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동양철학/老子別義(上)

老子別義(上)_16장 沒身不殆(몰신불태)

by 靑野(청야) 2013. 7. 14.

 

 

 
<도덕경을 번역한 러시아의 세계적 대문호 톨스토이>

 

 

 

<톨스토이가 러시아어로 번역한 도덕경>


<어렵사리 구하기는 했는데, 러시아말을 몰라서,
진짜 도덕경 번역이라 쓰여 있는 지 모르겠음>

도덕경16장

致虛極(치허극), 비움을 지극하게 하고
守靜篤(수정독), 고요함에 깊이 이른다

萬物竝作(만물병작),만물이 다투어 생겨나지만,
吾以觀復(오이관복),나는 만물이 되돌아감을 보나니,
夫物芸芸(부물운운), 무릇 사물은 무수히 생겨나도
各復歸其根(각복귀기근), 각자가 그 근원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歸根曰靜(귀근왈정), 근원로 되돌아감을 일러 '靜'이라한다.
是謂復命(시위복명), 이를 일러 (天)命에 따르는 것이라 한다.
復命曰常(복명왈상),천명에 따르는 것을 일러 '常' 즉 한결같음이라 한다.
知常曰明(지상왈명), '常'을 아는 것을 일러 밝음이라 한다.
不知常(부지상), '常'을 알지 못하면,
妄作凶(망작흉), 망령되이 흉함을 저지르게 된다.

知常容(지상용), '常 즉 한결같음을 받아드려 포용할 수 있고,
容乃公(용내공), 포용할 수 있으면, 공경을 받을 수 있고,
公乃王(공내왕), 공경을 받을 수 있으면, 세상이 왕이 될 수 있다,
王乃天(왕내천), 세상의 왕이 되면 이는 곧 하늘이고,
天乃道(천내도), 하늘이 되면 이는 곧 도를 이루는 것이다.
道乃久(도내구), 도는 영구한 것이니,
沒身不殆(몰신불태), 몸이 없어진다해도 두려움이 없게 된다.

주) * 篤 :도타울 독-> 도탑다,두터이 하다, 도탑게 하다
     * 竝 : 나란히 병->나란히, 모두, 나란히 서다, 견주다,함께 하다, 겸하다,아우르다
     * 夫物 : 무릇 사물이...
     * 吾以 : 以吾를 도치시킨 표현이고, 以는 이유를 나타낸다.
     * 妄 :망령될 망.
     * 乃 : 이에 내->이에, 곧,그래서,더구나, 도리어,비로소, 의외로, 뜻밖에..
     * 容 :얼굴용->형상, 용모, 몸가짐, 속에 든 것.
     * 公 : 공평할 공->공평하다, 공평무사하다. 공정하다.
     * 芸芸: 많은 모양. 무성한 모양. 썩 많음.
     * 殆 : 거의 태, 위태할 태->거의, 대개, 반드시,위태하다,두려워하다


[비움을 지극하게 하고, 고요함에 깊이 이른다면, 만물이 다투어 생겨나지만, 나는 만물이 되돌아감을 볼 수 있나니,무릇 사물은 무수히 생겨나도 각자가 그 생겨난 근원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생겨난 근원로 되돌아감을 일러 '靜'이라한다. 이를 일러 (天)'命' 에 따르는 것이라 한다. 천명에 따르는 것을 일러 '常' 즉 '한결같음, '불변하고 영원한 것' 이라 한다. '常'을 아는 것을 일러 밝음이라 한다. '常'즉 '한결같음', '불변하고 영원한 것' 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이 흉함을 저지르게 된다.

 

(그러나) '常 즉 한결같음을 포용하고 받아드리고, 포용하여 받아드리면 공경을 받을 수 있고, 공경을 받을 수 있으면, 세상이 의지하는 사람 즉 제왕이 될 수 있다, 세상이 의지하는 사람이 되면 이는 곧 하늘이고, 하늘이 되면 이는 곧 도를 이루는 것이다.

도는 영구한 것이니, 육신이 없어진다해도 두려움이 없게 된다.]

도덕경은 톨스토이가 '자신의 문학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으로 평가하였고, 헤겔이 '그리스 철학을 능가하는 인류 철학의 원천'이라고 극찬하였다하며, 실존 철학자 하이데거는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미친 것을 도가사상과 선불교'로 꼽았고, 직접 독일어로 번역하였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유럽에 전파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싯점에 부질없이 궁금한 것은, 이들이 번역에 참고 했던 판본이 어느 것이냐 하는 것이다. 모든 판본을 참고 했을리는 없고, 아마도 통행본으로 알려진 왕필본이나 몇종류의 판본이 아니였을까? 하지만, 왕필본이든, 어느 본이든, 노자의 오리지널보다는 그 오리지널에 후세 사상가들의 사상이 첨삭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을지? 동양인들에게도 전문가 영역인, 표의문자인 한자의 생성철학과 생성시, 사용시의 사용배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을지? 아마도, 서양인들에게는 그런 사소한(?) 문제보다는 노자로 대표되는 동양의 고대선인들의 사상 전체가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모양이다.

야오간밍이 쓴 老子講義에서, '톨스토이가 도덕경을 번역하여, 유럽에 퍼진 계기를 마련했다' 는 글을 읽었는데, 이번에 개인적으로 러시아에 연락해서 구해보니, 그전에, 프랑스, 독일어로 번역되어 있는 것을 톨스토이가 다시 러시아어로 번역하였다고 한다. 누구말이 맞는 지 모르지만, 번역의 선후를 떠나서, 세계적 대문호 톨스토이가 번역하였다는 사실이, 유럽에 퍼지는 기폭제가 된 것은 사실일 듯 하다는 생각이 든다..

致虛極(치허극), 守靜篤(수정독)

'비움을 지극하게 하고, 고요함에 깊이 이른다'

마치 선불교수행지침 같다.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삼매에든 지극히 높은 수양을 쌓은 고승이 참선수양하는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가? 역시, 이 귀절은 다른 귀절과 유달리, 시사하는 점이, 매우 크다.

중국의 3대 사상 儒.佛.仙이다. 이들사상은, 궁극의 상태를 '虛', '空', '無'로 보고, 여기서 어떻게 '實' 즉 '有' 가 다시 말하면 만물이 생겨났느냐? 그리고, 만물이 다시, 虛와 空, 無로 돌아가느냐? 虛와 公과 無는 어떤 개념의 차이를 보이느냐? 虛와 空은 무엇이냐? 이런 의문과 이 의문에 답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사상이요 철학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노자는 '虛'를 비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 세상 만물이 몸담고 있는 천지를 최초에는 '비어있다는 뜻의 '虛'로 본 것이다. 하지만 '비어있음의 크기' 즉 우주의 크기에 대해서 언급함이 없다. 또, 비어 있음에서 만물이 생겨 났다는 것을 말할 뿐, 어떻게 만물이 생겨났는지의 설명이 없다. 노자사상의 한계라 생각된다. 이 한계극복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 장자이지만, 장자 역시, 한계를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고대의 우주관은, 태초를 애매하게 언급은 하면서도, 비유요 방편일 뿐, 우주가 공간적으로 무한하고, 시간적으로도 무한하다고 말한다. 그 크기에 대한 구체적이고 진지한  思惟의 시도가 없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공자 역시 이 부분에서는 마찬가지 한계를 보인다. 반면에 불법에는 나름대로 불완전하지만, 우주의 크기를 정의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思惟事例를 무수히 볼 수 있다. 하지만, 태초 시작의 모호성은 역시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당시의 지식체계로는, 아무리 思惟의 능력이  깊다해도, 보이지 않는 우주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이것은 우주의 무한과 유한의 개념정립과 태초의 시작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대물리학은 작금에 이르러, 여러 이론이 혼재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우주의 크기를 정의하는 것 뿐만아니라, 태초의 시작을 명확히 설명하는 데 까지 이르고 있다. 이것은 2,000년이 넘는 인류지식의 발전이 반영된 결과이다.

하지만, 그런 과학적 뒷받침이 없다하드라도, 노자, 장자이후 장재 및 왕양명을 거치면서, 유.불.선의 궁극의 개념과 그로부터 '實' 즉 萬物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원리를 설명하는 학문이 발전하여 그 이론을 완성하게 된다. 주자 성리학에 이르러서는 현대물리학의 결론에 근접하는 사유의 극치를 이룬다.

한편으로, 불교에의 핵심사상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열반적정이다. 52백만자넘게 이르는 8만대장경의 핵심은 이것을 이해하고, 딲고 극복하는 방편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불교사상이 중국으로 도입되며, 도가사상이 접목된 징후를 여러곳에서 본다. 불가의 '空', '禪', 法'을 굳이 노자의 사유와 연결하자면, 미미한 차이는 존재하지만, 노자의 '靜'은 불가의 '禪'으로 대치된다. 노자의 '虛'는 불가의 '空으도 대치되고, 노자가 도입한 道의 개념은 불교, 유교에서 역시 사용된다. 이런 空과 禪의 개념은 '佛道'를 수행하는 수단이다.

노장사상의 참된 계승자는, 그런 면에서 '선불교' 라는 말이 있다. 하이데거가는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미친 것을 도가사상과 선불교로 꼽았다 장재(장횡거)는 태허즉기라 無(허)에서 有(기)가 생겼음을 주창한다. 이후의 궁극의 모습은 유.불.선 모두 통합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물론 그 시초는 노자개 제시한 '허'의 개념에서 출발한다.

'無所不在, 無時不在' 즉,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 존재하지 않는 때가 없다'는 개념은 장자가 '道'를 설명한 것이만. 이 개념은 지금도  카톨릭 계열의 이른바 '주(Lord)', 불교의 '불법'에도 적용되고 있다. 장자의 영향, 나아가서는 도덕경의 영향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뭇 종교들의 궁극을 추구하는 사상귀일점으로 수렴하는 '萬流一通'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헌데, '가장 미소세계로부터 귀납적으로 풀어나가는 현대물리학이론이 그 완성에 가장 근접하고 있다'라고 필자가 생각한다면, 너무 오버한 것일까?

萬物竝作(만물병작), 吾以觀復(오이관복), 夫物芸芸(부물운운), 各復歸其根(각복귀기근),

'만물이 다투어 생겨나지만, 나는 만물이 되돌아감을 보나니, 무릇 사물은 무수히 생겨나도, 각자가 그 근원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세상만물이 자연에서 태어나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그 섭리를 내가 보건데, 즉 내가 자각하건데, 천지만물은 그처럼, 자연의 섭리에 따라 생기고, 다시 그 섭리에 따라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마디로, 萬流歸終(만류귀종), 萬象流轉(만상유전)의 원리를 말함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비움을 지극하게 하고, 고요함에 깊이 이르면, 만류귀종, 만상유전의 이치를 깨닫는다 그러니, 도를 그렇게 딲는 것이다. 그 말 아니겠는가?

歸根曰靜(귀근왈정), 是謂復命(시위복명), 復命曰常(복명왈상), 知常曰明(지상왈명), 不知常(부지상), '妄作凶(망작흉),

'근원로 되돌아감을 일러 靜이라한다. 이를 일러 (天)命에 따르는 것이라 한다. 천명에 따르는 것을 일러 常 즉 한결같음이라 한다. 常을 아는 것을 일러 밝음이라 한다. 常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이 흉함을 저지르게 된다'

우주의 근원인 虛로 되돌아가는 것을 일러 '·靜' 이라 한다면, 이는 '萬流歸終 萬象流轉' 의 의미이고, 이를 일러 (천)명이라 한다면, 靜의 상태를 유지 것이 천명이고, 이것은 즉 무위자연의 도에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천명에 따르는 것을 '常'이라 한다. 즉 '상'은 '한결같음', '불변하고 영원한 것' 이니, '태어난 모든 것이 그 뿌리로 돌아가는 것, 곧 虛로 복귀하여 靜을 이루는 것이고 '불변하고 영원한 것' 의 이치를 아는 것이 '밝음' 즉 지혜로움이니, 이를 알지 못하면, 우둔하여. 천명을 거역하는 흉한 행동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知常容(지상용), 容乃公(용내공), 公乃王(공냉왕), 王乃天(왕내천), 天乃道(천내도), 道乃久(도내구), 沒身不殆(몰신불태)

'常 즉 한결같음을 받아드려 포용할 수 있음을 알면, 뭇사람들에게 공경을 받을 수 있고, 공경을 받을 수 있으면, 천하가 의지하는 사람 즉 세상의 왕이 될 수 있다. 천하가 의지하는 사람이 되면 이는 곧 하늘이고, 하늘이 되면 이는 곧 도를 이루는 것이다. 도는 영구한 것이니, 몸이 없어진다해도 두려움이 없게 된다.'

'容', '公' 의 용례에 따라 이 문장의 해석이 달라진다. 노자이후 첨삭이 되지않았다면, 노자시대에 그 용례를 추적하기가 쉽지 않다. '容'은 형상, 모습이니, 常容은 常의 모습 즉 한결같음의 모습이고 형상이다. 영원하고 불변하는 모습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받아드려 포용한다는 의미다. 또, 자료를 보면, 원래 '公'이라는 글자는 전국 말기까지 공정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고, 언제나 사회적 지위를 의미했으므로 도덕경에서는 '왕 즉 천하가 의지하는 사람이 되기위한 조건이니, '공경을 받다'로 해석하는 것이타당하다. 그런데, '공'을 공경의 지위대신.일반적으로 번역에 사용되는  '공평무사, 공정함'으로 해석 해도 전체 맥락을 이어가는데는 무리는 없지 싶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