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노자
노자와 공자는 중국의 사상을 양분하는 양대 산맥이었음에도 그 성격은 전혀 다르다.
공자를 중심으로하는 유가사상(儒家思想)이 현실적이었다면 노자의 사상은 초현실주의적이었다.
공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사회를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같은 훌륭한 덕과 올바른 예의 제도로써 다스려보려고 애를 쓰는데 반해서
노자는 사람은 어차피 그 어떤 제도로서 교화되거나 변화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현실차원을 넘어선 도(道)라는 절대적 원리를 추구하면서 현실사회가 어지러운 것은 사람들이 불완전한 자기의 이성을 바탕으로 하여 그릇된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판단아래 행동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곧 노자사상은 사람의 이성적 한계에 대한 각성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올바르다, 훌륭하다고 믿는 것은 모두 절대적으로 올바르거나 훌륭한 것이 못 된다.
올바른 것은 그릇된 것이 전제가 되어야만 하고 훌륭한 것은 나쁜 것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사람들의 모든 가치 즉 높다, 낮다, 길다, 짧다, 아름답다, 추하다, 행복하다, 불행하다는 모든 판단이 그러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불행에 빠지게 되고 사회적으로는 혼란과 분쟁이 일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절대적인 원리로서의 도(道)의 추구, 인간 이성의 한계성에 따른 각성에서부터 이른바 무(無)의 사상과 자연의 사상을 발전시킨다.
‘무(無)’란 도(道)의 본원적 상태이며 그것을 다시 인간에의 성품에 있어 無爲, 無知, 無慾, 無我 등의 개념으로 발전시킨다.
결국 노자는 사람들의 인위적이고 의식적인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인위적이고 의식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상태가 자연인 것이다.
‘자연’이란 ‘스스로 그러한 것’이며 ‘저절로 그러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람들을 불행케하는 모든 가치판단이나 사회적인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자연의 한 구성요소로서 인간본연의 회복이며 인간이 타고난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곧 절대적인 자유의 추구인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유가사상은 필연적으로 사회참여를 통하여
지상에서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君子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초현실적인 도가사상은 필연적으로 자연상태의 은둔생활을 통하여
神仙이 되기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가사상은 도가사상을 ‘현실도피’라고 비난하고 있으며
도가사상은 유가사상을 ‘지나친 세속주의’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노자가 쓴 유일한 경서인 ‘도덕경’의 첫 구절이 ‘도라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로 시작하고
스스로 생겨나고 발전하며 무엇인가 하려는 의지를 갖지 않고서도 모든 것을 이루어 내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므로 무엇이든 알려고 하는 지적호기심에 의해 만물의 영장이 된 인간은 오히려 그 지적욕망 때문에 자기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으므로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는 물처럼 부쟁(不爭)의 덕을 갖춰야 하며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고 역설하고 있다.
공자가 노자를 만나 ‘예(禮)란 무억일까요?’라고 집요하게 물었을때 노자는 답한다.
“이를테면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숙이 감추고 있어
얼핏 보면 점포가 빈 것처럼 보이듯(良賈深藏若虛)
군자는 많은 덕을 지니고 있으나 외모는 마치 바보처럼 보이는 것일세!
그러니 그대도 제발 그 예를 빙자한 그 교만과
그리고 뭣도 없으면서도 잘난체하는 말과 헛된 집념을 버리세!”
할말 잃은 공자는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여기에 대하여 묻는다.
“그것이 예입니까?”
그러나 노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맺음하고 공자 곁을 떠났다.
“그런건 나도 몰라, 다만 예를 묻는 그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이것뿐일세, 자네 그만 가 보게나!”
혹자는 이를 노자의 승리며 공자의 패배라고 분석하고 있지만 이는 대립적인 관점에서 본 유치한 관점이다.
공자는 오히려 자기와 차원이 다른 노자사상을 솔직히 인정하고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사고방식과 생각의 각도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백안시하고 멸시하는 태도는
소위 지식인 일수록 몸에 밴 습성인데
공자는 이를 초월하여 노자의 의견을 경청히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예에 대하여
끝까지 집요하게 묻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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