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자연으로 돌아오라
"자연으로 돌아가라" 루소
"자연으로 돌아가자" 老子(노자)
"자연에서 돌아오라" 孔子(공자)
"자연으로 돌아오라' 玉子(옥자)
노자와 공자의 말씀이라는 것은
그 사상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한 줄로 감히, 패러디한 것이다.
사람 사는 것이 참 그렇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 전혀 배려함이 없지만
인간은 자연에 목숨을 맨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DNA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만물유전(萬物流轉)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변한다' 는 뜻이다
만물이 그러하니 인간이라고 별 수 있나?
살아있는 생명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세상이 발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이 유한하기 때문에 목표가 있고,
한정된 시간안에 그 목표를 이루고자 애쓰는 것
그것이 대를 이어가면서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대를 이어간다는 것은 유한함을 극복하는 인간의 수단인 것이다.
조상을 모신다는 것은 알게 모르게
조상을 위하는 것보다 자신을 위한 본능이 깔려 있다.
내가 유한한 인생을 살더라도
내가 지극히 조상을 추모하는 것처럼 나도 후손의 추모를 받으리라.
그것이 유한한 생명의 인간이 유한함에 따른 허전함과
무상함을 이겨내는 강력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자손이 없거나 부모 자식간에 이별이나 결별이
더없이 가슴을 아프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수명이 짧을 때는 그 추모의 정성이 지극하더니,
역설적으로 인간이 오래 살게 되다보니 추모의 정성은 줄어드는 가보다
종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불효막심한 일들이
지금은 당연하듯이 자행된다.
이를테면, 화장(火葬)이 그렇다.
많은 가정들이 추모를 현대화 한답시고
1년에 겨우 한두번 자가용 타고 가면서 향이나 피우거나,
몇송이 꽃을 헌화하고 한두번 절이나 묵념하면서,
그것도 번거롭다하여,
어떤 이는 조상의 묘를 파헤치고,
뼈를 추려 화장하고 가까운 거리,
추모공원같은 곳에 봉안하고
조상 모신 의무를 다했다 스스로 위로한다.
그 뿐이랴?
어찌 돌아가신 조상, 부모, 가까운 이들의 몸을 태우리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지금은 횡행한다.
그로서 돌아가신 이에 대한 예의를 다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면, 가문의 결속을 기대하는가?
그도 아니면, 스스로의 심신이 평안을 기대하는가?
모든 가정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기반이 양반출신이 아니라서 그런 것만도 아니다.
가파르게 변해가는 문명에 가파르게 적응이 불가피한,
인간세상의 모습으로 이련 현상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이니 어쩌리?
아직도, 돌아가신 이를 열심히 땅에 묻는 이도 있다
그 후로, 얼마간 봉분을 돌보기도 한다.
하지만, 앞으로 기껏해야 한 두세대, 한 두세대가 지나서도
아니면? 대대손손?
그 돌봄이 이어지겠는가?
그저, 부질없는 짓이다.
이왕 땅에 묻은 묘라면, 이왕 땅에 묻힌 묘라면,
앞으로, 그냥 그 상태로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
풀과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다시 숲으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돌아가신 이가 영원히 사는 길이다.
그것이 돌아가신 이에 대한 진정한 예의 아니겠는가?
인간이 영원히 몸을 누일 대지는 대략 1.5m 눈 아래 가까이 있다.
이렇게 가까운 대지를 잊고 산다. 애써 잊으려 한다.
가까운 거리를 굳이 삥 둘러가는 것이다.
열심히 둘러가고 있는 것이다. 애써 둘러가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그 여정이다.
인생은 그 여정에 다름 아니다.
많은 이들이, 인생은 자연의 바깥에서 살다,
인생의 마감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사는 곳이 자연 아닌 곳이 없다.
그저 자연에 순응하는 길만이 인간이 가야 할 길이다.
인간이 갈 수밖에 없는 길이다.
그러니,
자연이 나에게 무언가를 베풀어(?)주기를 기대하지 말라
그것은 환상이다.
자연을 극복한다는 것은 하늘에 걸린 무지개처럼,
일시적 현상이거나 인간의 착각일 뿐이다
'자연으로 돌아오라'
'자연의 바깥에서 사는 이여 자연으로 돌아오라'는 의미가 아니다.
'자연속에 사는 이여, 깨어나라'는 뜻이다.
자연속에 사는 길,
스스로 자연이면서 애써 자연이 되고자 하는 길,
아침 이슬처럼살다. 이슬이 사라지듯 흔적없이 사라지는 삶
그것을 깨달아라
'生也一片浮雲氣(생야일편부운기),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
서산대사를 비롯한 많은 고승대덕말씀이다.
이 말씀 역시 자귀 해석대로,
인생이 한편의 구름이 생멸하는 현상같이 덧없음만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아니다,
제대로 깨닮음에 이른자라면, 아닐 수밖에 없다,.
'자연으로 돌아오라'
'자연속에 사는 이여, 깨어나라'
그 말씀 아니겠는가?.
내가 가야 할 길 역시 그 길이다.
그것이 영원한 길이다.
영원히 사는 길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 길만이 진정한 나의 길이 아니겠는가?
그 길만이 진정한 나의 길이여야 하지 않겠는가?
2015/08/13
靑野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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