록 비로소 지식은 향기를 그 만큼 발한다. 지혜가 인간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바탕위에서 지식이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지혜는 시공을 뛰어 넘어 인간의 마음속에서 인간이 인간이게 하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널리 인간에 유익하게 하라’는 우리 민족의 ‘홍익인간’의 이념도 고도한 인간 지혜의 발현의 염원일 게다.

황우석 사태를 보면서, 지혜가 결여된 고도한 지식의 추구가 어떤 결과로 귀결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무척 교훈적 사례라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는다. 이러한 깨달음이 지식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크나큰 경종의 영원한 울림으로 작용할 때, 이번 교훈은 그야말로 지혜로운 수습이 될게고, 앞으로 더 큰 성취를 위한 기반으로 , 이 문명을 선도하고, 참여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전화위복이 될 게다.

‘21세기는 지식기반사회’하 하느데, 우리 모두 곰곰이 이 문명의 미래를 성찰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수단들을 선하고 유익하게 사용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과학자는 과학의 영역, 기술자는 기술의 영역에서, 사업가는 기업활동의 영역에서…..지혜의 아름다움', '지혜의 힘'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다.

‘아는 것이 힘’ 이라는 것은 ‘지식적 앎’이 아니라 ‘지혜로운 앎’이 여야지 싶다. 대덕고승을 모셔 과학기술에 종사하게 할 수 없으니, 속세의 우리가, 명색이 과학자, 기술자입네하는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지혜로움에 다가가는 노력을 기우려야 하지 않을까?

개선/혁신/혁명


효율적 일처리의 원리


대표적 현장의 이즘(-ISM)


망하는 회사의 징후(

출처: LG연구소)



    v 현재의 성공에 이르기까지 많은 희생과 고통, 새로운 도전에 주저. 새로운 도전이 보람이 아니라 또 다른 고통의 가중.
    v 많은 정보량, 복잡한 프로세스->정보의 공유, 협업의 효율성 저해
    v 과정의 관리가 역부족, 결과로 관리, 결과만으로 평가, 결과에 연연할 수밖에 없는 체제

大宇神話의 消滅要因

1) Network기술의 부실
부분 부분이 그런대로 괜찮아도, Network상에서의 역할이 부족하고시의적절하지 못한다면, Network 상의 Node 의사와 상관없이 전체거물망은 출렁거릴 것이고,결국은 끊어져서 Network의 종말

2) 효율성 추구의 미흡

40여개의 방계회사, 세계경영기지등에서 일의 파악, 업무프로세스, 의사결정 프로세스, 자금소요.흐름의 파악과 제어등
거미줄망과 같이 얽히고 설킨 복잡성에 다가 그 효율성이 문제. 많은 정보량, 복잡한 프로세스는 정보의 공유, 협업의 효율성의 저해

3) 자동차산업진출

자동차산업은 그 많큼 규모의 산업이면서, 경영효율성이 극도로 높아야 성공할 수 있는 사업

=> 규묘의 확대에 뒤따르지 못한, 역행한 경영비효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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