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비내리는 땅고개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 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고나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 해이던가
물방아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 내리던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현인이 불렀던 [비내리는 고모령]이다
고모령(顧母嶺)은 대구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고개라 한다.
일제 강점기에 이곳이 징병이나 징용으로 멀리 떠나는 자식과
어머니가 이별의 사연을 담은 노래를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땅고개
고모령 만큼이나 사연이 많은
고모령을 닮은 [땅고개]는
국립공원 경주시 단석산 서쪽의 고개이다
건천으로 통하는 북쪽고갯길로,
언양으로 넘어가는 남쪽 외항고갯길
청도로 이어지는 서쪽 운문로와 함께
산내에서 산외로 통하는 길이다
<차를 운전하며 고개를 오르면서 찍은 땅고개>
그 옛날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당집이 있어
당고개라 불렸건만, 세월이 흘러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이 고개를 넘으면,
'안개동 할멈의 전설'이 서린 고장 오지마을 감산이다
해발 300m가 되는 여기서 부터 산내면이 시작된다.
안개동 할멈이 애기를 낳고, 먹을 것이 없어 구걸했건만,
아무것도 얻지 못해 화가난 안개동 할멈이
소금을 뿌리고 가는 바람에 서리가 일찍 내린다는 전설의 마을
때문인지, 기온차가 심해
과일들은 당도가 높고 맛이 있다 한다.
고랭지 채소로도 유명한 곳이다.
길은 땅고개에서
건천-산내-단석산방향으로 갈린다
단석산은 화랑의 무공수련터로
화랑의 영웅 김유신이 칼로 무우베듯 돌을 갈랐다는
단석(斷石)의 전설 서린 곳이다
이따금,새벽이면,
안개구름이 산허리를 감싸고
비오는 날이면 비안개되어
안개동 할멈의 전설이
땅고개 주변에 생생하게 피어오른다
지금은 뭉개지고 사라져 휴게소로 변한
당집의 수호신이 흘리는 눈물일지도 모른다.
지난 늦여름 밤
남방의 아가씨 이름의 태풍 '링링'이 불어제끼던 날
뜬금없이, 먼 고향시절,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에
[비내리는 고모령]을 읇조리며 땅고개를 넘었다.
부엉새 울음가 들리는 듯하다
'링링' 영향으로
몇일 째 오는 듯 마는 듯 내리던, 비는 폭풍우로 돌변햇다.
아가씨의 히스테리같은 폭풍우는 몰아치는 데,
길가에 우두커니 선 가로등만이
저항하듯, 침묵하고 있다
홀로 넘어가는 땅고개 고갯길 내내
자욱한 비안개와 몰아치는 폭풍우는,
빗발치는 울음소릴 애써 삼키지 않는다
검문하듯 가는 길을 멈추게 하고
가는 길을 술취한 듯 비틀거리게 한다
여름을 보내는 아쉬움이 크나 보다.
헤드라이트 조명과 비와 비안개방울이 빚어내는
꽃처럼 피어나는 무지개 터널은,
소리없는 환영(幻影),속세의 연을 끊고 들어서는 선계의 환영(歡迎)인 듯
간혹, 첩첩산골 山 짐승들도 외로운 지,
길거리로 나와 앞을 가로 막고 반긴다
땅고개 너머 두메산골에는,
계곡마다, 숨어 있는 듯 산골마을들
마을마다, 숨어 사는 듯 산골사람들
무슨 한이 그리 깊어,
무슨 사연이 그리 많아
반딧불이 밤꽃(夜花)이 노니는 이곳에
숨어살 듯 이 산골에 터전을 잡았을까?
이 산골에, 나는 또 무슨 사연이 있어
숨어살 듯 터를 잡았나?
구비구비 계곡을 돌아 고개를 넘나드는 것은
바람뿐만이 아니다
‘울 엄마가 묵고살기 힘들어 이곳에 시집보냈다’
‘식구하나 줄일려고, 걸어서 이곳으로 시집왔다’
곳곳에서 만나는 노년들의 회고에는 짙은 회한이 묻어난다.
‘60여년을 넘게 그렇게 세상과 문명을 등지고
땅을 일구어, 논농사, 밭농사 지으며
소키우고 닭키우고 살아온 산골마을 사람들.
어렵게 자식교육시킨다고
등뼈 빠지고 혼이 달아난 이야기들
공부시켜놨더니, 도회로 빠져나가 돌아오지 않는 자식들이야기
하지만, 손톱만큼도 원망은 내색하지 않는다
때로는, 밤이 깊어지면
굴뚝에서 피어나는 참나무 타는 냄새를 맡아가며
도회의 언저리에서 온갖 궂은 일마다않고
온갖 세파에 맞서 살려 발버둥치다
추방당하듯 도회를 버리고
이곳에 종착한 이들의 인생이야기로 숙연해진다
사업에 실패한 이야기
사랑에 실패한 이야기
삶을 포기하는 데 실패한 이야기마저
'행님, 자 한잔'
'동숭, 한잔 받아라'
막걸리 한두 병으로 시작하여
몸을 가누지 못 할정도로 마시면서
어렵게 쏟아내는 생생한 인생이야기들이다.
이제는 모든 것을 초월한 듯 담담히 회고 하지만,
그 아픔이 오죽하였겠는가?
가슴이 아파서 차마 사양하지 못하고
사양할 엄두를 못내고 술잔을 마주친다
듣고 있노라면
팔아서 생계비에 보태 써야할 생계란에 들기름을 섞어
기름 냄새 역겨워 손사래치는 나에게 억지로 먹였던 울 어머니
노년에, 관절이 망가진 몸으로 도시출신 며느리의 수발에
무척이나 못견뎌 하시던 아버지
가슴이 져며 온다.
어느 새 울 엄마, 울 아버지
내 자신의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땅고개에 가랑 잎이 휘날리고,
안개동 할멈의 저주가 찾아올 것이다
수십, 수백년을 대대로 물러받은 이들의
등뼈 빠지는 한숨소리, 혼이 달아나는 울음소리
이곳으로 숨어든 사람들의 아픈 통곳소리가
바람에 휘날리는 가랑 잎처럼
바람에 실려 땅고개를 넘나들었을 터이다.
지금도 그렇게 바람이 불어오고 불어간다.
고갯마루에 해가 떠오르면
산마루턱에 자욱하던 안개구름이 찰라에 사라지듯
사람들은 한숨도, 울음도 언제 그랬냐는 듯 한 순간에 삼키고
숙명처럼 또 일터로 나선다
산골사람들은 일찌기 잠자리에 든다
산골사람들은 꿈을 꾸지 않는다.
꿈마저 꾸고 싶지 않다
내일 아침 햇살이 들면, 안개처럼 사라질 꿈...
꿈이 없는 밤,
삶에 지친 산골사람들은
그렇게 잠자리에 든다
오래전에 꿈을 버린 나,
나도 산골사람이 다 되었다
2019년 9월5일
靑野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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