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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老子別義(上)

老子別義(上)_5장 天地不仁(천지불인)

by 靑野(청야) 2013. 7. 7.
[도덕경 5장]


天地不仁(천지불인) 천지(자연)은 인자하지 않아서
以萬物爲芻狗(이만물위추구)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 다루듯 한다
聖人不仁(성인불인) 성인도 인자하지 않아서
以百姓爲芻狗(이백성위추구)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 다루듯 한다

天地之間(천지지간) 하늘과 땅사이,
其猶 橐籥乎(기유 탁약호) 그것은 가히 풀무(바람을 만드는통)와 같도다(비유된다)
虛而不屈(허이불굴) (풀무통처럼) 비어 있으나 다함이 없고,
動而愈出(동이유출) 움직일수록 (바람이 생겨나듯 삼라만상이) 생겨난다.

多言數窮(다언삭궁)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지는 것이니
不如守中(불여수중) 침묵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

주) * 芻狗 : 짚으로 만든 강아지(제사용)
     * 橐籥 : 풀무
     * 猶    : 오히려, 가히, 크게, 마땅히 ~하다
     * 乎    : 어조사, 감탄사.
     * 屈    : 굽다, 굽히다, 다하다,강하다
     * 窮    : 다하다, 마치다, 궁하다
     * 愈    : 하면 …할수록 …하다, 낫다, 뛰어나다, 점점, 더욱더
     * 數    : 셈 수, 자주 삭
     * 中    : 한가운데이며, 지나치지 않는 것, 치우치지 않는 것


[천지 즉 대자연은, 인자하지 못하다. 즉 만물의 존재에 이것저것 간섭함이 없이 無爲하다. 만물의 입장에서는 제사에 쓰이고 버려지고 태워 없어지는 '추구(짚으로 만든 강아지)'로 취급되듯이, 그 만큼 대자연은 공평하고 무심하게 無爲를 실천할 뿐이다. 성인도 인자하지 못하다. 즉 백성에게 이것저것 간섭함이 없이 無爲하다. 백성의 입장에서는 제사에 쓰이고 버려지고 태워 없어지는 '추구(짚으로 만든 강아지)'로 취급되듯이, 그만큼 성인은 공평하고 무심하게, 無爲를 실천할 뿐이다

하늘과 땅사이는 마치 풀무(바람을 만들어내는 통)와 같지 않는가! 비어 있어나 둥글어 다함이 없고, 움직일수록 풀무통에서 바람이 생겨나듯이 삼라만상이 생겨난다.
말이 많으면, 자주 말이 막히게 된다. 침묵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 ]


도덕경 5장은 가장 오래된 곽점본(BC400~500년경)에는 이 중간 구절만 있고, [天地不仁부터 , 以百姓爲芻狗]과 뒤의 [多言數窮,不如守中] 句節은 없다고 한다. 또, 句節전후로 문맥의 흐름이 연결되지 않고, 다소 엉뚱하여, 가운데 句節들이 원래 노자의 원본 내용이고, 맨 첫句節과 마지막 句節은 후대에 누군가가 삽입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장은 도덕경 전체에서도 대표적으로 난해한 句節에 속한다. 이장의 해석은 죽간본,백서본등의 초기 도덕경부터, 그후 발견된 것을 대상으로, 왕필이후 무수한 사람들이 번역을 해왔는데, 그 해석도 가지가지고, 그 해석의 차이가 5장만큼 많이 나는 장도 드물정도로 각양각색이다.

우선 내용이 파격적이다. 인간이 본받아야 할 대지, 도를 본받아야 할 하늘, 그 '도'를 실천하는 성인'이기 때문에, 천지, 성인이 대자연을 닮아, 만물, 백성을 대하는 자세가 불편부당하여야 함을, 고도한 비유나 반어적 충격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며, 이런 표현을 字句대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仁'은 儒家에서는 아주 좋은 의미의 긍정적 의미로 쓰인다. 그 개념은 有爲하고 작의적이다. 반면에, 道家에서는 '無爲' 또는 '自然', 자연스러움, 無爲自然'을 이상으로 추구하기 때문에, 有爲한 '仁'은 크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개념이다. 장자가 '大道不仁'이라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식이 아닌, '자연의 본받음'만이 '도'에 이르는 길이라 보기 때문이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天地는 有爲하거나 作意的이지 않다. 그래서, '天地不仁'이라 한 것 아닐까? 그것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천지는 만물을 작의적이지 않은 無心함, 無爲함으로 대한다. 어떤 의미로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뜻일게다. 그것을 강조하느라 '풀로 만든 강아지(추구) 다루듯 한다'는 글귀로 표현된 것이라 생각한다.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성인도 천지와 같이, 백성을 대할 때, 유의하거나 작의적으로 대하는 것, 이를 테면 '仁'으로 대하는 것을 배격한다. 성인이 작의적이지 않고, 무심함, 무의함으로 대한다. 즉,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아도 무위자연의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다. '무위자연속에 살아가는 백성'의 삶, 그런 삶이 되도록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야 말로 이상적인 다스림이다. 그것을 강조하여, '백성을 풀로 만든 강아지(추구) 다루듯 한다'는 글귀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참고로, 몇분의 번역을 보자,

'천지(성인)은 인자하지 않다. 만물(백성)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도올은 이렇게 해석하면서 천지와 성인의 본성은 인자하지 않으며, 무지막지 하다고 한다.
이에 대해(도올의 번역에 대해), 이경숙이라는 분은 이를 코웃음(?)을 치면서 '천지(성인) 이와 같이 불인하니 만물(백성)을 간섭하지 않는다' 라고 번역한다.

'천지는 어질지 않으니 만물을 짚강아지처럼 여기고, 성인은 어질지 않으니 백성을 짚강아지처럼 여긴다' 로 번역하는 이도 있다.

天地之間 其猶 橐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천지지간 기유 탁약호, 허이불굴 동이유출)

하늘과 땅 사이는 비유컨데, 둥근 바람통안의 바람개비를 돌려 바람을 만들어내는 풀무와 같지 않는가! 풀무통 처럼 비어 있어나 둥글어 돌아가는 데 막힘이 없고 다함이 없다. 움직일수록 풀무통에서 바람이 생겨나듯이, 하늘과 땅사이의 작용으로 삼라만상이 생겨난다

어떤 이는, 어순이 '天地之間 虛而不屈, 其猶橐籥乎 動而愈出' 되어야 하고, 이를 번역하여, 하늘과 땅은 텅비고 다함이 없고, 그것이 풀무통과 같아, 움직일수록 바람이 생기듯 삼라만상이 생긴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 '虛而不屈' 을 번역하는 데, 대부분의 번역에서 '텅비어 있어 다함이 없다'로 번역한다. 이렇게 번역하면, '텅비다'. '다함이 없다' 두개념이 천지를 풀무에 비교하는 의미에 연결이 안된다. '텅비다'는 '풀무통이 비다'와 '천지사이는 空 즉 虛空이다'라는 개념으로 연결되나, '다함이 없다'는 '허공만을 묘사하지 '풀무통을 묘사하지않기 때문에, 부자연스럽다. 그래서 어떤 이는 '(풀무통 처럼 안이)텅비고 찌그러지지 않다' 로 번역하기도 한다. 모두 일리는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느 것이 옳은 해석인지,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하지만, 앞서의 설명처럼, 나는 '비어있는 것'과 풀무통의 둥근 형상이 바람을 지속적으로 일으키는 데 적절한 형상임을 떠올리며, '다함이 없다, 아무리 돌려도 돌려도 바람을 끝없이 일으킨다'라는 개념으로 '不屈' 이라는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多言數窮 不如守中 (다언삭궁 불여수중)

말이 많으면, 자주 말이 막히게 된다. 입을 다물고, 혹은 속에 말을 담고 즉 침묵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

中은 입(口)에 손가락을 세워서 입에 붙여 세운 형국이다. 즉 '입을 다물라' 고 할 때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행위를 한다. 이것은 中이라는 글자가 '침묵'을 의미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中은 가운데의 의미로 '속'이라는 의미도 된다. 즉 속에 담아두고, 입을 다무는 것, 다시말하면 침묵을 지키는 것이 말을 자주하여 궁한것 보다는 좋다라는 의미이리라.

서두에 소개한 바와 같이, [天地不仁부터 , 以百姓爲芻狗]과 뒤의 [多言數窮,不如守中] 句節이 후대에서 삽입되었다면, 중간句節과 무엇인가 내용의 흐름이 연결되도록 고려 하면서 作句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연결고리를 나로서는 찾을 수가 없다. 많은 이들처럼, 어거지로 연결하는 우를 범할 수도 없고, 이 숙제는 내실력으로는 5장만의 해석으로 풀리지 않을 것 같다. 도덕경 전편을 해석하고 다시 돌아오면, 眼界가 더 크게 열리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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