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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동양철학/老子別義(上)

老子別義(上)_32장_道常無名(도상무명)

by 靑野(청야) 2013. 10. 2.

 

<宇宙圖>

 鐘처럼 생긴 제일 밑단 한점으로 수령하는 곳이 우주탄생 0시점에서

종으로는 상부 인간모습까지 시간축으로 137억년이 흘렀고,  

인간의 모습에서 횡으로는 공간축 즉 우주의 반경 약 470억광년을 나타내고 있다.

출처:일본문부과학성, 2007년

 

[ 도덕경 32장 ]

道常無名(도상무명), 도는 영원히 이름을 붙일 수 없다.
樸, 雖小(박, 수소), 통나무처럼 소박함은, 비록 보잘 것 없지만,
天下莫能臣也(천하막능신야), 천하에 이것을 부릴자 없다.

侯王若能守之(후왕약능수지), 제후나 왕이 이것(소박함)을 지킬 수 있다면,
萬物將自賓(만물장자빈), 만물이 스스로 따르게 될 것이고,
天地相合(천지상합),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화합하여,

以降甘露(이강감로), 감로를 내릴 것이고,
民莫之令而自均(민막지영이자균), 백성들은 명령없어도 스스로 알아서 할 것이다.

始制有名 (시제유명),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면,
名亦旣有(명역기유), 이름이 이미 있게 되므로,
夫亦將知止(부역장지지), 무릇, 멈출줄을 알아야 한다.
知止, 可以不殆(지지, 가이불태) 이를 알면, 위태하지 않을 것이다.

譬道之在天下(비도지재천하), 이를테면, 도가 천하에 존재하는 것은
猶川谷之於江海(유천곡지강해) 마치 계곡의 물이 강과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것과 같다.

주) * 樸 : 순박할 박-> 순박하다, 질박하다, 꾸민 데가 없이 수수하다, 통나무
     * 雖 : 비록 수, 짐승이름 유-> 비록, 아무리 ~하여도, 그러나, . 도마뱀붙이
     * 莫 : 없을 막, 저물 모, 덮을 멱-> 없다 말다, ~하지 말라, 불가하다 , 꾀하다(=謨)
     * 名 : 이름 명->이름, 평판, 소문, 외관, 외형, 명분, 공적
     * 將 : 장수 장, 장차 장->장수, 인솔자, 장차(將次),문득, 청컨대, 무릇, 대저
     * 賓 : 손 빈->손, 손님, 사위, 대접하다, 복종하다, 따르다, 인도하다, 따르게 하다
     * 均 : 고를 균, 운 따를 연-> 고르다, 평평하다, 가지런히 하다, 조절하다
     * 譬 : 비유할 비->비유하다, 설명하다, 깨우치다, 깨닫다, 이를테면
     * 猶 : 오히려 유,움직일 요-> 오히려, 가히, 다만, 이미, 크게, 지나치게, 마땅히

[도는 영원히 이름을 붙일 수 없다. 통나무처럼 소박함은 비록 보잘것 없지만, 천하에 이 소박함을 마음대로 (신하로)부릴 자 없다. 제후나 왕이 이 소박함을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스스로 따르게 될 것이고,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화합하여, 감로를 내릴 것이다. 백성들은 명령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잘 알아서 할 것이다.

통나무를 다듬고 나면, 이름이 생기고, 이미 이름이 생기고 나면, 통나무의 소박함을 잃게 된다. 그러니 굳이 통나무를 다듬어 구별하는 것을 멈출줄을 알아야 한다. 이를 알아, 굳이 이름을 붙이고, 구별하여 소박함을 잃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위태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도가 천하에 존재하는 것은 마치 계곡의 물이 강과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것과 같다 ]

아인시타인은 '모든 과학의 제1법칙은 엔트로피법칙이며 모든 법칙이 다 깨어져도, 우주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법칙이다 '이라고 말했다. 아인시타인의 상대성이론을 검증하는데 역활을했던 영국의 천체물리학자인 아서 에딩턴은 '엔트로피의 법칙은 전 우주를 통틀러 최상의 형이상학적 법칙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엔트로피 법칙이란 무엇인가?  열역학 법칙에는 4가지가 알려져 있다. 이른바 열역학 제1법칙으로 불리 것으로 '우주안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불변' ' 즉 총에너지 불변의 법칙' 이라는 것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물질과 에너지는 새로이 창조될 수 없다, 단지 그 형태만 바뀔 뿐이다'는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은 ' 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변한다'. 즉 '이 우주내 물질과 에너지는 유용한 상태에서 무용한 상태로, 질서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만 변한다'는 법칙이다. 이는 일명 '엔트로피법칙'이라 한다. 열역학  제3법칙은, '절대영도(-273.15℃)에서 엔트로피는 가장 낮은 상태의 일정한 값을 갖는다'는 법칙이다. 4번째법칙은 가장 기초적이지만, 뒤늦게 정의되어 이른바 ' 열역학 제0의 법칙'이 라 불리는 법칙이 있다. '물질 A와 B가 열평형이고 물질B와 C가 열평형이면 물질 A와 C도 열평형이다’ 라는 법칙이다. 열평형이라는 것은 열의 이동이 없는, 즉 온도가 같다는 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이야말로 '모든 것이 변한다(제행무상)' 는 것을 나타낸다. 현대과학자, 고대철학자 모두, 이 우주에서,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아인시타인의 말대로, 우주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이론은 '엔트로피 법칙' 일 것처럼 보인다. 고대철학자들은 과학적 지식의 뒷받침없이, 깊은 사유만으로 이미 엔트로피법칙, 우주의 마지막 법칙, 최상의 형이상학적 법칙의 원형을 꽤뚫고 있었던 것이다.

아인시타인 시절에는 아직 Multiverse(다중우주) 개념이 철학적 수준에 머물렀지, 과학적 이론으로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다. 당연히, 고대의 철학자, 사상가들에게, Multiverse개념이 없었다. Universe적 사고에 머물렸던 것이다 Multiverse(다중우주)개념이 등장한 현대 우주론에서, 즉, M이론에서는 역학계가 다른 우주에서는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들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중우주론이 나오자, 창조론 신봉자들은 '정교한 우주가 저절로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빅뱅 이론가들은 다중 우주론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이 설계의 개념을 우회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 다중우주론은 과학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난 이론이며, 무신론적 우주론을 지지하기 위하여 과학의 옷을 입고 나온 신념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요컨데, '정교한 우주가 저절로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중우주론은 무신론적 신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주과학자들은, '정교한 우주가 저절로 발생할 수 없다'는 논리야 말로 신념일 뿐이며, 다중우주론을 태동시킨 과학적 배경와 발전의 과정을 제대로 모르는 무지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우리가 확증할 수 없다해도, 이론적으로 추론 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추론하고, 그 추론을 검증하는 과정 역시 주요한 과학의 영역에 속한다.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해서 '그것은 신념일 뿐이다' 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의 입자라 불리는 힉스입자'가 대표적인 추론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존재가 증명되어, 노벨상까지 받았다. 그러니, 검증되기 전까지의 이론은 신념일 뿐이라는 것은 비논리적인 어거지에 가깝다는 것이다. 古來로 검증이 끝나, 어거지라는 것이 밝혀지면, 과거의 어거지를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집요하게 또 다른 어거지의 틀을 만들어 왔다. 과학의 발전의 역사는 이런 어거지를 타파하고 증명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이어져 왔다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거지라 한들, 끊임없이 과학발전의 動因으로 작용한 것을 보면,  꼭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닌듯 하다.    


'우주는 무한하다'. '태초는 비어 있었다'는 식의 노자식 사유는 Universe적 사유라 생각된다. 반면에 불가에선, '諸行無常' 즉, '만물은 변한다고 한다. 영원히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뜻이다. '無始無終(무시무종)', 우주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생겼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 다시 생겨나기를 무한 반복한다는 불교의 우주관은 다중우주관이기는 하지만, 현대물리학이 우리 우주가 여러 우주중의 한 모습이라는 다중우주론과는 다르게, 불교의 다중은 時계열적으로 우리 우주가 무한히 생멸을 반복하는 다중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변한다' 는 제행무상의 논리 대로라면, 진리도 변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변하지 않는 것일까? Universe적 사고에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는 개념을 도출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이야기이다.

'無란 무엇인가?' 無는 없음이다. 그것이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 '없음'이 절대적이기 위해서는 없음 즉 '無의 存在'마저도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無'라는 것은 '상대적 무'이다. 그렇다면, 절대적 없음 즉 '절대적 무'는 어떤 상태를 말함인가?

'영원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변한다는 것이 '영원한 것'인가? 변하는 것은 현상일 뿐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하지만, 불변의 진리는 절대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면, 불변하는 것, 즉, 영원한 것이 어찌 존재할 수 있겠는가?

노자의 無中生有의 無는 상대적 무이다. 장자나 유가의 태허,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는 우주진공 역시 상대적 무의 개념이다. 태초의 시작, 물질의 시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절대적 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이미 절대적이 아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이 절대적이라면, '모든 것이 변한다'는 진리도 변해야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는 존재하는가? 이름을 붙일 수 없다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도는 존재하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인가? 도가 변한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하지만, 엔트로피법칙, 불가의 제행무상, 현대물리학 모두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포함되는 도는 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가 변한다면 그것은 이미도가 아니다. 그러니, 노자는 Universe식  사유의 한계를 보인 것 아닌가? 아니면, '도'의 개념이, 오히려, Multiverse식 사유를 뛰어넘는 대자연의 지배원리로서 경지를 말함일까? .

<왕필본>
道常無名, 樸, 雖小, 天下莫能臣也,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天地相合, 以降甘露, 民莫之令而自均,
始制有名, 名亦旣有, 夫亦將知止, 知止, 可以不殆
譬道之在天下, 猶川谷之於江海

<백서본>
道恒無名,樸. 雖,天地弗敢臣.
侯王能守之,萬物將自賓. 天地相合, 以輸甘露. 民莫之命而自均.
始制有名. 名亦旣有,夫亦將知止, 知止所以不殆.
譬道之在天下也,猶小谷之與江海

<초간본>
恆亡名,, 天地弗敢臣
侯王能守之, 萬物將自賓。天地相會也, 民莫之命而自均焉
有名,名亦旣有, 夫亦將知止,知止以不殆。
道之在天下也, 猶小浴之與江海。
 
주) * 朴 ->僕의 이체자
     * 唯 ->雖의 이체자

왕필본 백서본, 초간본 모두 이체자는 존재해도 문장 구성과 뜻 모두 대동소이하다.

본장은 첫귀절에서부터, 도덕경 1장 에서 선언한 귀절,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 를 이어받는다. 즉, '도에 이름을 붙이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도는 영원히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도는 무위자연의 원리이기 때문에 천지를 다스리지만, 통나무처럼 소박하다. 통나무는 나누지 않아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듯이 도역시 구별을 짓는 이름이 없이, 통나무처럼 그저 소박할 뿐이다. 하지만, 이 소박함을 천하에서 마음대로 부릴 자 없다.

제휴나 왕이 이 소박함을 지킬 수 있다면 즉 이 도리를 알아, 만물을 대하고, 백성을 다스리게 된다면, 만물이 스스로 따르게 될 것이고,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화합하여, 감로를 내릴 것이다. 즉, 하늘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 다시말하면, 하늘과 땅의 기운을 깨뚫어 보는 지혜로, 거기에 순응하며 처신하니, 어찌, 천지조화의 혜택을 받지 않겠는가? 그러니, 백성들은 명령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잘 알아서 할 것이다. 그 방법은 爲無爲(위무위)의 다스림이다. 즉 함이 없이 하는 것이다.

통나무를 다듬고 나면, 이름이 생기고, 이미 이름이 생기고 나면, 통나무의 소박함을 잃게 된다. 그러니 굳이 통나무를 다듬어 구별하는 것을 멈출 줄을 알아야 한다. 이를 알아, 굳이 이름을 붙이고, 구별하여 소박함을 잃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무위자연의 도리를 벗아나지 않고, 만물이 따르지 않거나, 백성을 억지로 다스려야 하는 그런사태에 이르지 않게 될 것이다.

이 도리는, 마치 계곡의 물이 강과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도는 그렇게 천하에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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