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들은 누구인가?
일본 역사상 최고 최대의 큰 사건이었던 '러일전쟁' 을 승리로 이끈 당시 일본 함대의 총사령관이였고, 그후 세계적인 명장이 되었으며, 일본 역사 10대 영웅 중의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린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이, 러일 전쟁 승전 축하연이 있던 날 밤, 어떤 신문 기자가 도고 제독에게 "각하의 업적은 영국의 넬슨 제독, 조선의 이순신 제독에 비견할 만한 빛나는 업적이었습니다" 라고 하자, 도고 제독은
"나를 이순신 제독에 비교하지 말라. 그 분은 전쟁에 관한 한 신의 경지에 오른 분이다. 이순신 제독은 국가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않고, 훨씬 더 나쁜 상황에서 매번 승리를 끌어 내었다. 나를 전쟁의 신이자 바다의 신이신 이순신 제독에게 비유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라고 그 기자를 즉각 야단을 쳤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한편, 일본 최고경영자들이 선택한 후계자 유형 1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라 한다. 통상 일본을 중세의 영웅으로 오다노부나가, 도요토미히데요시, 도꾸가와 이에야쓰를 꼽는다. 노부나가는 중세 이후 일본의 낡은 가치관을 타파했고, 히데요시는 새로운 가치체계를 가진 일본을 건설했으며, 도쿠가와는 두 사람이 한 일을 완성시켜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관리했다고 한다.
천하의 지배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현대인들에게 제시하는 인간학과 경영철학.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간학과 전략은 시공을 초월해 모든 경영의 기본인 인간관리 측면에서 현대사회의 최고경영자와 정치 지도자를 비롯해 조직을 이끌고 사람을 관리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의 성공사례로서 자리매김되고 있다한다.
이순신과 도쿠가와이에야스는 임진왜란 전후를 살았던 인물들이다,
임진왜란을 공통분모로 한쪽은 그 난을 일으킨 쪽, 즉 창의 입장에 섰던 나라의 대영주였고, 한 쪽은 그 난을 일으킨자들의 도전을 분쇄하고자 방패의 입장에 섰던 나라의 장군이였다. 이들은 한.일역사상 상대국민들에게는 최대의 적장이지만 자기 국민들에게는 이들만큼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된 사람이 없었다.
이에야쓰의 군대가 직접 조선을 유린하는데 참여하지 않고, 일본 국내 경영에 치중하였다고는 하나, 어쨌튼, 같은 국가전략하에서 일사분란하게 행동해온 적장이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배경도 틀리고, 입장이 매우 달라서 전혀 유사점이 없어 보이지만, 두사람의 철학과 전략.전술적 가치의 경중을 떠나서, 매우 유사하고 흥미로운 공통점이 많다고 하겠다.
<이순신장군의 일대기>
이순신 장군은 조선조 인종 원년 1545년 음력 3월 8일(당시 양력 4월 28일) 서울 건천동(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태어났다. 장군은 문반가문 출신이었음에도 어려서부터 무예를 즐겼으며 시재에도 밝았다.
1576년에는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1589년 녹도둔전관(鹿島屯田官)이 되었다. 그 곳에서 장군은 북병사 이일(李鎰)의 모함을 받아 첫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1589년 정읍현감이었던 장군은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었고, 1591년 2월에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어 거북선을 만드는 등 임진왜란에 대비하였다.
1592년 4월 왜적이 부산을 침략하자 장군이 첫 출전을 하여 <옥포대첩>을 시작으로, <한산대첩>, <부산대첩>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연전연승하고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 후 정유재란이 발발하기까지 해전은 거의 소강 상태로 들어 갔으나 왜구가 침략할 것을 대비하여 평소 전쟁준비를 하던 중 조정에서는 이른바 '요시라 첩보사건'에 연류되었다는 이유로 1597년 3월 4일 장군을 투옥시켰다. 그 뒤 장군은 많은 옥고를 치르고 4월 출옥하여 두번째 백의종군의 길에 오르게 된다.
그동안, 원균이 거느린 우리수군은 7월 칠천량 싸움에서 거의 전멸상태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하였다.
그 뒤 우리수군을 전폐하라는 조정의 밀지를 받고도
"아직도 배 12척이 있고 신이 죽지 아니하였으니..."라는 장계를 올리고 9월에 단 13척의 전선으로 10대 1의 열세 하에서 적선 31척을 크게 쳐부수어 세계 어느 해전에서도 그러한 전과를 찾아볼 수 없는 <명량대첩>을 거뒀고, 이어서 해남 울돌목을 비롯, 해전과 육전에서도 크게 승리하였다.
그 후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과 합진함으로써 해상전력을 강화하였다. 이때 풍신수길의 유언에 따라 왜적이 철수하게 되자 한척의 배도 놓치지 않겠다는 굳센 각오로 11월 남해 노량에서 적선 200여척을 부수어 <노량대첩>을 마지막으로 장식하였다.
이때 장군이 적병이 쏜 총을 맞고 "지금은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단 말을 내지 마라"란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54세의 일기로 장렬하게 순국하였다고 한다.
이순신은 항상 지형과 해로, 그리고 적정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싸웠다. 또 그렇게 되도록 상황을 만들어나갔다. 이순신의 23전 23승은 그렇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출전하지 않은 칠천량 해전에서 단 1번 이순신처럼 하여 승리했을 뿐이었다.
1643년 인조는 그에게 '충무' 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되었다. 1659년 효종때 남해에 그를 기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비(碑)를 세웠다. 1688년숙종14년에는 명량대첩비가 건립되었고 1705년 현충사가 건립되었으며, 1793년 정조는 정1품 의정부 영의정(領議政)을 가증했다.
장군은 임진왜란(1592~1598)으로 풍전등화와 같았던 나라의 운명을 구해낸 구국의 명장이었다. 또한 시문에도 탁월했던 장군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난중일기(亂中日記)』를 비롯, '한산섬의 노래(閑山島歌)' 등 여러 편의 시와 시조를 남겼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전생애는 그 모두가 충(忠)과 효(孝)로 점철된 우리민족의 위대한 표상으로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대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본래 마쓰다이라 씨족으로, 어린시절 오다가문에 이어 이마가와 가문에게서 인질로 지내야 하는 불운을 겪으며 성장하였다. 이마가와 가문에서 지내면서 다케치요라는 이름을 모토야스로 개명을 하였고 요시모토의 양녀와 혼인을 하여 이마가와 가문의 무장역할을 한다.
1560년 요시모토가 천하쟁패의 야망을 품고 교토로 진격하다가 노부나가의 습격을 받고 최후를 맞는다. 그리하여 모토야스는 급히 병력을 회군하여 본래 자신의 조상의 영지였던 미카와로 돌아와 사태를 관망하며, 이마가와 가문과의 관계를 청산해 버리고 신흥세력으로 떠오르던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는다. 이때 이름도 이에야스로 개명하고 성도 도쿠가와씨로 칭하게 된 것이다.
그 후 대세력을 가지고 있던 다케다 신겐과 연합하여 이마가와가문을 멸하고 그 영지를 신겐과 나누어 가졌고 오다 노부나가와 결속을 한다. 하지만 신겐은 천하쟁패를 목표로 노부나가와 싸우려 하자, 다케다 가문과 오다 가문 사이에 위치했던 이에야스는 어쩔수 없이 신겐과 접전을 벌이다, 대전략가로 이름난 신겐에게 대패하고 겨우 하마마쓰 성으로 퇴각한다.
1573년 신겐이 죽은 이후에도 이에야스는 신겐의 아들 가쓰요리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 다카텐진 성을 빼앗기는 등 위기에 처하였는데 1575년에 노부나가의 도움으로 가쓰요리를 나가시노에서 격멸시키는데 성공하는등, 노부나가의 그늘 아래서 이에야스는 점진적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다, 다케다 가문을 완전히 멸망시켜 대세력으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한다.
노부나가가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습격을 받아 최후를 맞았자, 노부나가의 부하 하시바 히데요시(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미쓰히데를 처단하고 노부나가를 이어 정권을 장악한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옛 가신들을 제압하고 세력을 확장하였는데 결국에는 이에야스와도 대립을 한다. 1584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기선 제압하기 위해 부하 이케다 노부테루를 보냈는데 이에야스는 나가구테에서 노부테루의 병력을 대파한다. 이렇게 이에야스는 초반에 히데요시와의 싸움에 승리를 거두지만 아직 히데요시에 비해 세력이 약하였기에 대세를 직감하고는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는다.
1590년 히데요시가 마지막으로 저항하는 세력인 호조씨를 쳤을 때 이에야스는 히데요시를 도왔고 호조씨의 영지였던 관동지방을 자신의 영지로 받게 된다. 그리하여 관동지방의 중심지 에도성에 처음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렇게 명목상으로 히데요시에게 복종하는 형식을 취하였지만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는 거의 독립적인 입장이었기에 임진왜란때 이에야스는 조선에 단 한명의 병력도 보내지 않고 근거지 확충에만 신경쓰고 있었다. 그리하여,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내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영주로 성장해 있었다. 그후, 히데요시의 부하 이시다 미쓰나리가 히데요시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영주들을 결집하여 이에야스에게 대항한다. 양측은 1600년 세키가하라에서 결전을 벌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사실상 일본 최고의 집권자가 된다.
결국 이에야스는 1603년 정이대장군에 취임하여 에도막부를 개설하였고 1615년에는 오사카성을 함락하여 도요토미씨를 완전히 멸망시켜 일본 전토를 통일한다.
<이순신장군과 이에야스>
이들은 16세기말의 풍운아였다. 풍신수길이 일으킨 전쟁을 분쇄하느라고 노심초사한 이순신장군, 풍신수길의 휘하에서 풍신수길이 일으킨 전쟁의 와중에서 일본본토를 수습하고 관리한 이에야쓰, 모두 풍신수길과 인연을 가지고 있다. 풍신수길의 기도를 분쇄한 이순신이지만, 이에야스도, 조선전쟁을 통해, 내심 풍신수길이 몰락하기를 고대하였을 지도 모른다.
이순신은 중앙집권적 왕조의 권력앞에 절대 충성의 자세로 일관하였으며, 군왕의 백성들을 군왕대신 보살피는 것이 군왕의 나라에 대한 충성의 연장으로 처신한 것이다. 우둔한 군주라도, 군왕에 대한 충성으로 일관한 만고충신이였다.
"아직도 배 12척이 있고 신이 죽지 아니하였으니..."
그 순간, 그로서 두려움이 없었겠는가? 그로서, 딸린 병사의 목숨이 귀중하지 않고, 그들을 뻔히 죽음으로 내몬다는 우려가 가벼웠겠는가? 나라의 존폐의 위기속에, 절체절명의 불리를 안고, 어쩔 수 없이 몸을 던져야할 장군의 고뇌가 어지간한 인간적 고뇌었겠는가?
이순신이 모함을 받아, 옥고를 치르는 동안, 원균이 이끌은 조선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박살이 나고, 겨우 남은 전선이 12척,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 열악한 사정을 알고, 전쟁에 나가지 말라는 왕명이 내려오나, 앞서의 이와같은 장궤를 올리고, 죽기로 각오하고 분연히 나서, 결국 승리로 이끈다.
어지간한 장군이라면, 100여척에 이르는 적선과 10대1의 열세에 겁먹거나, 평생에 구축해 놓은 해군을 일거에 잃는 빌미가 되도록, 자신을 음해한 세력, 그 음해를 헤아려 차단하지 못한 어리석은 군왕과 조정에 대해, 응징까지는 아니드래도, 분통을 터뜨리거나, 마침 왕명도 있고하니, 그것를 빌미로 자포자기할 법하다만, 병사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절대열세를 딛고, 승리를 이끌어낸, 전략과 전술, 무엇보다도 그 충성심과 애국심은 오늘날에 되새겨도, 숙연함에 젖게 한다.
나라에서. 사후에 '충무공'의 시호를 내리고, 우의정, 영의정에 추서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고는 하나, 남은 세력들이 진정으로 그 뜻을 기려 정신을 차린 것이 아니라는 것은 수십년도 안되어, 병자호란이라는 겪게 되는 것을 보면 알수 있다.
파당을 지어 국정을 농단한 무리들이, 왜란의 참화를 겪게한 원인인대도, 이를 어쩌지 못하고 끌려만 다닌 무능한 군주, 그런 군주의 나라 조선, 그 조선백성들 모두를 위해 모든 것을 다바친 그 위대한 정신이 오늘날에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반면에, 군웅할거하는 봉건영주들의 패권다툼에서 살아남기 위해, 권모술수, 이합집산을 식은 죽먹기로 하는 사회에서, 그나마 영웅다운 풍모를 견지한 사람이 이에야스라 할 것이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야망과 왕국의 건설에 모든 것을 걸었다. 어린시절 인질로서 온갖 수모를 겪고, 대소국가들과의 쟁패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남아, 급기야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막부를 건설하여 , 일본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260여년, 오늘의 일본이 있게 하는 기초를 구축는 커다란 족적을 남기게 된다.
<일본혼속에 살아있는 이에야스>
통상, 일본의 근대 3대영웅으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꼽는다는 데, 이들의 성격적 특징을 대변하는 것으로, 오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새는 죽여버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울지 않는 새는 울게 만든다]로 묘사되는 데 비하여, [울지 않는 새는 울때까지 기다린다]는 인간으로 이에야스를 묘사하고 있단다.
무리없이 하늘의 뜻을 살펴, 적응하는 기다림의 철학을 실천한 이에야스, 기다리는 동안 물샐틈없이 철저한 대비를 함으로서, 적대세력이 감히 섯부른 짓을 못하도록 기를 꺽어 놓는 포석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였다. 오다노부나가, 히데요시도 섯부르게 이에야스를 치지 못하고, 그럴바에는 한편으로 만들어 버리는 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도록한 심모원려의 이에야스. 이에야스시대의 유일한 대적수 다데마사무네의 기도를 차단, 분쇄한 생전의 포석등에서 보듯이, 이에야스의 전략적 포석은 당대는 물론이고,사후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구사되었다.
막부를 열어, 봉건영주들의 쟁패로 세월을 보내던, 중세일본의 혼란을 잠재우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여 근대일본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명치유신으로 막부가 와해되고, 왕의 친정체제가 확립된 것도, 다시 또 그 왕이 상징적 존재로 남고 군부가 전권을 휘들러 세계를 지배하려 대전을 일으킨 저력도 어찌보면 이에야스가 구축한 막부식 정치체제의 학습효과에 다름아니였다.
그후, 이런 일본의 패권주의 형태의 결과로, 여러나라에 엄청난 고통들을 안겨주고, 자국민들에게도 다시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던 시절이 많았지만,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 덕분에, 오늘날의 경제대국이 되어 세상을 굽어보는 위치가 된 것도, 이에야스막부의 重商주의와 重工주의 정책, 일사분란한 전체주의 정치형태에 기인한다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2차대전후, 막부시대애 구축한 황금이 오사카성 지하비밀금고에서 발견되고, 이것이 일본의 부흥자금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라 한다.
<한국인의 정신속에 불멸히는 이순신>
일본인의 혼속에 이에야쓰가 자리잡고 있다면, 한국의 혼속엔 이순신장군이 깊이 새겨져 있다.
'불멸의 이순신','聖雄 이순신', 인류역사상, 동서고금에, 신화와 전승이 난무하지만, 그중에서도 '세계4대해전'으로 인정받는 '한산대첩;을 이끌고, 23번의 해전에서 한번도 패하지 않은 전승의 신이 바로 이순신장군이였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도고제독이
'신의 경지에 오른 분' 이라고 칭송에 마지않은 장군을 둔 우리 후손들.
수년전에 서해교전에 묵묵히 산화해간 해군용사들의 용기도, 충성심과 애국심으로 산화해간 이순신장군의 정신이 면면히 살아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중국,일본,러시아, 미국...심지어 같은 피를 나눈 북한까지도...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형태를 달리한 각양각색의 여러도전과 도전의 빌미를 제공하는 여러환경속에, 나라를 오래도록 지켜나가고, 부흥시킬 방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어떤 형태의 도전이 되든, 절대의 불리와 환경속에서도,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으로 온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고 산화해간 장군이 있었기에, 장군의 정신이 우리 민족혼속에 흐르고 있기에, 그나마, 우리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끼리끼리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붕당이나 파당의 조직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며, 전체국민이나 국가의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따르는 조직이나 개인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그런 세상속에서, 북한정권의 공갈이나 핵무기 보다도, 중국, 미국, 러시아등 주변 대국들의 세계전략속에서도, 그나마, 그럭저력 견뎌 나가고, 꾸려나가는 것은, 불패의 신화를 창조한 장군의 숭고한 기상이 아직도 우리 정신속에 면면히 흐르는 때문 아니겠는가?
溫故知新, 역사를 배우고 옛 것을 배움에 있어, 옛 것이나 새 것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데,
멀리는 병조호란이다, 한일합방, 육이오다하여, 결과적으로 나라를 거들낸 어리석은 군주들, 군주들의 주변을 짜고 돌던 무리들, 나라의 장래는 아랑곳 않고, 오로지, 무리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그에 배반되는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적대시하는, 소인배들이, 파당의 수장이 되어, 도토리키재기식으로 고만고만한 주변무리들과 어울려 설치는 사태가, 우찌 그리 수백년역사속에 나라를 망쳐먹은 그 행실들과 코드가 비슷한가? 우찌 그리 옛날의 못된 버릇을 실천하는데, 기를 쓰는지?!
새시대, 새것이라는 게, 날마다 좌니,우니, 진보니 보수니 하며, 다투는 꼴이, 과거의 사색당파의 행실과 다른 것이 뭐있나? 일제시대, 친일이니, 반일이니 하면서 갈기갈기 찟겨진 민족들, 북이다 남이다하며, 조선어휘에 그런 욕설이 없어서 그렇지, 같은 민족을 향하여 최대, 최고의 욕설을 내품는 행실들하며....
요즈음 세태를 보면, 누군가 인간을 정의하건데, 인간의 마음이 이타적이고, 여유로롭고, 양심이 있다고 우긴다면, 온고지신이라 공자왈맹자왈 나불거리면,
"요런 싸가지 없는 세태를 겪고도 그런 쏘릴 찌껼여?' 하고 귀싸대기를 올려주고 싶은 심정이다.
북한 아해들이 핵공갈을 실천안한다 해도, 세상이 갈데까지 갈 모양, 세상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면, 적은 바깥에만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산업현장, 교육현장, 정치현장, ....
온통 개판이고, 진흙탕물이 튀는 개판의 전장터디, 뭣같은 군주, 뭣같은 나라였을 망정, "아직도 배 12척이 있고 신이 죽지 아니하였으니..." 하면서 죽을 각오로 전장에 나서던 이순신 장군의 기개와 충성심이 발휘되었던 그 시대상황이, 오히려 그리워진다. 차라리, 죽을 각오로 나설 상대가 있기에.
ㅊ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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