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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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늦둥이를 여행보내고...
● 새만금을 거쳐가다
● 김양아 ~보지가 걸렸다아~
● 완도로 가다
● 아! 청산도
● 남도 칠백리
● 화개장터에서
● 지리산을 가로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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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 칠백리
청산도에서 일박을 하고, 다시 카페리호에 몸을 싣고 완도를 거쳐 강진으로 향했다.
강진은 만덕산에서 시작해 석문산,덕용산, 주작산, 두륜산, 달마산에 이르기까지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해안선과 나란하게 거의 일직선으로 이어진 암맥의 남쪽방향으로 해안까지 달려 내려간 넓은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차령이나 노령산맥 같은 거창한 산맥이 가로질렀다면, 산자락마을이 이처럼 포근하고 안온 한 분위기를 연출하지 못햇을 것이다.
주작산이 이름에서 풍기듯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나는 듯한 형상을 지닌 산이라는 데, 높이가 사오백 미터급의 아담한 산세에 화강함 암맥들이 암릉을 이루어 설악의 울산바위를 축소해놓은 느낌을 풍기는서 독특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남으로는 해상국립공원을 앞바다로 북으로는 암릉이 병풍처럼 받쳐주는 땅.이 암맥의 남쪽 땅들이 완만한 구릉지역이, '땅끝으로 불리는 해남, 강진, 보성, 장흥땅을 이루고, 지리산 자락의 남쪽 순천에서 서쪽의 구례로 둘러싸인 지역을, 섬진강변을 따라 휘돌아가는 길' 이 이른바 아름다운 '남도 칠백리'를 이룬다.
<주작산 휴양림 입구>
< 주작산 암릉을 왼쪽에 두고, 보성으로 오는 길이 포근하기 이를 데가 없다 >
완도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잡으니, 주작산을 왼쪽에 두고, 오른쪽에는 남해바다를 두고 이차선도로가 구불구부 끝없이 뻗어 있다. 강진이 끝머리에 다산 정약용이 초기 귀양살이 하였다는 '다산초당' 의 안내문이 나온다. 당연히 다산초당(多山草堂)으로 가봐야지, 경기도 양평가는 길에는 다산길과 다산박물관이 있는 데, 여기는 또 뭔가?
다산초당에 오르는 오솔길은 다산유물전시관에서 시작된다. 주변이 온통 침엽수와 대나무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하루 종일, 사계절 내내 어둑어둑하다. 다산유물전시관에서 작은 고개를 넘으면 귤동마을로 이어진다. 길은 마을의 허리춤으로 진입해 곧장 다산초당으로 향한다. 길 초입은 가파른 편. 제멋대로 휘어지고 꺾인 나무뿌리가 모습을 드러낸 길, 이른바 '뿌리의 길'을 지나면 초당으로 이어진 마지막 계단이다 .
<뿌리의길, 나무뿌리가 모습을 드러내어 게단을 형성한 길이다>
<다산초당에 오르는 계단, 위에 다산초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다산초당>
<다산초당 앞에서>
다산은 신유박해에 연류되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됐다. 그 후 이곳 만덕산 중턱 초당에서 머물며 실학을 꽃피웠다고 한다. 18년간 강진에 유배생활을 하면서, 11년간을 머물며 후학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가 바로 여기 多山草堂이라 한다. '경세유표','목민심서'를 집필한 곳인 이곳 다산초당은 서암, 다산초당, 천일각, 동암등 4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多山草堂'은 글과는 달리, 초가집이 아니라, 기와집이네, 원래부터 그랬는지, 중간중간 세월에 중수하면서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어딘가에 그 내역이 있을 터이다. 초기 바탕은 그대로 였을 것이니, 그렇다면 이백여년전 건물이 우거진 낮은 야산중턱에 있다고 봐야 할터. 우거진 숲과 숲을 벗어나면, 탁트인 강진뜰과 저멀리 남해바다. 귀향살이를 보냈다하지만, 어찌 이런 복지(?)에. 다산은 귀향살이가 아니라 아마도, 옳커니 그 상황을 즐기고 반기며 요양살이 하고 갔을 듯 싶다.
여기에 유배의 나날을 함께 해준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혜장선사' 라 한다.
혜장선사과 정약용이 사귄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정약용과 혜장 선사는 1805년 봄에 처음 만나서 1811년 가을 혜장선사가 죽을 때까지 6년간을 친교 한 사이이다.
1801년 겨울, 신유사옥 때 천주학쟁이로 몰려 형 정약종이 사형당하고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다행히 사형만은 면하여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귀양을 오게 된다. 그런 정약용에게 잠자리를 제공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 동문 밖 주막집 한 노파가 그에게 협실 한 칸을 주어 기거 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5년이 되는 해 1805년 봄 바깥출입이 상당히 자유로워져서 다산은 한 노인과 함께 경치 구경을 하면서 백련사를 들르게 된다. 거기에는 30세의 젊은 나이에 대흥사 제12대 대강사를 지낸 34살의 혜장선사가 주지로 있었다. 다산보다 10살 아래인 그는 다산을 알아보지 못하고 한나절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산은 같이 동행한 노인과 함께 한 암자에서 하룻밤을 자려고 길을 가는 데 , 이상한 낌새를 느낀 혜장이 다산을 알아보고 찾아와서 자기 거처로 모시고 가서 같이 잠을 잔 것이다.
다산이 선승인 혜장선사에게 주역을 물을 만큼 혜장선사는 불교뿐만이 아니라 주역에까지 깊은 학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혜정선사는 불승이면서 염불을 멀리하고, 술과 주역등에 심취하다, 불가에서 배척당한 이단승이였다. 40세에 술병으로 요절하였다고 한다.
주역의 대가는 대답하였을 지 모르지만, '곤초육수'를 물은 다산이나, 다산이 물어 볼 정도의 상대인 혜정선사는 각자의 전공 분야인 유교와 불교의 영역을 벗어나서 상대방 영역에 까지 깊은 학식을 갖고 있었다. 다산은 몰라서 물었고 혜장은 다산의 날카로운 질문에 답을 못했다고 한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나 할까? 이로 인해 두사람은 더욱 사귐이 깊졌다한다.
다산은 이슥한 밤이 되면 만덕산 자락에 자리한 백련사 혜장을 만나러 산길을 더듬어갔다. 혜장은 언제나 차와 따뜻한 마음으로 다산을 맞았다. 두 사람은 사상과 종교가 판이하게 달랐지만 진심 어린 마음으로 서로를 보듬었다고 한다.
다산이 혜장을 만나러 가는 길은 만덕산 중턱에 걸쳐 있다. 작은 고개 두 개를 넘어가면 노약자도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편한 오솔길이다. 활엽수와 침엽수, 동백나무가 어울린 길은 아늑하면서 깊은 숲의 향기를 전해준다. 이 길을 따라 거닐다 보면 시대를 고뇌하던 다산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다산초당을 벗어나면 보성땅이다. 구비구비 아름드리 삼목(衫木?)의 가로수 길이 끝없이 달렸다.
<보성 삼목(杉木)의 가로수>
그 유명한 보성의 가로수길이 끝나는 지점에, 보성녹차밭 지대가 있다. 청산도를 떠나온 지 한나절이 지났다. 배도 출출한 김에 녹차밭을 찾았다. 녹차밭에 음식점이 있기 때문이다.
<보성 대한다원 녹차밭에서>
엄청 찌는 더위속에 엄청난 규모의 녹차밭 이랑사이로 아주머니들, 잡초를 매고 있다. 가까이서 보니, 나이많은 60대쯤 되어 보이는 노인분들이다. 그런 풍경을 보면서, 저 넓은 녹차밭을 관리할려면, 엄청난 인력이 투입될 것인데, 국민으로 등록도 안된 하층민들의 노동력으로 마구 생산해낼 중국의 녹차에 비해, 녹차산업이라는 게 한국에서 경쟁력이 있을까? 우리는 얼마나 가치있고, 그 가치값을 하는 한국 녹차를 사먹게 되는 걸가?
<찌는 더위속에 더 넓은 녹차밭의 이랑사이에난 잡풀을 매는 아주머니들,
그 아래 건물이 녹차판매보다 수입이 좋을 듯 싶은 식당이다>
이 삼복더위에 녹차밭을 방문하는 차들이 많은 것을 보니, 녹차수입보다는 방문객의 입장료나 음식값이 더 큰 것은 아닌지?. 수령이 100년도 넘게 뵈는 삼목들의 우거진 그늘을 지나 녹차밭을 돌아나오는 관광코스에 사람들이 제법 붐빈다. 녹차밭 언저리에 있는 음식점에도 사람들이 줄을 섰다. '(주)대한 다원'의 수입구조가 자못 궁금하다
<녹차밭 방문에도 입장료가 있다>
보성의 녹차밭을 벗어나 동으로 동으로 장흥면을 거쳐 순천에 있는 송광사로 향했다. 완도에서부터 예까지 오는 동안, 가는 길 곳곳의 관광안내 표지판에, 서쪽으로, 두륜산,땅끝마을, 주변에 백련사, 윤선도고택, 영랑생가, 이름만들어도 알만한 관광지가 줄줄이 등장한다. 모두가 보고 싶은 곳이다. 이번에 다가볼 수는 없는 곳이다. 언젠가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구석구석 다녀볼 길이다.
강나루 건너서
밀 밭길을
구름에 달가듯이...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
박목월의 '나그네'란 시. 누구나 잘 안다.
삼백리!
산술적으로는 십리는 4km이니 삼백리라면 120km내외이다. 하지만, 자연과 풍광, 사람사는 맛과 멋을 즐기며 가는 길에 어찌 산술적 거리가 의미가 있겟는가 ? 더구나, 차에 몸을 싣고 한달음에 내달리며 가는 길을 삼백리길이라 한들 무슨 의미 있겠는가?
이곳 남도의 길들은 산술적 거리로만 따져 될 일이 아니다. 나그네 가는 길에는 구름에 달가듯 가는 길도 있을 것이고, 한잔 술에 취해 십리를 백리처럼가는 길도 있을 터이다. 꼬불꼬불이어지는 구석마다 천.지.인의 조화로운 풍광이 나그네발목을 잡는다. 차로 한달음에 내달릴 길도, 바삐 걸어가도 한 두시진 족할 거리도, 나그네 발길로는 하루도 좋고, 한달도 좋은 그런 거리, 남도의 길들이 그렇다.
목월이 남도라서 남도라 하고, 삼백리라서 삼백리라 하였겠는가? 남쪽하늘 밑에 사람사는 동네.... 나그네가, 그곳에 꾸불꾸불 밀밭사이로 하염없이 뻗어내린 길을, 바쁜 듯, 느리게, 느린듯 바쁘게 가는 풍광을 표현한 시어(詩語)아니겠는가?
실로 오래간만에 목월이 느꼈음직한 서정이 저절로 가슴에 가득차 오르는 길을 갔다. 비록 걸어서 먼길을 간 것은 아니지만, 대신에, 구비구비 칠백리길 넘게 구름에 달가듯이 차를 몰았다.
순천시에 들어서자, 순천시 나름대로 '남도 삼백리'라는 관광코스가 있다고 안내한다. 순천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역사 자원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면서 순천의 맛과 멋을 즐길 수 있도록 탐방로 남도 삼백리길 탐방로가 조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순천시는 오는 2014년까지 3개 노선 210km의 남도 삼백리길 10개 코스를 구성할 계획으로 제1노선인 남도 문화길은 순천만 갈대길, 읍성가는 길 등 5개 코스 95km, 제2노선인 한양 옛길은 과거 관문길, 이순신 백의 종군의 길 등 3개코스 54km, 제3노선인 생태 치유길은 천년불심의 길 등 2개코스 61km이라 한다.
순천시는 오는 2014년까지 3개 노선 210km의 남도 삼백리길 10개 코스를 구성할 계획으로 제1노선인 남도 문화길은 순천만 갈대길, 읍성가는 길 등 5개 코스 95km, 제2노선인 한양 옛길은 과거 관문길, 이순신 백의 종군의 길 등 3개코스 54km, 제3노선인 생태 치유길은 천년불심의 길 등 2개코스 61km이라 한다.
완도에서 아침부터 달려온 끝에 뙤악볕이 절정인 오후 3~4시에, 송광사에 도착했다. 순천에 와서 송광사를 지나칠 수 있나?
한국불교에는 불(佛)·법(法)·승(僧)의 세 가지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 있다. 이른바 .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 즉 三寶사찰이다. 그중 해인사는 법보, 통도사는 불보, 그리고 이곳 송광사는 고려 중기, 普照國師 지눌(知訥)이 당시 타락한 고려 불교를 바로잡아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한 이후, 조선 초기까지 16명의 국사를 배출했다고 해서 승보사찰이라고 불렸다, 얼마전에 입적한 법정스님이 한때, 수도하던 사찰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고려중기이후 조선초기까지,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 송광사 대웅전>
<아름다운 송광사 경내>
<송광사로 들어 가는 극락홍교와 누각 '청량각' >
<'청량각' 반대쪽에 붙어 있는 편액 '극락교' >
송광사입구에는 주차장과 음식점, 관광기념품 매점등이 즐비하여 시장터를 방불하게 한다. 여기와 송광사는 작은 하천을 경계로 구분되어 있다, 송광사로 들어갈려면, '청량각'이라는 팻말을 달고 있는 '극락홍교'라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청량각은 속세의 먼지를 털고 경내로 들어오라는 의미이라 한다.
이다리를 건널 때는 무심히 봤는 데, 나올 때는 '극락교' 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동일 한 다리위의 누각의 이쪽 저쪽에 서로 다른 간판을 붙여 났으니, 무슨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극락교, 청량각의 편액을 뒤로 하고 송광사경내를 벗어나 산채비빔밥으로 주린배를 달래고, 시원한 동동주로 더위를 식혔다.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혼자 마신 동동주의 알딸딸한 기분으로 드라이브라? 술기운이 좀 있다하여도, 이 더운 날, 이 대낮에 누가 뭐라 하겠어? 이곳을 벗어나면, 밤이 되기전에, 구례읍내까지 갈 수 있을나? 설마 그곳에는 모텔이나 여관에 빈방이 없지는 않겠지?
일단 가는 데까지 가 보자. 가드라도 섬진강변을 거슬러 올라갈 일이다. 곧게 뻗은 새로난 길보다는 굳이 구불구불 강변의 길을 더듬어 가보자. 섬진강변을 따라가면 화개장터가 나올 터이다. 화개장터는 거쳐가야지. 해가 떨어지기전에 섬진강변의 아름다운 남도의 풍취를 마음껏 즐겨보자.
......
돌이켜 생각해보면, 남도 칠백리길과 어울러지는 해상의 다도해 풍광은, '천.지.인의 조화로운 풍광으로 치면, 세상의 으뜸'이지 않겠는가? 청산도, 완도 거쳐 강진, 보성, 장흥, 순천을 지나 지리산 서쪽자락과 섬진강 강변을 따라 하동, 구례, 남원, 전주로 이어지는 길들, 강과 산세들이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고 적당하여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하나같이 명당이 아닌 곳이 없다. 무릉도원이 이보다 더하랴 싶은 생각이다.
강과 호수, 바다와 들, 숲과, 산과 구릉이 절묘하게 어울러진 남도의 길들을 다녀보니, 이전에 다녀본 중국의 上有天堂下有蘇杭 이라던 그 소항지역에 결코 못하지 않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소주의 태호나 여러호수들, 항주를 끼고 있는 서호(西湖)가 아무리 크고 아름답다 하나, 태평양을 안듯이 앞에 두고, 낮은 구릉의 산들이 끝없이 펼쳐져 잇는 해상공원, 다도해에 비하겠는가?
청나라 수도였던, 자금성만해도 그렇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늑대같은 여러 주변국들을 누르고 거느리기 위해, 호화로움, 장대함, 현란함등 인간이 달성할 수 있는 온갔 수단을 동원하여 황제의 위엄을 포장해야 했다. 지금은 시각이 많이 달라졌지만, 중국과 수교후 한동안, 자금성을 보고 왔다는 내노라하는 사람들 마저, 입에 담기 부끄러울 정도로 경복궁을 비하하는 것을 들었다. 과연 그런가? 나 또한 자금성을 몇번을 가봤다.
경복궁은 자주는 아니라도, 간혹 가볼 기회가 있다. 경복궁 건물자체는 예술적, 문화적 가치까지는 그렇다치더라도, 규모면에서는, 자금성에 비할바 못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천하의 자금성이라 하더라도, 경복궁이 주변산세와 어우러져 품어내는 기세에 결코 비할 아니다. 허허벌판에 인공으로 세운 자금성이 아무리 호화로움과 담대함을 자랑하지만, 천.지.인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경복궁의 기세에 비하겠는가? 전 유모문화재청장이 이런 견해를 밝힐 때, 나는 무릎을 쳤다. 어찌 내 견해와 그렇게 일치하는 지!
내가 세계여행을 많이는 안 다녀 봤지만, 어지간한 곳은 거진 다녀봤다. 하지만, 저 완도에서 이곳 순천까지, 그리고 이곳에서 섬진강을 따라 지리산 서쪽 자락 을 이루는 구례, 진안 유역 전체가 세계 어디내놔도 손색없을 관광지로서 기본을 갖춘 곳이라는 생각이 내내 머리에 떠나지 않는다.
하늘과 땅만의 세상풍경이라면, 이곳이 많이 부족할 지 모른다. 산과 바다풍광만으로 비한다면, 이보다 더 웅장하고 스펙타클한 풍광이 세상에 좀 많겠는가?.
<주작산 암릉에서 바라본 멀리 남해바다와 들판 >
하지만, 하늘과 땅과 사람, 이른바, 천.지.인이 이토록 잘 어우러지고, 사람이 사는 곳이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조화로운 세상이 어디에 있겠는가?
남도 칠백리!
그 곳을 겉핥기로 지나왔지만, 언젠가는 몇날 며칠 시간을 내어 다녀 볼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 속세를 등지고 이곳에 묻힐 결심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 만큼 천지인이 조화로운 동네, 조화로울 수 있는 동네라는 생각이 시간이 흐를 수록 더욱 가슴에 울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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