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Feng, Gia-Fu, Feng, Gia-Fu , English, Jane >
<출판사: Vintage Books USA>
<출판일: 1997.03.01>
[도덕경 22장]
曲則全(곡즉전), 휜 것이 곧 온전한 것이며,
枉則直(왕즉직), 굽은 것이 곧 곧은 것이다.
窪則盈(와즉영), 움푹 패인 것이 곧, 충만한 것이며,
蔽則新(폐즉신), 낡은 것이 곧 새로운 것이다.
少則得(소즉득), 적게 가지는 것이, 곧 더 얻는 것이요,
多則惑(다즉혹), 많이 가지는 것이 곧 미혹을 안게 되는 것이다.
是以聖人抱一爲天下式(시이성인포일위천하식), 이것이 성인은 천하를 하나로 품는 방식이다.
不自見(부자견), 故明(고명), (성인은)스스로 드러내지 않기에 밝게 빛나고,
不自是(부자시), 故彰(고창), 스스로 옳다하지 않기에 오히려 돋보이고,
不自伐(부자벌), 故有功(고유공),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에, 공이 있게 된다.
不自矜(부자긍), 故長(고장), 스스로 뽐내지 않기에 오래간다.
夫唯不爭(부유부쟁), 故天下莫能與之爭,(고천하막능여지쟁) (성인은 )다투지 않기에, 세상이 그와 더불어 다투지 않는다.
古之所謂曲則全者(고지소위곡즉전자), 옛말에 이르기를 휜 것은 온전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豈虛言哉(기허언재), 어찌, (이것이) 공허한 소리(빈말)이겠는가?
誠全而歸之(성전이귀지) 진실로, 온전함으로 돌아가라
주) * 則 : 법칙 칙, 곧 즉 -> 법칙, 준칙, 이치, 본보기로 삼다, 본받다, 곧, 만일 ~이라면
* 枉 : 굽을 왕, 미칠 광-> 굽다, 휘다,굽히다, 복종하다, 사특하다,능멸하다.
* 窪 : 우덩이 와-> 웅덩이, 맑은 물, 깊다, 우묵하다, 낮다.
* 盈 : 찰 영-> 차다, 가득하다, 충만하다, 남다, 여유가 있다, 채우다, 미치다,, 이루다.
* 蔽 :덮을 폐, 해질 폐->덮다, 가리다, 은폐하다,총괄하다, 판단하다, 이르다, 도달하다.
* 彰 : 드러날 창-> 드러나다, 드러내다, 나타내다, 밝다, 뚜렷하다, 게시하다, 가로막다.
* 伐 : 칠 벌-> 치다, 정벌하다, 베다, 찌르다, 비평하다, 모순되다, 무너지다, 자랑하다.
* 矜 : 자랑할 긍-> 자랑하다, 불쌍히 여기다, 괴로워하다, 공경하다, 삼가다.
* 豈 : 개가 개, 어찌기-> 개가(凱歌) , 승전악(勝戰樂), 화락하다, 어찌 (기) , 그 기.
* 誠 : 정성 성->정성, 진실,참, 참으로, 만약, 과연, 참되게 하다, 삼가다, 공경하다,
[휜 것이 곧 온전한 것이며, 굽은 것이 곧 곧은 것이다. 움푹 패인 것이, 곧 충만한 것이며, 낡은 것이 곧 새로운 것이다. 적게 가지려는 것이 곧 얻는 것이요, 많이 가지려는 것이 곧 미혹을 당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인은 천하를 하나로 품는 방식이다. 천하를 자연스러움의 잣대로 보면, 모두가 하나로 품을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은) 스스로 드러내지 않기에 밝게 빛나고, 스스로 옳다하지 않기에 오히려 돋보이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에, 공이 있게 된다. 스스로 뽐내지 않기에 오래간다. 성인은 다투지 않기에, 세상이 (그와 더불어) 더불어 다투지 않는다.
曲則全(곡즉전), 휜 것이 곧 온전한 것이며,
枉則直(왕즉직), 굽은 것이 곧 곧은 것이다.
窪則盈(와즉영), 움푹 패인 것이 곧, 충만한 것이며,
蔽則新(폐즉신), 낡은 것이 곧 새로운 것이다.
少則得(소즉득), 적게 가지는 것이, 곧 더 얻는 것이요,
多則惑(다즉혹), 많이 가지는 것이 곧 미혹을 안게 되는 것이다.
是以聖人抱一爲天下式(시이성인포일위천하식), 이것이 성인은 천하를 하나로 품는 방식이다.
不自見(부자견), 故明(고명), (성인은)스스로 드러내지 않기에 밝게 빛나고,
不自是(부자시), 故彰(고창), 스스로 옳다하지 않기에 오히려 돋보이고,
不自伐(부자벌), 故有功(고유공),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에, 공이 있게 된다.
不自矜(부자긍), 故長(고장), 스스로 뽐내지 않기에 오래간다.
夫唯不爭(부유부쟁), 故天下莫能與之爭,(고천하막능여지쟁) (성인은 )다투지 않기에, 세상이 그와 더불어 다투지 않는다.
古之所謂曲則全者(고지소위곡즉전자), 옛말에 이르기를 휜 것은 온전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豈虛言哉(기허언재), 어찌, (이것이) 공허한 소리(빈말)이겠는가?
誠全而歸之(성전이귀지) 진실로, 온전함으로 돌아가라
주) * 則 : 법칙 칙, 곧 즉 -> 법칙, 준칙, 이치, 본보기로 삼다, 본받다, 곧, 만일 ~이라면
* 枉 : 굽을 왕, 미칠 광-> 굽다, 휘다,굽히다, 복종하다, 사특하다,능멸하다.
* 窪 : 우덩이 와-> 웅덩이, 맑은 물, 깊다, 우묵하다, 낮다.
* 盈 : 찰 영-> 차다, 가득하다, 충만하다, 남다, 여유가 있다, 채우다, 미치다,, 이루다.
* 蔽 :덮을 폐, 해질 폐->덮다, 가리다, 은폐하다,총괄하다, 판단하다, 이르다, 도달하다.
* 彰 : 드러날 창-> 드러나다, 드러내다, 나타내다, 밝다, 뚜렷하다, 게시하다, 가로막다.
* 伐 : 칠 벌-> 치다, 정벌하다, 베다, 찌르다, 비평하다, 모순되다, 무너지다, 자랑하다.
* 矜 : 자랑할 긍-> 자랑하다, 불쌍히 여기다, 괴로워하다, 공경하다, 삼가다.
* 豈 : 개가 개, 어찌기-> 개가(凱歌) , 승전악(勝戰樂), 화락하다, 어찌 (기) , 그 기.
* 誠 : 정성 성->정성, 진실,참, 참으로, 만약, 과연, 참되게 하다, 삼가다, 공경하다,
[휜 것이 곧 온전한 것이며, 굽은 것이 곧 곧은 것이다. 움푹 패인 것이, 곧 충만한 것이며, 낡은 것이 곧 새로운 것이다. 적게 가지려는 것이 곧 얻는 것이요, 많이 가지려는 것이 곧 미혹을 당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인은 천하를 하나로 품는 방식이다. 천하를 자연스러움의 잣대로 보면, 모두가 하나로 품을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은) 스스로 드러내지 않기에 밝게 빛나고, 스스로 옳다하지 않기에 오히려 돋보이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에, 공이 있게 된다. 스스로 뽐내지 않기에 오래간다. 성인은 다투지 않기에, 세상이 (그와 더불어) 더불어 다투지 않는다.
옛말에 이르기를 휜 것은 온전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어찌, 이것이 공허한 말, 빈말이겠는가? 진실로, 이 도리를 깨달아 온전함으로 돌아가라. 진실로 무위자연으로 돌아가라 ]
글자만으로 봐서는 이 장이 도덕경 81장중, 그나마 평이할 것 같아도, 내용에서는 가장 어려운 함의를 품고 있다고 보여진다. 때문에, 비슷비슷한 해석이 많지만, 내 견해로는 그중에, 딱히 노자의 思惟를 잘 반영한 해석은 드문 것 같다.
글자만으로 봐서는 이 장이 도덕경 81장중, 그나마 평이할 것 같아도, 내용에서는 가장 어려운 함의를 품고 있다고 보여진다. 때문에, 비슷비슷한 해석이 많지만, 내 견해로는 그중에, 딱히 노자의 思惟를 잘 반영한 해석은 드문 것 같다.
본 장은 노자의 思惟라기 보다는 태사담이나 그후 개작자의 思惟라 해야 옳다. 왜냐하면, 앞서의 21, 본 22장, 앞으로 나올 23장,24장 모두 초간본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장이 초간노자에 없는 내용이라해서,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본장의 내용은 왕필의 통행본 2장에서 나오는 '有無相生'이나 통행본 11장에 나오는 '無中生有', 노자의 思惟패턴을 오히려 더 잘 반영한 내용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장을 해석할 때,, 2장의 '有無相生'나 11장에 나오는 '無中生有' 思惟세계를 엿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曲則全(곡즉전), 枉則直(왕즉직), 窪則盈(와즉영), 蔽則新(폐즉신), 少則得(소즉득), 多則惑(다즉혹), 是以聖人抱一爲天下式(시이성인포일위천하식),'
'휜 것이 곧 온전한 것이며, 굽은 것이 곧 곧은 것이다. 움푹 패인 것이 곧, 충만한 것이며, 낡은 것이 곧 새로운 것이다. 적게 가지려는 것이 곧 얻는 것이요, 많이 가지려는 것이 곧 미혹을 당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인은 천하를 하나로 품는 방식이다.'
그러나, 본 장이 초간노자에 없는 내용이라해서,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본장의 내용은 왕필의 통행본 2장에서 나오는 '有無相生'이나 통행본 11장에 나오는 '無中生有', 노자의 思惟패턴을 오히려 더 잘 반영한 내용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장을 해석할 때,, 2장의 '有無相生'나 11장에 나오는 '無中生有' 思惟세계를 엿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曲則全(곡즉전), 枉則直(왕즉직), 窪則盈(와즉영), 蔽則新(폐즉신), 少則得(소즉득), 多則惑(다즉혹), 是以聖人抱一爲天下式(시이성인포일위천하식),'
'휜 것이 곧 온전한 것이며, 굽은 것이 곧 곧은 것이다. 움푹 패인 것이 곧, 충만한 것이며, 낡은 것이 곧 새로운 것이다. 적게 가지려는 것이 곧 얻는 것이요, 많이 가지려는 것이 곧 미혹을 당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인은 천하를 하나로 품는 방식이다.'
이 문장은 '온전함(全)'에 대한 고도의 思惟를 드러낸다는 것이 내가 보는 관점이다 . 즉 본 귀절들중에서 핵심은 '曲則全(곡즉전)' 이라 보여진다. 그래서 마지막 귀절에 '誠全而歸之(성전이귀지)', 즉, '진실로 온전함(全)으로 돌아가라, 진실로 온전함이라 무었이겠는가?' 로 끝맺는 귀절과 자연스럽게(온전하게)연결이 된다.
가령, 純白(순백)이 있다고 하자, 그것이 온전한 것이겠는가? 그것이 온전한 순백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한점의 티끌이 묻으면, 그 온전함은 쉽게 무너진다. 띠끌이나 먼지가 내려 앉고, 순백이 허물어지는 것이 특별한 현상이겠는가? 아니다. 그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순백을 유지하는 것이야 말로 극히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네모 반듯한 평면이나 사각형태, 곧은 직선이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겠는가? 노자식 思惟는 그런 것을 극히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암시한다.
오히려, 먼지도 앉고, 오염도 되고, 패이고, 울퉁불퉁 한 표면, 구불구불한 모습, 구겨지고 허물어지고, 그런 속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무성해지고 다시 허물어고, 하는 것이 자연이다. 그 모습, 자연스런 모습, 有爲함이 배제된 無爲한 자연의 모습이야말로 온전한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즉, 휜(曲) 것이야말로 자연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曲則全(곡즉전), '則'은 '卽' 즉, 曲卽全, '휜 것이 곧 온전함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아가서, 有爲함마저도 無爲함에서 나온다. 순백도 구겨지고 오염된 것 즉 자연의 일부이다. 결국 순백도 구겨지고 오염된 것과 다를 게 없다. 순백자체는 유의하지만, 언제든지, 오염되고 구겨져 자연스런 형태로 변할 가능성을 열어둔 有爲함이라면, 曲(휨)이 곧 全(온전함)이듯이 無爲함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有無相生'나 '無中生有'의 사상이다.
그리고, 곡즉전(曲則全)의 해석방향에 따라 다음 이어지는 부분의 해석이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이것을 '有無相生'나 '無中生有'의 思惟관점으로 보면, 굽은 것(枉)이나 곧은 것(直)이 차이가 없다. 굽은 것(枉) 곧 곧은 것(直)이고 곧은 것(直)이 굽은 것(枉)이다. 이른바 枉則直(왕즉직). 또, 가득찬 형태는 극히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움푹패여 무언가 더 채울 수 있는 그런 모습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움푹패여 무언가 채울 수 있는 것이나 가득찬 형태가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窪則盈(와즉영)이라 하는 것이다. 또, 새로운 것은 낡아지고, 낡은 것은 다시 새로움으로 바뀌어 나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항상 새로울 수 없고, 항상 낡은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극히 부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낡은 것속에서 새로움을 보고, 새로움 속에서 낡은 것을 본다. 그러므로 낡은 것이 곧 새로운 것, 蔽則新(폐즉신) 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적게 가지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가질 여유가 있고, 미혹도 없으니 적게 가진 것이야 말로, 얻는 것이 많은 것이다. 즉, 小則得(소즉득)이다. 많이 가져도 미혹을 당해 오히려 적게 가진 것보다 못해지니, 그것이야 말로 多則惑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성인은, 천지만물을 有無相生, 즉 유와 무를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생관계로 보고, 유와 무가 다른 것이 아니라 무에서 유가 나오는, 無中生有의 개념처럼, 曲이 곧 全이고, 枉이 즉 直이고, 窪(와)가 곧 盈(영)이며, 蔽가 곧 新, 少가 즉 得이며, 多가 곧 惑이 되는 개념으로, 이로서, '천하만물은 대립되는 것 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포용하고, 서로 다르지 아니하니, 이로서 '천하를 하나로 품는다(抱一爲天)'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인의 방식이다. 성인의 깨달음의 경지인 것이다.
하지만, 상기 귀절에 대해, 많은 이들의 해석이 천차만별이다. '지식백과'에는,
오히려, 먼지도 앉고, 오염도 되고, 패이고, 울퉁불퉁 한 표면, 구불구불한 모습, 구겨지고 허물어지고, 그런 속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무성해지고 다시 허물어고, 하는 것이 자연이다. 그 모습, 자연스런 모습, 有爲함이 배제된 無爲한 자연의 모습이야말로 온전한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즉, 휜(曲) 것이야말로 자연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曲則全(곡즉전), '則'은 '卽' 즉, 曲卽全, '휜 것이 곧 온전함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아가서, 有爲함마저도 無爲함에서 나온다. 순백도 구겨지고 오염된 것 즉 자연의 일부이다. 결국 순백도 구겨지고 오염된 것과 다를 게 없다. 순백자체는 유의하지만, 언제든지, 오염되고 구겨져 자연스런 형태로 변할 가능성을 열어둔 有爲함이라면, 曲(휨)이 곧 全(온전함)이듯이 無爲함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有無相生'나 '無中生有'의 사상이다.
그리고, 곡즉전(曲則全)의 해석방향에 따라 다음 이어지는 부분의 해석이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이것을 '有無相生'나 '無中生有'의 思惟관점으로 보면, 굽은 것(枉)이나 곧은 것(直)이 차이가 없다. 굽은 것(枉) 곧 곧은 것(直)이고 곧은 것(直)이 굽은 것(枉)이다. 이른바 枉則直(왕즉직). 또, 가득찬 형태는 극히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움푹패여 무언가 더 채울 수 있는 그런 모습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움푹패여 무언가 채울 수 있는 것이나 가득찬 형태가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窪則盈(와즉영)이라 하는 것이다. 또, 새로운 것은 낡아지고, 낡은 것은 다시 새로움으로 바뀌어 나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항상 새로울 수 없고, 항상 낡은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극히 부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낡은 것속에서 새로움을 보고, 새로움 속에서 낡은 것을 본다. 그러므로 낡은 것이 곧 새로운 것, 蔽則新(폐즉신) 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적게 가지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가질 여유가 있고, 미혹도 없으니 적게 가진 것이야 말로, 얻는 것이 많은 것이다. 즉, 小則得(소즉득)이다. 많이 가져도 미혹을 당해 오히려 적게 가진 것보다 못해지니, 그것이야 말로 多則惑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성인은, 천지만물을 有無相生, 즉 유와 무를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생관계로 보고, 유와 무가 다른 것이 아니라 무에서 유가 나오는, 無中生有의 개념처럼, 曲이 곧 全이고, 枉이 즉 直이고, 窪(와)가 곧 盈(영)이며, 蔽가 곧 新, 少가 즉 得이며, 多가 곧 惑이 되는 개념으로, 이로서, '천하만물은 대립되는 것 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포용하고, 서로 다르지 아니하니, 이로서 '천하를 하나로 품는다(抱一爲天)'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인의 방식이다. 성인의 깨달음의 경지인 것이다.
하지만, 상기 귀절에 대해, 많은 이들의 해석이 천차만별이다. '지식백과'에는,
"구부리면 온전할 수 있고, 휘어지면 바로 펼 수 있다. 움푹 파인 구덩이는 가득 채워질 수 있고, 낡으면 새로워질 수 있고, 적게 가지면 얻을 수 있고, 많이 가지면 미혹된다....."
또, 아래는, 어떤 노자전문가가 '직선의 삶, 곡선의 삶'이란 강의에서, 소개한 글이다.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삶의 진리를 2천500여 년 전에 설파한 노자(老子)는 이에 대한 해답도 내놨다. 곡즉전(曲則全)이다. '구부러진 것이 온전한 것'이란 직설적인 뜻보다는 곡선(曲線)을 추구하는 삶이 더 풍요롭고, 완전한 삶에 가깝지 않겠느냐는 광의(廣義)의 해석이 가능하다. '곡선의 삶'은 우선 느림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두 점 사이를 곧바로 달려가는 직선에 비해 곡선은 가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 하지만 늦게 가는 만큼 얻는 것들이 많다. 인생의 속도가 느리니 가족은 물론 인연을 맺은 이들을 차분하게 돌아보면서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걸으면 길에 있는 작은 돌 하나, 길섶에 있는 풀 한 포기까지 볼 수 있지만 차를 타고 질주하면 시야가 좁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앞서 나의 관점과 비교하면, '구부리면 온전할 수 있고....'라는 지식백가의 내용은 노자의 사유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부족에 기인한 설명이라 생각된다. 지식백과에서 그 모양이라니...
후자의 해석도, 곡즉전(曲則全)을 '구부러진 것이 온전한 것'이란 직설적인 뜻보다는 '곡선(曲線)을 추구하는 삶이 더 풍요롭고, 완전한 삶에 가깝지 않겠느냐는 광의(廣義)'으로 이해하고, 이를 강의에 활용한 것이다.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삶의 진리를 2천500여 년 전에 설파한 노자(老子)는 이에 대한 해답도 내놨다. 곡즉전(曲則全)이다. '구부러진 것이 온전한 것'이란 직설적인 뜻보다는 곡선(曲線)을 추구하는 삶이 더 풍요롭고, 완전한 삶에 가깝지 않겠느냐는 광의(廣義)의 해석이 가능하다. '곡선의 삶'은 우선 느림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두 점 사이를 곧바로 달려가는 직선에 비해 곡선은 가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 하지만 늦게 가는 만큼 얻는 것들이 많다. 인생의 속도가 느리니 가족은 물론 인연을 맺은 이들을 차분하게 돌아보면서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걸으면 길에 있는 작은 돌 하나, 길섶에 있는 풀 한 포기까지 볼 수 있지만 차를 타고 질주하면 시야가 좁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앞서 나의 관점과 비교하면, '구부리면 온전할 수 있고....'라는 지식백가의 내용은 노자의 사유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부족에 기인한 설명이라 생각된다. 지식백과에서 그 모양이라니...
후자의 해석도, 곡즉전(曲則全)을 '구부러진 것이 온전한 것'이란 직설적인 뜻보다는 '곡선(曲線)을 추구하는 삶이 더 풍요롭고, 완전한 삶에 가깝지 않겠느냐는 광의(廣義)'으로 이해하고, 이를 강의에 활용한 것이다.
교훈적 내용으로 활용하는 것은 좋지만, 직설적, 광의적 이해의 개념의 수준이 아니라, 부자연스러움과 자연스러움, 유위와 무위, 나아가서 부자연스러움, 유의도 무위 자연의 일부이며, 무위자연 자체임을 말하고자하는 이른바, 有無相生, 無中生有의 노자의 思惟체계를 제대로 이해나 하고 활용한 것일지?
내관점이 전적으로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 또한 이런 식의 무수한 도덕경해설이 제대로 된 해석이 아니라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 감정이, 내가 '老子別義'라 굳이 '別義'라 이름붙이며, 시작하게 한 큰 한 이유이기도 하다.
'不自見(부자견), 故明(고명), 不自是(부자시), 故彰(고창), 不自伐(부자벌), 故有功(고유공),
不自矜(부자긍), 故長(고장), 夫唯不爭(부유부쟁), 故天下莫能與之爭,(고천하막능여지쟁), 古之所謂曲則全者(고지소위곡즉전자), 豈虛言哉(기허언재), 誠全而歸之(성전이귀지)'
'(성인은) 스스로 드러내지 않기에 밝게 빛나고, 스스로 옳다하지 않기에 오히려 돋보이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에, 공이 있는 것이다. 스스로 뽐내지 않기에 오래간다. 성인은 다투지 않기에, 세상이 그와 더불어, 더불어 다투지 않는다.
옛말에 이르기를 휜 것은 온전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어찌, 이것이 공허한 말, 빈말이겠는가? 진실로, 이 도리를 깨달아 온전함으로 돌아가라. 진실로 무위자연으로 돌아가라 ]
천하를 하나로 품는 성인의 방식에 대한 보충 설명이 이어진다. 성인은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알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밝게 빛나는 것이고, 스스로 옳다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알고, 옳다고 주장하지 않기에, 오히려 돋보이는 것이다. 스스로 자랑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알고 자랑하지 않기 때문에, 공(功)이 있는 것이다. 스스로 뽐내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알고, 뽐내지 않기에, 오래간다. 성인은 다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알기에 다투지 않는다(夫惟不爭). 그러므로 세상과 더불어 다투지 않는다.
'夫惟不爭'은 통행본 8장 '上善若水(상선약수)' 에도 등장하는 귀절이다. '(물은) 만물과 이익을 다투지 않는다. 그리하면, 다투지 않으므로 허물이 없게 되는 것이다'. 즉, '夫惟不爭 故無尤(부유부쟁 고무우) ' 이라 했는 데, 8장은 '물'로 夫惟不爭하는 성인의 삶을 비유한 것이지만, 본장은 '曲則全'으로, 허물이 없는 성인의 삶의 모습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니, 옛말에 이르기를 '휜 것은 온전한 것' 과 다르지 않다고 한 것이다. 휜(曲) 것이야말로 자연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曲則全(곡즉전), 즉, 曲卽全이라 한 것이다. 이를, 지식백과처럼, 曲則全을 '휘면(구부리면) 온전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휜 것이 곧 온전함이다' 라 한 것이다.
어찌, 이것이 공허한 빈말이겠는가? 그러니, 지금까지 누누히 설명해왔듯이, 진실로, 온전함으로 돌아가라. 즉, '曲則全(곡즉전)의 도리를 깨달아, 진실로 도에 이르라 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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