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거 아부지
《아부지, 와 등에 바셀린을 발라?》
동네 아파트를 지나는데 요즘은 잘 볼 수 없는 손수레가 눈에 띄었습니다.
손수레를 보는 순간, 일흔을 훌쩍 넘기신 친정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아부지는 20년 넘게 한여름엔 새벽 2시,
한겨울엔 새벽 4시에 어김없이 일하러 나가셨습니다.
하루 종일 당신 몸무게의 몇 배가 되는 과일을
손수레에 싣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며 파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이 흐린 날은 비가 올까 걱정돼
수업을 받다가도 하늘을 자꾸 쳐다봤습니다.
비가 오면 팔리지 않는 과일을 보며 아부지께서 한숨지으실 것 같아서….
매일 새벽 2시에 일 나가신 아버지
"우리 시골 가 살믄 안 되것나?"
"와요? 와 또 그카능교? 농사지어 자식들 갈칠 수 있능교?"
"열심히 하면 고등학교는 안 보내것나."
"보소, 즈아부지. 우리가 못 배워 노동일 하는 거 아이요?
내는 자식들 다 대학 보낼기요."
"그라믄 아들 둘만 대학 보내고 딸들은 고등학교만 보내믄 우쩌겟노.
그럼 시골 가서 살 수 있지 않것나?"
"와 아들만 대학 보내자카능교? 딸들은 자식 아닝교?
내는 딸도 다 대학 보낼기요."
"내는 서울서 몬 살것다. 인심도 사납고,
어디 여개가 사람 사는 곳이가?"
"즈아부지, 내가 힘든 거 와 모르겠능교.
하지만서도 우리가 참고 고생하믄 자식들이라도
팬대 굴리며 살 수 있지 않겠능교?"
아부지는 시골로 가고 싶어 하셨습니다.
각박한 도시빈민의 삶을 살기보다 고향에서 농사짓기를 원했지만
그때마다 엄마의 대답은 늘 같았습니다.
농사 지어서는 절대 다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대학 못 보낸다고….
그래서 아부지는 저희 5남매를 공부시키기 위해
매일 새벽 2시에 일을 나가셨습니다.
하루 종일 무거운 과일을 싣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팔고
다음날 새벽 2시가 되면 또 어김없이 일어나 나간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월급쟁이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도 아부지께서는 늘 숨겨놓은 애인 만나듯
새벽 2시에 길을 나서셨습니다.
그 시간에 가야 좋은 물건을 뗄 수 있다고….
아부지가 신고 간 짝짝이 운동화
그런 아부지는 제게 사랑인 동시에 아픔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입니다.
학교에 가려는데 신발이 한 짝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엄마를 불러 내 신발 어딨냐고,
지각한다고, 짜증을 있는 대로 냈습니다.
자식이 한둘도 아니고 오 남매나 되다 보니
신발장 앞은 온통 정리되지 않은 신발로 뒤엉켜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짝밖에 없던 제 신발처럼
아부지 신발도 짝을 잃고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엄마도 저도 눈치를 챘지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와 신발사이즈가 같은 아부지께서 새벽에 나가시면서
미처 확인도 못 하고 사이즈만 맞춰 신고 가신 겁니다.
갑자기 올라왔던 짜증이 눈물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학교 뒷담 길을 잊지 못합니다.
햇살이 넘쳐흘러 나뭇잎이 아슬아슬하게 받아내던 그 길.
제 눈물에 엉켜 더 빛나던 그 무성한 나뭇잎들….
"안 쪽팔렸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 끝나고 돌아온 아부지께 여쭸습니다.
아부지는 늘 그렇듯이 약간 멋쩍게 웃으시며
손으로 얼굴을 쓱 문대십니다.
아부지는 말이 없으신 분입니다.
제가 매일같이 데모하고 밤늦게 들어와도
큰소리 한번 내지 않으셨습니다.
한번은 엄마가 그러시더군요.
아부지께서 제가 늦으면 몇 번이고 깨서
제 신발이 있는지 확인하신다고….
그러니 제발 새벽에 일 나가는 아부지 생각해서 일찍 들어오라고요.
다 큰 딸 방을 함부로 열어 보지도 못하고
새벽에 제 신발이 있는지 확인하고서야 편히 주무셨다는
아부지….
신발로 딸의 귀가를 확인하셨던 아부지
"아부지, 왜 등에 바셀린을 발라?"
"……. 디었다(화상) 아이가?"
"왜 등이 디었어? 누가 등에 뜨거운 물 쏟았어?"
"……. 햇볕에 다 익었다 아이가."
한숨 섞인 엄마의 대답은
제가 전혀 생각지 못한 답이었습니다.
엄마는 아부지 등에 매일같이 바셀린을 발라 주셨습니다.
전 정말 몰랐습니다.
까맣게 탄 아부지 등이 햇볕에 그을려 생긴 화상이라는 것을요.
아부지는
'내가 너희 때문에 이렇게 고생한다'거나
'내 고생을 알아 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차라리 저희한테 생색이라도 내셨다면 덜 미안했을 텐데
아부지는 힘들어도 말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게 아부지는 사랑이자 아픔입니다.
사춘기 시절, 친구들의 아부지는
은행장에, 한전 이사에, 교사에, 회사원에,
다들 자랑스럽게 말하는데
저는 차마 아부지가 행상한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면 아버지가 얼마나 열심히 사시는 분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상하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말하게 된 것은
사회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면서부터입니다.
그때 전 새벽에 운동화를 바꿔 신고 간 아부지 이야기를 글로 썼고
인쇄물로 나온 그 글을 주무시는 아부지 머리맡에 두었습니다.
그 글에 제가 얼마나 아부지를 자랑스러워하는지,
또 얼마나 노동하는 아부지가 대접받는 세상이 오길 바라는지 썼습니다.
아부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럽습니다.
당신도 부자가 아니면서
가난한 사람 곁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시는 아버지,
가난한 사람 사정은 가난한 사람이 안다고 하시던 아부지,
정치 사상 이념을 떠나서
굶어 죽어가는 북한동포를 살려야지 않겠느냐는
딸에게 고개를 끄덕이시던 아부지,
남들이 보기엔 키가 작고 체구가 볼품없는 아부지지만
제게는 산처럼 높고 당당한 아부지입니다.
어부이날입니다.
남들처럼 해외여행은 못 보내 드리지만
막내딸의 마음은 오늘도 아부지를 비행기 태워 드립니다.
아, 오늘 그 놈의 손수레가 멀쩡한 사람 잡습니다.
갑자기 아부지가 어린아이처럼 그립습니다.
지난번 뵀을 때 주름살이 더 깊어진 아부지를 보고
가슴 한구석에 휑한 바람이 지나갔는데
오늘 전화라도 한 통 넣어야겠습니다.
아부지,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퍼온 글)
출처: 아부지, 왜 등에 바셀린을 발라?
2. 우리 아부지
http://youtube.com/watch?v=vDInjp6WUEk
척박한 동네
농산물과 해산물을
대부분 직접 수확하여 끼니를 잇던 동네
우리 아버지 형제는 4명
큰 백부는 공부시켜놨더니
일본놈 밑에 살기 싫다꼬,
이른바 북간도로 토끼삣고,
둘째 백부는 일제시대
공무원(아마도 친일파?) 생활하다
복막염으로 돌아 가셨삣고,
우리 삼촌은 막내로,
공부시켜놨더니 빨갱이 되어
미군정시절,
아직 국가도 설립하기전에
빨갱이 잡는다고
그밑에 빌붙어 살던 국경수비대,
아마도 일제 순사경력자?
몇번이나 들여닥쳐,
집에 있다 다람쥐처럼
뒷산으로 토끼는 삼촌을 못잡고
죄없는 울 아버지 잡아다가
일본순사가 독립군 조지듯이
꺼꾸로 매달고, 몽둥이 찜질에다,
코로 입으로 고추가루 퍼부우며
'너거 동생내놔라'
나라도 아직 설립이 안되었는 데
오죽 독하게 족쳤을까?
빨갱이 동생이 오데로 토꼈는 지,
오데로 싸돌아 다니는지,
알리없는 울 아버지
국경수비대 놈들이 아마도 암시로
울 아버지 빨갱이 동생한테,
"니때문에 너거형이 작살나고 있다
마, 니가 자수해서, 너거형 광명찾게 해라
(니는 모리것고)"
아마도 이런 시그널을 보내
자수하게 맹글는 심산이였던지?
지리산 공비토벌이 있던 때,
지리산 전투에 참여한다는 풍문만 돌 뿐
이후, 행방불명 처리
나라에서, 지리산 사태가 수습된 후
행불자의 사망처리 기회가 잇었는 데,
삼촌의 저거 어무이,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가
'살아 돌아오면...'', '살아 돌아와라' 하는
희망의 끊을 놓치고 싶지 않아
'사망'신고를 안하고 '행불'로 신고하였다나
그 행방불명의 멍에는
연좌제가 폐지되기전까지
수십년을 우리 집안을 찍어 누르고 있었다.
해방의 기쁨을 맛보기전 부터
우리 집안은 풍지박산이 났던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아들 4형제중
공부시킨 아들들이,
공부시켜놨더니,
전부 객지로 나가삐모,
농사는 누가 짓고
조상은 누가 모시노?
그래,
셋째 아들인 우리 아버지 보고,
"니는 농사나 짓고 조상모셔라"
카며 학교근처도 안보내서,
無學으로 7남매 낳고 키우고
등짝에 바셀린이 뭐꼬,
무뤂이 작살날정도로
일하며, 공부시켜놨어도
7남매중 한 인간도
촌에 주저 앉아
아부지, 어무이 일손 들어주고,
조상 모시길 않았으니...
울 아부지는 나이들어
망가진 관절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도시 아들집에서
며느리 눈치밥먹는 신세가 되었다,
내가 그때, 아마도 40대?
지금 반 정도의 철이 들었더래도,
저녁마다 아부지 모시고
막걸리도 받아드리고,
해장국도 사드리고
이런저런 대화상대도 해드리고 했어야 했는 데,
며느리 한테 다 미루고
그럴 시간은 못내어도
친구들하고 술 퍼묵고, 싸돌아다녔다.
아부지가 우리집에 사는 시절
도회 아파트 노인정에
사정사장 모셔놨더니
며칠후, 안가겠다, 몬가겠다 하시네
도회 할배.할매들이 시골 촌 할배라꼬,
상대도 안해준다카면서,
(아마도 '분위기 배린다, 오지마라'꼬 눈치를 무지 주었겠지?)
집에서만 지낼려니
얼매나 거북하고 어려웠을 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집을 나가 구서동 산복도로를 절며, 절며 걷다,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경찰서 신고해서
밤12시가 다 되어 찾아 집으로 모시면서
착한 울 마누라는
눈두덩이 부을 정도로 울었지.
시아버지를 찾았다는 안도감에,
시아버지의 심정과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공감해서...
나는 울아버지
무작정 외출을 나무라던 기억만 나니
참 몹쓸놈의 불효막심이였지
지금은 그때 다정하게 못해드린 거
지금이라면 해드리고 싶은 심정이지만
이제, 부질없이 후회를 해봐야
무슨 소용있으리요?
두고두고 마음만 아프다.
'살았을 때 효도하라"는
옛말이 틀린게 하나도 없다
우리꼬맹이 그때의 날 꼭 닮아,
그럴 조짐이 농후하니
나가 우리 아부지 외면하고
술 퍼묵고, 돌아다녔으니,
그 죄값을 받는 인과응보라...
지금 아들래미, 딸래미가
내한테 섭섭하게 하드라도
내가 입이 100 개라도 말 못하것소
아부지!
우리 아부지!
ㅎ흐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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