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동양철학/老子別義(上)

老子別義(上)_37장_無名之樸(무명지박))

by 靑野(청야) 2014. 1. 7.
 
<노자 할배, 왕필할배...
 
道經 37장을 전부, 대충 끝내고 보니, 할배들하고 할 이바구가 많은 데...
 
일체만유의 귀일점은 동일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보편 타당성이 결여된 이론에 불가할 뿐일 것이다, 
 '萬有一通의 진리'라 하지만, 일체만유의 귀일점이 동일하다면,
어찌 진리가 여러 모습이겠는가?
그러니, 어쩌면, 모든 철학적 사유는 방편일 뿐일 것이다.
인류의 영속을 위해서 그것의 결론에 귀일하기는
아마도 부질없는 짓이기도 하겠지만, 불가능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 과정의 영속성이 유지되고, 그것이 인류의 사유의 필요성과
나아가 인류의 영속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류가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신이 되던지,
게으른 돼지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본문중에서)
 
할배들아, 그렇지 않겠는가? >

 


 

[도덕경 37장 ] -도덕경 상권 도경 마지막 장

道常無爲,而無不爲(도상무위이무불위), 도는 언제나 아무것도 함이 없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侯王若能守之(후왕약능수지), 제후나 왕이 이 도리를 능히 지킬 수 있다면
萬物將自化(만물장자화), 천지만물은 스스로 따르게 될 것이다.
化而欲作(화이욕작), 따르는 중에 욕망이 일어나면
吾將鎭之以無名之樸(오장진지이무명지박), 이름없는 통나무와 같은 소박함으로 이를 억누를 것이다
無名之樸(무명지박), 이름없는 통나무와 같은 소박함으로
夫亦將無欲(부역장무욕), 무릇, 욕망을 없애면,
不欲以靜(불욕이정), 고요함으로 욕망이 사그러 들고,
天下將自定(천하장자정). 천하는 스스로 안정을 이룰 것이다.

주) * 將 : 장수 장, 장차 장->장수, 인솔자, 장차(將次),문득, 청컨대, 무릇, 대저
     * 鎭 : 진압할 진, 지킬 진-> 누르다, 억누르다, 진압하다,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다
     * 亦 : 또 역-> 또, 또한,만약, 가령,~도 역시, 단지, 만 ~뿐. 이미. 모두
     * 化 : 될 화, 잘못 와->변함, 되다, 화하다, 교화하다. 가르치다, 감화시키다, 따르다.
     * 作 : 지을 작, 만들 자->짓다, 새로 창안하다, 하다, 되다, 변화다, 생겨나다

[도는 언제나 작위적으로 함이 없지만, 함이 없이 함으로써,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제후나 왕이 이 도리 즉 無爲(무위),爲無爲(위무위), 無不爲(무불위)를 지킬 수 있다면, 천지만물이 스스로 이 도리에 따라 변화게 될 것이다. 이 도리에 따라 변화는 중에, 욕망이 일어나면, 이름없는 통나무와 같은 소박함으로 이를 억누를 것이다. 이름없는 통나무와 같은 소박함으로 이를 억눌러, 바르게 할 것(貞)이다. 무릇 족함을 알아, 욕망을 없애면, 고요가 찾아들므로, 족함을 알게 되어, 욕망이 사그러 들고, 천하는 스스로 안정을 이룰 것이다.]


'道란 무엇인가? ' 하지만,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道를 道라 부르면 이미 그 道는 道가 아니다'  도덕경 1장 첫 구절에 나오는 귀절이다
 
노자가 '道'와 그 작용을 설명하는 데, 도덕경 81장 전편을 소모했다고 과언이 아니다. 도덕경 하편이 아직 남아있기는 하지만, 상편만으로 판단했을 때라도,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시각으로 인간과 대지와 하늘과 道와 自然과의 관계와 상호 영향, 상호얽킴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은 그 바탕하에서, 인간이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를 설명한 것이다.

佛家에 존재하는 수많은 경전들, 그 경전들의 존재 동기나 목적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凡人이 그 수많은 경전을 섭렵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한정된 경전이라도 그 깊이를 그런대로 파헤친다는 것도 만만찮을 것이다.

道家의 無, 有, 虛의 개념은, 필연적으로 불가의 有, 無, 空의 개념과 맞딱드려 질 수밖에 없다. 有와 無, 空, 虛은 존재와 비존재를 구분짓는 존재론의 출발이고 기본개념이기 때문이다. 滅과, 不滅, 生, 不生의 개념 역시 道家, 佛家의 단골 사유메뉴이다. 滅과, 不滅, 生, 不生의 사유는 존재와 비존재을 넘나들며, 사유영역을 넖혀준다.

'不有之法不卽之無(불유지법부즉지무), 不無之相不卽之有(불무지상부즉지유)'
'불유의 법이 곧 무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고, 불무의 현상이 곧 유에 거주하는 것도 아니다(-금강삼매경론 서론에서)'

'不滅故 不可說無(불멸고 불가설무), 不生故不可說有(불생고불가설유), 遠離二邊故(원리이변고), 不可說亦有亦無(불가설역유역무), 不當一中故(부당일중고), 不可說非有非無(불가설비유비무'

'불멸이므로 무라 말할 수 없고, 불생이므로, 유라 말할 수 없다. 유.무의 양변을 떠났으므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라고 말할 수 없다. 한 순환의 와중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므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없다(-한국불교전서 제1책 p625)'

여기서 말하는 法은 大乘起信論疎에나오는 대승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즉 일체 만유의 근본 도리라하니, 노자가 말하는 '도'와 유사한 개념이 아니겠는가?

노자 도덕경 전편에 걸쳐 설해지던, 有,無의 개념, 道의 개념이, 불가의 주요경전에서도, 역시 핵심개념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본다. 그러니, 노자, 불가의 철학은 有와 無를 둘싼 사유의 철학, 존재와 비존재를 思惟하는 존재론의 철학인 것이다.

노자와 佛家의 이런 思惟는 오랜 세월 무수한 구도자들이 고도의 수행과 명상을 통하여 정립해온 개념이지만, 하이데거로 대표되는 서양식 존재론적 思惟家들에게 이르러, '無'의 개념이 그동안 단순히 없음, 부정의 소극적 개념에서,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터전] 과 같은 것으로, 無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하게 된다.

[사실을 똑바로 읽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해체하고, 원초적인 눈으로 세상을 다시보려는 그런 사상을 해체주의는 담고 있다. 해체론에서는 無가 중요하다. 무는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터전과 같다.... 무를 닮은 사유야 말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읽고 이해하여, 세상을 새롭게 보게하는 존재론적 혁명을 자져오는 '思想的 始原'으로 부각되었다. (-김형효의 '원효의 대승철학 서설에서)']

道家, 佛家에서는 '무의 개념' 이 애초부터 그 태동을 같이한 '思想的 始原'이였지만, 아마도, 서양철학에서는 하이데거에 이르러, 무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새로운 존재론적 思惟가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도덕경 도경 37장에서 접해본 무의 개념은 도덕경 첫장부터 나타난다. 도덕경 무의 개념으로부터 시작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佛家의 사상 역시 無의 사상에 기반한다. 하지만, 이 無는 단순한 無가 아니다. 非有인 듯 하지만, 그도 아닌 것이고, 有도 아니면서 非無인 듯하지만 그도 아니다. 그래서 空이라 한다.

空이라하지만, '色不異空, 空不異色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佛家의 대표경전중의 하나인 반야심경에서)', 色은 물질, 만물인 有이다. 색은 공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아니하니, 색은 곧 공이요, 공은 즉 색이니 有인 것이다

無와 非有, 有와 非無 즉, 有가 아니면 無인가, 하지만, 無도 아닌 것이며, 無가 아니면 有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有가 아닌 것이며. 그것이 空인가 하면, 空은 곧 色이라한다. 이러니, 도가, 불가, 하이데거식 현대철학의 존재론적 思惟 모두, 하나같이 미묘하고, 한량하기 그지없다. 이런 미묘함을  일러 노자는 微明(미명), 襲明(습명)이라 하였고, 장자는 保光(보광), 즉 '감추어도 들어나는 빛'이라 하였다.

하지만, 내생각으로는,  분명하게 思惟하건데, 일체만유의 귀일점은 동일하리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諸이론은 보편 타당성이 결여된 이론에 불가할 뿐이며,  萬有一通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체만유의 귀일점이 동일하다면, 즉 만유일통의 진리라면, 어찌 진리가 여러 모습이겠는가? 그러니, 어쩌면, 이 모든 철학적 思惟는 방편일 뿐일 것이다.
 
 
일체만유의 귀일점이 존재하느냐 않느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일체만유의 귀일점을 향하여 思惟한다하지만,  어찌 그것이 용이하게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이런 老子, 佛家, 존재론의 思惟야 말로, 끝없이, 미묘하고도 한량하기 그지 없는 일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인류의 영속을 위해서 그것의 결론에 귀일하기는 아마도 부질없는 짓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불가능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 과정의 영속성이 유지되고, 그것이 인류의 思惟의 필요성과 나아가 인류의 영속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류가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스스로 神이 되던지, 게으른 돼지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 장은 도덕경 중 이른바 道經(도경)의 마지막 귀절이다.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로 시작하여, 道常無爲而無不爲(도상무위이무불위)를 거쳐 天下將自定(천하장자정)으로 끝을 맺는 셈이다.

道經 全편이, 도란 무엇인가, 인간을 포함한 천지만물이, 道의 원리와 道에 따른 행위 즉 道理란 무엇이고, 道理에 따라 행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1장부터-37장까지 37장전편을  대부분 소모했다.

'道란 무엇인가?' 동서고금에서, '道'란 '무위자연'을 지향하는 세상만물의 근원적 원리' 정도로 미루어 짐작하지만, 정작 도덕경에서는 ' 道가 뭐라 말할 수 없다(道常無名)' 고 한다. 그러면서, 말할 수 없는 道의 원리, 도를 체득해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도덕경이니, 아이러니한 것 아닌가?

이것 역시 2장이나, 36장에서 말하는 二重性이고 異重性이면서 同異을 말한다. 有와 無가 대비됨으로서 존재한다는 有無相生의 사유를 되새겨보자. '道가 이렇다' 라고, 명쾌히 정의될 수 있는 것이라면, 몇마디 경구로서 道의 정의가 명쾌해 질 수 있다면, 세상이 그만큼 단순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런 세상에서는 도덕경이 존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道는 천지만물을 지배하는 원리이면서, 세상만물 어디에나 어떤 순간에도 존재한다. 억지로 이름을 붙인다면 '大乘'이라 하는 불가의 대승개념가 유사하다는 것을 이미 밝힌 바 있다. 道, 大乘은 無所不在, 無時不在하는 동시성과 이중성을 가진다. 천지만불을 지배하면서도, 천지미물속에, 티끌 속에 깃들기도 하는 것이 道이고 大乘이기 때문이다.

우주는 한없이 크다. 얼마만큼 큰 것이냐? 천지만물이 천태만상으로 천변만변, 충분히 영속할 수 있을 만큼 큰 것이다. 이런 관점은,  과거에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물리학의 대세는 우주의 무한성을 부정한다. 우주는 유한하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과학기술적 思惟는 우주를 유한하게 봐야할 지모르지만, 철학적 思惟는 우주를 무한하다 전제하던, 과학기술적 思惟처럼 우주를 유한하게 보던. 하등 문제될게 없다. 즉, 우주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무한하지는 않다하드라도, 이 우주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 천지만물이 천태만상으로 천변만변, 충분히, 영속할 수 있을 만큼, 이 우주는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덕경이나 동양의 우주론적 思惟가 우주의 과학기술적 解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해도, 고학기술적 解와 무관하게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도덕경 32장에서 말한다.

'道常無名(도상무명), 樸, 雖小(박, 수소), 天下莫能臣也(천하막능신야)'
'도는 영원히 이름을 붙일 수 없다. 통나무처럼 소박함은,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천하에 이것을 부릴자 없다.'

주) * 雖 : 비록 수-> 비록, 아무리 ~하여도, 그러나

<통행본>
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能守之, 萬物將自化,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백서본>
道恒無爲.
侯王能守之,萬物將自化.
化而欲作,將鎭之以無名之樸.
夫亦將知足知足以靜,萬物將自定.

<초간본>
道恆亡爲,
侯王能守之, 萬物將自爲,
爲而欲作, 將之以名之,
夫亦將知足, [知足]以靜, 萬物將自定

주) * 貞 : 곧을 정-> 곧다, 지조가 굳다, 마음이 곧바르다, 충실하고 올바르다.

왕필본 본문, '道常無爲而無不爲', 초간본,백서본에서 '道恒無爲也'으로 되었고, 또 '無名之樸, 夫亦將無欲(부역장무욕), 不欲以靜(불욕이정)...'이 초간본과 백서본에서, 無名之樸'이 없고, '夫亦將知足, 知足以靜'로서 不欲以靜의 '不欲'대신에, '知足'를 쓴 차이를 보인다. 이 때문에, 왕필본과 초간본,백서본사이에 해석상에 다소 차이와 혼선을 겪는다. 초간본의 '恒'은 '常'의 뜻, 또, '亡' 은 아마도, 춘추전국시대에. '無'의 '없음'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초간본에만 등장한다.

같은 '없음'이라는 뜻이다.


'道常無爲,而無不爲(도상무위이무불위)'
'도는 언제나 아무것도 함이 없이, 하지 않는 것이 없다"

도덕경에는, 전편에 걸쳐, 無爲, 爲無爲, 無不爲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노자사상을 단적으로 압축한 白眉라 해도 과언이 아닌 단어들이다. 無爲는 '함이 없음'을 의미한다. 자연 그대로,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뜻이다. 인위적인 것을 억지로 개입시키지 않고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그렇게 자연스런 상태로 두는 것이 최상이다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일 게다. 爲無爲는 '함이 없음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천하만물은 자연스런 상태로 스스로 자라고, 스스로 살아간다. 만물이 그렇게 살아가게 기반을 제공하는 것은 자연의 역활이다. 그것이 爲無爲이다.  자연에 자양분을 직접주고 기르지는 않지만, 만물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함이 없다 하지만, 함이 없이 행하므로, 하지않는 것이 없다. 그것이 無不爲의 사상이다.

'侯王若能守之(후왕약능수지), 萬物將自化(만물장자화), 化而欲作(화이욕작), 吾將鎭之以無名之樸, 吾將鎭之以無名之樸(오장진지이무명지박),'
'제후나 왕이 이 도리를 능히 지킬 수 있다면, 천지만물은 스스로 따르게 될 것이다. 다르는 중에 욕망이 일어나면, 이름없는 통나무와 같은 소박함으로 이를 억누를 것이다.'

본 귀절은 도덕경 32장, '侯王若能守之(후왕약능수지), 萬物將自賓(만물장자빈), 제후나 왕이 이것(소박함)을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스스로 따르게 될 것이다'를 연상시킨다.

본 귀절의 뜻도, 유사하게, 제후나 왕이 이 도리 즉 道常無爲,而無不爲(도상무위이무불위)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스스로 이 도리에 따라 변화될 것이다. 賓(빈)은 '따르다', 化(화)는 '따라서 변화다', '따라서 교화되다'의 뜻이다.

통나무와 같이 소박하고 질박함으로, 無爲, 爲無爲, 無不爲를 실천하는 중에, 이를 거슬러고 부질없는 욕망이 싹튼다면, 이름없는 통나무와 같은 소박함으로 이를 억누를 것이다. 통나무처럼 소박함으로 돌아가도록 다스릴 것이다.

도덕경의 많은 귀절에 '樸(박)'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초간본에는 대부분 '樸'대신에, '朴'이라는 단어도 쓰이는 데, 이것은 '樸'의 이체자이다. '朴'과 ''樸'은 글자체가 틀리나 뜻은 같은 뜻으로 쓰인 것이다.

'樸'은 소박하고 질박함 즉 다듬어지지않은 상태를 말한다. 명사로는 통나무의 뜻이다. 그래서, 통나무는 , 통나무와 같이 소박하고 질박함의 대명사로, 도의 원리를 비유화하는 데 자주 사용된다. 어찌 통나무가 道의 깊은 원리를 대변하겠냐마는, 통나무의 그 생성목적이 道의 원리를 알기쉽게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다. 즉, 통나무는 다듬지 않은 자연그대로의 상태, 자연상태로의 분위기가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노자의 생각을 비유하는 데 적절하기 때문이다.

'大制不割(대제불할)', '復歸於樸(복귀어박)' 이라 고도 했다. '크게 쓸려면, 나누지 말라', ' 통나무와 같은 소박함으로 돌아가라' 고, 도덕경28장' 에서 말한다.

통나무를 용도에 맞게 재단하는 순간, 內在하고 있던 모든 가능성은 사라지고 오로지 재단목적만의 나무토막으로 남을 뿐이다. 즉 잘려진 나무조각은 쓰임이 잘려진 목적에 한정되기 때문에 이미 소박하고, 질박한 통나무가 아닌 것이다. 이런 개념이 '道'라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이미 道가 아니다' , 그래서 '道常無名(도상무명)' 도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라는 비유에 사용되기도 한다.

'夫亦將無欲(부역장무욕), 不欲以靜(불욕이정), 天下將自定(천하장자정)'
'무릇, 욕망을 없애면, 고요함으로 욕망이 사그러 들고, 천하는 스스로 안정을 이룰 것이다.'

왕필본에서, '夫亦將無欲(부역장무욕), 不欲以靜(불욕이정)' 즉, ' 무릇, 욕망을 없애면, 고요함으로 욕망이 사그러 들고' 의 뜻이다. 이것이 백서본에서 '夫亦將知足, 知足以靜' 즉, '무릇, 고요함으로 족함을 알아' , 초간본에서는 '夫亦將知足, [知足]以靜' '무릇, 욕망을 없이하면, 고요함으로 [족함으로]' , 이후 모두 문장'萬物將自定'을 잇는 차이를 보인다.

無慾(무욕)은 묙망이 없는 마음가짐 즉, 욕망자체가 생기지 않는 마음가짐이고, 不慾(불욕)은 욕망을 내지 않는 마음가짐을 뜻한다. 그것은 때때로 욕망이 일어나나, 그것을 억제하고 사그라 들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이를 바탕으로 이 부분의 초간본, 백서본을 고려하여 왕필본을 재해석하면,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제후나 왕이, 無爲로서 다스리면, 백성이 스스로 따르게 될 것이다. 굳이 세상을 억지로, 有爲하고 作意的으로 잘 다스려 보겠다는 욕망을 없애고, 無爲로서 다스리면, 백성이 스스로 따르게 되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고, 고요함으로써, 그런 욕망이 사그러 들고, 천하는 스스로 안정을 이룰 것이다.

도덕경 왕필본 상권, 도경을 끝내며

도덕경 상권인 도경을 나름대로 해석하고자 하면서, 피상적으로 알아왔던, 도덕경, 남이 나름대로 이해한 결과물에 의존해왔던 도덕경과, 노자에 대한 지식에 대해, 이 작업 역시 내 나름대로의 이해이겠지만, 나로서는, 이전의 느낌과 다르게, 매장마다 언급하였듯이, 많은 새로운 것을 알게 해준다.

사람들이 노자의 사상이 이상주의적이라 비판하기도 하고, 얼핏 보면, 노자의 귀절마다, 상식에 반하는 반어적 귀절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읽는 이들이 노자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곤란을 겪기도 한다. 정치적 목적이나 교세의 확립에 이용하기위한 수단인지, 이런 저런 이유로, 실제로 진시황시대부터, 현대 중국에 이르기까지, 정치권력으로부터 이용되기도 하고, 유가, 불가등의 종교세력으로부터 질시와 공격을 많이 받아온 것은 주지의 역사적 사실이다.

不常賢(불상현), 絶學無憂(절학무우), 天地不仁(천지불인), 즉. '현명함을 숭상하지 말라', '배움을 끊어라',' 천지는 인자하자 못하다'등등의 반어적 귀절들이 거의 매장마다 등장한다. 이에 대한 세세한 나름대로의 이해한 바를 각 장에서 이미 설명한 바가 있다.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도, 억지로 다스릴려고 하지말고, 無爲로서 다스려라 한다. 이는 속되게 이야기해서 천하를 내버려두라는 뜻이다. 이런 사상을 두고, 古來로, 현실도피, 이상주의 등등의 비판이 있어 온 것이다. 특히, 현실참여와 현실개조를 통해 이상으로 나아가려는 儒家들이 그 비판에 앞장을 서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표를 이루는 과정이 달성가능한 것이고, 제한적이라면, 즉, 세상이 인간의 생각과 노력대로 용이하게 바뀌어지고, 바뀐 것이 유지되는 정도라면, 세상은 그 만큼 단순할 수 있고, 오랜 역사전 전통이 쌓일 그릇의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는 도덕경이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세상은 인간과 땅과 하늘과 대자연 속의 모든 것과 그 모든 것의 존재와 움직임과 변화를 감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 모든 것들을 영원토록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커야 하는 것이다. 그런 세상이라면, 대자연, 대우주아니겠는가?. 그러니, 도덕경의 思惟대상은 궁극적으로 이런 대자연, 대우주인 것이다.

그래서, 도덕경은 여러 현실적인 화두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고도한 함의를 통해, 인간과 땅과 하늘과 자연의 상호얽힘속에 인간이 처신해야할 기준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노자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이고, 그것이 '道' 아닌가 한다.

노자 도덕경을 읽으면, 형식과 주제에 거침이 없다. 한계가 없는 것이다. 노자의 사유의 분망함과 자유로움을 느낀다. 그 사유의 깊이도, 마치 현대문명을 통찰하고 그 해법을 말하는 듯. 현대우주론을 보는 듯 하기도 하다, 아닌게 아니라, 현대문명의 수많은 과학자들이 도덕경을 찾는 것이, 현대우주물리학이, 이른바 '만유의 이론'을 추구하듯이, '일체만유을 지배하고, 일체만유가 귀일하는 원리로 알려진 '道'를 思惟하는 老子, 老子의 이런 자유분망한 사유방식으로 부터 창조적 모티브를 얻고자 하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무량하기 짝이없는 우주속에서, 애써, 그 우주의 존재원리인 도와 그 작용을 이해한다는 것에서, 우리가 생활에서 직접적인 가치를 크게 못 느낄지도 모르지만, 마치 신앙이, 부족한 인간의 중심을 잡아주듯, 대자연, 대우주속에서, 극히 그 일부일 뿐인 인간이 중심을 잡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덕경은 無爲自然을 말하고, 인간세상의 理想을 말한다고 하지만, 나로서는, 어찌보면, 가장 인간적인 경구로 가득차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老子는 우리에게 그것을 애써,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유분망하게 스스로 그 자취의 흔적을 남겼을 뿐이고, 우리가 그 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할 뿐인 것이다.
 
이것으로,  老子別義(上)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2013년 7월3일에 시작한 작업이, 어줍잖게 6개월 반을 넘겼읍니다. 현실적인 한계속에, 개인적으로, 그렇게 만족스런 진행이지 못했습니다. 동서양 존재론 철학의 원류답게 글자하나하나마저, 그리 호락호락 한 것이 아니군요
 
처음의 의도대로, 훈고학적인 字句해석에 머무르지 말고, 도덕경 귀절을 기반으로 관련되어, 불교,유교, 현대과학의 영역으로 思惟를 넓히고, 연관지어, 통합적이고 종합적 식견을 구축해보고자 하였으나, 아무래도 많이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다만, 앞으로, 시간이 된다면,  언젠가는 그런 작업을 다시 해보지 싶은 데, 이번의 경험이 좋은 안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갑오년 생인 본인이 갑오년의 시작, 그러니까 回甲의 시작을, 비록 반똥가리이지만, 하던 일의 마무리로 시작하여 일단, 기분은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동안, 많은  관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같이 참여의 수고를 기꺼히 하여준  여러 동기들에게 심심한 감사드립니다. 꾸벅!, 꾸벅!, 꾸벅!, 꾸벅!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개인적으로도, 老子別義(下) 즉, 道德經 下券 德經 全 44장의 공부가 무척 기대되기는  하지만,  언제 시작할 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밀린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