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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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새만금을 거쳐가다
● 완도로 가는 길
● 김양아 ~보지가 걸렸다아~
● 완도에서
● 아! 청산도
● 남도 삼백리
● 화개장터에서
● 지리산을 가로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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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개장터에서
송광사입구에서 더위에 지친 몸을 오후간식으로, 도토리 묵과, 동동주 한되로 떼우고, 이번에는 섬진강변을 따라 구례로 향했다. 굳이 굽이굽이 옛길로 차 바퀴닫는대로 차를 몰다보니, 낮술이 과해서 그런지, 초행길이라 그런지, 더러 실수도 있었지만, 뉘엇뉘엇 해그름에, 화개장터부근 도착한 것이다. 태양은 산을 넘어가고 주황색 꼬리를 맞은 편 산허리에 걸쳐두고 있다. 산골임을 감안하드라도, 한여름의 황혼녁이니 제법시간이 흘렀을 터이다. 굳이 시간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알고 싶은 생각도 없다. 적당한 공터에 차를 대고, 흘러가는 섬진강물과 화개천이 만나는 화개장터 주변을 서성거리니, 해는 저물고....
섬진강과 화개천 그리고 구 화개교와 이어진 도로로 둘러싸인 삼각지대가 화개장터이다. 화개장터 왼쪽 끝 부근에는 남도대교가 있어, 하동과 건너편의 구례를 이어준다.
남도대교는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탑리와 전라남도 구례군 간전면 운천리 를 연결하는 길이 358.8m, 폭 13.5m의 왕복 2차선 다리이다. 남도대교 동쪽이 하동군이고, 그 맞은 편 서쪽이 구례군이다. 이 구례군에서 좌측에는 중대리계곡을 사이에 두고, 다시 구례군과 광양군이 나누어진다.
<중대리계곡쪽에서 바라본 남도대교와 오른쪽 건물이 화개장터 부근>
<화계장터쪽에서 바라본 남도대교,
좌측으로 중대리계곡과 구례-광양을 경계짓는 다리가 보인다.>
하동군쪽에도 쌍계계곡으로부터 이어져온 화개천이 섬진강쪽으로 흘러 내려온다. 그 화개천을 건너다니는 다리가 2개 있다. 신 화개교와 구 화개교이다. 섬진강변쪽으로 섬진강과 평행하게 화개천을 이어주는 왕복4차선 차도의 다리(신화개교)와 조금 윗쪽에는 소로로 화개천을 이어주는 다리(구화개교)가 그것이다
<화개천을 가로지르는 화개교. 좌측이 섬진강,
우측이 쌍계계곡에서 흘러내리는 화개천이다>
<화개장터 안내도>
그 동안, 전라도와 경상도와 경계라는 곳을 가 볼 기회가 있었나? 원래는 화개장터를 들러보고, 구례읍(?)으로 나와 일박을 할까 했었는데, 저녁도 저물었고, 화개장터의 풍경이 마음에 들어, 여기서 하루밤을 묵기로 하기로 했다. 이왕 하루밤을 묵기로 하였으니,여유롭다. 저녁을 먹기전에, 발품을 팔아 주변일대를 다녀보자. 섬진강변, 남도대교도 건너보고, 화개교, 화개천 언저리와 화개장터를 하염없이 돌아다녔다.
<화개장터입구>
<화개장터 안>
1997년부터 4년에 걸쳐, 화개장터를 복원하였다는 데, 옛날의 오리지널 화개장터가 그곳이였는지, 수년전에 복원한 화개장터가 왜 여기에 터를 잡았는지, 화개장터 유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화개장터 유래>
화개장터에는 주변의 물산들을 파는 시장이 개설되어 있다, 여느 장터처럼, 장터국밥등 술과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장터 가장자리를 삐삥둘러 여렀있다. 화개천을 건너편 하동쪽에도 숙박시설과 음식점이 위치한다.
목표집, 장터국밥집, 순천집.....다양한 음식점들이 널려있다. 국박, 재첩국, 은어회.....등이 주 메뉴들이다.
이 삼복더위에 관광객들이, 바다로 몰려갔는지, 동해안으로 피서를 갔는지, 여기로 오는 길목은 그닥 붐비는 것 같지는 않지만, 정작 이곳에는 좁은 동네에 비하면 이곳을 배회하는 객들이 상당히 많아 보인다. 나처럼 체류하는 객들이 많나보다.
그러니, 오랜 객지생활에서 느낀 경험으로 볼 때, 숙박을 할려면, 이정도면, 본능적으로 방을 예약해두어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우선 1박2일의 은지원과 김종민이 다녀갔다는 장터국밥집을 정하고, 음식점 쥔의 도움을 받아, 서둘러 방부터 챙겼다. 모텔에는 아니나 다를까 손님이 많아서, 1층 구석에 온돌방밖에 남은 게 없다한다. 이 마저 잡지 않으면, 술을 깨기를 기다려 늦은 밤에 운전대를 잡고 동네를 벗어나던지, 은어회와 술을 포기하고, 구례읍으로 잠자리를 찾아 나갈 뻔 했다.
<1박2일의 은지원과 김종민이 다녀갔다는 장터국밥집앞에서>
은어회!
뭘 먹을까? 여러 메뉴를 훑어보다, 눈이 번쩍 띄였다. 은어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깨끗한 물에 사는 고기다. 거제도 우리동네에는 은어들이 참으로 많았다. 지금은 삼성조선 때문에 매립지로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고현만에 연한 하천으로 은어떼들이 오르내렸다.
때독을 풀어, 그물로 은어를 잡던 기억, 동네 어른들이, 은어회를 막걸리와 더불어 즐기는 데, 옆에서 한조각 두조각 얻어먹던 기억이 생생한다.
때독은 표준말로는 때죽, 때죽나무라한다는 데, 꽃이 핀 모양이 은방울 꽃처럼 주렁주렁 열매처럼 피어나서 여무는 데, 이렇게 여물어, 주렁주렁 달린 노르스럼한 열매다발을 훑어 넓적한 돌위에서 으깨서 물에 흘러보내면, 어지간한 물고기들도 기절하는 일종의 독초였다. 정신(?)을 잃고, 물에 둥둥 떠는 놈들을 그물이나 양손바닥으로 건지는 것인데, 민물고기들을 기절시키는 자연산 독초열매였던 것이다.
그렇게 잡은 고기들을 매운탕을 해먹기도 하고, 회를 처먹기도 한 것으로 기억한다. 헌데, 인체에는 그다지 해가 없었던 것은 때죽의 독이 소화되기 전에 내장을 덜어내서 그런지, 인체에는 별도 독이 안되는 그런 정도 인지 알길이 없다. 아마도, 어린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분들이라면, 때독(때죽)나무 열매로 고기를 잡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어린시절 그렇게 은어회에 들인 입맛이 인체 메모리에는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었나 보다. 지나칠 수가 없다. 은어는 비늘이 없다. 어린나이에 먹기에도 부담이 없었다. 갖잡은 은어를, 고소한 옛날방식의 콩 된장에 통채로 찍어 먹던 것이였는 데, 그 맛이 40년가까이 흘렀어도 잊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맛을 4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마도 두번 다시 맛보지 못한 것으로 기억한다.
<정갈하게 차려놓은 은어회와 동동주>
헌데 여기에 은어회라니!
맛 된장에 버무리거나, 쌈을 싸기도 하고, 동동주에 곁드린 언어회, 한 마디로, 으악! 쥑인다. 괜히, 쥔 아지매마저 구여브진다. 실제로도 미인이다. 단아한 모습이 음식점 쥔 같지가 않다. 어깨에 x자로 멜빵바지를 걸친 모습마저, 품의가 있다. 건강미가 철철 흘러 넘친다.
"아지매는 고향이 경상도요? 전라도요?"
이곳이 전라도, 경상도 경계라는데, 아지매 고향이 궁금해진다. 괜히 말을 걸어보고 싶은 충동이 도진 것이다. 어찌보면, 시골구석인데, 건강해뵈는 아지매가 이런 생활에 만족하는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다.
"나는 요, 이십오년동안 전라도 구례에서 살다가, 여기 경상도로 시집와서 이십구년째라예"
으~흠~!
전라도 구례아가씨가 스물다섯에 경상도 하동총각에 시집와서 이십구년이 흘렸응께, 오십네살,
"흑!"
"아지매,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으로 뵈누마!"
돈들어가는 게 아니니 칭찬이나 해주자. 이런 물맑고 공기좋은 곳에서 살아서 그런지 실제로도 그 아지매, 그정도로 밖에 안보인다.
"아지매, 언제까지 장사하는교?" 이런 시골이라도 장사시간이 있을 터, 해서 물어봤더니,
"손님이 있을 때까지...!"
문을 열어두고 손님을 받는단다. 손님을 쫒아내지 않는다? 칭찬의 효과인지, 실제로 그런지!
고소한 은어회를 곁드린 동동주 맛, 동동주맛을 더욱 맛나게 하는 은어회의 고소한 맛!
마음같아서는 대취하고 싶다. 쥔 아지매 말대로, 손님이 있을 때까지 문을 연다했으니, 내가 한여름 밤을 대작하며 지새도 문을 안닫을라나?. 안타깝게도, 그동안 술과 피로에 찌든 몸 때문에. 내일은 서울로 차를 몰아야할 터이고, 참으로 어렵게 어렵게 절제를 해야 했다.
하지만, 다방탐방은 해봐야제! 레지하고 차는 한잔 나누고 들어가서 자자, 저기 '태양다방'이 있네. 생강차나 한잔 시켜먹고 피로나 풀어보자해서 찾아간 태양다방,
"문닫았어요" 주변 상인들의 말이다.
"제기럴!"
덕분에, 오래간만에, 좀 일찍 푹 잘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늦으막 하게 숙소를 나왔다. 한결 몸이 가볍다. 언어회 효과인가? 오래간만에 푹 잔 탓인가? 아니면, 맑은 공기 탓인가? 어째, 이동네를 훌쩍 떠나기 아쉬워진다. 쥔 아지매의 단아한 모습에 이끌렸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 번 더 보고싶다. 아지매의 건강미와 구김살없는 미소가 이곳의 대기만큼이나 상큼하다.
은어회 핑계가 생겼다. 핑계인지, 속마음인지 나노 모르겠다. 어제의 그 은어회에 대한 미련때문인지?. 그 만큼 그 은어회 맛이 입끝에 살아 있다. 은어회 핑계로 어제 찾았던 그 은어횟집으로 다시 발길을 돌려 저녁과 똑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당연히 동동주를 곁드려야 한다. 헌데 차를 몰고 천리길을 가야하는 데...
"아지매, 동동주 병으로 없어요?"
동동주 한되면 아무래도 운전하기 부담스럽다. 시골길에 검문이야 있겠냐만은,,,
"병으로 파는 것은, 없는데, 아참, 그라몬 동동주 반되만 하이소"
그러면서 갔다주는 동동주 반되, 크억, 반되나 한 되나 별차이가 안난다. 인심이 생각보단 후하다. 언제 한번 시간을 충분히 내어서, 조용히 찾아와야겠다. 이 아지매 그때까지 장사할라나, 아지매 장사 그만두기전에 내가 올기회가 있을라나?
......
화개장터를 벗어나면서 한동안, '이십오년동안 전라도 구례살았고, 경상도로 시집와서 이십구년째 산다'는 장터국밥집 쥔 아지매의 목소리가 귓가를 내내 맴돌았다.
세월이 좋아지긴 좋아졌나보다. 54살의 시골 아지매가 40대같으니!. 아지매 모습을 보니, 시골이 시골같지 않은 시골이다. 돌이켜보니, 대학졸업반때, 우리 엄니 돌아가신 나이가 54살, 당시, 우리 엄니는 할머니에 가까웠다고 기억나는 데, 같은 시골인데 왜 그런 차이가 났을까? 지금 이나이에 보는 모습과, 당시 어린 눈에 비친 모습의 차이라서? 그보단, 제대로 못먹고, 시골 논.밭 농삿일로 날이면 날마다, 뙤악볕에 그을리며, 엄청 고생한 탓이리라. 그런데 마누라도 돌아가신 나이가 54세때다. 우리 마누라 역시 40대 같이 고왔는데, 그래도 그 사람은 내보다 먼저 갔다. 마누라 생각이 난다.
'오는 인생에는 순서가 있어도 가는 인생에는 순서가 없다'
하더니, 그말이 맞는 갑다. 문득문득 가슴에 차오르는 허허로운 마음을 달래느라 먼길을 떠나 왔는 데, 여행길에 지친 탓인지, 그동안 그런 감정을 잊고, 술에 찌들며, 며칠을 즐겁게 보냈는 데, 여행막바지, 이곳 화개장터,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이곳 좁은 공간에도 사람들이 사느라 열심히 북적거리는 것을 바라보노라니, 불현듯 잊고 있던 감정이 되살아난다. 마누라, 돌아갈 때의 나이와 같은 건강한 국밥집아지매를 보니 불현듯이 마누라 생각이 난 걸까? 찌들어 지내던 며칠과 달리, 술을 좀 절제한 탓이련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
다산초당 인근 백련사에서 도를 닦던 혜장선사, 그 유명하다던 정약용을 만나 5~6년동안 담론을 주고 받았다니, 속되게 말하는 돌중은 아니였지 싶은데, 술병이 들어 4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하니, 선사는 불법으로 닦은 내공은 어디에 갈무리해 두고, 인생의 무상함을 술로 달랬던 것일까?
나역시, 인생을 달관한 듯, '인생이 별거냐!' 건방(?)을 떨어 왔건만, 나도 모르겠다. 소슬한 바람이 감상을 부채질하는 늦가을도 아닌 데, 완도, 청산도, 남도칠백리, 화개장터를 를 쏘아 다니고, 서울거리를 방황(?) 하며, 평생에 걸쳐, 무슨 계기만 있으면, 간간히 삐져나오는 허허로운 이 감정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ㅋㅋㅋ
<배경음악: 알리버전의 화개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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