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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동양철학/老子別義(上)

老子別義(上)_3장 則無不治(칙무불치)

by 靑野(청야) 2013. 7. 7.
[도덕경 3장]
 
 
不尙賢(불상현) 현명한 사람을 받들지 말라
使民不爭(사민불쟁) (그러면)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할 것이다
不貴難得之貨(불귀난득지화) 구하기 어려운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말라
使民不爲盜(사민불위도) (그러면)백성들로 하여금 도둑질을 하지 않게 할 것이다
不見可欲(불견가욕) 탐나는 것을 보이지 말라,
使民心不亂(사민심불란) (그러면) 백성로 하여금 마음이 어지러워지 않게 할 것이다.
 
是以聖人之治(시이성인지치) 그러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虛其心(허기심) 마음을 비우고, 
實其腹(실기복) 배를 채울 것이다
弱其志(약기지) 하고자 함을  약하게 하고
强其骨(강기골) 뼈대를 튼튼하게 할 것이다 
常使民 無知無欲(상사민무지무욕) 항상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하고 무욕하게 하라  
使夫智者 不敢爲也(사부지자불감위야) 지혜로운 자가 감히 도모하지 못하게 하라.
爲無爲 則無不治(위무위칙무불치) (그리하면)하지않음을 하는 것으로 다스려지지 않는 법이 없다
 
주) *使      : 사동사(~하게 하다)
     *夫智者: 지혜로운 자, 앎이 깊은 자, 안다는 자
     *不敢爲: 감히 못하게 하다
     *也      :어조사 야(구의 끝에 쓰여 긍정·판단·설명의 어감을 나타냄)
 
 
[백성들이 다투는 것은 현명함, 현명한 사람을 숭상하여 현명해지고자 경쟁하기 때문이다. 현명함을 숭상하지 않는 다면, 그런 경쟁이나 다툼이 없어질 것이다. 백성들이 도둑질을 하는 것은, 구하기 어려운 재물을 귀하게 여기는 풍조 때문이다. 황금을 돌같이 하면, 도둑질이 없어 질 것이다. 탐나는 것을 보면,  백성들의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탐나는 것이 보이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도 심란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성인이 다스리면, 백성들이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울 것이다(내실을 기할 것이다,만족할 것이다). 백성들이, (쓸데없는 일에) 나서지 않고, 나라의 기강은 튼튼하게 될 것이다.  
항상 백성들를 무지하게 하고, 마음에 욕심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안다는 자가 함부로 나서지 무언가 도모하지 못하게 다스려라.   그러면, '함이 없음'을 행함으로써,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노자는 3장에서, '爲無爲' 의 정치, '함이 없음'을 행하는 정치, 이른바 이상정치, 도덕정치를 말한다.   즉, 자연이 모든 생명들에게 들어나게 하지 않지만(無爲),  모든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고, 죽어서 돌아가는 순환환경의 기반(自然)이듯이,  정치도 이를 닮아서 하라는 말이다.
 
'常使民 無知無欲(상사민무지무욕) 항상 백성들를 무지하게 하고, 욕심이 없게 하라'
 
이 대목을 두고, 유가(儒家)에서는 노자를 '백성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고 우롱하는 우민정책을 갖고 있다'. 고 비판했다한다. 
 
또, 혹자는  노자가 말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라.'의 무지(無知)의 뜻은 '인간의 쓸데없는 위선적 편견, 지식들을 버려라. 즉, 거짓 선을 행하지 마라' 라고 주장한다.
 
도덕경 3장은 도덕경 全편에 걸쳐서 가장 곡해하기 쉽고, 난해한 부분이라 나는 생각한다.
 
1장은 도덕경의 시작 즉 '도' 라는 개념의 도입이면서 '도'에 대한 정의를 하지않는다. 全편을 다 이해해야만, '소리도 형체도 없는 도의 윤곽을 깨달아라라'는 성인의 뜻이리라. 2장은 직접적으로 대립되는 개념비교를 통해 존재의 상대성을 일깨운다.
 
이 장에서 설명하는 것은 백성을 다스리는 치세의 도를 설명하고 있는 데, 고도로 은유적이어서,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 누구나 儒家에서 '우민정치'라 할 정도로 곡해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번역 본에서는 내 기준으로 보면, 곡해하 할만한 것이 대부분이다
 
'不尙賢(불상현) 현명한 사람을 받들지 말라'
'常使民 無知無欲(상사민무지무욕) 항상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하고 무욕하게 하라'  
'使夫智者 不敢爲也(사부지자불감위야) 안다는 자가 함부로 하겠다는 것을 도모하지 못하게 하라'
'爲無爲 則無不治(위무위칙무불치)하지않음을 함으로써(無爲, 爲無爲) 다스려지지 않는 법이 없다'
 
'賢(현)은 현명함, 현명한 사람을 이르는 것일 것이다. 이를 받들지말라, 崇常하지 말라(不尙)하니, 또, '백성을 무지,무욕하게 하라', '백성들을  지혜로운 자가 감히 나서서  도모하게 하지 말게하라' 하니, 일반상식에 반하는 다분히, 반어법적이며 은유적인 글귀이다. 여기에 내재된 함의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무엇인가?  이 장을 통해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本義'는 무엇인가? 노자가 賢의 가치나 지혜(智)나 앎(知)을 몰라서 이런 글을 남긴 것은 아닐 것이다.
 
약 2,500여년전, 당시로서는 아직 보편적인 법칙 또는 일반적 주장에서부터 특수한 법칙이나 주장을 끌어내는 이른바 '연역법(演繹法)'이니, 특수한 사례로부터 일반적인 진리를 추론하는 이른바 '귀납법(歸納法)' 이니 하는 추론법이 분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논리적인 인과관계 역시 두리뭉실하게 설명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노자는 인간, 세상, 대자연 모습과  작용, 상관관계에 대한  깊은 깨달음,  그것들의 대강이 머리속에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 도덕경이지 싶다. 다시말하면, 머리속에 있는 만물과 만유에 대한 깨달음, 그 것들의 대강을, 여러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나 있는 현상에 대비하여, 이를 연역적이나 귀납법적 방식으로 풀어낸 것이라 보는 것이다. 제3장은 1장,2장과 연계해서 보면, 연역법적 추론에 가깝다.
 
3장은 인간들의 생활의 한 단면인 '정치' 에 대한 깨달음을 설명한 것이다. 여기서는 노자가 머리속에 그리는 정치의 지고지순한 레벨, 보통 이야기 하는 도덕정치, 이상정치와 그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스림(정치)이 자연을 본 받는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그 백성들이, 마음을 비워, 욕심이 없고, 배부르고 등따습고, 임금이 있는지 없는지, 우리를 다스리는 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그런 태평한 상태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지 않을 까?
 
그러니, 그런 사회라면, 자연과 동화된 사회, 인간도, 인간의 삶도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 그자체인 사회일 터이니, 그런 사회에, 현명함을 구하고, 지혜를 구하고, 욕망을 들어낸다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말함일 것이다.
 
3장을 2장처럼 해석한다면, 지혜롭고, 현명함(賢)이라는 것은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현명함이 들어나는 것이고, 어리식음 역시 현명함이 있기 때문에 들어나는 것이다. 욕망이라는 것은 부족함이 있기 때문에 들어나는 것이다.  안다는 것(知)은 무지가 있기 때문에 들어나는 것이다.  즉, 지혜로움, 현명함은 어리석음과 서로 비교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지식은 무지와 비교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욕망도 부족함이 있어 생기는 것이니,
 
현명함을 숭상하지 않으면, 다시말하면, 현명함을 버리면 동시에 어리석음도 없어지는 것이고,  지식을 버리면 무지도 의미가 없어진다. 욕망을 버리면 부족함도 없어진다. 그래서 현명함, 지식, 욕망을 버려라, 그러면, 어리석음, 무지, 부족함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비우면 배가 불러진다 虛其心(허기심) 實其腹(실기복)이라 하지 않았겠는가? 
 
성인은 그렇게 인간사회, 정치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爲無爲(무위), 즉, 하지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하는, 자연에 따르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백성도 자연의 일부로 보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도, 무위자연을 실현하는 정치로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노자가 꿈꾸어 왔던, 이상정치였던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도덕경 3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理想' 이라는 것은 도달할 수도 있고, 할 수도 없다. 통상적으로는 도달하기 힘든 상상의 수준이다. 하지만, 그것은 목표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 이상을 향해 나아가간다는 것은 목표를 정하고 목표에 매진하는 과정이다. 이상에 도달하는 것보다는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 생활이기 때문이다.
 
도덕경 3장을, 유가에서처럼, '우민정치'라 비난하기도 하고, 많은 내노라 하는 해석가들이  '백성들을 쓸데없는 지식으로 소모적 경쟁과 갈등에 빠지게 만들지 말고, 등따습고 배부르게 하라. 그것이 바로 성인의 치도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상을 설정하고, 그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도 이상적이지만, 그 이상이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에, 영원한 목표일 수 밖에 없다.  영원한 목표가 있는 이상, 세상은 중심을 잡고 변화무쌍하게 굴러 갈 수있는 것이다. 알게 모르게, 무위자연을 실현하는 정치, 그것의 토양인 무위자연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본받아 이만큼 살아가고 있는 것일 뿐만아니라,  앞으로도 이 문명과 미래의 중심이 될 것이다.
 
노자가 굳이 3장을 통해서 不尙賢,常使民 無知無欲..., 다스림(治) 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이들의 창을 통해서 '무위자연'을 바라본 것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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