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중부 포키스 지방에 있었다는 고대도시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
BC 6세기에 세워져, 아폴론의 신앙과 신탁은 당시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BC 4세기의 것>
[도덕경 33장]
知人者智(지인자지), 사람을 아는 자는 지혜롭고,
自知者明(자지자명), 자신을 아는 자는 현명하다.
勝人者有力(승인자유력), 남을 이기는 자는 힘이 있는 것이고,
自勝者强(자승자강), 자신을 이기는 자야 자는 강하다.
知足者富(지족자부), 족함을 아는 자가 부유한 것이지만,
强行者有志(강행자유지), 강행하는 자는 의지가 있는 것이다.
不失其所者久(부실기소자구), 자신의 자리를 잃지 않는 사람이 오래가는 것이고,
死而不亡者壽(사이불망자수), 죽어도, 잊혀지지 않는 자가 오래사는 것이다.
주) * 死而不亡 : 形體(형체)는 죽어도 道(도)는 망하지 않음
[사람을 아는 자는 지혜롭다 하겠만, 자신을 아는 자는 현명하고, 명철하다 할 것이다. 남을 이기는 자가 힘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자신을 이기는 자야 말로 강하다 할 것이다. 만족함을 아는 자가 부유한 것이지만, 그자리에 머물지 않고, 그 부유함에 안주하지 않고, 끝까지 행하여 관철하는 자는 강한 의지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잃지 않는 사람이 오래 가는 것이고, 육신의 형체는 죽어도, 잊혀지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되는 자가 오래사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아라'
소크라테스가 자주 사용하던 경구라 한다. 그리이스 델포이 신전 바위벽에 새겨져 있던, 말로 알려 져 있다. 이 귀절을 비롯하여, ‘참고 견디며 겸손하라.’ 등 당시 시절 유명했던 철학자의 격언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는 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한다. 이 귀절이, 소크라테스가 이 신전에서 신탁으로 받은 것인지, 소크라테스의 자신의 명언인지, 불분명하다만, 어찌되었던, 그가 당시 憂民敎化에 자주 사용하였던 모양이다.
이 경구는 이후, 동서고금에서, 속되게는 ,'너 주제나 제대로 파악해라' 라는 부정적 의미로도 이용되고, '너의 존재가치를 제대로 알라. 너의 가능성을 너 안에서 찾아라' 는 긍정적 의미로도 많이 사용된다.
아무래도, 부정적 의미보다는, 자기고백과 철저한 자기 반성을 통해, 자신에게 잠재된 가능성을 발견하고, 극대화하라'는 메세지를 전하는 것이, 老子급 성인으로 추앙받는 소크라테스의 원래 의도일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老子도덕경 역시. '상대(사람)를 알아라, 그것은 지혜로운 것이다. 하지만, 너 자신을 알아라 그것이 더욱 현명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고금의 성인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무언가 통하는 것이 있나보다. 당시, 그리스나 老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나 백서본이 쓰여졌던 전국시대의 주나라 철학자들 사이에 사상적 교류가 있었던지, 아니면, 세상이 아무리 변해간다해도, 인간세계를 이루고 지탱하는 기본인 윤리, 도덕의 근본바탕은 동일하다 것을 시사한다..
'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
'상대(적군)를 알고 나(아군)를 안다면 백번 싸워도 이길 수 있다' 즉, 상대를 아는 지혜와 자신을 아는 현명함이 있다면, 대응준비도 철저히 하고, 무리한 대응도 회피하니, 언제나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손자병법의 논리도 여기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임진.정유 왜란에서 海戰에서, 이순신 장군도, '知彼知己' 했기 때문에, 亂中全勝을 이끌기도 했지만, 왕명을 이행하지 않아, 잠시, 백의종군을 감수해야 했던 적도 있다. 왕명을 지켰더라면, 그 전쟁에서 패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장군은 상대인 왜구의 세력을 잘 아는 지혜를 바탕으로, 조선수군의 취약점을 알아, 보강하고, 지리적 있점을 잘 활용하는 전략을 세우는 현명함이 있었고, 왜구와 싸울 때마다 쳐부셔 승리하였고, 자신에게 닥쳐온 백의종군 시련을 잘 극복하며, 전승을 거두고, 조선을 구한 것이다.
<왕필본>
知人者智, 自知者明,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知足者富, 强行者有志,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백서본>
知人者, 知也; 自知者, 明也.
勝人者, 有力也; 自勝者, 强也.
知足者富,强行有志.
不失其所者久,死而不亡者壽.
본장은 초간본에는 없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왕필본, 백서본의 글들이 거의 일치함을 본다. 내용도 그리 난해하지 않고 평이하다.
'누군가를 안다' 는 것은 참으로 주관적이다. 대부분 내 목적, 내 이익에 부합하도록 사람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래서 내가 그를 안다' 고 자부하지만, 대부분 내가 알고 있는 기준에 벗어난 행동을 하는 상대를 보면, 과대평가하는 경우도 있고, 실망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내 주관의 창으로만, 그를 봤기 때문이다. 내 창틀을 벗어난 상대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헀으면서도, 상대를 다 본듯이 착각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제대로 알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知人者智, 自知者明, '
하지만, 내가 상대를 알아야 할 목적이, 나를 위한 것이나, 내가 바라는 것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를테면, 나를 버리면, 그 목적을 위해,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에게 구할 필요가 없으니, 기필고 알아야 할 것이 없어진다. 그러면, 자연스러운 상태로, 상대를 상대로 인정하고, 상대를 받아드리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이 사람을 아는 자는 지혜롭다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을 지혜롭게 아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을 먼저 알아야 한다. '너자신을 알아라'는 것은 너의 지식과 사고의 창틀로 보는 세상은 그 창틀의 크기로 한정된 좁은 세상이다. 그러니 너의 창틀 크기를 깨달아라. 그리되면 세상의 극히 일부만을 보고 있는 너의 수준을 알게 될 것이다. 세상이 넓다는 것을 안다면, 어찌 그런 창틀을 고수 하겠는가? '너 자신을 안다' 는 것은 그런 창틀을 알고 그것에 머물르라는 것이 아니다. 너자신을, 너의 지식과 사고의 한계을 알았다면, 그것을 극복하고 그 틀에서 빠져 나오라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아는 자의 현명함이요 명철함일 것이다.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그래서, 흔히들, 겨루어서 남을 이기는 자가 힘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자신을 이기는 자, 자신을 제대로 알고 그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자, 아픔과 고통을 감수하며, 자신의 틀을 깨고 나오는 자야 말로, 진정으로 강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 그것이 쉬우랴?
'知足者富, 强行者有志'
그러니, 만족함을 아는 자가 부유한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그 부유함에 안주하지 않고, 비록 만족하지 않아 부유하지 않을 지라도, 자기만의 세상에 둥지를 틀지 않고, 자기 껍질을 깨는 아품을 감수하며, 끝까지 행하여 관철하는 것도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不失其所者久,死而不亡者壽'.
남을 알고, 자신을 알아, 그 바탕위에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잃지 않는 사람이, 오래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고, 육신의 형체는 죽어도, 잊혀지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되는 자가 오래사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백성을 위해, 임금을 위해, 자신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였고, 그것이, 온갖 모함과 불합리한 왕명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길게 보아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장군이, 자신해야할 그 자리를 잃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까지, 죽어도, 잊혀지지 않고 있으며, 오래도록 추앙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古來로, 성현과 영웅들이 명멸해갔지만, 이순신장군의 일생이야 말로, 노자 도덕경 33장에 딱 들어맞는 일생을 살다간 사람중에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노자도덕경, 백서본을 쓴이가 '이순신 장군의 일생을 지켜보고 이 귀절을 썼다' 싶을 정도로, 이 귀절에 충실한 삶의 모습이다. 어쩌면, 장군이 노자 도덕경 30장, 31장에 이어, 33장을 읽고 몸소 실천했을 법도 한 것일 수도 있다.
'너 자신을 알아라'
이것은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 어렵다' 것을 방증기는 하지만, '自知者明'이라, 자신을 제대로 앎으로써 현명해져야 한다는 것으로, 이찌보면, 이 단순한 경구가 델포이 신전의 신탁, 노자 도덕경에서 부터, 오늘날을 거쳐 먼 미래로, 인류 사유세계의 화두로서, 면면히 이어지게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지식과 정보는 풍부해지고, 문명이 발전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인간과 자연과의 遊離(유리)를 더욱 가속시키기 때문이다. 자신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은, 인간개개인을 넘어서, 인간사회전체에 대해 울리는 경종이라는 생각하는 것이다.
'地治人, 天治地, 道治天, 自然治道' 라
인간의 이기심이 자연을 어지럽히지만, 자연을 우습게 볼 일이 아닌 것이다. 자연이 도를 다스리고, 도를 통해 천지를 다스리고, 천지를 통해 인간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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