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적막한 산내(山內)의 삶
1
그는
바람따라 홀연히 떠났다,
때맞춰 기세등등하던 가을꽃들마저 시들어,
낙엽에 앞서 갈길을 재촉한다
곧 낙엽도 지겠지?,
대지는 매서운 겨울바람의 놀이터가 되겠지?
우째, 작년 이맘때, 고구마밭 뒤엎고,
뒷산에서 성희롱에 열심이든 멧돼지들도,
나의 표효소리에 놀라서 인지
그때부터, 올해까지 일체의 기척이 없다.
산신령의 音功에 시겁을 한 놈들이
올해는 발길을 끊은 것일까?
그렇다면 간이 작은 놈들이다.
내 따위 고함 소리에 꼬리를 내리다니
아니면
간혹 남기고 가는
이상한(?) 인간들의 낌새 때문일까?
어째, 춥고 고요한 밤이되니
산골의 적막함이 더욱 가슴에 파고든다.
바람따라 홀연히 떠나버린
그의 빈자리 때문일지
발길을 끊은 산돼지마저 그리워지는 늦은 밤,
홀로. 몇병 안남은 냉장고의 술을 꺼낸다
그런 밤이다.그런 적막한 밤이다.
2
겨울비가
이틀째 추적추적내린다.
12월초 이른 아침
온통 잿빛의 세상속에 흰 안개만이 자욱하다.
봄안개 못지않는 흰 안개가
계곡과 산허리를 점령하고 있다.
짙은 구름이 햇살을 가렸으니 안개도 오래 머물 터이다
아직 나무에 달려있던 낙엽들이
비에 젖어 대지로 떨어진다.
마지막 입새들이 비에 젖어
무거워진 몸을 이기지 못하고
대지로 귀환하는 것이다
이 때가 되면
영양과 수분의 섭취가 시원찮아진 상록수들도
신세대를 위해 구세대들을 희생시키는 작업을 한다.
추위가 닥치면,
모든 입사귀들이 나눠 먹을 영양과 수분의 흡수가 줄어든다.
이를 대비해 세상을 오래 산 입사귀들 부터 희생시키는 것이다,
'정부 우세(頂部優勢)' 라는 말이있다.
정아(頂芽, 정수리부 씨의 눈) 발달을 촉진하고
측아(側芽)의 발달을 억제하는 현상이다.
상록수의 낙엽은
정부우세의 희생양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불리한 것을 희생하여
우세한 것을 계속 가꾸고자 하는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초목은 자연의 섭리에 어김없이 순응한다
인간만 이 섭리를 허물고자 부단히 발버둥 칠뿐
하지만 인간과 초목은 결국 무덤에서 흙으로 만난다.
다음 생에서는 인간의 흙이 초목으로 다시 태어나고
초목의 흙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밑거름이 될 지 모를 일이다.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안개는 더욱 짙어진다.
이 비가 들고 나면
본격적인 추위가 닥칠 것이라 한다.
지금은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임에도
반갑고 편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다.
곧 불어닥칠 매서운 겨울바람과 추위에
당분간 맞서야 함을 알기에 마음이 무겁다.
이 기분을 떨쳐내는 데는 소주 한잔이 제격인데,
겨울들어 찾아든 목감기에 그마져 즐길 여유가 없다.
3
영하12!
冬將軍(동장군)이 찾아왔다.
前年(전년)의 영하20부근이 지속된 추위에 비하면
추위라 할 수 없다 하겠지만,
올 들어 처음 겪는 매서움에,
아직 내복도 챙기지 못한 아랫도리가 유난히도 썰렁하다.
주변 산과 계곡의 활엽수들은 낙엽을 잃고
앙상한 가지만이 매서운 골바람에 장단을 맞추듯 떨고 있다.
몇년째 冬魔(동마)의 침공에 온몸으로 맞서다보니
이제, 이 정도 공격은 가볍게 재낄 수 있는 내공이 쌓였다.
하지만,
'유난히 더운 여름이 지나면 유난히 추위가 닥친다'
라는, 기상예보 아닌 예언이 있기에
동마의 마수가 어떤 허점을 헤집고, 뻗여 올 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지구 북반구가 태양으로 가장 멀어지는 동지를 지나
한달이내에 대지가 식어 추위가 절정으로 치닫는다.
아직 봄을 떠올리기에는 너무나 아득한 세월이 남았고,
동마의 침공을 회피할 기회는 전무하다
이제부터 전쟁의 시작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에 애써 위안을 구하며
한 계절 내내 보내야 할지도 모를, 전쟁터로 비장하게 나섰다.
凍破(동파)을 방어하고,
초목의 凍死(동사)를 저지하고
독감을 물리치며
남방으로 기울었던 太陽神(태양신)이 돌어오는 내년 봄까지,
死力을 다해 버터야 한다
4
12월중순, 5박6일
비내리고 매서운 날들을
부산.마산.창원 인근 동네에서 지내다
산골집으로 돌아오니 주변이 새하얀 눈밭이다.
집을 비운 사이 첫눈이 내렸던 것이다.
한밤중 해발 600m 고개를
凍結(동결)된 채 넘어 귀촌 하나 했지만
다행히 눈의 양이 적은 지 큰 일은 없었다
비교적 제설이 잘 되어 있었던 같다.
지난 며칠 동안
98년, 근 1세기를 사신 장모님을 마지막 배웅하고
새 사람으로 온지 1년, 손주 돐을 환영했다.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
생과 사가 극명하게 갈리는 현장을
지켜 보았던 것이다
봄의 생기같은 손주의 재롱에 가려
겨울의 춥고 칙칙한 기분을 잠시 잊고 있었지만,
오랫만에(?) 집으로 돌아와 뜨락에 내려서니
겨울 달은 말없이
冬天(동천)의 어둠 틈새를 비집고
며칠동안의 外遊(외유)를 나무라는 듯하다
앙상한 가지가
밤하늘의 달을 가린다 한들 민망하다
엊그제 달려 있던 잎새들도
바람이 데려간 듯,
찬바람, 달빛 모두 흘러 보낸다
잎새를 그리워
가지는 울고 있다. 애처롭게 울고 있다.
달빛마저 흔들리는 듯하다
산허리 돌아
다녀가는 싸늘한 골바람에
가지가지마다 애처롭게 떨고 있는 마지막 낙엽을
山인들 우찌 보호하겠는가?
山이 저 모양인데,
나인들 어쩌겠느냐?
가지야 가지야
나랑같이 내년 봄를 기다리자
지금은 아득하지만,
머지않아 태양신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이 冬魔(동마)를 깨물어 저 멀리 좇아 버릴 때까지
적막함이 짙어지는 밤
바람도 숨죽여 잦아들지만
찬 기운에 더욱 손끝이 아리고 무릎이 시리다
이제 인생의 가을을 지나
겨울로 접어들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아직은
가야할 길이 멀어 보일지 모르지만
이제 가야할 길을 슬슬 준비해야 할 때인가 보다.
마음이 웬지 서글퍼 진다.
육십여년을 살았다면 많이 살았다
이제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편하게 생각하면
딱히 반가울 것도, 서글퍼 질 것도 없지만...
잠자리에 들어야 겠다
저 달마저 산너머 지기전에
2018년12월 18일
靑野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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