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수상잡록/자연으로돌아오라

행님도, '기구한 일생'이네요

by 靑野(청야) 2018. 3. 15.

  

<조적 작업>

<황토방 아궁이>


<별채 방바닥 배관>


<외부 페인트작업>



"행님, 처음 조적(組積) 하는 것 치고는 잘했네. 조적 일당쟁이 해도 되겠다. 12만원 짜리는 되겠는 데?"

우리집공사 책임자가 내가 쌓은 담장 보고 한 말이다.

조적(組積)은 돌이나 벽돌을 쌓는 일을 일컬음이다. 이분야 전문기능의 하루 여덟시간 일당은 약 20만원, 내가 12만원짜리 정도라니, 60% 수준은 된다는 말씀이다. '니는 안되겠다" 카는 낙제수준은 겨우 면했다는 말씀.

"행님, 큰 행님을, (다른 공사장) 조적 공사때 부릅시다" 동생뻘대는 공사인부가 거든다.

우리집 공사하는 멤버는 일의 프로세스 진행에 따라 2명도 되고 4명도 되기도 하는 데, 대부분 대현민국이라는 명칭의 밴드의 멤버들이다. 울산.부산. 경남 일원에서 이곳으로 이민온 자들의 모임이다. 작년말 모임에서 내가 회장(?)하라꼬 강제로 추대되었다. 우리 밴드회원이 우리집 별채와 황토방을 짓는 것이다. 별채는 창고를 방으로 개조하는 작업이다. 4월말이 완공 목표다.

"행님은 우째 이 산골짜기로 오게 되었소?"

산내에 정착한다고 용쓰고 있는 나를 무척 궁금해 하고 틈나면 물어본다. 연고도 없는 깊은 산골 동네에 터잡고 앉았으니, 내 입장이라도 궁금해할 만하다. 하지만, 몇마디로는 설명이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소이부답(笑而不答)하는 수밖에.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김상용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여기 산내 골짜기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 사연도 가가지다.

인근에 자연치유병원이 많아 요양겸 상주하는 인원이 많기는 하지만, 주민등록을 여기에 두고 주민이 된 사람들의 사연이 재미있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서글퍼지기도 한다. 기구한 인생들이 대부분이다

십수년전에 인근 도회지에서 사업하던 사람들이 일패도지 하여 몸만가지고 이곳으로 스며들어 당시, 촌집을 그저 공짜비스무리하게 사서, 이후로 열심히 노력하여 재기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회의 영악한(?) 사람에게 시달림이나 죽기살기 경쟁이 싫어 이곳으로 이민온 사람....

동생뻘 되는 인부는 동네 띠동갑되는 친구이다. 울산에서 학원을 경영하다 학부형들과 면담내지는 시달림에 진저리를 내어 학원을 세주고, 이곳으로 들어와 농사짓고, 소일겸 공사장 인부로 일하는 것이다. 일이 좀 고되어도 사람상대로 씨름하지 않으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단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그가 노동일을 그렇게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집 옆에 땅을 사서 자기 살집을 스스로 지어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소박한 꿈을 가지 50대이다.

공사책임자는 십수년전에, 한많은 사연을 안고, 이곳에 들어와 정착한 사람이다. 집짓는 일에는 면내에서 꽤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지금도 공사대금을 현금으로 줄 때 딸이름으로 된 통장으로 넣어준다. 자신의 이름으로 통장을 낼 수 없는 사정이 있는 사람이다.  그 속사정을 세세히 묻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아픔을 겪어서 그런지,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사람이다. 비슷한 연배이지 싶어, 한잔 마시면서 주민등록을 펴놓고, 선후를 가렸다. 1년차이로 내가 형뻘이였다. 그때부터, 바로 "행님아", 세이야" 하면서 친해지다 보니, 그 친구가 어울리는 이동네 건달(?)들과 간혹 몇번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된다.

서로 간에 '건달'로 부르는 이동네 건달팀의 건달 막내로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들과 나와 서로 마주치며 인사를 할라치면, "아이구 행님" 하면서 행님소리를 듣게 된다. 공사책임자인 건달동생의 바람잡이 때문이다. 그 만큼 내가 건달중에서도 나이가 든 축에 들어가는 것이다. 썩좋은 기분만은 아니다

이곳 토박이중에 '문복산 꿀사과' 로 인근에 유명한 사과 농원이 있다. 80대 노친네가 직접 사과농원을 경영한다. 사과를 사러가면, 언제나, '새댁, 엄마집이라 생각하고 들어온나"  기다리는 동안 굳이 거실로 들어와서 쉬었다 가라 한다. 그러고는 사과도 깎아내고, 커피도 타준다. 사과는 사는 박스 수량의 거진 1/3정도를 거져 얹어준다. 그렇게 정감있는 어르신들이다.

처음 거실로 들어간 날, 거실 구석진 벽에 왠 영문으로 된 학위기(?) 같은 게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래 "아드님인지, 따님인지 누가 유학을 다녀온 모양이지요", 물어봤다가 아뿔사, 마음으로 낭패를 당했다. 평생에 가슴 아픈 가족비사(悲事)를 건드린 것이다. 산골에서 농사를 지어 똑똑한 아들을 어렵게 미국으로 유학보냈더니, 박사과정중에 병으로 타계하였단다. 걸려 있던 그 학위기가 추서된 박사학위기인지, 석사 학위기인지 명확히 물어볼 엄두가 안났다. 한동안 방황하다 사과농원 경영에 묻어버린 그 아픔이, 수십년도 전의 일이라 덤덤한 채 이야기 하시지만, 그, 아픔은 고스란히 전해진다.

60여년전에, 언양에 친정이 있었다는 할머니의 부모님이, 먹기살기 힘들다면서, 꼬불꼴불 비포장 산길로  걸어서 종일 걸리는 이곳으로  딸을 버리듯이 시집을 보냈다며, 못먹고 살던 그때당시를 담담히 회상하기도 한다. 왠지 낯선 이방인을 그렇게 반갑게 안방 거실로 불러 들이며, 오리저거 싸모보고, '새댁'이라 부르며, 엄마집에 왔다 생각하라 하시던 할머니, 사과한개라도 더 얹져주려 하시자, '인제 고만' 하고 싶은 할아버지, 직접 그렇게 말씀으로 태클을 거시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사과박스를 챙기는 것으로 '덤으로 주는 것을 고만하라' 고 은근히 제어하시는 할아버지. 아직도 농사일을 직접하실 만큼 정정하다. 내나, 오리저거싸모나, 가까이 있는 분들을 잃은 아픔이 크기 때문이였을까? 잠깐이지만, 가슴에 아련한 슬픔의 파도가 밀려 왔다간다 이후로 그집의  저온 창고는 우리집 창고 인양, 수시로 이용하게 되었다. 

사과를 사서 나오는 길에 오리저거 싸모는 '새댁'소리 들었다고 좋아하기도 하고 어처구니 없어하기도 한다. 내가 놀릴때 짜증을 내면서도 크게 싫어하는 구석은 아니다.


이동네 토박이든, 이주자든, 감내하기 힘든 갖가지 사연을 극복하고 있어 그런지, 다들 물질적으로 그렇게 썩 여유롭지는 못한 것 같애도 마음 씀씀이들에서 된장국 같은 구수함이 흠씬 묻어 나온다.

하지만 모든 분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이른바 '악질분자'도 있다고 한다. 세계 최빈국중 하나이면서도 국민행복도는 세계1위의 부탄도 문명화의 여파로 점점, 예전 같잖아서 국민불만지수가 높아진다는 최근에 뉴스를 본적이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 살다보니, 이곳도 약육강식의 문명사회로 변질된 탓일까? 변질되는 과정일까? 간혹 공사 시켜놓고, 차일피일 대금결재 미루는 사람, 사소한 일에 시빗거리를 만들어 고자질하는 사람, 미투운동에서나 폭로될 법한 파렴치한 성범죄(?)가해자도 있었다고 전해지고, 나름대로 동네부자축에 드는 이들이 더 손까락질을 받는 경우도 있다. 손가락질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럴 듯하다. 하지만,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못들어 봤으니 일방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질투와 시기의 다른 표현이나 오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귀촌한 사람중에 "촌사람들이 더 무서워요" 하면서 조심하라고 경고를 하기도 한다. 산골이라 순박할 것 같지만, 여기도 사람사는 세상이라 그런지 요지경인 면이 있다.

공사기간내내 앞집 횟집에 대놓고 식사를 하지만, 때로는 우리쩨자 저거 싸모가 이곳에 있을 때, 간혹 집밥을 해서 내어 놓기도 한다. 중간중간 간식과 커피도 내 놓는 때도 있다. 그럴때면, 더 열심히, 하루 일과를 가뜩 채워, 성의를 보인단다. 우리쩨자 저거 싸모 이바구다. 그럴수록 비록 어영부영시간만 때우는 보조역이라도 나는 더욱 힘들어진다. 그들이 열심히 할수록 일의 진척을 반가워해야할 일이지만, 내몸은 더욱 피곤하니, 아이러니하다할 것이다.

담장을 쌓는 일은 예사 어려운 일이 아니다. 1~2m높이 담장이지만, 20kg이상의 돌담을 쌓아 위쪽 끄트머리를 밟아도, 돌이 움직여 위험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돌을 짤라내지는 못하더라도 요리조리 돌을 움직이며 가능한 서로 맞물려 지도록, 쌓아여야 한다. 옛건축물이나 제대로 된 건축물의 돌담보면, 서로 어긋지게 맞물리도록 쌓는다. 대부분의 돌을 필욯산 부위를  짤라내어 서로 맞물리게 쌓은 것을 볼 수 있다. 시골의 개인돌담을 쌓는 데, 못할 것도 없지만, 우리집 같은 경우에는 그렇게까지 할 순 없고 우짜던지 자연석의 생긴 모양을 잘 이용하여야 한다. 힘에 겨운 큰 돌을 곡갱이와 지렛대를 이용 굴리거나 뒤집ㄱ기도하고, 작은 돌을 사이에 끼우고, 자갈이나 흙으로 틈새나 돌이 자리잡도록 채우고 다져가면서 쌓아야 한다. 그 일을 쥔인 내가 수행한 것이다.

이전에 담공사 발주를 받은 사람이 돌담을 엉터리로 쌓아, 대지를 허공으로 날려 보낸 것을, 구거(작은 도랑)쪽으로 향한 향토방 구덕과 별채 보일러 놓는 장소를 좀더 넓게 확보 하기 위해 희생된 대지를 내가 탈환작전에 나섰기 때문이다.

나이들어 무거운 돌을 반복해서 취급하다보면, 손가락, 팔꿈치, 어깨근육이 100%로 무리로 이어진다. 작년 화단 주변 돌 작업하다. 어깨근육파열과 엘보를 경험했다. 그래서 인지 조적작업은 피할라 했는데,...


어느 하루 인부로 왔던, 70대 노인네, 늙고, 갸느린  장애의 몸으로, 대부분 곡갱이와 지렛대만을 이용하여 조적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었다. 하지만 보기보단, 생각보단 어렵다. 한동안 해매다, 한때 돌과 곡갱이와 함께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곡갱이 끝을 돌밑에 넣고, 힘껏 재껴서 돌을 움직여 구거쪽으로 이동시키다,  곡갱이 끝이 돌을 벗어나는 바람에, 구거쪽으로 떨어진 것이다.


별로 높지않은 언덕이기에 방심했었나? 스노우보드 선수처럼 1.5m 아래로 떨어질때, 찰라의 순간에 곡갱이를 던지며, 돌을 피하고,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두발로 비틀비틀 착지한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대단한 순발력이였다. 떨어짐의 위험에 당황하거나 겁에 질리는 마음보다. 엉뚱하게 아무 이상없이 착지한 순발력에 내 스스로 대견해진다. '순발력이 살아 있다' 는 뿌뜻함일지, 아직도 식지 않는 만용일지, 정신차리지 못한 어리석음일지?

요즈음 나이때는 발끝이 돌뿌리에 걸려도, 비틀거리던 때를 떠올리며, 돌과 같이 떨어졌거나 나딩굴어 졌다면 우찌되었을까? 시간이 자나면서 주제파악이 되면서 이후로 더욱 조심하여, 어쨋튼, 당일 분량의 조적을 어렵게 마무리 했다. 하지만, 오늘의 사고날 뻔한 일은 주변인들에게 비밀이다. 특히, 오리 저거 싸모에게는... 동생뻘 되는 인부처럼, 좋아하는 일터에서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당신는 당장에 걷어치워라' 카며 짤릴 일이기 때문이다.

그날은 기상관측이래 3월치고는 가장 더웠던 날이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어줍잖은 공사장 인부로 일한 것은, 담장 조적공사외도 외벽 페인트마무리 작업에다, 바닥배관 도우미, 미장공사 도우미...졸지에 현장공사장 인부로 전락(?)했다. 땀이 비오듯 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땀을 흘러야 할지 모를 일이다.

"행님, 일을 그렇게해서 밥먹고 살것소?"


평소에는 건달 선배라고 깍듯하면서도 간혹 공사중 진담겸, 농담겸 장난 같은 공사 책임자의 꾸중이 날아든다. ' 마무리가 시원찮으면 뒤에 쥔이 고생한다' 카면서.

"행님, 큰 행님도 기구한 인생이네요? 돈내고 욕들어 먹으니.(쯔쯔) "

듣고 있던 띠동갑 동생이 한마디 한다.

그동생 눈에는 내가 '기구한 인생'축에 드는 모양이다. 물론 농담이지만, 어째 생각하면, 내 스스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현장 일로 다져지지 않은 근육이 해그름이 되자 욱씬거리기 시작한다. 몸살이 나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 나이에 일로 근육이 새로 생길 일도 없을 게고, 그래도,  공사 끝날 때까지 수시로 중노동(?)을 해야할 것 같다. 그러나 다행이랄까? 작년 조적 중노동할 때보다 적응력이 생기는 느낌이 든다. 몸살까지는 가지 않을 것 같다. 내몸이 나를 믿지 못하고 어쩌면 몸살까지 가지 않도록, 스스로 자신을 조절하였을 지도 모른다. 작년에는 전적으로 내 따라하던 몸이 몸쌀로 고생하기 일쑤였다. 언제까지 내몸이 스스로 조절할지 모르지만 일단 다행이다. 앞으로의 일에도 내몸이 몽니부리지 않도록 달래가며 부려야 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내몸과 대화하는 경지에 온 기분이다.

올 봄에 인근에는 전원주택이 100여채 지어지고 있다 한다. 인근 도회의 베이비 붐세대들이 은퇴시점이라서 그렇다나? 점심때가 되면 공사판 인사들이 앞집 횟집에 모여들어 들끓는다. 떠들석하는 소음속에 들려오는 말이다. 하지만, 비나 눈오는 날이면 인부들은 간곳없고, 간혹 공사장 책임자들이나 나같은 발주자나 백수들, 주변 펜션 사장들은 일을 쉬고, 종일 술로 세월을 보내는 경우가 있다. 일하면서 쌓인 근육의 앙금이나 마음의 앙금도 풀고, 격려하기도 하고, 그동안 못했던 소통의 기회이기도 하다. 얼핏 영화에서나 보던, 말로만 듣던 미국서부개척시대분위기가 이랬을란가?

이른 봄이 지나간다고, 촉촉히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아지지만, 지난 겨울 추위 여파로 남해안 지역보다 이곳은 봄기운이 이르다. 아침저녁으로 냉기가 꽤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계곡에 개구리 짝부르는 소리만은 요란하다, 곧 봄이 무르익어 봄꽃과  새순이 만발하겠지?

작년에는 농업대학 다닌다고, 올해는 집짓는 일로 느긋이 농촌 생활을 즐길 틈이 없다. 이제 봄농사 준비를 해야하는 때이다. 엇그제까지 지긋지긋한 추위를 피해 봄날이 오가를 학수고대 했는 데, 벌써 3월중순이다. 텃밭을 일구고, 거름주고, 울타리를 새롭게 단장해야 한다. 하지만, 아직 봄 농사 를 준비할 엄두도 못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봄이 빨리 가기만이 기다려진다.

"아직은 공사중'이지만, 동네 동생의 말마따나, 돈주고 사서 중노동(?)에 시달리는 '기구한 인생'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바램이 더 크기 때문일까?

오늘따라 산개구리 짝찾는 소리 더욱 요란스럽게 들린다.



'수상잡록 > 자연으로돌아오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란희'와의 투쟁  (0) 2018.05.27
전원일기  (0) 2018.05.10
오, 산개구리소리  (0) 2018.03.14
山內건달에 入門하다  (0) 2017.12.12
산신령이 되다  (0) 2017.10.1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