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일대 교수 Stephen Mitchell이 번역한 도덕경과
1973년 호남성 장사(長沙) 지방에서 발견된, 비단 위에 쓴 백서노자(帛書老子) >
[도덕경 1장]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도>라고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 이름을 지어 명할 수 있으면 그 이름은 이미 이름이 아니다.
無名天地之始(무명천지지시) 하늘과 땅, 세상의 시작은 이름을 붙일 수 없다.
有名萬物之母(유명만물지모)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 만물의 어미라 한다.
故常無欲以觀其妙(고상무욕이관기묘) 고로, 항상 욕심을 버리면, 그 오묘함을 관조할 수 있으며,
常有欲以觀其徼(상유욕이관기요) 욕심을 내면, 그 변죽(껍데기 현상) 만을 볼 뿐이다.
此兩者同(차량자동) 이 두가지 근원은 같으나
出而以名(출이이명) 나타나 이름만 달리 했을 뿐이다.
同謂之玄(동위지현) 이 둘이 모두 현묘하다
玄之又玄(현지우현) 현묘하고 현묘하다
衆妙之門(중묘지문) 모든 현묘함의 문이다.]
[도는 하늘과, 땅,과 천지의 시작이지만,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그것은 도가 아니다' 즉, 도가 '무엇'이다' 라고 정의하면, 이미 그 정의는 제대로 도를 정의한 것이 못된다. 하늘과, 땅,과 천지의 시작, 즉 천지의 근원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 굳이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만물을 낳는 근원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도리의 오묘함은 마음에 욕심을 버리면, 볼 것이요, 욕심이 있으면, 오묘함은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 볼 것이다.
하지만, 도리의 오묘함이나, 껍데기 모두 그 근원은 같다. 이름을 달리했을 뿐이다. 그러니 이 둘은 묘하고 묘한 것이고 모든 현묘함의 출발이다.]
도덕경 1장은 '道'에 대한 정의로 시작하지만, 정의를 내리는 순간(道可道)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非常道)' 라고 부정한다. 그러므로 사실은 道에 대한 정의를 표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비유컨데, 道를 설명하여야 한다. 道를 설명하지 않으면 한발짝도 도덕경이 쓰여지지 못했을 것이다. 道는 '천지만물의 이치이며, 천지를 주관하는 것'이라 표현하지만, 애매하기 그지없다,
동양철학에서, 太虛, 虛, 無, 空의 세계를 설명할 때, 이들의 존재를 굳이 정의하기도 하지만, 太虛, 虛니,無니, 空이라 정의하는 순간 그것 역시 太虛, 虛도, 無도, 아니고 空도 아니라 부정한다. 虛이니,無니, 空이라 정의하는 순간, 虛가 존재하고, 無가 존재하며, 空이 존재하는 '有'로 돌아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儒.佛.仙으로 대표되는 동양사상에서는 이와같이 정의하고, 이를 부정하고, 부정의 부정을 부정하고...하는 반어법적, 역설적인 전개를 즐긴다. 그 만큼, 근본개념을 평이하게 설명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일 게다. 그래서, 비유컨데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드리는 자의 思維능력의 공력에 따라 받아드리는 수준이 천차 만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 개념은 하나일 수 있는 데, 무수한 해석의 종류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서양의 합리적 사고구조로는 어떤 의미로는 비과학적으로 비쳐질 수도 있는 것이다.
道 역시 이와 같아서 道라고 정의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道가 아닌 것이다. 즉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를 도덕경의 첫머리에 둔 것도, 道의 개념이 받아드리는 자의 공력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도덕경 1장 첫구절,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을 思維하다보면, 불경의 핵심인 반야심경의 사상이 엿보인다.
아래, 불경인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密多心經)의 핵심을 훑어보자.
(오른쪽에서 세로줄 5번째첫글자부터)'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즉, 물질적 현상이 그 본질인 공과 다르지 않고, 공 또한 물질적 현상과 다르지 않으니, 물질적 현상이 곧 본질인 공이며, 공이 곧 물질적 현상이라. 감각, 지각, 의지적 충동 및 식별작용이 모두 다 공이로다....
(오른쪽에서 10번째 중간 无無明부터)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즉, 어리석음(무명)도 없고 무명의 소멸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늙고 죽음의 소멸도 없노라.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나니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 无無明의 无는 無의 고어이면서 약자. 그러므로 탁본에서는 無無明을 '无無明'으로 쓰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깨달음을 통해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의 해탈, 해방을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반야심경내용중에, 고통도 깨달음의 대상인 생로병사의 존재를 부정하는 반어적, 역설적 경구가 반복된다. 지혜도, 얻을 것도 부정한다. 깨달아야 할 대상도 부정한다. 나아가서 그 부정도 부정한다.
'無(없다)'고 정의하는 순간, 그 無는 無가 아니다. '無'라는 '有'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相對的 無', '相對無'라 표현한다. '텅빈 공간'을 無라 하겠는가? '텅빈 공간'이라 정의하는 순간, '텅빈 공간'이 그 텅빈 공간을 채울 것이다. 그러므로, 無, 空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다. 그렇다고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 존재를 비유컨데, '絶對的 無', '絶對無'라 한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긴 설명, 유사 반복되는 설명이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반야심경의 대상은 석가모니 자신이나, 깨달은 자가 아니라 일반 대중이기 때문이다.
'道可道非常道' 역시 그런 반어법적인 전개방법을 보인다. 도덕경 역시, 노자 자신을 위해 쓴 것이 아니기고, 우매한 대중을 위해 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절주절 그 다음의 설명이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 이름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無名天地之始(무명천지지시) 이를믈 붙일 수 없는 것이 하늘과 땅, 세상의 시작이며,
有名萬物之母(유명만물지모)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 만물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도덕경 1장, '道可道非常道', 반야심경의 '色卽是空 空卽是色'은 각 경전의 핵심사상이다.
어쩌면, 도교, 불교를 통틀어 대표되는 핵심사상이라 할 만하다. 나머지는 이를 설명하기 위한 무수한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이 내 견해다. 하지만, 모든 사상의 출발점이 여기서 비롯된다는 것이지, 그것이 무수한 방편과 설명에 불과하다(?) 해서 귀중하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문명의 발전 단계상, 노자와 석가모니가 활동하던 시절인, 지금으로 부터 2,500 전후로 호모사피엔스의 지성의 발현이 정점에 이르렀나 보다. 혹자는 그 시기가 지구상 최고 지성의 출현시기라 칭한다. 과학기술은 지속으로 발전을 해가고 있지만, 그 내면의 사유세계의 통섭적 지성은 당시에 이미 정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이른바 인류의 큰 스승으로, 노자와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뒤를 이어 예수등이 등장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작금의 종교, 정신세계.사상세계도, 아직은 당시 출현한 지성의 영향과 지배하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석가모니가 설했다는 반야심경, 노자의 도덕경의 도에 대한 깨달음은 당시 지리적 여건, 교통의 환경을 유추해볼 때, 교류되지 않은 독자적 思維物인 것으로 단정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두 지역의 성현의 깨달음은 일맥상통한다. 그들의 지성이 정점에 도달했었기 때문이다. 極과 極은 통하는 원리일까?
우선은, 정의를 내릴 수 없는 '根本始作'에 대한 정의를 시도한 흔적이 그것이다. 하지만, 정의를 시도하지 않으면, 도덕경이든, 반야심경이든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깨달음, 사유의 결과를 세상에 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노자가 도덕경을 남기고 시원찮은 것을 굳이 남겼다고 마땅찮게 여겼다는 사유(事由)나, 부정에 부정을 통해 본질을 설명하려는 석가의 딜레머(?)를 도덕경 1장과 반야심경에서 보는 것이다.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道에 대해, 정의를 내리자마자 허겁지겁 '道'의 개념을 또 다른 설명과 비유를 통해 정의를 전달 하고자 하는 노자의 심정이 헤아려진다. 도덕경 전체 81장에, '道'가 들어가는 구절이 70여곳이다. 도덕경의 도경 1장은 앞서소개한,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이고, 마지막 장 37장에, '道常無爲而無不爲(도상무위이무불위)' 즉, '도는 항상 함이 없으면서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다.
도는 크게는 우주본체로 부터, 작게는 나무, 풀한 포기, 그릇하나, 잔속에도 있지 않는 곳이 없다는 이른바 '無所不在 無時不在'의 가르침인 것이다. 이처럼, 도덕경은 '道'를 여러각도에서 설명한 것은 그만큼 道를 설명하기 힘들다는 반증이다.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즉, 물질적 현상이 그 본질인 공과 다르지 않고, 공 또한 물질적 현상과 다르지 않으니...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즉, 어리석음(무명)도 없고 무명의 소멸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늙고 죽음의 소멸도 없다.
'색','공'의 비유와 부정을 통해 색과 공의 진정한 정의, 그것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려는 석가모니의 심정, 노자의 심정과 별반다르지 않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이니 人法地(인법지)', 즉, 대지는 하늘을 본받고, 人間의 上有世上인 하늘이 道를 본받고, 道는 自然을 본받나니, 사람들은 대지를 본받을 지어다'
하지만, 요즈음 세상은 대지를 본받기는 커녕 경쟁이라도 하듯 대지를 깔아뭉개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대지의 신 가이아(Gaia)의 분노가 극에 이르렀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는 것이다.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 이름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無名天地之始(무명천지지시) 이를믈 붙일 수 없는 것이 하늘과 땅, 세상의 시작이며,
有名萬物之母(유명만물지모)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 만물의 어미라 한다.
'이를을 붙일 수 없는 것, 하늘과 땅, 세상의 시작'이나,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 만물의 어미' 라는 것이, 같은 것이나 이름을 달리 했을 뿐, 그것이 道라 하겠지만, 굳이 道라 말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道라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이미 道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과 대지와 하늘이 순환한 도리, 그 도리의 자연스러움에 '함이 없다'. 즉, 무위(無爲)하다. 또, 그 도리의 자연스러움에 '함이 없음을 애쓴다' 즉, 무불위(無不爲)하다. 혹은,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즉, '어리석음(무명)도 없고 무명의 소멸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늙고 죽음의 소멸도 없다.
이처럼, 노자나 불가에서는, 생명과 대지와 하늘이 순환한 도리를 설하고 있는 것이, 그 도리의 無爲而無不爲(무위이무불위), 色卽是空 空卽是色(색즉시공 공즉시색)한 경지를 굳이 글로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말씀의 대상이, 자신을 위해 쓴 것이 아니라, 대중을 위해 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명의 기운과 현상이 생명의 영역에서 머물고, 맴도는 한, 그리고 경쟁과 이익에 마음이 끌리는 한, 이 도리를 제대로 깨친다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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