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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동양철학/老子別義(上)

老子別義(上)_35장_執大象也(집대상야)

by 靑野(청야) 2014. 1. 7.


<거제출신 세계적인 사진작가 김아타의 작품 '도덕경'

도덕경 5290자 한자한자 이미지를 중첩하니, 뜬 구름같이 변했다.

경전의 글자가 사라졌다하나, 말씀이 사라졌다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글자의 실체는 중요하지 않다. 도덕경을 남기고,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노자의 독백을 형상화 했다는 의미는 있을랑가?>


[도덕경 35장 ]

執大象(집대상), 큰 상을 잡게 되면
天下往(천하왕), 천하가 다가간다.
往而不害(왕이불해), (천하가) 다가 가나 해로움이 없고,
安平太(안평대), 안락하고 평화로움(걱정없고 탈없음)이 크다.
樂與餌(낙여이), 음악과 음식은
過客止(과객지),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하지만,
道之出口(도지출구), 도가 입밖으로 나오면,
淡乎其無味(담호기무미), 담백하여 맛이 없다
視之不足見(시지불족견), 보아도 보이지 않고,
聽之不足聞(청지붤족문), 들을려해도 들리지 않지만,
用之不足旣(용지불족기).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다

주) * 象 : 코끼리 상->코끼리, 꼴, 모양, 상(像), 이미지
     * 往 : 갈 왕->가다, 보내다, 향하다, 돌아가다
     * 與 : 더불 여, 줄 여->더불다, 같이하다, 참여하다
     * 餌 : 미끼 이-> 미끼, 먹이, 경단, 음식
     * 旣 : 이미기->이미, 벌써, 이전에, 원래, 처음부터, 다하다, 다 없어...
     * 安平: 걱정이나 탈이 없음


[거대한 천지만물의 상을 잡게 되면, 천하가 다가간다. 천하가 다가가나 해로움이 없고, 걱정없고 탈없음 즉, 안락하고 평화로움이 크다. 음악소리와 음식은, 지나가는 손님의 발길을 멈추게 하지만, 도를 말로 이르면, 담백하여 맛이 없다. 도는 보려고 해도 볼수 없고, 들을려 해도 들을 수가 없다. 아무리 사용해도 다함이 없다. 즉, 다 쓸 수가 없다]

'吾言甚易知, 甚易行, 天下莫能知, 莫能行(오언심이지, 심이행, 천하막능지, 막능행), 言有宗, 事有君, 夫唯無知(언유종, 사유군, 부유무지)'

'나의 말은 심히 알기쉽고, 행하기 쉬우나, 천하는 능히 알지 못하고, 행하지 못한다. 나의 말에는 근원이 있고, 나의 일에는 근거가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나를 알지 못한다 (욕망과 영리에 현혹되었기 때문이다)'

노자가 도덕경 70장에서 말했다.

당시 노자시대 사람들도 노자의 말씀에 어려움을 느끼고 투덜거렸던 모양이다. 노자를 상대한 사람이 왕후장상(王候將相)을 비롯하여 내노라하는 글쟁이, 학자들도 있었을 터인데, 그 시대 그 문화에 젖어있던 당대의 사람들마저 어렵다 했으니, 이렇게 경전속에서까지 언급하지 않았을까?

사실은 왕필본 70장은 초간본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직접노자가 한 말씀이 아니고, 개작자가 추가한 것일 수 있다. 그렇더라해도, 노자 도덕경를 개작하여, 도덕경 속에 포함시킬 수 있는 자라면, 거진 노자 수준으로 도를 통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수준의 도사가, 경전의 말씀으로 올릴 정도이니, 당시 도덕경을 공부하는 識者들사이에도 '도덕경이 어렵다'는 말들이 많이 돌고 있었나 보다.

그러니, 오늘날, 나같은 비 전문 아마추어의 어려움은 짐작하고도 남지 않겠는가?

노자가, '나의 말에는 근원이 있고, 나의 일에는 근거가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나를 알지 못한다(욕망과 영리에 현혹되었기 때문이다)'라고'  자신의 말씀을 '천하가 능히 알지 못하고, 행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밝히고 있으니, 나로서는 감히 어렵다고 입밖으로 내뱉지(出口하지) 못하겠다. 그리하면, 나역시 떠리미로 욕망과 영리에 현혹된 자가 되지 않겠는가. 고약한 늙은이 심뽀가 시공을 초월하여 나를 놀리는 것 같다. 70장에 가서 다시 해석의 難易에 대해 언급할 것이다.

<왕필본>
執大象,天下往,
往而不害,安平太,
樂與餌, 過客止,
道之出口, 淡乎其無味,
視之不足見,聽之不足聞, 用之不足旣.

<백서본>
執大象, 天下往.
往而不害, 安平.
樂與餌, 過客止.
故道之出: 淡呵其無味也.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而不可旣也.

<초간본>
執大象,天下往,
往而不害,安坪,
樂與餌, 過客止,
故道[之出]:淡,其味也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而不可旣也

노자 전편이 다 그렇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본장 역시 해석하기에 참으로 어려운 문장이다. 문자 개개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몇 줄 안되는 문장의 전모와 의미의 연결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노자가 설하려는 바를 그려내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본장에 련된 초간본, 백서본, 왕필본 대부분이 구조와 내용이 일치한다. 다만, 초간본, 백서본의 道之出言이 왕필본에서 '道之出口'로 바뀌었는 데, '말씀(言)'은 '입(口)'에서 나오니, 도가 입밖으로 나오면, 즉 도에서 나오는 말, 도에 대해 말로 이르는 것'등의 해석을 할 수 있으나 '도를 말로 이르는 것' 과 같은 뜻이 되겠기에 본장은 이로서 해석한다

본장의 핵심화두이면서, 해석의 어려움은 첫구절 '執大象'에 집중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연결하느냐에 따라 나머지 해석이 달라진다.

'執大象, 天下往'에 '대한 어떤 이의 설명을 들어보자,

[집(執)'에 해당하는 글자는 초간문에서 '설(埶)'인데, 구석규는 이것을 '설(設)'로 읽어야 한다고 하였다. 위계붕은 이에 근거하여 '대상을 베푼다〔設大象〕'는 말을 '설상'이라는 주나라 제도와 관련해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주나라에서는 현행법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매년 정월 그 해의 법을 써서 상위(象魏: 궐문)에 내걸고 백성들이 보도록 하였는데 이것을 '설상'이라고 한다.  나라에서 '설상'을 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기 위해 궐문으로 모여들었다. '대상을 베풀면〔設〕 천하가 그에게로 간다'는 말은 바로 이런 제도와 관련된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인 '음악과 음식은 과객을 멈추게 할 뿐이다'는 말은 곧 '설상'이라는 정월의 큰 행사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기 때문에 당연히 음악도 있고 음식도 있지만, 음악과 음식은 잠시 사람들을 머물게 할 뿐이다]

고 설명한다는 것이다

주) * 魏啓鵬(위계붕) : 사천대학 역사학과 교수 겸 사천성 민속학회장, 중국 현대 철학자
     * 裘錫圭(구석규): 중국의 갑골문 연구분야의 권위자,베이징대학교수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부분은 노자가 애써 표현하려는 '執大象'을  조화롭게 풀어내는 것은 아닌것 같다. 어떤 해설(최재묵의 초간노자)에서는 '埶'을 '執'의 착오자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왕필이 이를 교정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전문가들사이에도  많은 해석상의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象' 이란 무엇인가? '象' 은 '像'이다. 像은 모습, 형상을 뜻하는 것이다.

본문의 '象' 에 대해서, 야오간밍의 노자강의(p50)에 의하면, '당시 허난지역을 포함한 중원에 많은 코키리(象)가 있었는 데, 그것이 사라지면서 코키리로 부터 얻어지던 재료가, 귀해지고, 급기야 코키리 자체가 귀한 동물로 여겨져, 후세 사람들이 그리워했다는 것이다. 想象(상상)이라는 단어도 코끼리를 그리워한다는 본래의 뜻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도덕경 4장에 '象帝之先(상제지선)' 즉, '(도는) 조물주보다 먼저 있었던 것 같다'라는 말이 나온다. 象帝는 上帝라는 뜻이다. 당시 춘추전국시대에는 글자수가 약 3,300여자로 제한되었으니, 같은 글자체를 사용해도, 뜻은 영판틀린 경우가 많았다. 즉 뜻의 입장에서 보면, 같은 뜻이라도 글자체를 빌려썼기 때문에, 모양이 틀리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이를 異體字(이체자)라 하는데, '象'은 '上' 이나 '像'이라는 글자로 쓰임이 분화되었거나 '上' 이나 '像'이라는 뜻을 표현하는 데,  '象'이라는 글자를 사용했다.

도덕경 70장의 말씀 따나, 가뜩이나 '나의 말을 천하가 능히 알지 못하고, 행하지 못한다' 고 하는 데, 이와같이, 깊은 훈고학적, 역사적 지식 배경이 있어야 하다니, 古典을 해석한다는 것이 예삿일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경전을 해석하는 데, 상당한 훈고학적인 지식이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본래 聖賢들이 의도하는 바를 깨닫고 실천한는데는 꼭 이런 지식적 배경만이 해결해주는 것이 아닌 것이다. 문자는 동기나 화두를 제공할 뿐, 진정한 깨달음은 문자로 설명만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권의 책을 읽어도, 진정한 깨달음에 다가가지 못한다'는 聖賢들의 한탄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리라. 그말은 역으로, 진정한 깨달음은 '책을 많이 읽음'에 크게 지배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多讀이 필요조건은 되지만, 필요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多讀이 능사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니 앞서의 위계붕과 구석규의 설명처럼, 훈고학적인 지식이 총동원되어, 그럴듯하게 해석을 내놓았으나, 오히려 넘치는 지식으로 너무 경전의 의미를 왜소화하는 우를 범한 것이 아닌가 한다. 경전은 자귀에 얽힌 해석도 중요하지만, 전하고자하는 전체적인 그림(像)과 의도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노자가 옛부터, 자기 말을 어렵게 생각한다고 통탄했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노자로서는 요즈음 해설자들의 해석을 접하드라도,' 2,500년의 시간이 흘렀는 데, 아직도 그 모양으로 공부가 부족한가, 내말을 알지못하고 행하지 못하는구나' 하고 통탄하지 싶다.

도덕경 14장을 상기하면,

[...其上不皦(기상불교) 其下不昧(기하불매), 繩繩不可名(승승불가명) 復歸於無物(복귀어무물), 是謂 無狀之狀(시위무상지상) 無象之象(무상지상) 是謂 惚恍(시위홀황) ...

(도는).... 그러니, 그 위로 밝게 들어나지 않고, 그 아래로 어두워 묻혀버리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상태가 무궁무진하게 이어져, 이에 이름을 붙힐 수 없다. 생겨난 것은 다시 아무 것도 없는 상태(無物)로 되돌아간다. 이를 일러 형상없는 형상이라하고, 이를 일컬어, 홀황 즉, 황홀이라 한다 ]
 
주) * 皦 : 옥석 흴 교-> 새하얗다, 희다, 밝다, 뚜렸하다
     * 昧 : 어두울 매->어둡다, 찟다, 탐하다, 어둑새벽
     * 繩 : 노끈 승-> 노끈, 먹줄, 바로잡다.
     * 繩繩 : 끊이지 않고 대를 이어 있다. 무궁무진 이어나가다. 

 

즉 道는 '無象之象'이라는 설명이다. 道의 구체적 작용이 德이라면 象은 도가 구체화한 모습이라 생각된다. 도는 이름도 없고 이름붙일 수도 없지만, 그 구체적인 모습은,  道자체는 아니라해도 道의 모습을 형용하는 이미지 즉 형상으로 삼는 것이다. 그래서, 大象이란 大道의 구체화한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라 생각된다. 大道자체라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니, '執大象(집대상)' 이란 그 구체화한 大道를 붙잡는다는 것으로, 大道를 구체적으로 닦음을 의미한다. 즉, 큰 도를 닦아 득도를 하면, 天下往(천하왕) 즉 천하만민이 다가간다는 것, 곧 천하만민이 모여든다는 뜻이다.

천하가 다가가지만, 즉, 천하만민이 모여들지만, 도의 기치아래 천하만민의 모여드니,  어찌 해로움과 걱정이나 탈이 있겠는가? 그러니, 평안하고 태평함(安平)이 크다는 것이다.

음식을 곁드린 음악소리 즉 음식과 음악소리에, 지나가는 손님을 가던길을 멈추지만, 다시말하면, 음식은 냄새와 맛으로, 음악은 소리로서 지나가는 손님을 끌어드린다. 즉 이로움과 득실에 따라 사람들이 모여들면, 安平하지 못하고, 해로움과 소란스러움이 크겠지만, 도는 그렇게 작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의 기치 아래 모이면  그럴 염려가 없다(而不害, 安平大)는 것이다.  '執大象'(집대상)하기 때문이다. 

굳이 '執大象'(집대상)'이 무엇인지 즉 붙잡아야할 大象 즉 도의 구체적인 모습을 말하고자 하나, 도가 입밖으로 나오면 즉, 굳이 도를 말로 표현하면, 담백하여 아무 맛이 없고, 보아도 보이지 않고, 보아도 볼 수 없다, 들을려해도 들리지 않고, 들어도 들을 수 없다.

도는 그처럼, 無爲하여, 함이 없이 자연그대로,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 無爲를 행함 즉, 爲無爲하기 때문에, 하지않는 것이 없다. 즉, 無不爲한 것이다. 도는 함이 없지만, 함이 없이 행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도는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다.

그러니 '집대상'이라, '대상을 잡아라' 즉, 그 대상인 '대도'를 구체적으로 닦아라'는 메세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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