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사진작가 김아타의 2005년 작, '뉴욕 타임스퀘어'
8시간 노출촬영(하니, 움직이는 행인, 자동차의 모습이 사라졌다.
色(만물)이 空(사라짐)이 된 것이다. 즉, 色卽是空?.
空으로 돌아갔지만, 이 속에는 엄청난 정보를 담고 있다.
그러니 공이 공이 공이 아닌 것이다. 즉, 空不異色?.
그러니,원효가 大乘起信論疏(대승기신론소)'에서
말하는 '同異論(동이론)' 즉 '同異의 同時性', '二重的 同時性'?>
將欲歙之(장욕흡지), 움추릴려면,
必固張之(필고장지), 필히 (이미)펴여진 상태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將欲弱之(장욕약지), 약하게 할려면
必固强之(필고강지), 필히 (이미)강한 상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將欲廢之(장욕폐지), 폐하게 할려면
必固興之(필고흥지), 필히 이미 흥한 상태가 존재해야하는 것이다.
將欲奪之(장욕탈지), 탈취할려면
必固與之(필고여지), 필히 (이미) 기여한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是謂微明(시위미명), 이를 일러 미묘한 밝음이라 한다.
柔弱勝剛强(유약승강강),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
魚不可脫於淵(어불가탈어연), 고기가 연못을 나오면 안되듯이,
國之利器(국지리기), 나라의 권력도
不可以示人(불가이시인),함부로 사람(백성)에게 휘둘러 대면 안되는 것이다.
주) * 歙 : 들이 쉴 흡->들이쉬다, 거두다,
* 固 : 튼튼하다. 탄탄하다. 견고하다, 굳다. 딱딱하다. 쉽게 변하지 않다.
* 示 : 보일 시
* 與 : 더불 여, 줄 여->더불다, 주다, 같이하다, 참여하다, 기여하다.
* 歙張 : 움추림과 폄.
* 利器 : 날카로운 병기(兵器), 실용에 편리(便利)한 기계(機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權力)...
[움추릴려면, 필히 이미 펴여진 상태가 존재해야 하고, 뭔가 약하게 할려면, 필히 그것이 이미 강한 상태로 존재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폐하게 할려면, 필히 이미 흥한 상태가 존재해야 하고, 뭔가 탈취할려면, 필히, 이미 기여한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일러 미묘한 밝음이라 한다.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 고기가 연못을 나오면 안되듯이, 나라의 권력도, 잘 관리되어, 백성에게 휘둘러대면 안되는 것이다.]
'一應非一 以卽異故如異, 異應非異 以卽一故如一'
(일응비일 이즉이고여이, 이응비이 이즉일고여일)
'동일 것(一)은 동일하지 않음(非一)에 상응하므로 상이한 것에 즉하여서(상관적이어서) 상이한 것과 같이 하고, 상이한 것(異)은 상이하지 않는 것(非異)에 상응하므로 동일한 것에 즉하여(상관적이어서) 동일한 것과 같이한다.'
이는 원효가 ‘大乘起信論疏(대승기신론소)’에서 설명한 유명한 '同異論(동이론)'의 한 귀절이다 (출처: 김형효저. '元曉의 大乘哲學' p273)
주) * 大乘起信論은 대승불교의 핵심적 사상을 설명하고 있는 데, 특히 마음의 본질과 작용, 그리고 깨달은 마음과 깨닫지 못한 마음에 대한 체계적 설명을 통해서 깨달음과 무지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보여 주고 있다. 책의 저자인 인도의 마명(馬鳴:100∼160?)이 저술하였다고 하나 그의 생존연대가 불확실하여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원전인 산스크리트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도덕경 2장에, '어렵고 쉬운 것도 상대적으로 성립하는 것이다'는 '難易相成(난이상성)', '길고 짧은 서로 비교될 때 생긴다.' 는 長段相較(장단상교)식 사유 즉, '무엇을 쉽다하고, 무엇을 어렵다하는가?', 무엇을 길다하고 무엇을 짧다하는가? 쉽고 어려움의 판단기준, 길고 짧음의 비교 기준이 무엇인가?'을 묻게하고, '있고 없음은 서로 비교 됨으로써 생긴다'
이는, 노자의 '有無相生(유무상생)'의 사상이다.
필자는, 불가의 사상, 노.장의 사상이 풍기는 향기가 유사하다. 어쩌면 歸一할 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품어왔다. 노자가 불교철학을 받아드린 흔적은 없다. 이는 시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 불경은 석가모니가 직접 설한 것도 있을 것이고, 석가모니의 사상에 기초는 하겠지만, 역시, 도덕경 여러 판본처럼, 석가의 이름으로, 후대인들의 사상이 많이 들어갔을 것이다.
금강경이나, 반야심경등 불가의 핵심경전의 원전은 석가모니의 사상에 가까울 것이고, 두 성인 사이에 사상적 교류가 없었을 터인데도, 여기서의 空, 色의 사유, 노자의 有, 無에 대한 사유이나, 道의 사상에서 매우 유사한 향기를 풍긴다. 내 생각으로는, 佛家의 '金剛三昧經論(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 '대승기신론소' 같은 경의 해설서나 관련 연구서가 노자시대보다 훨씬 후대의 글이지만, 사상적 유사성이 커서 글쓴이들이, 도덕경의 영향을 받기 자연스러웠을 것이고, 그 결과인지, 이런 류의 글에서, 도덕경적 사유가 곳곳에 스며 있음이 보인다. 그래서, 원효가 노자와 장자를 읽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듯이, 불교가 철학적 측면에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노자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이런 비교는 노.장철학가나, 불교철학가들사이에 많은 연구가 있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되겠기에, 관심을 지속시킬 대상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불경에는 이전부터 관심을 기울어 왔지만, 최근에 도덕경을 나름대로 해석을 하면서, '대승기신론', '대승기신론소'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오다,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를 대하고는, 앞서 생각대로, 노장의 향기(?)가 많이 스며있거나, 어쩌면, 석가,도가의 철학적 유사함이 상당히 깊은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다고 생각하여 온 터이다.
원효의 대승철학개념에서 도덕경의 2장, 有無相生, 11장 無中生有를 비롯하여, 27장 是謂要妙등 등장하는 많은 귀절들과 유사성, ‘대승기신론소나 '대승기신론'의 '대승' 개념자체가, 노자가 말하는 '도'개념과 유사함을 발견하게 된다.
'然夫大乘之爲體也, 簫焉空寂, 湛而沖玄, 玄之又玄之, 豈出萬像之表, 寂之又寂之....
一如用之而空, 獲之於無, 萬物乘之而生, 不如何以言之, 强號之謂大乘'
(연부대승지위체야, 소언공적, 담이충현, 현지우현지, 기출만상지표, 적지우적지...
일여용지이공, 획지어무, 만물승지이생, 불여하이언지, 강호지위대승)
'대승을 본질로 삼는다, (대승의 본질은) 고요하고 비어서, 공적하고, 깊고 넉넉하여 현묘하다. 현묘하고 현묘하지만, 어찌 만상의 표피를 벗어 났겠으며, 아무리 고요하다해도...
일여가 이를 베풀어 공하고, 무에 의거해 뜻을 나타내려하나, 만물이 그것을 타고 생기니, 어떻게 말할 수가 없어서, 억지로 대승이라 부른다....'
'元曉의 大乘哲學(김형효 저)' p226~p227에 나오는 글이다. 여기에 나오는 '...억지로 대승이라 부른다'는 도덕경의 '도는 영원히, 이름을 붙일 수 없다(도덕경 32장) '...글자로 표현하자면 '도'라 한다. 억지로 이름을 붙인다면, 큰 것(大)이라 할 것이다(도덕경27장)' 의 문장과 전후문장을 상기시킨다.
본장은 초간본에 없지만, '움츠림(歙)과 폄(長)', '약(弱)과 강(强)', '폐(廢)와 흥(興)', '탈(奪)과 여(與)'를 서로 비교함으로써 생기는 상대적 의미를 밝히고 있다.
원효나 노자는 두 가지 대비되는 상태가 각각 개별적으로,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두 동작이 서로 영향을 주고, 상대적 관계를 가지는 것을 설명한다.
이 상태가 없다면, 저 상태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상태든 영원히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불변이 아니며, 독립된 상태로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고 두 상태가 동일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독립된 둘도 아닌 것이다.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영향을 주면서 다른 상태로 전환하기도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저것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있다. 오른쪽은 왼쪽과 다르다. 하지만, 왼쪽이 없으면 오른쪽도 성립하지 못하고, 반대로 오른쪽이 없으면 왼쪽도 성립하지 못한다. 즉, 이처럼, 좌우는 서로 대비됨으로써 존재하는 경우도 있고, 나무는 물과 햇볕과 땅과 바람과의 상호 연관성에 의거해서 존재하기도 한다.
이는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緣起論(연기론), 緣起(연기)의 法則(법칙)이다. 연기의 법칙은 서로 다른 만물과의 상호 얽힘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원효의 同異論은 佛敎의 연기론에 기반하겠지만, 그 훨씬 이전 석가와 同 시대인인 노자 역시, 도덕경 전편에 걸쳐, 緣起論, 연기의 법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석가나 노자, 원효의 사상의 핵심중 일면이 도덕경 여러 편에 이어, 여기에 담겨 있다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왕필본>
將欲歙之, 必固張之, 將欲弱之, 必固强之, 將欲廢之, 必固興之,
將欲奪之, 必固與之, 是謂微明,
柔弱勝剛强, 魚不可脫於淵, 國之利器, 不可以示人
<백서본>
將欲翕之, 必姑張之; 將欲弱之, 必姑强之; 將欲去之, 必姑與之;
將欲奪之, 必姑予之. 是謂微明.
柔弱勝强. 魚不脫於淵,邦利器,不可以示人.
무엇이 움추린 것이고 무엇이 편 것인가? '펴다' 는 것은 움추림이 있기 때문에 이 움추림으로부터 펴어지는 상태로의 이동 현상이다. 움추림이 없다면 편 상태로의 이행이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움추림이라는 것은 편 상태가 있어야 그로부터 움추린 상태로의 이행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움추림(翕)이 있을려면, 편(張) 상태가 필히 먼저(先)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弱(약)함이나 强(강)함은 서로 상대적이다. 弱하다는 기준이 무엇인가? 强하다는 것은 무엇을 强하다고 하는가? 弱함과 强함은 상대적이다. 힘을 쓰는 어떤 현상이 있는 데, 또 다른 힘을 쓰는 현상이 나타나 상호 비교가 될 때, '이것이, 이래서 弱하구나, 이것이 이래서 强하구나'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弱함과 强함은 서로 비교될 때 성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이렇게 弱하게 할려면, 弱하게 하기 위한 대상인 强함이 존재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의 역도 역시 마찬가지다.
廢(폐)하거나 興(흥)함도, 빼앗거나(奪), 주는 것(與)도 역시 같은 논리이다. 廢하는 것은 興한 것이 있어야 廢가 성립하는 것이다. 다 무너진 흙더미에서 더 무너뜨릴 것이 있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성취를 이루었다면, 더 이룰 성취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쑥대밭에서 일으켜 세우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興하는 것이다. 빼앗는 것(奪)도, 주어진(與) 것이 있어야 빼앗을 게 있다. 주어진 것이 없는 데 빼앗을 것이 있겠는가?
그래서, '是謂微明'이라, 이를 일러 미묘한 밝음이라 한다. 그러니, 이것이 원효가 ‘大乘起信論疏(대승기신론소)’에서 말하고자 하는 '同異論(동이론)' 아니겠는가?
본장의 해석의 핵심은, '是謂微明' 전후의 사유의 흐름을 어떻게 이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즉, 연기론적 사유로부터 '是謂微明(이를 일러 미묘한 밝음)' 이라 결론 짓고는, '柔弱勝剛强'이라, 겉으로는 앞의 귀절들과 관련없어 보이는 귀절이 느닷없이 등장한다. 이어서, '魚不可脫於淵, 國之利器, 不可以示人'이라, 이 귀절 역시 앞의 귀절들과 얼핏 관련이 없어 보인다.
'柔弱勝剛强(유약승강강),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
유명한 노자 도덕경의 귀절이다.
노자 또는 개작자가 심득한 무위자연의 깨달음이겠지만, 이 귀절의 함의가 어찌 앞의 귀절과 이후 귀절 즉, '고기가 연못을 나오면 안되듯이, 나라의 권력도, 잘 관리되어, 백성에게 휘둘러대면 안되는 것이다' 와 의미의 연결이 되는 것인가? 개작의 실수인가? 아니면, 의미의 연결이 되는 것인가? 된다면, 이 귀절의 의미는 앞의 해석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부드럽고 약함 즉 柔弱(유약) 과 굳세고 굳셈 즉, 剛强(강강)은 대비되는 자연현상이다. 앞서 대비되는 현상들은 필연적으로 존재하기 마련인데, 柔弱과 剛强 역시 대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柔弱은 물처럼, 자연에 잘 순응하는 반면, 剛强은 무위함에 반하는 유위함이 크다. 그러므로 柔弱함이 剛强에 비해 자연에 잘 순응하는 것이다. 자연에 보다 더 잘 순응하는것이 이기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剛强은 廢하고 柔弱함이 興하는 것은 아니다. 柔과 强은 서로 대비됨으로써 존재하듯이, 언제나, 柔弱과 剛强은 대비됨으로써 존재한다.
柔弱한 간난아이가 태어나고, 늙어 剛强한 몸둥아리로 변해가고 급기야 자연으로 귀의한다. 柔弱은 생겨나고, 剛强은 사라지지만, 그렇다고 전부 柔弱만이 존재하는 세상이 도래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剛强은 새로 생겨난다. 柔弱의 존재를 위해서도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그것이 도이다. 이 도리를 아는 것이 '是謂微明(시위미명)' 즉, 이를 일러 미묘한 밝음이라 할 것이다.
'魚不可脫於淵(어불가탈어연), 國之利器(국지리기), 不可以示人(불가이시인) '
'고기가 연못을 나오면 안되듯이, 나라의 권력도, 잘 관리되어, 백성에게 휘둘러대면 안되는 것이다'.
고기는 연못을 벗어나서 살 수 없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고기는 물에서 살아야지 연못을 벗어나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이 고기가 사는 삶의 도리인 것이다.
나라의 권력은 强하다. 그러나, 백성은 柔弱(유약)하다. 하지만, 나라가 없다면, 백성도 없다. 백성이 없다면 나라 역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나라는 백성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고, 백성은 물처럼 柔弱하나 나라라는 그릇이 있어야 몸과 삶을 위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나무와 물과 햇볕과 땅과 바람과의 상호 연관성에 의거해서 존재하듯이, 나라와 백성은 상호 얽힘으로 존재하는 '연기의 법칙'에 지배받는다.
그러니, 나라는 권력을 앞세워 剛强(강강)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마라. 백성은 연못속의 고기같은 柔弱한 존재이다. 나라는 권력을 그런 백성을 편안하게 삶을 영위하도록 잘 관리하는 데 써야지, 백성에게 휘둘러서는 안되는 것이다.
연못밖으로 내 몰린 백성은 살 수 없는 법이다. 그러면 백성이 존재하지 않게 되고, 백성이 없는 나라 역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柔弱勝剛强(유약승강강)을 '柔弱한 백성이, 함부로 휘두르는 剛强한 권력에 대항하여 이긴다' 식으로 해석할 수 있고, 대부분 그렇게 해석하나, 나로서는 이는 도덕경의 본 뜻을 왜소화하고, 왜곡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도덕경전편에 흐르는 사상은, 승패를 말하는 이분법적인 좁은 사상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자연스러운 다스림, 즉, 부드러움이 가장 자연스러우니, 백성도 그런 자연스러움으로 다스려라. 권력을 휘둘을 때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백성의 삶의 터전 즉, 연못밖으로 내몰리는 백성이 없도록 하는 데 써야한다는 메세지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 도리야 말로 微明(미명), 즉, 미묘한 밝음이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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