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그런 깨달음은 없다
<크리슈나무르티의 '깨달음'에 대하여>
U.G. 크리슈나무르티, Uppaluri Gopala Krishnamurti (이하 U.G)는
1918년 6월에 태어나서 2007년 3월에 죽은
인도의 힌두 철학자요 명상가, 종교가 입니다.
이사람은 1895년 5월에 태어나서 1986년 2월에 죽은,
20세기 가장 존경받는 철학자이고 명상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Jiddu Krishnamurti와
이름이 크리슈나무르티로 같아서 혼돈하기 쉽습니다
근대이후 힌두철학자, 명성가, 종교가로서
▶케샤브 찬드라 센(1838~1884),
▶라마 크리슈나(1836~1886)
▶라마나 마하리쉬(1879.-1950)와
▶마하리쉬의제자 비베카난다(1862년~1902년),
▶내가 좋아하는 오쇼 라즈니쉬(1931~1990)
▶그리고 세계의 스승으로 알려진
지두 크리슈나무르티(1895-1986 )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힌두교의 Guru(구루, 스승, 신성한 교육자)로 일컬어지는 이들입니다
U.G 크라슈나무르티는 기존의 구루들,
종교들의 깨달음과 수행방식을 비판하여 안티구루로 불리는 대표적 인물이며,
최근래까지 활동을 하였습니다 ,
그의 저서 '그런 깨달음은 없다' 가
사후10여년만인 2015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런 깨달음은 없다'?
'저는 평생동안 깨달음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이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육체적인 변화 없이 깨달음에 이루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거짓' 이며
'깨달음이란 [자연스러운 상태]에 이르는 육체적인 현상이라는 것'
'깨달음의 상태가 전지전능의 상태가 아니라 생각이 끊어진 상태일 뿐' 이다
'붓다의 방법으로는 또 다른 붓다가 나올 수 없으니 각자의 길을 가야한다'
'모든 종교...는 사이비다'
U.G. 크리슈나무르티(이하 'U.G')는 나름대로의 깨달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더 깊은 함의는 본문을 직접 읽으며 짐작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생각하건데,
인간은 육체를 매개체로 내부적으로 사유등 정신작용과
외부적으로 대자연과 교감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해왔습니다.
U.G.의 말씀에 따르면, 이 교감이 완전할 때,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고
깨달음은 [자연스러운 상태]에 이르는 육체적인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U.G 뿐만아니라, 동서고금의, 수많은 종교인, 철학자, 사상가들에게
'깨달음' 은 끊임없고, 차원높은 사유의 대상이자 화두 였습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왜 깨달음이 필요한가?
그런 깨달음에 어떻게 이를 것인가?
이것은 깨달음에 대한 4가지 근본 화두입니다
'그런 깨달음은 없다' 는 깨달음을 얻은
크리슈나무르티에게는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그의 큰 깨달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말씀을 논리적으로 되짚어 보면,
U.G의 말대로, '그런 깨달음이 없다' 면
U.G에게 '그런 깨달음이 없다' 는 깨달음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U.G의 깨달음은 거짓일 수 밖에 없다할 것입니다.
有를 부정하면 無가 됩니다,
그렇다면, '無가 있다는 것' 그것도 '有'이므로 부정되어야 합니다.
有.無는 相滅(상멸)이 아니라 相生을 통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有無相生(유무상생)이라 했습니다.
유와 무는 절대적인 것이아니라 상대적이라는 것이지요
깨달음 역시 상대적입니다.
깨달음 지극히 주관적 결과물입니다.
깨달음이 객관적이라면 그 대상과 과정이 무엇이든
결과와 결과의 수준은 동일해야 합니다.
동서고금에 그런 깨달음이 없었다 할 것입니다
U.G가 말하는 '그런 깨달음이 없다'는 것은
깨달음이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주관적이라면,
역설적으로 무수한 깨달음의 수준이 존재 하고,
그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 역시 무수히 존재할 것입니다
모든 종교적 신앙은 주관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객관화하거나
그것에 이르는 과정을 객관화하는려는 것이 종교의 속성입니다.
하지만 이 문명사회가 다할 수록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객관적 진리라면, 둘이 존재할 수 없고
수많은 종교들이 난무할 수는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과 신앙의 대상이 객관적 진리인데
수많은 종교들이 난무하는 것은
결국 그런 종교는 '사이비'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이비'를 피할려면
종교적 신앙은 주관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깨달음이나,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 역시 주관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 뿐이라 생각됩니다
많은 이들이 깨달음의 목표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부단이 설하고, 부단히 객관화하려고 시도 하지만,
그 목표와 그길에 이르는 길이 천차만별일 수 밖에 없습니다.
'붓다의 방법으로는 또 다른 붓다가 나올 수 없으니 각자의 길을 가야 한다'
라는 U.G의 깨달음이.
깨달음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며
사람들은 깨달음의 목표, 신앙의 대상을 정하고
그 과정(신앙생활이나 수행생활)에 매달린다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U.G의 깨달음 은 '참'이며
그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할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주요 論書(논서)중 하나인 <大乘起信論(대승기신론)>은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깨달음' 의 경지를
불각(佛覺), 상사각(相似覺), 수분각(隨分覺), 구경각(究竟覺)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경각(究竟覺)은 불교의 수행이 완성되어 얻게되는
'완전한 깨달음' 을 가리키며
곧 붓다의 상태를 이룬 것이나 붓다가 되는 자리를 뜻한다고 합니다
어느 종교나 대동소이 하게 깨달음이나 신앙의 대상수준을 정하고
그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나름대로
객관화하고 심지어 唯一無二(유일무이), 절대화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특이하게 스스로 수행에 의하여 깨달음을 얻어
구경각을 이루고 붓다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내세웁니다.
U.G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경각이 '완전한 깨달음' 이라면, 또 다른 구경각이 존재할 수 없으니
大乘起信論書(대승기신론서)의 설명대로라면 또 다른 붓다가 나올 수 없고 붓다의 복제품만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깨달음은 없다. 각자의 길을 가라 '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였을까 싶습니다.
사람들은 '깨달음'과 '신앙'을 진리라 하는 데 스스럼없습니다.
진리는 '보편타당한 것' 을 말합니다.
보편타당한 것은 객관적이야 합니다.
주관적인 것은 보편타당에 배치됩니다.
깨달음과 신앙은 지극히 주관적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과 신앙은 객관적 진리라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억지(?)을 부립니다.
그것은 '주관적 진리'라고
'객관적 진리'와 '주관적 진리'
진리는 유일무이하여야 합니다
두 분야의 다른 진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객관적 진리'와 이른바 '주관적 진리'는
본질이 동일해야 하고, 보편타당해야 합니다.
'구경각'이 객관적 진리라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상태가 존재해야 하고, 그 상태에 이르는 길이 보편성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깨달음에 그런 보편성과 객관성이 있다하겠습니까?
이처럼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에 대하여
보편적 타당성이 결여한다하드라도
굳이 깨달음의 객관성이 확보되지 않드라도
'왜 깨달음이 필요한가?'
이 화두에 부합할 수 있으면 족한 것이다 할 수 있읍니다
그것이 신앙적 깨달음이 존재해야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런 깨달음에 어떻게 이를 것인가?
U.G의 말대로,
'붓다의 방법으로는 또 다른 붓다가 나올 수 없으니 각자의 길을 가야한다'
즉 각자가 각자 방식대로 그길을 가라는 것이
U.G가 말하고자 하는 바라 하겠습니다
.
.어둡고 적막한 밤하늘에 둥근달만이 소리없이 빛나는 데
피부로 파고드는 차고 매서운 겨울바람에 보잘 것 없는 육신은 떨고,
애써, 내일의 따스한 햇살을 기다리며...
2018년 마지막(음력) 보름날 밤에
靑野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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