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正義)란 무엇인가?
며칠전 우연히, TV보다 밤샘을 할 뻔했다.
국사 교과서 8번째 검인정본이 나왔는데,
오류가 많아 문제투성이라는 기사가 나온 후, 모 방송사에서,
그 교과서 집필자와, 다른 7종류의 검인정교과서 집필자 각 2명씩이 나와
서로 비판과 해명을 하며, 치고받는 싸움판(설전)을 구경하느라,
밤2시를 넘기고, 때를 놓쳐, 잠이 안와서 혼이 났다.
우리 사회의 정상인의 기준이나, 교육부 기준은 잘 모리겠고,
내 기준으로 보면, 쓰잘데기 없는(?) 치졸한 공방에 시간만 낭비했다.
나자신 치졸(?)한 것에 치졸한 관심을 일으킨 것에 부메랑을 맞은 것이다.
맞아도 싸지 싶었다
상대의 논리는 무조건(?) 부정하고 자기식대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주장한다.
자기 고백은 없고, 오로지 남의 작품에 꼬뚜리 잡기에 혈안이다.
공공의 장소에서도 얼굴을 붉히고 상대를 비난하는 데,
명색이 최고의 지성을 가르킨다는 분들의 교양미는, 누구 가릴 것없이, 찾아볼 길이 없었다.
우리 교육계, 나아가 우리 사회의 이른바 '보수, 진보, 우파, 좌파의 의식수준'의 적나라한 한 단면을 참으로 과감없이 그대로 보여주는 현장 아니였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 는 말이 있다.
'보이는 만큼 안다' 는 말이지만, 그 정도는 양반이다.
아는 것을 넓혀야, 보이는 것이 넓어 질게다.
'아는 것을 뽀죽하게 파는 것, 즉 자기 전공분야를 깊이 하는 것' 을 나무랄 일이 못되고, 권장해야 할 일이겠지만, 옆으로의 넗힘이 얼마나 부족한지, 한 인간의 생애에 배우고, 깊게 하고, 깨닫는 것이 얼마나 된다고, 그리도 자기 주장, 자기 아집들에 당당한 지?
'깊이 파려면 넓게 파라' 는 경구도 이들에게는 뉘집 개짓는 소리로 들리나 보다,
작금의 우리 사회에, 이런 사태는 너무 흔하고 흔해, 지금은, 사실 대수롭지 않다.
시골 길거리에, 이리 밟히고 저리 밣히는 개똥이나, 질경이보다 더 흔하듯 하기 때문이다.
정치는 이미 그보다 더 개판이니, 언급할 가치도 없고,
이번의 국정원의 댓글사건, 이석긴지 이새낀지 사태의 주변에서,
맞물려 돌아가는 꼬라지들를 보면, 우리 사회에 정의의 실종이 참으로 심각하다.
우리 사회가 우짜다가 이런 지경으로 내몰리는지?
이런 갈등과 불합리가, 쌓여가다가 결국 폭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제대로 배워왔다 할 수 있는가?
중세 봉건시대 몰락한 것은 먼 시대 이야기라 하더라도,
왕정시대의 부조리, 불합리에 대한 반동으로 러시아혁명이나, 중국 공산혁명이 일어난 것이나, 다시 그후, 혁명의 결과에 대한 반동으로, 결국 쏘련이 망하고, 중국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왔고, 1차세계대전, 2차세계대전을 거쳐 오늘날의 세계질서가 형성되어 왔다지만 이후로도 나라마다, 나라간에, 엄청난 부조리와 부조화로 몸살을 알아오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것은, 내 생각에는 이 '문명의 불안전성'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시 일제점령기, 6.25전쟁, 4.19, 5.16, 5.18등 시대의 분수령을 긋는 큰 사건들과 그외도 무수한 사건과 사고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작금의 사회는
부와 권력과 명예를 가진자와 못 가진자의 갈등,
부와 권력과 명예를 거머질려는 자, 지킬려는 자들끼리의 경쟁으로 날을 지새우고 있고,
정치, 사회 모든 분야에 이른바 진보와 보수, 종북논란으로
하루가 멀다하고 다툼이 없는 날이 없는 것이다.
약속된 방법, 정당한 방법으로 그짓(?)을 한다면 누가 뭐라하겠는가?
문제는 약속위반, 부정한 방법으로 일을 도모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는 이 '문명의 불안전성' 이 그 원죄라면 원죄이다.
역사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교과서 논쟁을 보면서, 작금의 역사 記述이, 記述者의 한풀이 정도로 전락한 것이 아닌지?
역사에서 배울 길이 없는 민족은 희망이 없는 것이다. 내관점으로 記述者들 시각을 보면, 당대의 역사마저, 이렇쿵 저렇쿵 집단의 입장을 대변하기에 급급한 자들이다, 이들에 의해, 교과서에 역사기술 운운 ? 후대를 가르킬 교재에서 마저?...
18년이 넘게, 궁형의 울분을, 52만 6,500자, 130책의 역사서 記述로 승화시킨 사마천이
우리사회의 이전투구를 바라보노라면 어떤 감회가 들까?
'고대부터 한무제에 이르기까지, 3,000년 역사를 쓴 내가, 그에 비해 니네들, 한줌(?)도 안되는 나라의 꼴랑, 반세기 역사기술에 그리도 말이 많다니... 니들 하는 꼬라지들을 보면, 작금의 니들 사회는 내가 돌아간다해도 별수 없었을 것' 이라 할란가?
'정의란 무엇인가?'
이 싯점에, 내로서는, 뼈저리게 생각하게 하는 화두이고, 시대상황인 것이다.
동서고금에 정의(正義)가 무엇인지, '정의(正義)'에 대해 정의(定義)를 내린 사례는 무수히 많다. 사전적으로는 정의((正義))란 '시시비비의 판단기준'을 말한다.
고대 중국에서의 ‘정의((正義))’는 정치적 정당성과 종교적 관행의 존중이 합쳐져 만들어진 숙어로 ‘인간으로서 준수해야 할 도리’라는 의미라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정의에 해당하는 말은 ‘신이 정한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의 플라톤(Platōn), 아리스토텔레스을 거쳐, 근대에 이르러 J. S. 밀(John Sturat Mill) 등의 공리주의자에 의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원리라는 주장으로 이어져서 현대에 까지 내려 오고 있다.
최근에 이르러 마이클 샌덜이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라는 저서를 내 놓았다.
이에 대해 이한이라는 자는 이를 비판하는 책을 출간하였다. 즉.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현대 정치철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마이클 샌델의 정치철학을 비판하는 정치교양서란다. 변호사 이한은, 모호한 딜레마를 내놓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타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마이클 샌델의 정치철학을 깊이 해부했다고 소개한다. 샌델이 자신의 견해를 논증하기 보다는 주장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평범한 독자들은 이런 류의 비슷한 책을 한 권을 읽기도 버거운데, 비평서까지 읽고, 거기서 얻어지는 것이 무언지 모르겠다는 불만을 토로한다. 기껏 고심해 읽어 나름대로 윤곽을 잡아놓으니, '그것은 틀렸다' 라고 하니, 진실이 무엇인지,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 아니라, 헐!, 왠 말장난(?) 인지, 헷갈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시대를 초월한 정의는 존재하는 가?'
'시대를 초월하는 정의는 고사하고 당대의 정의정도도 존재하는가?'
작금의 사태들을 지켜보면, 당대는 정의와 불의의 구분 마저 모호해졌다.
'시대를 초월한 정의' 을 찾기 위해, 동서고금의 역사를 배워오면서, 불행히도,
'이 사회가, 이문명에, 시대를 초월한 정의'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는 결론의 유혹에 빠진다.
'시대를 초월한 정의라는 것이 없다' 라는 나름대로의 결론의 유혹에 우울해진다.
'시대를 초월한 정의' 따위는 꿈같은 이바구이고,
'시간을 초월한 정의'나마 존재하는지 눈을 씻고 찾아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고, 유야무야되는 사건들이 대부분이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이 있다.
인생사 대부분이, 그러하다면, 인생사에서 정의라고 할만한 것들 대부분,
시간에 얼매이는 속된 일일뿐, 시간을 초월한 정의'라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우리는 니나 할 것 없이, 정의가 없는 세상에서 어쩌면, 정의롭지 못한 인생을 사는 격이다.
지금의 이 혼란도, 어떤 방식이든, 시간이 지나면 정리되고, 또 잊혀져 갈 것이다.
그바탕위에 흥하던 망하던, 역사는 반복되고 돌고 돌 것이고...
그러니,오늘의 사태에 답답하다면,
오로지, 시간이 지나도록, 기다려야하는가? 혹은,
'有無相生'
즉, 善과 不善은 相生한다는 도덕경 말씀을 위안으로 삼아야 하는가?
'不善'이 있기 때문에 '善' 이 존재한다.
'善'의 존재가치는 '善'이 '善'이기 때문이 아니라,
'不善이 무수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수한 不善의 존재는 필연이다',
'善을 추구하려면, 무수한 不善을 감내해야 한다' 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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