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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동양철학/老子別義(上)

老子別義(上)_15장 蔽不新成(폐불신성)

by 靑野(청야) 2013. 7. 14.

 


< 현대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 하이데거와 도덕경15장 귀절
탁함(濁)과 맑음(淸), 안주함(安)과 생동함(生)을 靜(고요함)과 動(움직임)으로 대비하여 
 도를 딲은사람의 행동을 설명>

  


[도덕경 15장]

古之善爲士者(고지선위사자) 옛날부터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은
微妙玄通(미묘현통) 미묘현통하여

深不可識(심불가식)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夫唯不可識(부유불가식) 깊이를 알 수 없으므로
故强爲之容(고강위지용) 고로, 억지로 묘사하자면,
豫焉若冬涉川(예언약동섭천)
겨울 내를 건너듯 머뭇거리고,
猶兮若畏四隣(유혜약외사린)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주춤거리고,

儼兮其若客(엄혜기약객) 손님처럼, 엄격하고,
渙兮若氷之將釋(환혜약빙지장석) 얼음이 녹아 풀려 흐트러지듯 하고,
敦兮其若樸(돈혜기약박) 통나무처럼 투박하고,
曠兮其若谷(광혜기약곡) 골짜기처럼 텅비어 있는 듯하고,

渾兮其若濁(혼혜기약탁) 탁한 물처럼 흐리다.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정) 누가 능히, 탁함에 처해도, 고요히 처신해서, 그 탁함을 서서히 맑게 할 수 있겠는가?
孰能安以動之徐生(숙능안이동지서생) 누가 능히, 편안한 환경에 처해 있어도 안주하지 않고 움직여 서서히 살아날 수 있게 하겠는가?'

保此道者(보차도자) 이런 도를 보전하려는 자는
不欲盈(불욕영) 욕망을 채울려고 하지 않는다.
夫惟不盈(부유불영) 채우지 않기에,
故能蔽不新成(고능폐불신성) 그러므로 새로 만들지 않고도, 능히 가릴 수 있다

주) * 善爲士者: 일을 잘하는 사람.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 성현, 도를 깨달은 사람
     * 强爲之容: 억지로 그 모양을 말하다. 
     * 涉川 : 시내를 건너다. 
     * 豫 : 미리 예-> 미리. 미리하다. 예측하다
     * 猶 : 오히려 유-> 오히려. 마치 -와 같다. 
     * 鄰 : 이웃 린-> 이웃. 이웃하다. 도움
     * 若畏四鄰: 마치 사방이 적에 포위 된 듯 두려워하는 듯하다. 
     * 儼 : 의젓할 엄-> 의젓하다. 삼가다. 공손하다. 
     * 渙 : 흩어질 환-> 흩어지다. 어질다. 
     * 將釋 : 장차 장, 풀 석->막 (얼음이) 풀리려 하다. 
     * 敦 : 도타울 돈-> 도탑다. 힘쓰다. 노력하다. 깊고 많다.
     * 樸 : 순박할 박-> 순박하다, 질박하다, 다듬다,통나무
     * 曠 : 밝을 광-> 밝다. 환하다. 들판. 광야. 비다. 
     * 渾 : 흐릴 혼-> 흐리다. 물소리. 물이 합쳐지다. 
     * 孰 : 누구 숙-> 누구. 어느. 무엇. 익다. 
     * 夫唯 : 夫惟로 쓰기도 한다(도덕경 8장), "원인을 진술 할 때" 문장 앞에 붙는 접속사
     * 新成 : 새로 만듦
     * 敝 : 해질 폐, 덮을 폐->해지다. 부서지다. 패하다. 가리다, 덮다, 자기를 낮추는 겸양의 접두사

[옛날부터 도를 딲은 사람은, 미묘하고 매우 아득하고 깊은 곳까지 환하게 깨달아 알아서,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깊이를 알 수 없으므로, 억지로 묘사하자면, 겨울 내를 걷너듯 머뭇거리고, 사방의 이웃을 의심하며 두려워하듯 주춤거리고, 손님처럼, 엄격하고 점잖으며, 얼음이 녹아 풀리듯 흐트러지고, 통나무처럼 투박하고, 골짜기처럼 텅비어 있는 듯하고, 탁한 물처럼 흐리게 보인다

누가 능히, 탁함에 처해도, 고요히 처신해서, 그 탁함을 서서히 맑게 할 수 있겠는가?
누가 능히, 편안한 환경에 처해 있어도 안주하지 않고 움직여 서서히 새로움으로 살아날 수 있게 하겠는가?'

이런 도를 보전하려는 자는 욕망을 가득 채울려고 하지 않는다. 욕망이 가득 차지 않으니, 능히 새로운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애를 쓰지 않아도 된다. 즉, 욕망을 가릴 수 있다]


본장 역시 해설은 고사하고 단순한 번역마저 예사롭지 않다. 그 원인은 사용된 핵심 한자의 당시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 그 이유 일 수 있고, 원본자체가 어렵고 함의적인 단어를 즐겨쓴 노자의 고약함(?)에 기인하는 것일 수 도 있다. 아니면, 당시 한자의 어휘력이 풍부하지 못하여, 그 원래 의미와 틀리게 발음만으로 가져다 쓴 경우 도 있는 것 같다.

거기에 더하여, 세월이 흐르면서 중간중간 글자가 첨삭되며, 그 와중에, 오도된 된 글자의 삽입도 있는 것 같다. 여러 판본을 비교해보면, 초간이 그 원래의 뜻에 비교적 분명한 반면, 다른 판본은 부분 또는 전체를 뜯어 고쳐 개작하거나 또는 파생, 와전된, 훼손 된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를 확인하고, 왕필본을 통행본으로 하되, 그 판본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라는 뜻에서 각 본을 비교 열거하였다.

그러니, 해석이 여러 가지를 치고 있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어떤 때는 영판 반대의 뜻으로 해석하는 사례도 본다. 창작적 해설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고, 창작적 해석을 이게 아니다 딱히 부정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릇 모든 경전이 그러하듯, 이런 글귀나 일부 문장에 내포되어 있다하여도, 전체적으로 성인이 말하고자 하는 본디 큰 흐름, 큰 뜻을 나름대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면, 그로서 족할 것이다. 그것이 굳이 도덕경에 집착하는 이유이다.

古之善爲士者(고지선위사자), 微妙玄通(미묘현통), 深不可識(심불가식)

'옛날부터 도를 통한(휼륭히 도를 딲은) 사람은, 미묘하고, 매우 아득하여, 깊은 곳까지 환하게 깨달아 알아,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초간 본: 長古之善爲士者, 必非弱玄造.深丕可志_
백서 갑: □□□□□□, □□□□, 深不可志,
백서 을: 古之□爲道者, 微眇玄達. 深不可志,
하상공본: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왕필 본: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善爲士者'는 도덕경 68장에도 등장한다. 68장에 등장하는 '善爲士者'는 의미적으로 '武士'를 의미할 수밖에 없다. 이장에서의 '士'는 이른바 四民 즉 士, 農,工,商으로 분류되는 '선비' 개념이 아니라, 다음에 이어지는 微妙玄通(미묘현통)과 연결해 볼 때, 士者는 '道士' 또는 도를 통한 사람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제65장에는 '古之善爲道者'이 등장하는 데, '古之善爲道者 非以明民 將以愚之 民之難治 以其智多 고지선위도자 비이명민 장이우지 민지난치 이기지다', '예로부터 道를 잘 닦은 사람은, 백성들을 세속에 밝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愚直(質朴)하도록 한다.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들이 잔꾀가 많기 때문이다'

즉, '善爲士者'는 제65장 처럼 '善爲道者'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古之' 는 의미상 '옛날의' 의 의미보다,' 옛날부터' 혹은 '예로부터' 로 해석하여야 의미의 흐름이 원활하다.

夫唯不可識(부유불가식) 故强爲之容(고강위지용),豫焉若冬涉川(예언약동섭천), 猶兮若畏四隣(유혜약외사린),


'깊이를 알 수 없으므로, 그렇기 때문에, 억지로 묘사하자면, 겨울 내를 걷너듯 머뭇거리고,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주춤거리다'

초간 본: 是以爲之頌,
백서 갑: 夫唯不可志, 故强爲之容曰, 與呵, 其若 冬 □□, □□, □□畏 四□
백서 을: 夫唯不可志, 故强爲之容曰, 與呵, 其若 冬 步水, 猷呵, 其若畏 四[吅文]
하상공본: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與兮, 若 冬 步川, 猶兮, 若畏 四隣
왕필 본: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豫焉 若 冬 步川, 猶兮, 若畏 四隣

儼兮其若客(엄혜 기약객), 渙兮若氷之將釋(환혜 약빙지장석), 敦兮其若樸(돈혜 기약박), 曠兮其若谷(광혜 기약곡), 渾兮其若濁(혼혜 기약탁)


'손님처럼, 엄격하고 점잖으며, 얼음이 녹아 풀리듯 흐트러지고, 통나무처럼 투박하고,골짜기처럼 텅비어 있는 듯하고, 탁한 물처럼 흐리듯 보인다'

초간 본: 敢唬, 其奴客_ (見裕之}唬, 其奴{白矢心)_ 屯唬, 其奴樸_ 坉唬, 其奴濁。
백서 갑: □呵, 其若客, 渙呵, 其若 淩 澤, □呵, 其若楃, 湷□, □□□, □□, □若浴。
백서 을: 嚴呵, 其若客, 渙呵, 其若 淩 澤, 沌呵, 其若樸, 湷呵, 其若濁, {莊}呵, 其若浴。
하상공본: 儼兮, 其若客, 渙兮, 若 氷 之將釋, 敦兮, 其若朴, 曠兮, 其若谷, 渾兮, 其若濁。
왕필 본: 儼兮, 其若容, 渙兮, 若 氷 之將釋; 敦兮, 其若樸, 曠兮, 其若谷, 混兮, 其若濁。


위의 두 문단은 도를 통한 사람, 즉 善爲士者의의 행동거지를 묘사한 글이다. 도를 통한 사람의 행동거지는 평범한 사람의 잣대로는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 이다. '미묘현통' 한 행동거지가 오죽하겠는가? 굳이 설명하자면 즉 억지로 묘사하자면, 道力이 깊은 '善爲道者' 또는 '善爲士者' 가 겉으로 들어나는 행동은 보통사람들의 눈에 비친 모습으로는 어떤 때는 이율배반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비유한다.

즉, 겨울에 차가운 물속을 건널 대, 두려운 듯 머뭇거리고,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며 망설이고 의심하고 주저하다가도, 손님처럼 엄격하거나 점잖으며, 혹은 의젓하다가도, 풀어져 녹을 얼음처럼 흐트러진 모습처럼 보이기도 할 터이다. 통나무처럼 투박하기도 하고, 골짜기 같이 탁한 물같이 흐리멍텅해 보인다.

'어떤 때는 엄격하고 점잖고, 질박하며, 골짜기 처럼, 마음을 비운듯, 지혜롭게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머뭇거리고, 주춤거리고, 투박하며, 흐리멍텅하고, 보통사람보다 못해 보이는 처신을 보인다'. 이런 대비를 통하여, 이도를 통한 사람들의 행동거지가 미묘하여 깊이를 알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 자하는 것이다.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정), 孰能安以動之徐生(숙능안이동지서생)


'누가 능히, 탁함에 처해도, 고요히 처신해서, 그 탁함을 서서히 맑게 할 수 있겠는가?'
'누가 능히, 편안한 환경에 처해 있어도 안주하지 않고, 움직여 서서히 살아날 수 있게 하겠는가?'

초간 본: 竺能濁, 以(宀用午)者, 將舍淸_ 竺能?, 以迂者, 將舍生_
백서 갑: 濁而情 之, 余淸, 女以重之, 余生。
백서 을: 濁而靜 之, 徐淸, 女以重之, 徐生。
하상공본: 孰能濁, 以 靜 之 徐淸, 孰能安以久重之, 徐生?
왕필 본: 孰能濁, 以 靜 之 徐淸, 孰能安以久重之, 徐生?


중국의 현대 노자연구가 야오간밍의 '老子講義'를 보면, 이 두 구절이, 하이데거가 서재에 걸어두고 마음을 새긴 도덕경 글귀라 한다. 여기서는 또 다른 대비를 통해, 미묘현통한 '善爲道者'의 행동거지를 연관시키기 위해 전제를 까는 형국이다. 즉,

세상에는 濁(탁함)과 淸(맑음), 安(안주함)과 生(생동함) 만이 존재하겠느냐마는, 대표적으로 대비되는 현상인 濁(탁함)과 淸(맑음), 安(안주함)과 生(생동함) 중, 탁함을 맑게 하는 데, 고요함(靜)을 수단으로 하고, 안주에 머물려는 것을 생동하게 하는 수단으로 움직임(動)을 수단으로 한다. 그 수단 역시 서로 대비되는 靜(정: 고요함) 과 動(동: 움직임)이다. 묘한 대비고, 대응귀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누가 능히 그렇게 하겠는가? 깊이를 알 수 없어 다소 지혜로워보이기도 하고,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는 미묘현통한 '善爲道者' 가 그것을 할 수 있다. 어찌하여 그것이 가능 하겠는가? 즉 '능히 그 일을 할 수 있다' 하고, 다음구절에서 그 이유를 마무리한다.

保此道者(보차도자), 不欲盈(불욕영), 夫惟不盈(부유불영), 故能蔽不新成(고능폐불신성)


'이런 도를 보전하고 유지하려는 자는 욕망을 가득 채울려고 하지 않는다. 욕망이 가득 차지 않으니, 능히 새로운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애를 쓰지 않아도 된다 즉, 욕망을 가릴 수 있다'

초간본 : 保此?者, 不谷(尙立)呈。
백서 갑: 葆此道, 不欲盈. 夫唯不欲□, □以能 □ □□成.
백서 을: 葆此道□, □欲 盈. 是以能{敝衣}而不成。
하상공본: 保此道者, 不欲盈. 夫唯不盈, 故 能 蔽 不新成。
왕필본: 保此道者, 不欲盈. 夫唯不盈, 故 能 蔽 不新成。

댓귀관계로 보면,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것' 은 '도를 지키고, 보전하는 것'을 이어 받는 다. 즉 미묘현통한 도를 가진 '善爲道者'가 앞서의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욕망을 가득 채우지 않는다. 즉 욕망이 없이 마음을 비워 살기 때문이다. 욕망을 채우지 않고 비워두기 때문에, 능히 새로운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애를 쓰지 않아도 된다(애쓰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그런대로 해석을 해다가, 15장이 마지막 귀절, '蔽不新成(폐불신성)' 에서 요동을 친다. 나 역시 요구절에서 오랫동안 고민을 하였다. 많은 이들이 서로 반대의 해석을 내 놓기도 한다. 이를 테면,

'단지 가득 차지 않음으로서 해어진 것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가득 차지 않으니 해어져도 새롭게 할 수 있다'.
'고로 능히 가려서 새로이 이룸이 없습니다'.
'가득채우지 않으므로, 새로움을 이룰 수 없이 능히 낡아질 수 있다'

라고 번역하는 데, 이 번역본들은, 뭔가 이상하다. 앞서의 靜과 動이나, 탁과 청, 안과 생의 대비관계나 앞서의 문장의 의미의 흐름으로 봐서 그렇다. 그래서 초간본을 보면, 본디의 의도가 어렴풋이 짐작되리라 보는 것이다.

초간본에는 이귀절들이 '不谷{尙立)呈' 이라는 귀절로 단순하다. 尙立은 '上尙下立', 정(呈)은 '드러내 보이다'로, 谷은 '尙立' 즉, '上尙下立으로 받들어 세우다', 정(呈)은 '드러내보이다'의 뜻이다. 그러니, '不谷{尙立)呈' 은 '不上尙下立呈' 이라 할 수있다. '드러내어 받들어 세우지 않는다 않는다' 의 의미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不'과 谷(尙立)과 정(呈)이 뒤에 '不欲盈 夫唯不盈, 故能蔽不新成'으로 바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의 필자의 이해처럼, 내용의 원활한 파악과 이해를 위해 첨삭이 가해졌다는 것이고, 초간본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마지막 귀절, '蔽不新成'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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