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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수상잡록/수상록.에세이

文明과 未來와 나 1

by 靑野(청야) 2011. 4. 26.





文明과 未來와 나 









    목차

    ● 변화, 변화의 속도
    ● 다가오는 미래, 다가가는 미래
    ● 미래의 환경의 조명
    ● 가까운 미래의 기술들
    ● 진퇴양난 국면을 맞이한 현대문명
    ● 인류는 언제까지 살아남을 길이 있는가?
    ● 당대가 책무_이 세상과 후대를 위하여

     

     

     

    ● 변화, 변화의 속도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보편적인 구분개념으로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데, 주요한 기준이 되는 개념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를 사는 우리이면서 현재라는 개념은 애매모호하기 그지없다. 시간적으로는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접점이 현재일 뿐이다.

     

    때문에, 과거-현재-미래로 구분하는 현재라는 것은 일정한 과거와 일정한 미래를 포함하는 시간공간의 의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물리적인 시간에 대하여 인간을 중심으로 의미있는 인접한 과거와 의미있는 미래를 포함하는 것이 통상적인 인간생활에서 현재, 또는 현재생활이라 칭할 것이다.

    ‘의미있는’ 이라는 것은 순간순간 이루어지는 현재 시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주고 받지만, 딱히 어느 시점부터, 어느 시점 까지라 단정적으로 구분을 지을 수 없는 그런 시간적 교감이 부단히 일어나는 그런 시간대를 말함이다.

    앨빈토플러가 ‘미래의 충격’, ‘제3의 물결’, ‘부의 이동’, ‘불황을 넘어서’ 등의 역작을 내놓은 지 오래되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인간의 심리.. 각 분야의 다각적인 시각에서 미래 사회의 변화를 분석하고 예측하고. 엄청난 변화의 속도에 따라, 생활 방식의 변화, 가족관계와 인간관계의 변화, 문화의 변화 등 복잡한 현 사회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들 한다. 굳이, 저자의 고심 어린 역작들을 읽지 않더라도, 우리는 요즈음의 우리네들이 사는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해가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요즈음의 기술개발은 그와 같아서, 변화의 속도는 광속이다. 눈 깜박하면, 어느 새 변화가 이루어진다. 아니, ‘변화는 이미 이루어 져 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활용하지 않았을 뿐. ‘우리가 변화의 필요성을 느낄 때는 이미 누군가가 변화를 주도할 준비를 해두었다’고 보는 것이 순리적이다. 아무리 넓은 세상을 본다지만, 어지간히 앞서나가기 전에는, 기술에 관한 한, 우물 안 개구리 일 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깨닫고 보니, 누군가는 훨씬 멀리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깨닫기 전에는, 그런 기술이 있는지 없는지, 그런 기술을 개발하는 누군가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진대, 누군가 앞서나가는 것을 눈치채는 정도도 대단한 수준이라 봐야 하는 세태이다.

    투자의 기재라는 워렌 버핏이. 누구나 인정하고 전도 창창하다고 알려진 세계일류 전자회사인 삼성전자주식을 사지 않는 이유로, ‘삼성전자의 주가는 오를 만큼 올랐고, 현재 사업포트폴리오 구조로는 더 이상 높은 이익을 창출하기 어렵다’ 라 했다.

    당사자 최고 보스인 삼성전자의 이건희 회장역시,  ‘지금 삼성을 대표하는 대부분의 사업과 제품은 10년안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사업과 제품이 자리잡아야 한다’ 고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으레, 신년사에 격려 겸,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심기일전의 계기로 삼으라는 삼성 식의 독려 정도로 생각했지만, 웨렌버핏의 발언이 있고부터 새로운 각도로 이들이 던진 화두를 곱씹어 보게 된다.

    아마도 사업과 투자의 세계적 거장들의 화두는 변화, 변화의 속도에 대응해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메시지에 다름 아닐 것이다.

     



    ● 다가오는 미래, 다가가는 미래

    개개인의 입장으로야, 기술의 변화가 이루어지든 말든, 변화의 속도가 광속이거나, 변화가 퇴보하거나, 당장은 그 영향이 삶의 질과 변화에 직접적으로야 실감이 안 날 수도 있을 것이니, 대부분,

    지금 이 순간 등 따습고, 배부르면 되었지, 뭔 소리래?’

    하지만, 우리가 지나온 주변의 삶의 궤적을 돌이켜보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세상의 변화를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 본다면, ‘우리는 과거의 이력에 오늘을 지배당하는 어리석음 대신에, 오늘의 준비가 미래를 지배하도록 하는 지혜를 얻어야 할 것’이다.

    과거의 향수가 비록 아름다웠다 하여도, 오늘의 발전의 거름이어야지, 과거 향수, 오늘의 성과에 천착(穿鑿)하여서는 오늘이 과거가 될 미래쯤에는 그 향기는 이미 사라질 것이다. 반면에, 비록 지난 과거의 향기가 별 볼일 없었다 하여도, 오늘의 깨달음과 지혜로운 행동이 있다면, 그것은 곧 다가올 미래의 향기로운 밑거름이 될 것이다.

    ‘미래는, 미래의 변화를 읽고 미래를 준비하는 자는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으로 다가 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미래는 불확실성과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미래를 지배한다!’ 이는 과거가 아닌 미래를 오늘에 지배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미래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다는 나름대로의 깨달음이다.

    미래가 다가온다’ 는 대응자세는, 내 자신이 굳이 변해가겠다는 능동적 자세보다는 미래가 다가와서, 속되게 말해서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가까이 오는 미래에 대처한다는, 그런 안일한 자세가 풍긴다. 반면에, 미래로 다가 간다’ 라는 것은 스스로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자세를 견지하며, 미리 미래환경을 예측하고, 심지어는 미래로 도도히 흘러가는 물줄기를 바꾸기도 하는 그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일컬음일 게다. ‘다가오는 미래의 손님이 되기 보다는 다가가는 미래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는 의미가 강조된다.

    미래학자 앨빈토플러가 굳이 오랜 세월 동안 역작을 통해, 미래의 변화에 대한 화두를 인류에게 던진 것은, 나름대로 ‘미래를 준비하라, 그러면 미래는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으로 다가 갈 수 있을 것이다’ 는 내 式의 깨달음(?)과 유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미래를 살아갈 후손, 인류에 주는 것, 인류애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당연히, 책 몇 권을 팔아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그런 속된 동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동기나 미래학문의 학문적 성취에 천착하였다면, 어찌 인류의 심금을 울리는 그런 지혜로운 역작이 나오겠는가?

    우리가 어떤 자리나, 어떤 입장이라 하드라도 시간은 흐르고, 미래는 다가오게 마련이다. 우리가 싫어한다고, 시간이 멈추어지고, 시간이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가 ‘다가오는 미래’, 미래가 다가 오도록 시간을 기다리면, 얼마 전 일본의 지진 후 쓰나미처럼, 시간에 따른 변화는 걷잡을 수 없이 우리를 덮치고, 우리는 변화에 대비할 시간도 없이 허둥지둥 자멸할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시간에 따른 변화를 예측하고 미리 대비한다면, 그 같은 쓰나미는 일어나질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일어나더라도 일엽편주 두둥실 즐기는 파랑 정도로 끝날 것이다. 그렇게 끝나도록 시간을 앞질러 사고하고, 행동하여야 한다.

    우리의 인생이 어떤 좌표에서 어떤 궤적을 그리며, 어떤 행로를 그려 가드라도…..

    ‘다가가는 미래’ 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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