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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동양철학/老子別義(上)

老子別義_序文

by 靑野(청야) 2013. 7. 2.

 

 

도덕경(道德經) 은, 노자(老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책으로 인간과 천지, [자연의 道와 德의 원리]를 담고 있다는 것으로 <노자> 또는 <노자도덕경>이라고도 하며, 약 5,000여(5290)자, 81장으로 되어 있고,, 상편 37장의 내용을 <도경 道經>, 하편 44장의 내용을 <덕경 德經>이라고 한다.

道는 '천지만물의 이치이고, 천지를 주관하는 것'이며, 德은 '그런 도가 어떤 하나의 존재에 머물러 도의 작용을 하는 것(출처:네이버지식 백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도경 道經>은 천지만물의 이치를 설명한 경전'이고, <덕경 德經>은 그 작용을 설명한 경전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 도덕경은 노자가 지었다고 하나 한 사람이 쓴 것이라고는 볼 수 없고, 오랜 기간 동안 많은 변형 과정을 거친 흔적이 있어, 기원전 4세기경 지금과 같은 형태로 고정되었다고 여겨진다. 가장 대표적인 판본으로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 하상공(河上公)이 주석한 것으로 알려진 하상공본과, 위(魏)나라 왕필(王弼)이 주석하였다는 왕필본의 두 가지가 있다. 근년에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의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백서노자(帛書老子)와 색담사본도덕경(索紞寫本道德經)은 <도덕경>의 옛 형태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

모든 종교나 경전의 생성과정이 그러하듯이 도덕경은 노자가 지었다고 하나 한 사람이 쓴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노자의 사상과 전하는 바가 기반이 되고 주류가 됨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도덕경이 [자연의 道와 德의 원리]를 설명하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이론의 여지가 없이, 당연하고도 타당한 일을 설명한 것도 있고, 심오한 근본이치를 설명한 것도 있지만, 그 표현의 함의(含意)가 너무나 광대하고, 추상적이여서, 아직도 그 해석에 의견이 분분하고, 古來로, 장자이래 많은 해설이 존재해왔다.

그래서, 노자사상은 儒.佛.仙으로 통칭되는 동양의 3 사상의 한분야로서, 장자로 이어져 노장사상, 道家思想으로 발전하고, 동서고금의 철학자나 성현들이 도덕경의 사상에 매료되어, 사상적.철학적으로 깊이 탐구하기도 하고, 실용적으로 활용되어 왔다. '神仙되는 길', '養生의 道'등 을 추구하는 道敎信仰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신출귀몰. 신기막측의 도술, 역술, '不老長生', '反老換童'등 민간기복신앙의 숭상 대상과 근거로도 변질적으로 활용되기도 하였기에, 현대인들에게 신비주의적인 선입관과 부정적인 시각의 일면을 가지게 된 계기가 여기에 기인한다 할 것이다.

어쨋튼, 노자사상은 아직도, 유교사상과 더불어, 사계절의 순환 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또 중세이후, 서양에 전파되어, 서양문명의 근간을 이룬다는 성경 다음으로, 베스트셀러로서 많이 읽히는 고전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에서는 거의 모든 가정에 독일어판 도덕경이 구비되어 있고, 영국, 미국에서는 청년들간에 도덕경을 공부하는 것이 유행이라 한다. 미국의 한 학자는 '도덕경은 미래사회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책이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고 하였다. 중국에서는 도덕경을 중고생 필독서로 정해놓고 있다 한다

그 유명한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는 도덕경을 직접 번역하여 유럽에 도덕경이 유포되는 데 큰 역활을 하였고,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노자 15장중,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청),孰能安以久久動之徐生(숙능안이구구동지서생)' 그 뜻은 '누가 능히, 탁함에 처해도, 고요히 처신해서, 그 탁함을 서서히 맑게 할 수 있겠는가? 누가 능히, 편안한 환경에 처해 있어도 안주하지 않고 움직여 서서히 (새로움으로) 살아날 수 있게 하겠는가?' 로 이해되는 데, 이 두 구절을 서재에 걸어두고 아꼈을 정도로 도덕경을 애독하였다한다. 그외에도 프리쵸프 카프라등 문학, 철학, 물리학의 거장들의 저서나 기록등에서, 도덕경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는 자국이 處處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이처럼, 도덕경은 현대의 동서양의 사상세계, 지식체계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古來로부터 성현들이 가르치고 남긴 이름난 글이나 경구, 말씀의 배경에는 대부분, 도덕경의 사상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많은 이들의 지식, 사상속에 도덕경의 철학적 함의가 알게 모르게 스며있고, 그 함의가 구현되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심지어 공자마저, 젊은 시절, 노자를 찾아가서, 예를 묻고는, 노자의 사상에 충격을 받고, 사상적 성숙의 계기가 되었다고 전한다. 뿐만아니라. 현대에 이르러, 우주의 생성, 태초의 문제까지, 현대우주론이 추구하는 우주기원, 우주종말까지 해석할 수 있는 사상적 사유기반을 제공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노자사상은 그만큼, 동서고금을 뛰어 넘어, 세상과 자연의 생성,유지, 변화의 이치를 설명하는 데, 보편타당한 원리를 제공한다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현대철학 뿐만 아니라 물리학자들, 정치가, 기업가들도, 2,500년전에 쓰여진 도덕경을 즐겨 탐닉하여 영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나름대로의 분야에서, 시대환경과 시대상에 맞게 해석하고, 그 속에 담긴 함의를 애써 더듬어, 새로운 지혜을 얻을려는 노력을 해 오고 있는 것이다.

도올은, 도덕경에서는 노자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볼 수 없으며, 논어에는 공자의 삶과 인간성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하였다. 도덕경은 철학적인 원리를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실천 방법은 내재되어 있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반면에 중국의 노자사상의 대가 야오간밍은 '도덕경'은 고전이면서 2.500년 시공을 뒤어 넘어 현대의 문제를 예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만고의 고전'이라 칭송한다.

千理지行 時於足下(천리지행시어족하),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天下亂事 必作於易(천하난사 필작어이), 세상에 아무리 어려운 일도 쉬운일 부터 풀려나간다.
天下大事 必作於細(천하대사 필작어세), 세상의 아무리 큰일도,작은일이 쌓여 이루어진다.
上善若水(상선약수), 으뜸가는 선은 물과 같다.
和其光 同其塵(화기광 동기진),빛을 갈무리 하고 풍진에 함께 살라

.......

도덕경 전체 81장에는 담겨있는 내용이, 해석이 난해한 부분이 없지도 않지만, 이처럼 내용이, 한구절 한구절이 물흐르듯, 무리없고, 토를 달 여지없는 보편타당한 원리를 말하고 있다. 이런 경구들은 실제로, 2,500년이 지난 현실세계의 생활속에 바로 활용하고, 금과옥조로 삼는 지혜들이다. 그러므로 나는 도올이 '도덕경이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실천 방법은 내재되어 있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에 선듯 동의하기 힘든 일면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오히려, 야오간밍의 '고전이면서 2.500년 시공을 뒤어 넘어 현대의 문제를 예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만고의 고전'이라 하는 것에 고개를 끄떡이게 된다.

이처럼, 도덕경은 많은 수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번역하여 해설서를 내놓고 있다. 어떤이는 직역으로 어떤 이는 나름 이해를 추가한 의역으로 내놓고 있는 데, 언듯보면, 애매모호한 함의에 편성하여, 노덕경의 본디 뜻을 곡해하는 해석도 부지기수다. 물론 이러한 견해도 내가 곡해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도덕경 해석을 가능한한 번역(飜譯), 경해(輕解), 중해(重解) 3 단계로 하고자 한다.

첫째단계는 번역이다.

이 번역은 여러 번역 본이나 여러 한자적 지식을 참고로 하여, 가능한 子句의 객관적이고, 보편적 번역되도록 했다. 여기서는 그 개념의 의역이나 해석을 되도록 가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기존의 해석문을 기반으로 하여, 자귀의 정확한 의미를 확인하고, 나름대로 오류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교정하고, 자귀의 뜻에 보다 정확하게 부합하게 하는 데 주력하였다.

둘째, 輕解이다, 앞의 번역에 대한 해석이다.

이것은 앞의 번역에 대한 해석이다. 번역을 좀 더 문맥과 개념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하였다. 다소의 의역을 포함하여 나의 생각도 개입한다. 이처럼, 번역과 경해를 구분함으로써, 도덕경의 해석을 얼버무리는 식의 주관적 해석이 가능한 배제되도록 하고자 한 의도이다.

셋째, 重解이다. 앞의 번역과 해석에 대한 해설이다.

이부분은 도덕경을 내 주관으로 바라보는 해석이다. 해석보다는 해설이라 해야 제대로 된 표현이지 싶다. 나름대로 철학이나 종교, 자연과학, 물리 및 우주관과 결부시켜 도덕경의 함의라고 생각되는 것을 추출하고자 하였으며, 노자가 의도하지는 않았을 수 있지만, 결과론적으로 도덕경에서 비롯된 개념의 연결성, 활용성을 포함하여, 도덕경의 개념의 확대를 시도한 해석이라 할 수있다.

장자, 사마천, 왕필, 하상공, 소철등이나,  도올이나 오강남, 야오간밍같은 동서고금의 대가들이 당연히, 도덕경을 언급하거나 도덕경에 기반을 둔 사상을 확립하기도 하고, '도덕경 주해'을 남겼다. 2012년 현재 약 1,600 종의 관련서적이 있다한다.

 

하지만, 나 역시 나름대로 도덕경 해석을 남기고자 한다. 어디에, 어떻게 남기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집 구석에 처박혀 있을 수도 있고, 우리 꼬맹이가 '어린 내나 잘 키워주시지, 쓸데없는 일에..' 할 지 모른다. 하지만, 도덕경을 붙잡고 씨름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다. 노년에 이르러 그만한 즐거움이 세상 또 어디에 있겠는가?

아마도, 도덕경 자구의 해석은 대가들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구로부터 얻어지는 깨달음의 해석은 그들과 다른 내 나름대로의 영역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내 思維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장자에게, 사마천에게, 도올에게, 야오간밍에게 나름대로 깨달음의 해석이 존재하겠지만, 나에게도 나름대로 깨달음의 해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의 기쁨이다.

그러나, 先人들의 말씀은 수천년을 걸쳐 말씀으로 내려오지만, 현대문명의 구성원인 대부분, 후대들의 마음은 대부분 콩밭에 가 있다. 성현의 말씀은 멀리, 높이 있고, 이익은 눈앞에 있음이다. 권력과 부와 편함과 자기이익을 탐하는 데, 대부분의 인생을 소비한다. 나를 지키고,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을 부정하고, 남을 넘기 위한 경쟁이 지나치다.


자원의 소모와 쟁탈로 자원의 수급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 수십년, 한 세대정도는 버틸 수 모르지만, 두 세대, 세 세대까지 지속은 불가능하다. 이를 교정하고, 이끌어 가야할 말씀들은 과학기술에 기반한 성장주도 문명에 주눅이 들어 있다. 그러니 스티븐 호킹이 '철학은 죽었다' 고 까지 극언을 한다. 물론 우주를 생성을 설명하는 데 국한하여 철학의 기여에 대해 하는 말이겠지만. 어쩌면 이런 상황은 옛성현들의 말씀들을 잘못 새겨들은 현대인들의 책임이 크다. 스티븐 호킹이 언급한 그런 의미에서는 굳이 표현한다면, '철학이 죽었다기 보다는 제대로 된 철학자가 죽었다' 고 해야하는 것이 타당한 표현이지 싶다. 스티븐호킹이 도덕경의 함의를 깊이 눈치챘다면, 이런 표현을 하는데, 아마도 주저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철학이 과학기술, 성장위주의 문명에 제동을 걸지 못하고, 오히려 그 문명의 수혜자로 안주하는 한, 현대 과학기술과, 성장에 기반한 문명의 종말은 필연일 것이다. 자원의 고갈, 생태계의 교란, 人性의 왜소화, 첨단화등, 문명의 여러 조짐은 확연히, 그 길로 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그것을 제어할 마땅한 수단이 없다면,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필귀정이 될 것이다.

나역시, 기호지세의 과학기술, 성장위주의 문명에 제동걸고, 제어할 수단을 도덕경에서 엿본다면 지나친 기대일까?

과학기술, 성장위주의 문명에 제동걸고, 제어할 수단을 도덕경에서 엿보며, 문명에 대한 미래희망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게는 이 도리의 깨침의 수준이 어떠하던, 그런속에 즐거움이 있다면, 나는 그것이 궁금한 것이다. 현실에 얽매인 몸의 깨침에 어떤 한계가 있을 지, 이 역시 궁금한 것이다.

그것이 내가 총 81장의 도덕경을 내式으로 읽고, 해석하려는 이유이다. 그것이 '和其光 同其塵(화기광동기진)'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섞인다는 즉 이 풍진세상에서 굳이 아둥바둥 살아가는 이유인 것이다

'노자별의(老子別義)'

나의 도덕경 해설을 이렇게 칭하기로 했다. 감히 선현들의 '노자본의,장자집석 (老子本義,莊子集釋)' 이나, 혹은 뭇 성현들이 노자를 읽고 그 '本義'라고 하는 해설서들에 어깨를 갖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別義'라 칭한 것이다. 別義(별의)라 칭한 것은 나만을 위한 칭호이다. 나 혼자만의 즐거움을 관리하기 위해 칭하는 용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릴 때,아마도 대여섯살때이지 싶다. 앝은 개천에서 돌을 일구어 가재나 피라미잡던 생각이 난다. 돌을 하나하나 일궈낼 때마다, 그 밑에 가재나 피라미가 있는 지, 없는지 물밑 환경에 엄청난 호기심을 가지고 정신없이 개천의 돌을 뒤졌던 것이다.

내 앞의 개천에 신비로운 81개의 돌이 놓여 있다. 어릴 때의 개천에서 가재잡던 호기심과 동류의 호기심으로 열심히 돌을 일궈볼 것이다. 내가 가재를 잡던 허탕을 치던, 아무도 관심이 없을 것이고 굳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을지도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때의 즐거움을 안다. 돌을 하나씩 들쳐낼 때마다, 그 어린시절의 즐거움과 동류의 즐거움이 지금도 내 정수리를 훑고 지나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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