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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동양철학/老子別義(上)

老子別意(上)_11장 無中生有(무중생유)

by 靑野(청야) 2013. 7. 13.
 
바빌로니아의 유한 우주관
 
[도덕경 11장]

三十輻共一轂(삼십폭공일곡) 서른개의 바퀴살이 모여, 하나의 바퀴통을 형성하지만,
當其無(당기무) 당연히, 빈공간이 있어야 그 빈공간을 이어
有車之用(유차지용) 수레(바퀴)의 구실을 할 수 있다
埏埴以爲器(연식이위기) 찰흙를 이겨서 그릇을 만들지만,
當其無(당기무) (가운데를) 비게 만들어야
有器之用(유기지용) 그릇으로 효용이 생긴다.
鑿戶牖以爲室(착호유이위실) 방에 창문을 내어
當其無(당기무) 빈공간을 만들어야(창문이 생기므로)
有室之用(유실지용) 방으로서의 쓸모가 있는 것이다.

故有之以爲利(고유지이위리) 그러므로, 있음 즉 有가 이로움이 되는 것은 
無之以爲用(무지이위용) 없음 즉, 無가 쓰임이 되기 때문이다
 
주) * 輻  : 바퀴살 폭, 바퀴살복, 몰려들 부->바퀴살 ,몰려들다 (부),다투어 모이다 (부)
     * 轂  : 바퀴 곡-> 1. 바퀴통 2. 수레, 수레 바퀴
     * 埏  : 땅 가장자리 연, 이길 선->1. 땅 가장자리 2. 묘도(墓道) 3. (흙을)반죽하다
     * 埴  : 찱흙 식, 찰흙 치-> . 찰흙 2. 진흙 3. 점토(粘土) 4. 견고(堅固)하다
     * 鑿  : 뚫을 착, 구멍 조, 새길 촉->1. 뚫다 2. 파다 3. 깎다
               4. (쌀을)쓿다(곡식을 찧어 속꺼풀을 벗기고 깨끗하게 하다)...
     * 戶  : 집 호,지게 호->1. 집 2. 지게 3. 구멍 4. 출입구(出入口)
     * 牖  :들창 유->1. 들창(-窓: 들어서 여는 창) 2. 성(姓)의 하나 3. 깨우치다.
 
 
[바퀴는 서른개의 바퀴살이 있어, 하나의 바퀴통을 형성하지만, 바퀴통이 비어 있기 때문에 그 속을 이어 차축과 이어 바퀴를 만듦으로서, 수레가 그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들지만, 그 속을 비게 하여야  뭔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의 역활을 할 수 있다. 방에 창문을 내어야, 바람이 통하고, 바캍도 내다볼 수 있어, 방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있음 즉, 有가 이로움이 되는 것은, 없음 즉, 無가 쓰임이 되기 때문이다]

도덕경 2장에서는  美는 醜라는 비교대상이 있음으로 성립하고, 善이라는 것도 비교대상이 되는 선이 아닌 것(不善)이 비교됨으로써 존재한다. 또, 有와 無의 비교로 부터, 有는 無가 있기 때문에 성립하고, 無는 有가 있기 때문에 성립한다는 '有無相生'의 원리를 설명하는 대신 여기 11장에서는 유와 무의 또다른 조명으로 無中有生' 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즉 無의 쓰임(用)에 따라 有의 잇점이 생긴다. 無가 단순한 無가 아니다라는,  어찌보면, 여기에 고도의 철학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어, 이장 역시 논란이 많은 장이다. 용어는 평이하여도, 有, 無의 철학적 사유경험이 없다면 이해하는 데, 난해함에 봉착하기 쉽다. 여러해석을 보면, 평이한 이 문장에서도 엉뚱한 해석을 볼 수 있는 데, 이는 有, 無의 철학적 사유경험이 부족함에 기인함을 알 수 있다.

老子의 無中生有

'통나무로 잔을 만든다 하자, 통나무 그 자체로는 그저 나무토막일 뿐이다. 거기 홈을 파서 물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든 물건은 '물잔'이라는 이름으로, 그 텅빈(無) 공간의 쓰임이 있기 때문에, 물을 담는 기능(有)을 낳는 것이다.

집에 문이 하나도 없다면, 답답하고, 출입이 불가능 할 것이다. 여기에 벽을 들어내고 문을 낸다면, 문으로 공기가 출입하고, 시야가 트임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답답함을 가시게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출입이 가능하여 집으로서의 기능이 살아날 것이다. 여기서 無는 벽을 들어낸 텅빈 공간 즉 門의 공간이 되는 것이고, 그 門을 통하여 출입과 공기가 통하는 방인 有가 탄생하는 것이다.

혹자는 방안의 빈공간을 '무'로 해석하는 이도 있는 데, 문을 냄으로써, 그 공간의 기능이 살아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내생각에는 잘못된 해석이다. 방안의 빈 공간을 포함한 전체공간을 '有'로 보고, 문을 내기 위해 들어낸 공간이 '無'로서 이 무의 쓰임 때문에 전체 공간이 유로서 살아난다는 것으로 해석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오류는 첫째문장 三十輻共一轂(삼십폭공일곡)  當其無(당기무)  有車之用(유차지용)의 해석에서도 나타난다. 즉. 바퀴통이 텅비어 있는 것이 無, 바퀴살이 이 공간을 통해 하나의 바퀴통과 차축을 연결하여 수레를 굴러가게하는 바퀴역활이 생기는 것을 有로 보아야 하는 데,

어떤 이는, 수레의 물건을 담을 수 있는 수레의 기능인 텅빈공간을 無로 해석도 있다. 바퀴살의 팅빈공간 유무생성의 인과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엉뚱한 해설이라 생각한다. 또, 바퀴살이 없는 통짜 바퀴도 있음을 들어, 이런 류의 해석을 주장하지만, 노자가  모든 바퀴를 대표하는 설명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바퀴살과 통을 연결하여 생기는 기능의 예로 설명한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없음속에 있음이 생기고(無中生有), 있고 없음이 서로를 낳고(有無相生), 있음이 이로움이 되는 것은 없음이 쓰임이 되기 때문(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의 원리이다.

즉 전통적으로는 '無'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입장에서, 無는 유가 감추어져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서양의 존재론 역사에서는 無의 중요성을 제일 먼저 깨달은 사람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라 하는 데, 노자사상에 영향받은 바 크다한다.

본 장에서, 수레바퀴, 질그릇, 門(문)이 有와 無의 개념을 설명하는데, 동원하였다. 노자의 有와 無에 대한 개념은 어찌보면 현실적이고, 소박하며 자연스럽다.일상 생활의 단순한 재료를 이용하여 有無를 설명함 때문인가?  때문에 오히려 더 현학적인 장자의 '無' 나 불교의 '無'의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노자가 던지는 '有', '無'의 사유의 향기는,  불경의 '無'개념 과  향기가 친근하다. 왜그런가?  나만이 그런가?

有.無에 대한 사유 

있음이란 무엇인가? 없음이란 무엇인가?

있고(有) 없음(無)은, 동서고금의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이지만, 가장 난해한 사유의 대상이 되어 왔다. 왜냐하면, 있음은, '무엇이 있으며, 왜 있으며, 어떻게 있으며, 무엇으로부터 있음이 생겼는가?',  없음이란, '무엇이 없는 것인가, 왜 없음이 생기는가, 있음으로 부터 없음이 생긴다면, 있음은 어디로 돌아가는가?'.  단순히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와 비존재의 이른바 존재론의 영역까지 사유를 넓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有,無에 대한 사유는 필연적으로 궁극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吾不知誰之子(오불지수지자) 象帝之先(상제지선)  나는 (도가)누구의 자식인지 알 수 없지만, 조물주보다 먼저 있었던 것 같다(道德經 4장)'
'태허는 끝없이 넓고 큰 세계를 아무리 큰 지식으로 이 경지를 들여다보아도 그 한계를 알 수 없다(莊子)
'천지에는 옛날도 없고 지금도 없으며 처음도 끝도 없이 영원히 변화하는 것이다(공자)'
'太虛卽氣, 기가 모이면 만물이 생기며, 만물이 사라지면 기가 흩어진다. 기가 흩어진 상태를 허(虛)라고 하며, 근원적인 허의 상태를 태허 (莊載) '
 
노자, 장자,공자의 궁극에 대한 견해는 대체적으로 촛점이 모아진다고 생각한다. 우주론적 관점으로 보면, 정상우주론에 가깝다는 것 내 개인적 판단이다. 이미 크기를 알 수 없는 태초의 우주에서 有가 생기는 원리로 부터 有의 소멸, 有無相生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여러 思惟들이 여러 성인들이 남긴 자취라 할 것이다. 그런 성인들의 말씀은 우리의 정신적 토대로 오랫동안 자리매김하여 왔기 때문에, 현대적 이해와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현대물리학의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것도 필요하다.
 
라이프니츠는 세상만물을 이진법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0', '1' 이라는 두개의 십진법 숫자로 이진법을 설명한 것이다. '0' 은 텅빈 것, 아무것도 없는 것(無), '1'은 신(神)의 개념으로 인식하였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1'인 신의 창조적 활동으로 만물이 생겨났다. 즉, 만물이 설명된다는 설명이다. 중세 신학적 사고로 이진법을 발견하고, 연구하였기 때문이다
 
또, 라이프니치는 이진법 연구의 일환으로,  주역의 64괘 384효을 0과 1의 이진법화하여 설명을 시도 하였다. 즉, '0' 은 텅빈것, 아무것도 없는 것, '1'은 신(神)의 개념으로 이것이 6개의 효을 이루고, 이 효의 조합으로 64괘의 괘가 생긴다는 것이다 즉, 無(0)와 神(1) 사이에서 만물이 생성하였음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1은 神, 0는 無로 보는 라이프니치의 이진법을 통해보는 일종의 有無論이 있다,
 
나는 일찌기 올린  '周易新小考'에서 '1'와 '0'을 존재(有)와 비존재(無)의 개념으로 대치하여 이것이 조합하여 6효를 이루며  상호 연관성가지고, 64괘를 설명하는 새로운 주역의 해석을, 도덕경 해설이전에 도전해보고 싶었던 것이였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주관적 사유이기 때문에, 객관적 지식과 상상력을 더하기 위해, 도덕경 해석을 먼저 시도하였는 데, 이또한 만만찮다. 장자가 10만자에 이르는 저술을 했지만, 노자는 5,000자에  불과한 글자로 자기 생각을 표현해났으니,'聖人不仁' 을 실천한 것일까?  독자를 위한 배려가 전혀 없다 할 것이다. 아니면, 그  함축적 의미가 깊다할 것이다. 이는, 이를 이해하고자하는 노력이 그만큼 더 필요하다는 반증이다.
 
고대 동양에서부터 '태극'으로 인식되어 온 태초의 우주의 모습은, 현대우주물리학에서도 부단히 탐구대상이 되어 왔다 .현대우주물리학에는, 정상우주론, 팽창우주론이 대립하고 있는 데, 대체적으로 팽창우주론이 힘을 얻고 있다. 팽창이 있었다는 것은 시간을 꺼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태초가 있었다는 말이다.  태극은 모든 것이 통합된 우주의 원초, 또는 무극, 무에서 '기(氣)'가 일었다. 이는 무(진공)에서 양자요동으로 물질이 생겨났다는 현대우주양자론의 우주 생성논리가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양자요동을 설명하는 것이 양자역학론이라면, 무극에서 기가 일었다는 것을 '이(理)'로서 설명한다. 이른바 '이기론(理氣論)'이다. 그 후, 인플레이션과 빅뱅이후, 다양한 물질이 생겨나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하늘과 땅, 그리고 만물이 생겨났다.
 
뿐만아니라, 현대우주물리학은  그 태초에서 만물이 생겨나는 원리, 태초이전, 그리고 우주의 종말, 종말이후까지도 설명하는 이른바 M이론으로 일컬어지는 '만물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 으로 불리는 이론이 제창되고 그것의 해석이  거의(수년, 수십년, 수백년, 어쩌면 불가능?) 완성단계에 와 있다한다.
 
 얼마전 21세기 에디슨이라 이름난 발명가인 레이 커즈와일이라는 사람이,
 
'2045년경이면 사람은 죽지 않는다'
 
라고 예측한 기사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다. 즉 진시황이 그토록 바라던 불노장생이나 영생불사가 실현될 것이라는 기사다. 지금은 황당한 이야기로 들리거나, 과거 같으면, 미친 놈 헛소리하는 것으로 치부하였을 지 모르지만, 과학기술발전의  끝없는 질주를 경험하고 있는 현 세대들은 時期에는 異見이 있을 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실현될 것이라는 것에 대해 누구도 강하게 부인 못한다
 
'철학은 이제 죽었다'
'우주는 신이 설계하지 않았다..… 스스로 창조해 갈뿐'
'현대 물리학은 우주창조에서 신을 위한 자리를 남겨두지 않는다'

이것은 역시 스티븐호킹이 'Great Design'이라는 저서에서 쓴 말이다.  물론, 사람마다 받아 드리는 느낌이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레이 커즈와일을 넘어서는  광오한 말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호킹은 아인시타인 이래,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물리학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Grand Design(위대한 설계)'에서, M이론은 궁극의 이론이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속성들을 모두 갖춘 유일한 모형이며, 이 이론에 따르면, 엄청나게 많은 우주들이 무(無)에서 창조되었다고 예측한다. 그 우주들이 창조되기 위해서는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 혹은 신의 개입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 다수의 우주들은 물리 법칙에서 자연발생한다. 즉, 우주는 신(神)에 의해 창조된 게 아니며, 철학은 현대의 과학발전, 특히 물리학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했다. 철학은 이제 죽었다라는 주장을 내놨던 것이다.

쉽지는 안겠지만,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결국 언젠가 '만물의 이론' 완성된다면, 사유의 출발이 태초 및 태초이후이던, 모든 철학, 종교도, '불사의 인간'시대의 도래 못지 않게,충격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용도폐기를 준비하던가, 그런 수모를 받지 않을 려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有.無에 대한 여러 사유의 산책
 
아래 글들은 有, 無, 또는存在와 非存在에 대한 성현들의 생각들을 더듬은 앞선 사람들의 자료를 정리하고, 나의 생각을 첨언 한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

존재론이라면, 서구철학의 전통위에서 고금의 위대한 사상가들과의 진지한 대화를 통하여 그 자신의 독특한 사상을 정립하였다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존재론'을 떠올린다. 그는 '존재와 시간','존재문제에 대하여' 등을 통해서, 전통적인 '존재자' 즉 '존재하는 것'에 대해, '존재 즉 있음' 과 '어떻게 존재하는 가' 즉 존재방식으로 '존재의 의미와 존재의 진리'를 밝히는 것이 것이 존재론의 과제라 하였다. 존재와 존재자를 구별함으로써 이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하이데거가 노자의 도덕경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노자가 얼마나 하이데거의 사유에 영향을 주었는지, 대단한 하이데거의 단순히 지적 호기심이였는지 모르지만, '存在' 의 의미를 밝히는 데 기를 쓴 하이데거였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존재를 '有', 비존재를 '無'로 대치하면,'

있고 없음이 서로를 낳고(有無相生), 없음속에 있음이 생기고(無中生有), 있음이 이로움이 되는 것은 없음이 쓰임이 되기 때문(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는 有無相生이다' 이것을, 이를테면,

'존재와 비존재는 서로를 낳고, '비존재속에 존재가 생기고', '존재의 이로움는 비존재가 쓰임이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莊子의 有無觀

아직, 노자 도덕경 전체를 파악한 후 언급되어야 마땅하나, 5장과 11장의 결합만으로 노자의 有,無 즉 존재론의 원형적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과연 노자의 존재론은 이후 생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有,無,有限,無限의 개념과 無에서 有가 생성되는 우주론적 시각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노자는 만물의 존재원리와 그 이치는 '道'라 하고, 그 '道' 가 만물속에 작용하는 원리를 '德'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노자의 지고지순한 우주는 대자연으로 표현되고, 그 道와 德도 대자연을 본받는다고 이해한다, 대자연의 그러함이 道의 출발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대자연을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 우주 즉 대자연의 有無相生을 말하지 않는다.

노자가 약 5천자의 도덕경을 남긴 반면, 장자는 10여만자에 이르는 저술을 완성하였다. 저서인 <장자>는 원래 52편(篇)이었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것은 33편(內篇 7, 外篇 15, 雜篇 11)이라 한다.

장자는 노자(老子)와 마찬가지로 도(道)를 천지만물의 근본원리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노자의 무위사상(無爲思想)을 계승하는 것이지만, 현세와의 타협을 배제하는 점에서는 더욱 철저하였다고 한다. 장자의 도는 '하나이고 전체 이므로 즉, 일(一)이며 대전(大全)이므로 도의 대상이 없다. 어떤 대상을 욕구하거나 사유하지 않으므로 무위(無爲)하다. 도는 스스로 자기존재를 성립시키며 절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자연(自然)하다. 도는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지극한 도란 모든 것 속에 있다, 심지어 ·똥 ·오줌 속에도 있다(도재시뇨: 道在屎尿)고 주장하였다.

도가 개별적 사물들에 전개된 것을 덕(德)이라고 하는 데, 그래서, 천지만물의 공통된 본성이라면 덕은 개별적인 사물들의 본성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도 덕이다. 덕을 회복하게 되면 도와 간격 없이 만날 수 있다.도와 일체가 되면 도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 장자는 외편 지북유(知北遊)에서 만물을 포함하고 있는 거대한 공간을 태허라 하였다.

[태허는 끝없이 넓고 큰 세계를 아무리 큰 지식으로 이 경지를 들여다보아도 그 한계를 알 수 없다. 사물을 사물로 있게 하고 이를 지배하는 道는 사물과 동떨어져 있지 않고 모든 사물 속에 있다. 그리고 사물과 사물 사이에 이것과 저것의 구별이 있음은 말하자면 상대적 구별이라는 것이다,
 
사물과 떨어지지 않는 道가 상대적으로 구별되는 사물들을 낳는다면 서로 구별된다고 여겨지는 사물들도 결국 道이며 道의 입장에서 볼 때 구별이 없는 하나이고 따라서 사물과 사물 사이에는 정말 차별이나 대립은 없게 된다.
 
가득 차거나 텅 비고 쇠약해지거나 감소되는 모습에 대해 말한다면 한쪽에서 가득 차고 텅 비는 일이 있어도, 만물이 하나라는 입장에서는 정말로 가득 차거나 텅 비지 않으며, 한쪽에서 쇠약해지고 감소되는 현상이 있어도 정말로 쇠약해지거나 감소되지 않는다. 처음이나 끝도, 처음과 끝이 아니며 흩어지는 현상도 정말 쌓이고 흩어지는 것이 아니다.]

장자의 이런 사상은 당나라 때 선종(禪宗) 형성에 영향을 주었고. 송(宋) ·명(明)시대의 주자, 성리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孔子의 有無觀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염구(冉求)가 공자에게 물었다. '천지가 생기기 전을 알 수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알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 다음날 다시 공자를 찾아와 물었다. '어제 제게 '천지가 생기기 전을 알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선생님은 '알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이에 공자가 말했다고 전한다. ' 대저 천지에는 옛날도 없고 지금도 없으며 처음도 끝도 없이 영원히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 자손도 없는데 있다고 한다면 되겠느냐!'

공자가 말을 계속했다. '조물자란 사물을 낳는 작용으로 죽은 것에 삶을 주지도 않고 사물을 죽이는 작용으로 산 것에 죽음을 주지도 않는다. 죽음과 삶은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니며 각기 독자적으로 변화되어 간다. 천지에 앞서 생겨난 것이 있다는데 과연 사물일까? 사물을 사물로 존재하게 해주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다. 사물이란 그 사물에 앞서 무물(無物)의 상태에서는 생겨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미 사물이 있으면 사물은 사물을 낳아 만물이 끝없이 생겨서 자란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바로 道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주)* 염구(冉求) : 공자10명의 제자 가운데 한사람

佛家의 有無觀
 
불교의 핵심 4대교리는 諸行無常(제행무상), 諸法無我(제법무아),一切皆苦(일체개고), 涅槃寂靜(열반적정)이다.

재행무상이란 세상만물은 변화의 한 가운데 있으며, 영원히 고정불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고,  제법무아란 모든 것이 고정된 항상 그러한 실체가 없듯이, '나'라는 존재 또한 무수한 인과 연들에 의한 작용으로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이지, 고정된 내가 없다는 뜻이며, 일체개고는 모든 것은 변화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죽음을, 윤회를 초래하는 삶은 결국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이런 고통을 벗어난 뒤에 도달하는 경지를 열반적정이라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영원히 불변하는 고정적인 존재란 없다는 것은 사물이나 인간의 변화과정은 혼자서 생겨나거나 혼자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존재들은 그것을 발생하게 한 원인들과 그 원인들의 관계에 의해서 발생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 존재는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이다.
 
불교의 경전에 등장하는 '色卽是空 空卽是色(색즉시공 공즉시색|) 물질적 현상이 곧 본질인 공이며, 공이 곧 물질적 현상이라','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소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즉, 어리석음(무명)도 없고 무명의 소멸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늙고 죽음의 소멸도 없노라.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나니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와 같이, 無, 空등이 모든 경전에 많이 등장해도 결국 이것은  불교의 핵심사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들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노자가 도덕경에서 도와 덕을 설명하는데,  81장, 5,000여자의 글자를 동원한 것처럼.
 
道家의 無는 有의 상대 개념으로서의 無,  有를 위한 쓰임으로서의 無, 儒家의 人爲 道德에 상대되는 자연주의적 가치관으로서의 無, 사물의 존재 법칙으로서의 無 등 다양한 함의를 지닌다. 이후, 도가의 道와 有.無의 사상은 장자, 장재, 주희를  거치면서,  태허, 이(理) 개념으로 전환되어, 중국 나아가 동양 철학의 기본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불교의 空개념은 모든 존재하는 것은 선행하는 조건들에 의존하여 임시적으로 있는 것이지 독립된 自性(자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非有). 그러나 임시적으로나마 사물들은 존재하고 있으므로 아예 없다고도 할 수 없다(非無). 현상계는 연기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이므로 절대적인 有는 성립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無도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계는 상대적이다. 무엇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이와 같이 현상계는 不有 즉 無와  不無 즉 有의 양면성을 가진다. 두 모습은, 無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有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즉, '有'라고 하는 것과 '無'라고 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동일한 세계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은 필연적으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상관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현상의 그러한 모습을 일러 불교에서는  '空'이라고 한다.
 
道家.儒家의 宇宙觀

노자, 장자의 우주관에서,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세계 즉 태허와 그 것이 작용하는 원리인 '道', 개별사물에 작용하는 '德'의 사상으로 정리 할 수 있는데,  궁극적인 수준에서는 공자도 노자의 사상과 거진 일치하는 것 처럼보인다. '천지가 생기기 전의 일을 알수 있느냐?' 는 염구의 물음에, '알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니까' 로 대답하고, 사물의 생성이 도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라고 말하듯이, 아마도, 공자도 노자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리고, 노자, 장자, 공자의 우주관을 현대물리학의 잣대로 보면 '정상우주관' 처럼 보인다. 공통적인 것은 하늘은 원래부터 있는 것, 만물이 하늘과 땅에서 생겨나지만, 하늘(천)과 땅의 시작을 태초로 얼무어 버리고,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즉, 그들은 사고를 태초이전은 물론이고, 우주 및 만물의 근본 시작까지는 확대하지 않았다. 당시의 극고한 지혜을 동원하드라도 태초의 정의하고 설명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태허가 노.장의 공간적 의미를 떠나 형이상학적 본체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중국, 북송시대의 철학자 張載(장재)에 의해 '태허즉기'(太虛卽氣)의 명제가 확립되면서부터라고 한다.

장재는 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기(氣)의 모임과 흩어짐에 의해 설명했다. 기가 모이면 만물이 생기며, 만물이 사라지면 기가 흩어진다. 기가 흩어진 상태를 허(虛)라고 하며, 근원적인 허의 상태를 태허라 한다. 따라서 태허라는 것은 기가 흩어져 있는 우주 만물의 근원적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태허는 기가 흩어져 있는 것이지 기가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허무(虛無)와는 다른 것이며, 그런 점에서 '태허즉기'의 명제는 '유(有)는 무(無)로부터 생긴다'는 노,장적 일종의 우주생성론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태허의 기는 물질인가 비물질인가, 존재인가 비존재인가? 존재라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그 원리는 有인가 無인가?에 후인은 궁금한데, 성현은 가고 없어 그  대답을 들을 길이 없다.

장재의 태허즉기 사상은 남송의 주희(주자)에 섭취되어 성리학으로 발전하였다. 그후 이기일원론, 이기이원론으로 대립되며 이기론이 발전하였던 것이다.
 
성리학에서 '태극은 모든 존재와 가치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 실체' 라 한다. 즉 태극에서 만물이 나왔다는 논리이다. 그렇다면, 태극의 공간적 정의는 무의미해진다. 태극을 공간이라하면, 그 공간도 태극에서 나와야 한다는 논리에 배치된다. 태극이 공간이 아니라면, 태극은 물질이 아니다. 물질은 공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공간도 아니다, 물질도 아니라면, 그것은 '에너지' 또는 공간적으로 '무'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서 '모든 존재와 가치의 근원' 이라는 것이다. 주자(朱子)는 이 태극을 이(理)로 규정해 '형체도 없고 작용도 없는 형이상학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자가 존재자이게 할 수 있는 근원 존재, 즉 보편적 원리'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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