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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동양철학/老子別義(上)

老子別義(上)_4장 和光同塵(화광동진)

by 靑野(청야) 2013. 7. 7.
[도덕경 4장]

 

道沖 以用之(도충이용지) 도는 비어 있어 아무리 쓰도 

或不盈(혹불영) 언제나, 차서 넘치지 않는다.

淵兮 似萬物之宗(연혜사만물지종) 깊고 깊어 만물의 근본(宗)같다

 

挫其銳(좌기예) 날카로운 것은 무디게 하고

解其紛(해기분) 얽힌 것은 풀어주고,

和其光(화기광) 빛을 부드럽게 하며

同其塵(동기진) 티끌과 한가지로 존재한다.  

 

湛兮 似或存(담혜사혹존) 맑고 맑아 뭔가 존재하는 것 같다

吾不知誰之子(오불지수지자) 나는 (도가)누구의 자식인지 알 수 없지만,

象帝之先(상제지선) 조물주보다 먼저 있었던 것 같다.

 

주) *沖: 빌충, 비다(empty)

     *用之: 그것(之)을 쓰다 (또는 작용을 계속해가다.)

              之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조사로도 쓰이고 지시대명사로도 쓰인다. 

     *兮: 어조사 혜

     *淵: 못 연,모이는 곳, 근본,근원

     *湛: 맑을 담, 깊을 담

     *誰: 누구 수

     *象: 코끼리, 모양(피상적인 모습), 대신에 像은 구체적인 모습

 

[도는 비어 있어 그것을 이용하여(도에 다가) 무언가를 채워도 언제나 넘쳐남이 없다. 그러니 도는 너무나 깊어 만물의 근본 같다. 또 도는 날카로움이나, 어지럽게 얽힘이 없이 두리뭉실하고,  빛과도 어울리고, 티끌과도 같이 존재한다. 

 

도는 너무 맑아,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존재하는 것 처럼 보인다. 나는 도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도의 始原을 모르지만, 아마도 조물주보다 먼저 있었던 것 같다 ]

 

'

道沖  以用之 不盈'

 

참으로 많은 함의를 가진, 어려운 구절이고, 논란이 많은 구절이다 왜냐하면 '도'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설명에 사용된 용어나 문장 구성이 다양한 해석을 낳기 때문에 각인각색의 해석이 존재한다. 

 

참고로, 다른 이들의 번역을 보자.

 

"도는 비어 있으므로 아무리 퍼내어 써도 고갈되지 않는다"(도올),

"도는 텅 비어있어서 그것(道)을 써먹어보려고 해도 손에 잡히는 게 없다"(이경숙)

 

그런데, 내 생각, 내관점으로는 이렇다. 즉, 도올처럼, 도가 비어 있다고 해놓고, 아무리 퍼내도 고갈되지 않는다니 뭔가 어색하다. 또 도가 텅비어 있어, 도를 써먹으려 해도 써먹을 수가 없다는 해석도, 도를 써먹을 수 없다니,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도덕경에는 여러 곳에 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도란 무엇이다'라고 명확하게 정의하는 대신, 비유로 혹은  유사 반복설명으로 도가 무엇일 것이라는 그림이 (독자의 머리속에) 그려지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도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황의 나열과 설명을 시도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제4장의 글귀를 재음미하면,
 
도는 비어 있다. 그런데 빈 것이 빈 것이 아니다. 뒤에도 나오지만, 나무를 깍아내에 잔을 만든다고 했을 때, 나무가 깎여나간 부분은 비게 된다. 그 빔은 단순히 空이나 無가 아니다. 잔에 술이나 물을 채우기 위한 빔이다. 따라서 그 빔(無,空)은 술이나 물이 담김(有)을 위한 빔이다. 2장에서 말하는 有無相生의 원리다.
 
그래서, 도는 비어 있되 빈 것이 아닌 큰 그릇이다.  삼라만상을 담는 우주일 수도 있고, 대자연을 담는 큰 그릇일 수 있다. 대자연을 담는다는 것, 삼라만상을 담는다는 것은 그러니, 결코 그 속을 채울 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만큼 도는 큰 것이다. 그 큼은 물리적인 큼이 아니다. 우주와 자연의 모든 원리을 포용하는 논리적인 큼이다. 그것을 나는 만유원리, 만유사상이라 부르고 싶다. 그러니, '도는 만유의 원리이니, 만유는  결코 그 원리를 벗어나남이 없다'라고 하는 것이  노자의 本義이지 싶다
 
현대물리학의 진공의 개념이 이와 유사하다. 진공은 그야말로  큰 沖(비어있음)이다. 하지만, 그 빔에는 진공에너지가 가득차 있다고 한다. 진공에너지는 물질과 반물질의 쌍소멸로 무나 공으로 돌아가면서 생긴다. 다시 그 진공에너지로 부터 양자요동으로 물질이 생겨난다고 설명한다.
 
2,500년전의 노자의 머리 속에는 이런 비어있음 즉 '도'의 개념으로 가득차 있었을 것이다. 요즘 같았으면, 우주물리학 이론으로 풀어내어, 우주물리학을 연구성과를  수세기나 당기는 업적을 쌓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도가 날카로움을 무디게하고, 어지러히 얽힘을 풀어주고, 빛을 부드럽게 하고, 티끌과 한가지로 존재한다. 즉, 도가 둥글고 원만하고, 빛과 도 어울리고, 티끌속에도 존재한다. 이렇게 해석한다해도, 이는 노자의 표피적 표현이고, 만유사상에 대한 비유적 설명일 뿐이다. 도올이나 이경숙씨 역시 이런 노자의 표피적 표현에 천착하다, 본뜻을 본뜻답게 보지 못한 것으로 이해된다

 

湛兮 似或存

 

그래서 어떤 논리도, 어떤 상황도 도를 채울 수 없다. 도가 모든 것을 포용하기 때문이다. 도가 뭔가로 채워지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또, 도는 너무 깊어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은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 맑은 것이다. 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맑다.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그런 도이기 때문에, 만유의 원리, 만유의 사상은 언제 어디서 출발했는 지,그 始原을 모르겠다. 조물주가 천지를 창조 했다면, 도는 그 이전부터 있었던게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그것이 물리적이든, 사유의 세상이든, 태초의 개념은 古來로 인류를 괴롭혀온 화두이다. 당연히 인류 문명사는 태초의 개념을 설명하고자 함에 의하여 문명이 발전하였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종교, 철학이 수천을 이 문제와 씨름하고 나름대로  표준모형을 만들어 이를 신주단지로 모시고 사는 것이 세상모습이다. 최근의 우주물리학이 나름대로, 우주생성의 비밀을 거진 다 파헤쳤다고 한다. 이른바 만물의 이론 'Great Unified Theroy', 'Theory of Everything' 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당시 노자도 태초를 고민한 흔적이 '도'와 도덕경이라 생각한다, 만유를 일통하는 원리를 추구한 것을 '도' 라 명명하고, 그 도의 개념과 작용을 나름대로 설명한 것이 '도덕경'인 것라 할 것이다.

 

象帝는 上帝로 삼라만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조물주라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上帝라는 개념이 당시에 있었는 지 모르겠다.  象帝는 뒤에 혹은 당시에 上帝의 개념과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이는 노자가 儒家에서 혹은 토속신앙으로 하늘에 주재한다는 상제숭앙신앙을 어리석은 짓이다 하기 위해  '上'을 '象'으로 바꾸었다는 평이 있는 데, 이는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성인의 마음을 그렇게 왜소하게 짐작하는 것은 올바른 이해태도가 아닐 것이다.  뒤에 노자사상은 도가신앙으로 발전하면서 '上帝' 개념을 받아드린다. 노자의 '象帝'가 발전해서 上帝가 되었을 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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