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독일어 번역판,
Peter Kobbe가 Stephen Mitchell 이 번역한 영문판
'Tao Te Ching' 을 보고 독일어로 재번역한 것>
<Stephen Mitchell 이 번역한 도덕경 영문판 'Tao Te Ching'>
[도덕경17장]
太上,不知有之(태상부지유지), 가장 훌륭한 임금이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其次,親而譽之(기차친이예지), 그 다음은 가까이하고 칭찬받는 임금이고,
其次,畏之(기차외지),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임금이며,
其次,侮之(기차모지), 가장 좋지 못한 지도자는 사람의 업신여김을 받는 임금이다.
故信不足焉(고신부족언), 그러므로, 임금에게 신의가 모자라면,
有不信焉(유불신언), 사람들의 불신이 따르게 된다.
悠兮其貴言(유혜기귀언), 휼륭한 임금는 말을 아끼고 삼가한다.
功成事遂(공성사수), 모든 일들이 성공적으로 잘 이루어지면,
百姓皆謂我自然(백성개위자연). 백성들이 모두가 이르기를 '내 스스로 그렇게 하였다'라고 한다.
주) * 焉 : 어찌 언, 어조사언->어찌, 어디에, ~보다 더, 이에.. 於之의축약형
* 悠 : 멀 유 ->멀다, 아득하다, 근심하다, 한가하다.
* 兮 : 어조사 혜
[가장 훌륭한 통치자는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다스리는 것이고, 그 다음은 가까이 하고 칭찬받는 통치자이다.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통치자이며, 가장 좋지 못한 통치자는 사람의 업신여김을 받는 통치자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통치자에게 신의가 모자라면, 사람들의 불신이 따르게 된다. 휼륭한 통치자는 말을 아끼고 삼가한다. 통치자가 할일을 다하여 모든 것이 잘 이루어 지면, 백성들이 말하기를 이 모두가 우리가 스스로 그렇게 하였다'라고 한다]
노자는 초나라 출신이지만, 막판에, 주나라 장서실 관리, 지금으로 치면, 도서관장 정도의 직위였다가, 주나라의 멸망의 징조를 보이자, 공자처럼, 천하를 주유하며, 세상을 개조하고, 이상을 펴볼 노력을 하지 않는 체, 미련없이 함곡관 너머로 사라졌다고 한다. 속세를 버린 것이다. 이때, 함곡관 관령인 윤희이, 함곡간을 통과하는 조건을 내걸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지극히 윤희이 간청하는 바람에, 마지 못해 써 주었던 5,000여자의 글이 도덕경이라 한다. 노자가 도덕경 5,000여자를 써주자, 윤희가 읽어 보고는, 크게 느낀 바가 있어, '이런 변방의 관리로 썩을 내가 아니다' 하면서 노자를 따라 함곡관 너머로 같이 사라졌다고 고사가 전한다.
사마천이 고대로 부터, 한나라 무제에 이르기 까지 3,000년의 역사를, 18년 동안 써내려간 史記는 52만 6,500자인 데, 그중, 노자에 관한 이야기는 450자라 한다. 노자가 주나라 장서실 관리로 이름이 좀 났기는 났던 모양이다. 그 450여자중에서도 27자부터, 161자까지가 '공자가 노자에게서 예를 배웠다'는 기록이란다. 이른바 공자의 '問禮老聃(문례노담)'이다.
당시 34살의 젊은 공자의 '禮'에 대한 물음에 답하며, 공자의 사상확립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공자가 노자에게 '禮'를 묻다가, 노자로 부터 한소리 들었다고 전하는 것이 있다.
'그대은 교만함과 욕심을 버려야 하며, 잘난 체하거나 뽐내지 말아야 하고, 쾌락을 멀리하길 바라오. 그런 것들은 그대에게 무익한 것들이오'
노자에게 면박(?)을 받고 나온 공자가 '人中之龍' 이라고 노자를 평했다. '노자는 신룡과 같아서 어떻게 바람을 타고, 구름을 몰고 다니는지, 광활한 허공을 노니는 지, 나는 알지 못한다' 고 했다고 한다. 도저히 그 생각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고백을, 같이 간 제자들에게 한 것이다. 여러 제자를 둔 스승으로 쉽지 않은 고백이었을 터인데, 공자의 열린 마음 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공자가 노자로 부터 받은 충격을 겸허하게 흡수하여, '人中之鳳'이라는 칭송받으며, 노자이상의 성인의 반열로 추앙받고, 그의 사상이, 동양사상의 정점에 오른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는, 아직 불교가 전래되기 전이라, '禪'의 개념이 정립되기 전인데, 이후 불교가 전래되고, 수양의 수단으로 '禪'이 도입되면서 '禪佛敎'가 유행하게 되는 데, 그 근원이 노자의 '靜' 의 사상과의 융합에 있다는 것은 앞선 글에서 밝힌 바가 있다. 노자 사상은 선불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나는 노자를 읽으면서, 헤겔이 '그리스 철학을 능가하는 철학'이라 표현을 정도로, ' 2,500년전에 그런 통찰력이 있는 경전을 저술한 노자가 공자처럼, 당대'왜 제자가 없었을까?' ,'왜 노자는 당대나 중국 역사에서, 공자처럼 그렇게 주목받지 못했을까?' 궁금하였다. 당시에는, 공자에게 면박을 줄 정도로, 너무 파격적이고, 혁신적이라, 일반인이나, 정치권에서 받아드리기 어려워 배척당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노자의 도덕경는 2,500여년동안, 동양권뿐만아니라, 전세계에 걸쳐 독자들의 검열과 심판을 극복하여 왔다. 7세기 중엽 당나라 현장법사가 불경번역사업을 하면서, 도덕경을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한 것이 최초의 도덕경 번역 효시였고, 그후 18세기말 라틴어 번역 판이 나온 이래, 독일어, 러시아어, 영어, 불어로 번역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도덕경는 오히려 현대인들의 사유에 가까이 와 닫는 점이 많다. 그래서, '21세기 인류의 경전' 이라 칭송받는 것일까?
유교 경전은,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 四書와 시경,서경, 역경의 三經 또는 예기, 춘추를 포함하여 四書五經이라 한다. 논어는 15,900여자, 맹자는 35,300여자, 대학은 1750여자, 중용이 3560여자로 四書는 56.500여자의 한자로 구성되어 있고, 三經은 역경이 20,900여자, 시경이 29,600여자, 서경이 24,500여자로 구성되어 유교경전은 통털어 150,000여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또, 장자가 약 100,000여자의 글을 남겼다 하고, 앞선글에서 소개한 대로 사마천의 사기가 52만 6,500자, 불교의 8만대장경이 이보다 100배나 많은 52,330,000여자로 구성되어 있다하는 데 비하여, 도덕경은 겨우 5,000여자이다. 이런 자료들속에는 단어들이 서로 어울려, 귀절을 이루면서, 여러 의미들이 생겨나므로, 같은 단어들이 많이 사용된다. 대체적으로 중복없이 다르게 사용된 단어들만 모으면, 대부분의 경전의 글자수의 1/10 ~1/20된다. 즉, 논어 같은 경우 15,900여자가 사용되었으나, 중복단어를 빼면 서로 다른 단어가1,500여자이고, 맹자는 2,000자가 조금 못 된다.
세워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도덕경도, 이런 구성이라면, 500여자 정도 부근이 되지 싶다. 500여자 정도로 구성된 귀절과 문장이, 헤겔의 말을 빌리면 '그리이스 철학을 능가한다' 고 하였다고 하고,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동서고금의 베스트 셀러 저자10위중 1위' 에 해당하는 이가 도덕경의 저자로 알려진 노자라 하니, 표의 문자인 한자를 사용함에 있어도, 더욱 얼마나 그 뜻이 함의적인지 알 수 있다. 후세인들이 그만큼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太上,不知有之(태상부지유지), 其次,親而譽之(기차친이예지), 其次,畏之(기차외지), 其次,侮之(기차모지),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가까이 하고 칭찬받는 지도자이다.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이며, 가장 좋지 못한 지도자는 사람의 업신여김을 받는 지도자라 할 수 있다'
자료에 의하면, 전설의 상고시대였던, 堯舜時代(요순시대)는 부족국가로 구성된 시기로, 중국이 태평성세였던 理想國家時代'라는 것이다. 당시의 요(堯)임금이 평민차림으로, 백성들의 삶의 현장을 둘러보러 나서. 한 곳에 이르자, 한 노인이 길가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한 손으로는 배를 두들기고, 한 손으로는 땅바닥을 치며장단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한다.
'日出而作(일출이작), 日入而息(일입이식), 鑿井而飮(착정이음), 耕田而食(경전이식), 帝力于我何有哉(제력우아하유재)'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고, 우물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끼니를 해결하니, 임금(제왕)의 덕이 있다한들,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는 '정치의 고마움을 알게 하는 정치보다는 그것을 전혀 느끼기 조차 못할 정도로 행하는 無爲之治가 진실로 위대한 정치라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 노래를 擊壤歌(격양가)라 한다.
실제로 요순시대가 있었는지, 요순시대의 정치가, '임금의 덕이 있다한들,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할 정도로 태평성대였었는 지, 모르지만, '제왕세기'나 '논형'의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이 글은 후세대들이, 그 시절을 미화하기 위해 만들어 냈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주) * 帝王世紀(제왕세기) 진(晉)나라의 황보필(皇甫泌)이 펴낸 신농,복희등의 고대 전설
적 제왕시대를 기술한 역사서
* 論衡(논형) 중국 동한(東漢), 즉 後漢의 사상가 왕충의 저술하여, 한대의 사마천의
<史記>나 명나라말 사상가 李贄(이지)가 지은 <焚書(분서)>에 비견할만한 역작으로
꼽히는 역사서
어찌되었든, '요순시대의 태평성대'가 '이상정치'의 모델로 삼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후세대들의 역사에서 보듯, 온갖 모순되고 백성을 괴롭히는 정치가 횡행하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노자시대 역시, 요순시대의 이상정치가 잘 알려졌을 것이다. 노자는 주나라 장서실 관리라는 직업을 가지며, 옛날의 문헌들을 접하며, 나름대로 정치의 이상향을 '요순시대'로 삼았던 모양이다. 노자가 정치의 이상향인 ‘무위지치(無爲之治)’,'무위(無爲)에 의한 다스림'인 '無爲自然思想' 의 정치관인 '道德政治'가 현실적으로 달성 불가능 한, 그야말로 이상향일 뿐이라는 논리를 불식시키기 위해, 실제로 요순시대에 大道(대도)가 펼치지고 있었다고 본 것이다. 자신이 이상향으로 삼는 정치모델을 요순시대로 설정했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도덕경 17장의 귀절에는 王이나, 帝라는 단어가 직접 들어가지는 않지만, 문맥상이나, 첫 귀절의 '太上'이나 마지막 귀절에 들어간 단어인 '百姓'이라는 단어로 유추해볼 때, 그 대상은 '임금(王, 帝)'이라 고 해석하는 것이다. 다시, 그 '임금'은, '통치자'나, 현대적으로 '지도자'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귀절은 2,500년이 흐른 오늘날의 정치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계여러 곳에, 법치정치와 패도정치, 폭압정치가 횡행하고 급기야, 통치를 거부하며, 통치자와 백성이 대립하여 군중이 피를 흘리며 죽어나가는 사태가 세계 여러 곳에서, 지금도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또, 엄청난 변란을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는 한국 정치사에서도 이런 정치 형태는 비켜가지 않는다. 정치에서의 탐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해지 않는가 보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인가? 정치의 속성이기 때문인가? 도덕정치는 돌아갈 수 없는 이상일 뿐, 이미 失樂園, Lost Paradise인가?
故信不足焉(고신부족언), 有不信焉(유불신언), 悠兮其貴言(유혜기귀언), 功成事遂(공성사수), 百姓皆謂我自然(백성개위자연).
'그러므로, 통치자에게 신의가 모자라면, 사람들의 불신이 따르게 된다. 휼륭한 통치자는 말을 아끼고 삼가한다. 통치자가 할 일을 다하여, 모든 것이 잘 이루어 지면, 백성들이 모두가 이르기를 '내 스스로 그렇게 하였다'라고 한다'
백성들이 ' 나 스스로 그렇게 했다' 즉, '잘 먹고 잘 사는 태평성대를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일해서 일구었다'. 누가 그런 환경을 조성해 주었는 지, 누가 그런 기반을 조성하고 관리해주는 지, 누가 임금이고 통치자인 줄 모를 정도로, 有爲(유의)함이 없는 다스림,즉, 無爲의 다스림을 행하는 통치자, 지도자의 이상적 덕목은, '말을 아끼고, 일단 말을 뱉어놓으면, 지켜야하고, 통치자가 나서지 말고, 뒤에서 있는 듯 없는 듯 할 일을 다하는 것'이다.
정책을 내고, 유세를 통해 정책과 비전을 설명하고,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으며, 경쟁을 통해 우열과 선후를 가리는 것에 기반한 현대정치와 문명의 패러다임으로는 접목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겠다. 하지만, 노자의 말씀은 '무조건 입 다물고 있어라' 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도자, 통치자는 지키지도 못 할, 美辭麗句(미사려구)를 남발하여, 백성을 현혹하지 말고, '정해진 법과 사회적 관습에 따라, 선의의 경쟁을 하고, 경쟁에서 승복하는 모습, 경쟁을 위해 내세우는 약속이 정제되고 절제되어야 하며, 일단 약속한 이상, 이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는 의미로 해석하면,
오늘날의 정치, 사회현실과, 지도자입네하는 자들의 처신을 보면서, 노자의 말씀은 오늘의 정치, 사회의 병리현상에도 통하는 이상적 처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니, 서양의 여러나라들이, 다투어, 노자도덕경을 번역하여, 중.고 교양필독서로 삼는 이유를 알만하다. 오히려, 동양에서 도덕경이 저평가 되고 읽혀지기를 소홀한 것은 아닌가?
당나라 중기에. 독실한 불교신자였다는 白居易(백거이)가 '讀老子(독노자)' 즉, '노자를 읽고서' 라는 시로 조롱(?)하듯이, 읊은 시가 있다.
'言者不知知者黙, 此語吾聞於老君, 若道老君是知者, 緣何自著五千文(언자부지지자묵, 차어오문어노군, 약도노군시지자, 연하자저오천문)'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이고, 아는 이는 말하지 않는다는 데, 이 말을 나는 노자에게서 들었다. 만일 노자가 실로 아는 이라 한다면, 무엇 때문에 도덕경 5천이나 되는 글을 지었던고?'
이런 생각들은 과거 동양의 정치권이나, 사회전반에 노자 정치관은 너무 이상적이라는 생각으로 퍼져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儒學者나 불교도들의 견제와 제왕세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권모술수로 점철된 정치판의 풍토가 道德政治, 無爲之治를 자신들의 취부를 감추는 데 장애가 된다하여, 너무 '理想政治'으로 몰아가며, 경원하다시피한 영향이 아닌가 싶다.
노자는 당대에 제자를 두지 않고, 주나라가 멸망할 것을 예측하고, 공자처럼 천하를 주유하며, 생각을 전파하지 않고, 홀연히 속세를 버렸다고 앞서, 소개한 바가 있다. 애써, 제왕들을 설득하여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고자하는 노력마저, 무위자연에 반하는 행동으로 보았던가? 그 시절의 풍토에서는 무의미하다고 본 것일까?
그런 노자의 사상은 장자를 거쳐, 선불교, 유교에 심대한 영향을 이어져 왔다지만, 정작, 선불교, 유교가 도덕경과 노자를 멀리한 것은, 노자의 혁신적인 사상의 영향이 있었겠지만, 그 스스로의 사상의 근원과 자취를 애써 드러내기 싫었던 것이거나,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자신의 思惟만으로 이루어 것으로 아는 것인지?, 그 思惟의 근원이 어디서 계기가 된 것인지 몰랐던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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