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여행견문록

남도여행기8

by 靑野(청야) 2012. 8. 1.
남도여행기
---------------------------
 
목차
 
● 늦둥이를 여행보내고...
새만금을 거쳐가다
김양아 ~보지가 걸렸다아~
완도로 가다
아! 청산도
남도 칠백리
화개장터에서
지리산을 가로질러
---------------------------
아침공기가 맑아서 그런지, 아니면, 은어회 뒤에 재첩국 한그릇 효과인지, 아침 동동주 한되 같은 반되에도  술기운이 없다.( 그라몬 은어회 한접시에 동동주 반되는 더하는 건데). 어제 내려왔던 섬진강변을 따라 올라가다,  오늘도  꼴리는대로, 핸들 돌리고 싶은데로 돌려보자. 해서, 화계장터를 뒤로 하고, 지리산을 오른쪽에 두고 섬진강변을 따라 차를 몰았다. 

 
화개장터에서 피아골을 돌아나와, 칠의사의묘, 마산면 냉천리에서 화엄사를 탐방하고, 다시 돌아나와 861번 도로를 따라 성삼재까지 차를 몰고 올라가서 성삼재에서 잠시 쉬고, 남원쪽으로 방향을 틀어, 달궁삼거리, 정령치, 선유계곡, 구룡계곡을 거쳐, 광한루원을 둘렀다가,남원IC를 통해 순천-원주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前池後岡은 發福之地(전지후강은 발복지지)  앞에 맑은 못이 있고 뒷쪽이 작은 산등성이면 복받을 땅이고,  錦湖長江은 君子之地 (금호장강은 군자지지) 맑고 넓은 호수이거나 넓고 긴 강을 끼고 있으면 군자가 살 곳이다. 背山臨水는 健康長壽 (배산임수는 건강장수),앞에는 냇물이 흐르고 뒤에는 산을 등지고 있는 곳이면, 건강하고 장수하는 곳이며, 前底後高는 出世英雄 (전저후고는 출세영웅) 앞이 낮아 멀리보이고, 뒷산이 높으면 영웅이 태어날 곳이고, 前窄後寬은 富貴如山 (전착후관은 부귀여산) 앞이 낮으면서 끌어안는 형상에 뒷산이 넉넉하면 부귀영화를 누릴  땅] 이라한다.
 
한마디로 명당의 조건들이다.
 
하지만, 풍수지리 전문가는 아니라해도, 이 나이쯤되면, 풍수수지리에 나름대로 일가견들이 있게 마련이다. 즉, 명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나름대로 깨달음이다.  산전수전 다겪은 년배가 되어 산수야해(山水野海)를 다니다보면,  뭔가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있는 동네가 있다. 
 
[시야가 좁지도 넓지도 않며, 적당하게 안정감을 주는 땅, 멀리보는 산세(山勢)가 강하지도 약하지도, 가깝지도 멀지도 않는 그런 느낌을 안겨주는 곳, 청명한 공기와 맑은 물이  끊임없이 공급될 수 있는 뒷배경이 있는 땅, 거기다 조용하고, 밝은 동네, 한마디로, 마음에 평온함을 안겨주고, 여기서 집을 짓고 살았으면 하는 그런 동네],  
 
사람마다 인생관 취향이 틀리듯이,동네를 보는 눈도 틀릴 수있지만, 대부분, 이런 느낌이 드는  땅, 그곳이 명당아니겠는 가? 내가 생각하는 명당이란 이런곳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섬진강자락을 따라 구비구비 돌아가는 지리산자락은, '산색이 아름답고 물이 맑다' 는 山紫水明(산자수명),  '앞에는 냇물이 흐르고 뒤에는 산을 등지고 있는 곳'이라는 背山臨水(배산임수)는 기본이고, '물이 구곡 수로로 감아돌며, 앞쪽으로 경사가 완만하여 유정(有情)고 뒤로는 무정(無情) 한 가파르고 높은 산의 풍치'라는 山河有情(산하유정)한 지세가 이어진다. 완도에서부터 이어져온, 산자수명,  배산임수, 산하유정한 지리가 특히나 이동네에서 더욱 다이나믹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감탄이 절로난다. 명당이 아닌 곳이 없다.
 
화계장터에서 화개천을 따라 올라가면 불일폭포를 지나 쌍계사가 나오는 데, 이번에는 이코스는 Skip 해야겠다. 길이 다른 것이다. 이제는 이리저리 쏘아다니는 것도 점점 피곤해진다. 이번 여행에는 지리산 왼쪽자락으로 흐르는 섬진강 본류를 따라 올라가자. 그리가다보면, 피아골 입구가 나온다. 피아골은 둘러야지!.
 
지리산 10경의 하나로  ‘피아골 단풍’ 이 유명하단다.  그 자태와 색깔이 곱고 진해 사람들은 일명 ‘핏빛 단풍’이라 부른다. 지금은 한 여름이지만, 가을이면, 단풍구경으로 인근도로가 북새통으로 막힌다고 한다.
 
피아골계곡에 연곡사라는 사찰이 있고, 거기서 2㎞정도 오르면 직전(稷田)마을이 나온다. 이는 오곡 중의 하나인 식용 피(기장)를 가꾸는 밭, 즉 '피밭이 있던 마을' 이란 뜻으로 풀이된다. 옛날부터 이곳에서 오곡 중 하나인 피를 많이 재배했다는 의미가 바로 피아골의 어원이라는 것이다. 처음에 피밭곡(稷田谷)이던 것이 피아골로 진화된 것으로 여겨진다는 데, 어떨지?
 

<피아골입구>
 
 
 
<피아골계곡>
 
피아골은 가까이는  6·25전쟁 당시 빨치산과 군인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격전지라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피아골의 단풍이 다른 곳보다 더 붉은 것은 그들이 흘린 피 때문이라고도 한다. 

6.25전에는  여수,순천에 주둔하고 있는 군부대가 명령을 불복한 사건으로 정부군의 토벌을 피해 반란군이 여기로 도주하여 활동하던 곳이기도 하단다. 
 
개인적으로는, 국교수립직전에, 좌익활동으로  우리집안을 오랫동안 연좌제 족쇄에서 고통받게한  우리 삼촌이 이곳으로 숨어들어 토벌대에 맞서 싸우다 돌아가신 것으로 알려진  곳이이다. 때문에, 그사람의 형님(=우리아버지)가 국경수비대와 경찰에 끌려가서, ' 니동생 어디있는 지 불어라' 하며 당시, 얼마나 모진 고문을  부지기수로 당하셨기에,
 
그 이후,  국가가 수립되어 민주화가 되고 민주화 열풍이 사회를 뒤흔들던 그 시절인데도, 내가 군댈 갈 나이가 되었을 때,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더라도 군대에는 가지마라. 군과 경찰은 몹쓸(?) 넘들이다' 하고 군과 경찰에 깊은 적개심을 드러낸 적이 있다.
 
어쨌거나 피아골을  배경에는 지리산 전체가 자리하고 있으니, 계곡이 깊고, 배경의 산세들이 웅장하기 그지없다. 내눈엔, 풍수지리의 前底後高는 出世英雄 (전저후고는 출세영웅)의 전형적인 곳으로 여겨지는 데, 얼마나 많은 영웅들이 태어났는 지 알수는 없지만, 역사적으로, 당대에 한가닥한다는 시대의 영웅들이나 반골의 인물들이 그래서 여기에서 그렇게  득실거렸던 것일까?
 
피아골을 지나면 마산면 냉천리 쪽으로 가다보면, '칠의사(7義士)의 묘'가 나온다.
 
정유재란 당시 1,000여 명의 의병과 150 여 명의 화엄사 승병(僧兵)들이 구례 석주관에 석성을 쌓고 방어선을 구축하여 하동에서 섬진강을 거슬러 오는 적의 대군을 맞아 결사항전 끝에 시산혈해를 이루며 옥쇄항전의 역사를 피로 새겼고, 훗날 사람들은 이 의로운 충혼의 넋을 기리며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이 강을 일러 “혈류성천(血流成川) 위벽위적(爲碧爲赤)즉,  피가 흘러 강이 되니 푸른 물이 붉게 물들었다.”는 혈천(血川)이라 하였다고 한다 

석주관 칠의사 묘역 “정유전망의병추념비(丁酉戰亡義兵追念碑)” 은 순조 4년에 나라에서 7의사에게 각각 관직을 추증하였고, 1946년에는 지방 인사들이 칠의각을 지어서 기념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칠의사의 묘>
 
861번 도로를 따라 구례쪽으로 가다보면 화엄사로 가는 길이 나온다. 지리산자락과 구례에 왔으니, 화엄사는 가봐야지?  화엄사로 올라가는 길에는 제법 옹기종기 큰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다.  이때는 바야흐로 점심나절이다.  엄청난 폭염이 차창밖을 짓누른다. 
 
이때부터, 섬진강 지류를 벗어났지만, 꼬불꼴불 화엄사로 들어오면서,  주변산세 감상에 여념이 없다. 딱히 이곳만이 아닌 인근의 지세들이 연이여, 산세에 낮은 구릉들이 연이여 있어, 前窄後寬은 富貴如山 (전착후관은 부귀여산), 앞이 낮으면서 끌어안는 형상이고,  뒷산이 넉넉하면 부귀영화를 누릴 땅, 前池後岡)은 發福之地(전지후강은 발복지지), 앞에 맑은 못이 있고 뒷쪽이 작은 산등성이면 복받을 땅이 라는데, 그런 땅이 있다면, 이곳의 땅이 그런 땅이지 싶다. 이곳에서 얼마나 부귀영화를 누리고, 얼마나 복을 받은 사람들이 배출되었는지 알 수없지만. 
 
내겐, 화엄사로 오르내리는 도로변을 유심히 살핀 또다른, 이유가 따로 있다. 여기 혹시 시골다방없나? 아니면, 시골이용원은 없나? 앞서도 이야기 했지만, 완도, 청산도, 화개장터에서도 그런 다방이나 이용원이 없나하고,  저녁전후로 이곳저곳 들러 봤었다
 
이렇게 유정(有情)한 곳이라면, 그런 분위기에 걸맞는  다방이 있으리라. 다방이 있으면, 아무리 상경이 늦어지드라도 옛날 다방에서 아가씨들과 농담(?) 따먹기하던 그 기분한번 살려보자,  다방이라면, 다방이라는 이름을 쓴다면, 당연히 김양이나 이양이 있을 터이다. 한 명만이 있다면, 김양이겠지? 그리고, 그 옛날 삼거리에 있던 , 비누거품을 일으켜 턱과 입술주변에 잔뜩 뭍어 수염을 밀어내는 그런 이용원은 없나? 그런 이용원이 있다면, 지친 심신을 내맡기고 싶은 데.
 
흐흐흐~,  있구나!. 기대에 벗어나지 않게!!, 이 시골구석에, 다방과 이용원이 있다. 날도 지독히 덥다. 화엄사를 둘러보고 올 때, 여기서 좀 노닥거리다 가자! 애써 호기심을 누르고, 화엄사로 향했다.
 
화엄사는 서기544년 백제성왕때, 인도승려 연기대사가 세웠다는 한국불교 화엄종의 총본산이라고 한다.  법화종이 불경중  법화경을 대표경전으로 하는 종파이듯이,  화엄종은 화엄경을 대표경전으로 하는 한국 불교종파중 하나이다. 화엄종의 시조는  신라 의상대사로 알려져 있다.
 
의상대사는 당나라시대 종남산 지상사에서 지엄의 문하로 있다가 당의 침공정보를 가지고, 귀국하여 당의 침공을 알리고, 왕명으로 676년에 부석사를 창건하여 화엄종을 열었다고 전한다. 그 뒤 전국 화엄종을 퍼뜨렸다는 데, 화엄종의 총본산이라 알려진 구례화엄사가, 서기 544년에 세웠다면, 이는 의상이 화엄종을 열기전의 일로, 아마도 여기에는 곡절이 있지 싶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의상국사(義湘國師)가 왕명을 받아 석판(石板)에 화엄경 80권을 새겨 구례 화엄사에 보관하고 있다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한다. 이로 유추해보건데, 초기 이름은 화엄사였더라도,  정식으로 화엄종의 사찰로 알려지게 된 것은 의상국사가 이 행위를 한 이후이지 싶다는 것이 비전문가인 나의 짐작이다.
 
화엄사에는 아직도 남아 전하는 부속건물들은 모두 신라 시대에 속하여, 거의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한다
 
한국불교라 하면, 조계종에 익숙해있는 우리들에게 화엄종은 좀 생소한 종파이다.  앞서도 이야기 했지만, 불교에는 진각종, 태고종, 천태종, 법상종,  화엄종, 법화종, 조계종 등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종파들이 문을 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敎)의 중시냐 선(禪)의 중시냐, 어느경전을 대표경전으로 하느냐 뭐 그런 차이로 생겨난 것이 종파 아닌가 한다.
 
고려前期에 보조국사 의천이 이론과 실천의 양면을 강조한 교관겸수(敎觀兼修)를 기치로 천태종을 창시하였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계종은 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고려후기 신종때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순천송광사에서 禪定의 상태인 定과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지혜인 혜(慧)를 함께 닦아야 한다고 하는 '정혜쌍수(定慧雙修)'와,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딲음을 지속하여야 한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사상을  당시 세속에 물들며 타락했던  불교를 혁신하기 위한 결사운동으로 시작하여 조계종을 창시하였다고 한다. 천태종은 교종(校宗)의 입장에서 선종(禪宗)을 통합하려 하였고, 조계종은 선종을 바탕으로 교종을 통합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주) 교종은 경전 즉 언어와 문자위주로 수행하는 불교종파, 선종은 참선을 통해 수행하는 종파 
 
돈오점수는  현대한국불교의 대선사로 알려진 성철스님이 선문정로에서,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창함으로써 논쟁이 이어져온 그 돈오점수를 말한다. 그 뿌리는 고려후기 불교 혁신화두로 지눌선사가 주창하고 조계종을 창시한 것인데, 수백년이 흐른 후 종파의 시조의 사상에 감히 시비(?)를 건 성철스님도,  조계종의 시조인 지눌이, 천태종의 시조인 의천국사의 사상에 시비를 건 것처럼?   옳고 그름을 떠나서, 종교를 떠나, 시대를 뛰어넘는 혁신적 사상가라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조계란 명칭의 유래는 중국에서 선불교를 중흥시킨  육조 혜능(六祖慧能)이 머물면서 제자를 가르킨 곳이 조계산인데, 여기서 유래한다고  전한다. 수많은 신라, 고려의 승려들이 육조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불교혁신 결사운동으로, 당시로는, 요샛말로 엄청 진보적 불교를  주창하고, 창시한 종파의 이름을 조계종으로 한 것이다..   
 
六祖라는 것은 달마가 중국불교를 개조한 이래 6번째 법맥을 이어받았다는 것이고, 혜능이 설한 말씀을 기록한 것을 '육조단경(六祖壇經)' 이라는데, 8만대장경중에서 '석가이외의 인물이 설한 말씀이 경전의 반열에 오른 것' 은 이것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러니, 육조단경은 화엄경,열반경의 반열에 오른 것으로 평가 받는 다는 것이다.
 
이번에 가보지는 않았다만 화개천상류로 올라가면, 하동 쌍계사가 나오는 데, 쌍계사에는 육조혜능의 법신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어쨋튼, 이곳 순천, 하동, 구례를 끼고 도는 섬진강의  유장한 흐름과 , 백운산 지리산의 유정하고 무정한 산세들이 어우려져,  계곡마다, 들마다  山紫水明, 背山臨水, 錦湖長江, 前底後高,  前窄後寬, 山河有情, 명당의 조건들이 다 갗추어져 있으니, 이렇듯 고래로 부터, 화엄종, 조계종의 본산들이 여기에 둥지를 튼 이유를 알 듯도하다.  
 
<화엄사입구 불이문, 진리는 둘이 아니다,
'진리는 하나'라는 깨달음의 길로 들어선다는 불이문.
편액은 선조의 4째부인의 아들인 왕자 의창군이 썼다함>
 
 
<화엄사전경>
 
화엄사로부터 빠져나와 도로 861번을 타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쪽 마산면 냉천리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내려오는 길에 올라가면서 확인하였던 다방과 시골풍의 이용실을 둘러봤다. 다방이름은 '다방', 이용원이름은 동네답지 않게 '서울이용원'이다. 마치 서울서 오는 날 반기는 듯하다 
 
흠흠, 동네도 한적하고, 조용하다. 시골다방에서 노닥거릴 분위기로는 대길(大吉)이다. 기대를 잔뜩 품고, 다방뒷뜰에, 차를 세우고는 호호탕탕 다방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헌데, 헉!, 세상에!,
 
기대했던 다방 모습은 간데없다, 비록 화장을 떡칠을 했을 지라도 예쁘장하고 상냥한 김양의 모습은 어디가고...
 
여기가 다방이 아니라, 노인정인가보다. 그것도 할머니만 노니는 노인정. 다방이라고 들어서니, 푸른 소파옆에 붙어있는 방에 누워있던, 할머니 두분이 동시에  부시시 일어난다.
 
"어서오세요!" 한 할머니는 옷깃을 매만지고, 한 할머니는 손님을 맏는둥 마는둥 주방(?)로 간다.
 
'(아차, 여긴 완도하고도 또 다르네. 여긴, 거기보다 한 20~30년은 더 뒤쳐진 분위기다. 아니 20~30년 앞선 분위긴가? 왠 할머니 레지?)'
 
아마도, 젊은이는 도회로 가고 손님이라고는 시골 초로들만 있나보다. 그것도 간혹 들러는. 그런 줄도 모르고 음횽(?)한 속셈으로 불쑥 들어간 다방, 얼떨결에 자리에 앉아 할머니 레지가 따라주는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할머니'하기에는 그렇고, '아지매'하기에는 택도 없고,  '아가씨'라고 부르기는 더욱 말이 안된다
 
"저기요, 블랙으로 해주세요"  얼떨결에, 어정쩡 '저기요' 가 튀어나온다. (순발력 하나는 타고났제?)
 
할머니가 손으로 이것저것 혼합해오는 커피를 목구멍으로 넘길 자신이 없다. 해서 블랙을 주문 한 것이다. 혹시나 할머니 레지, 주제도 잊고 내 옆이나 앞에 앉으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는 데, 블랙커피를 탁자에 내려놓고, 주제를 아시는지, 그냥 가려한다. 하지만, 그 순간 여기까지 온 김에 성은 알고 가야지, 치기가 발동한다.
 
"저기요, 성씨가 뭐에요" 
 
" 나요??, 김이요" 할머니 레지가 뒤돌아보며, 한 껏 상냥할려는 말투와 표정으로 '나는 김...'이라한다.
 
헉!, 흐~윽!, 김 할머니란다. 차마 할머니도, '나는 김양'이라 뱉지 못한다. 아마도 30~40년 전까지는  '김양, 이었으리라!, '언젠가는 나는 김양이예요' 했을 터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김'이라 한다. 아마도 동네의 비슷한 연배의 할아버지 단골은 '김양'이라 불러 줄지 모르겠다. 
  
조선팔도 김씨들이여, 대답해보거래이, 우째, 古今을 막론하고, 조선땅 다방마다 레지 성씨는 대부분 '김'이냐?  여기 구례화엄사에서 내려오는 이 동네 다방의 할머니 레지도 (쥔인지 모르지만) '김'이라한다. 이전에는 조선땅에 놀던 옛 풍류인들은 '황(진이)' 이나 '성(춘향)', '계(월향)' 씨였지 싶은 데, 그것이 예명인지, 가성(假姓)인지, 아니면, 내가 겪은 김양들이 가성들을 썼는지, 알길이 없다만. 아마도, 옛날에는 대성(大姓)가문에서, 압력을 가하여, 이런 풍류인들이 본명을 숨기고 가성을 썻을 확율이 높을 것이다. 예명을 지어도, 대성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요새도 싸이가 김모씨라는 데, 그런 풍류도가 이어온 것인지 어떤지?
 
넘어가지 않는 블랙커피를 겨우 삼키고, 부랴부랴 다방을 빠져나와 이번에는 바로 옆에 있는 '이용원을 향했다. 이용원도 당연히 의심스럽다. 하지만, 일단 겪어 봐야지. 확인해봐야지. 그 전에 멀리 입구 사진이나 찍어두자, 그러고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미용실을 둘러보는데, 할아버지 두명과 할머니 한명이 눈에 뛴다.손님인가?  이발사는 어디있나? 면도사는 어디있나? 상황파악이 언듯 안된다. 둘레둘레하는 데,
 
"아까 전화하고 오신분이예요"  할머니가 묻는다. 아마도 어떤 단골 할아버지(?)가 전화로 예약을 했나보다.
 
으악!!~~ 여기도 할머니?. 아마도 면도사이리라. 그러면, 할아버지는 이발사?  또 한 할아버지는 손님? 순식간에 상황이 파악된다.  흐흐흐 역시나.....동시에 기겁을 하고
 
'아뇨!...."  허겁지겁 문을 닫고 돌아섰다. 등어리에 식은 땀이 흐른다. 삼복더위 땜에 흐르는 땀이 아니다.
 
"휴!, 다시는 시골 다방이나 시골 이용원을 찾지 말자!' 다짐을 하고  그길로, 861도로로 다시  찾아들어 악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오늘 중으로 귀경해야 한다.  불현듯, 서울 야경이, 서울 분위기가  그리워진다.
 
    <샘다방 >
<샘다방내부, 차마 레지 할머니를 찍진 못햇다.>
 
<서울이용원, 들어가기전에 찍어둔 전경이다.
돌아나올 때는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 곳이다>
  
화엄사를 빠져나와 다시 냉천리로 해서, 여기부터는 섬진강과 이별하여  861번 도로을 따라 첩첩산길 올라가면 성삼재가 나온다. 노고단을 갈려하면 여기서 하차하여 도보로 가야한다. 성삼재에서는 노고단이 코앞(?)에 바라뵌다. 이미 성삼재 자체가 해발 1,000M급이다. 노고단이 1,500M급이니 여기서는 6~700M정도 다시말하면, 도봉산 오봉정도의 등산길이면 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등산준비는 아니했으니, 여기서, 발길을 돌리자. 
 
<성삼재 휴계실과 주차장>
 
<노고단 올라가는 입구>
 
<성삼재에서 남원쪽으로 바라본 풍경>
 
여기서 최단거리로 서울로 갈려면, 남원IC를 거쳐야 한다. 남원IC로 갈려면, 성삼재에서 다시 구례쪽으로 내려와서 가던지, 성삼재를 넘어 선유계곡, 구룡계곡을 지나치는 아슬아슬한 곡예길을 따라 남원으로 빠져나가는 길이 있다. 어짜피 서울로 가는 길이니, 성삼재를 넘어 '지리산계곡을 가로질러' 가보자.  달려본 결과지만, 승용차길이 구불구불 남원까지 연결되어 있다. 정령치, 선유계곡, 구룡계곡을 남원으로 빠져나오는 코스다.  
 
보통, 지리산 여행은, 전라도쪽으로는 남원에서ㅡ 구룡계곡입구- 육모정-구룡계곡-선유계곡-정령치-달궁삼거리-성삼재-노고단으로 이어지거나 정령치에서 뱀사골방향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나는 성삼재에서 오다보니, 정령휴계소-선유계곡-구룡계곡...순으로, 보통 여행길의 역순으로 차를 몰았다.
 
정령치는 서산대사 황령암기( 黃嶺庵記)에 의하면,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鄭)씨 성을 가진 장군을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는 데 이로 인해 정령치(鄭嶺峙)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 곳이다. 이어서,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고 놀앗다는 선유폭포, 구룡폭포로 이어지는 끝이 없을 것 같은 꼬불길을 차로 기어 가야했다.
 
<정령치에서 바라본 남원방향 >
<선유폭포를 품고 있을 선유계곡>
 <선유폭포(펌).
계곡길이 험하고 좁아 차를 세우지 못한다. 계곡안이 궁긍하기 이를 데 없어...>
 
구룡계곡이라 이름붙여진 계곡으로 난 찻길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꼬불꼬불의 정도도 심하다. 전설에 의하면,  초파일날, 아홉마리 룡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홉군데 폭포에서 놀다가 승천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제1.2곡은 암벽에 이삼십만이 썼다는 용호석문 이란 글이 음각되어 있는 절벽 아래 흰바위로 둘러싸인 못이 불영추라 한다. 제3곡은 육모정, 제4곡은 학서암, 제5곡 바위가 물에닳아 반들거리고 중이 독경하는 모습이라하여 서암이라 일명 구시소, 제5곡은 유선대. 제6곡은 자주대. 제7곡은 비폭등, 제8곡은 석문추라하며 경천벽 제9곡은 교룡담. 9 마리룡이 살다가 승천하였다하여 구룡폭포라고 한다고 한다.
 
찻길아래로는 계곡이요, 위로는 계곡을 이르눈 경사면 산의 등짝과 등성이다. 구룡계곡의 찻길을 꺼꾸로 내려오니, 아마도 저아래 계곡은 구비구비 돌때마다, 핸들을 꺾을 때마다 제9곡부터 제1곡까지 구룡의 명소들이 지나칠 것이다. 걸어서 확인을 못하니 속으로 상상만 할 뿐이다.
 
<구룡의 절경을 품고 있을 구룡계곡>
 
구룡의 제3곡은 육모정이다. 육모정은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 구룡계곡인 옥룡추에 세워진 정자로 그 옆에는 춘향묘소가 있다. 육모정에서 부터 주천면 고기리 까지 이어진 계곡이 구룡계곡인 것이다.
 
춘향묘소는 도로 공사를 하다가  " 성옥녀 지묘 " 가 새겨진 지석 (誌石)이 발견하여 이 지역을 정비하고 단장하여 오늘날과 같은 춘향묘 규모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 날의 춘향묘는 춘향이 소설속에 나오는 가상 인물이기 때문에, 이것이 실제 묘소는 아닌 식적인 묘 인 것을, 춘향전에 나오는 인물에 대한 의인화 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종의 가묘(假墓)라는 해설인데, 모시는 모습이 정중하기 이를데없다. 
<춘향의 묘>
 
<구룡계곡입구>
 
성삼재에서 꺼꾸로 거쳐 구룡계곡을 빠져나오면, 구룡계곡 입구라는 표지석이 나타난다. 이제야, 지리산을 가로 지르는 여러길 중에 861번도로 '지리산을 가로질러' 온 것이다. 이제 남원시내로 들어서는 것이다.
 
남원은 대체로 자주 거쳐가는 길이다.  광한루를 거쳐, 정문옆에 있는 '본가추어탕' 에서 한참늦은 점심으로, 전라도 남원 추어탕의 진수(?)를 경험하고  주변를 기웃거렸다.
 
춘향은 소설속의 인물이라는데, 오면서 본 춘향의 묘하며, 춘향전이라는 소설, 소설의 무대도 그렇고, 소설속의 무대들을 복원(?) 하여 광한루원(언젠가 광한루가 광한루원으로 바꿨다)으로 관광지화 한 것을 보면,  이곳 사람들의 풍류와 해학이 얼마나 끈끈하고, 면면히 이어오는 것인지 짐작이 된다. 
 <광한루원>
 
<본가 추어탕, 광한루원 옆, 음식골목 어귀에 있다.
지리산을 넘어오며 허기진 배를 채운 곳이다>
 
광한루원과 주변을 둘러보고, 구남원역부근을 둘러 남원IC로 나왔다. 남원역은 8년 전에 외곽으로 이전하고,  옛남원역 부근은 옛정취를 물씬 풍기며 남아있다. 30여년전의 서울의 청량리나 공릉동에서 보아왔던 그런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여인숙, 다방, 무슨 무슨 집(작부집)들이 즐비하다. 아마도 옛 역전부근을 보전한 때문인지, 개발이 지연되어 그런 것인지?.
<구 남원역전 주변동네>
 
흠흠, 이번에는 그냥 지나치자. 꼬불꼬불 선유계곡, 구룡계곡길을 운전해온다고 체력이 바닥이 난 것인지, 구례 화엄사 아랫동네 다방과 이용원을 보고  겪은 충격(?)이 너무 커서 그런지, 호기심도 많이 죽었다. 슬슬 황혼녁이 가까워오니, 갈길이 바쁘다는 핑계가 마음속에 일어난다.  다음을 기약하자. 다음에는 경상도 쪽으로 지리산 자락을 한번 다녀 보자.  그 길이 1023번, 60번도로다. 60번, 1023번, 861번 도로면, 지리산을 거진 둘러보는 길이 될 것이다. 지리산 허리를 둘러보는 둘레길도 있다. 굳이 고생고생 산길를 걸어서 등산하는 길은 부지기수....  
 
서울에 도착하니 밤 9시. 휘향찬란한 도회의 야경이 그리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머리가 다시 치근거린다. 술독이 다시 오르나? 눈도 다시 침침해진다. 
 
며칠 서울을 벗어나 싸돌아 다닌  시골동네, 山紫水明  背山臨水, 前底後高한 완도, 청산도와 앞바다, 남도 칠백리길의 구석구석의 풍광들 , 錦湖長江하고,  山河有情지리산 자락, 섬진강변이 어제, 그제의 일인데도 눈에 삼삼하며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차를 되돌려 가고 싶어진다. 
 
조선땅에는 대부분 이런 풍수를 가진 곳이 많다. 그래서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 하지 않는가? 하지만, 요즈음 그런 금수강산이 많이도 망가지고 있다. 더러운(?) 인간들의 탐욕스런 발길 때문이다 . 금수강산을 품고 있는 대기도 옛날같지 않다. 반디불이가 사라지고, 메뚜기 잠자리가 사라진 곳이 많다. 문명의 악취, 대기오염때문이다. 그속에서 인간들이 바글거린다. 탐욕의 짓거리는 더욱 기성을 부린다. 그러니, 조선땅 어디를 가나 빼곰하다 하면, 아파트에 도로다 골프장이나, 유흥지에, 펜션이다 모텔까지 난개발이 일 쑤인데, 내가 다녀본 이 동네들은 수려한 풍광에 비해 그나마, 인간의 발길이 덜 닿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얼마나 가겠는가? 돈 맛을 드리면 시골인심이 더욱 급속히 망가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여기도 이곳저곳 펜션이다, 전원주택지개발이다, 급매물, 분양이라는 생소하지 않은 단어들이 눈에 자주 띈다.
 
'인간의 탐욕을 저지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다' 라는 선각자의 탄식이 새삼 되새겨진다. . 인간이 스스로는 그럴 능력이 없는 것인지, 탐욕이 너무 크기 때문인 것인지....이대로는 아마도 자연이 '자연재앙'으로 인간이 저지르는 탐욕의 죄를 다스리는 지 모르겠다
 
이번 여름휴가는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  한 해를 다보낸 기분이다.  내가 여행 떠나기 전에, 서토로  멀리 여행을 떠나 보낸 늦둥이 녀석은 재미나게 보내고 있을지? 나는 여행내내 늦둥이 생각이 한 시도 내 뇌리를 떠난 지 없지만, 그녀석은 이 아빠를  생각을 한 순간이라도 한 적이 있을지?
 
 
'끄엍'
 
 
 * 배경음악:  마스네의 타이스의 명상곡 (Massenet, Meditation from Thais) , 장영주 연주
 
 

'여행견문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진목록2  (0) 2012.08.01
사진목록1  (0) 2012.08.01
남도여행기7  (0) 2012.08.01
남도여행기6  (0) 2012.08.01
남도여행기5  (0) 2012.08.0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