農人告余以春及(농인고여이춘급) 농부가 내게봄이 왔음을 알려주니,
將有事於西疇(장유사어서주) 서쪽 밭에 나가 밭을 갈련다.
或命巾車(혹명건차) 혹은 천막친 수레를 몰고
或棹孤舟(혹도고주) 때로는 한척의 배를 저어서
旣窈窕以尋壑(기요조이심학) 고요하고아늑한 골지가 찾아
亦崎嶇而經丘(역기구이경구) 험한산을 넘어 언덕을 지나가리라.
木欣欣以向榮(목흔흔이향영) 나무들은즐거운 듯 생기 있게 자라고,
泉涓涓而始流(천연연이시류) 샘물은졸졸 솟아 흐른다.
善萬物之得時(선만물지득시) 만물이좋은 때를 만난 것을 즐거워하며,
感吾生之行休(감오생지행휴) 나의생이 머지않았음을 느낀다.
已矣乎(이의호) 아, 어찌하리!
寓形宇內復幾時(우형우내복기시) 이몸이 세상에 남아 있을 날이 그 얼마 이리.
曷不委心任去留(갈불위심임거류) 가고머묾은 뜻대로 할 수 없는 것.
胡爲乎遑遑欲何之(호위호황황욕하지) 어찌어디로 급히 가려하는가
富貴非吾願(부귀비오원) 부귀도바라지 않고,
帝鄕不可期(제향불가기) 죽어 신선이사는 나라에 태어날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懷良辰以孤往(회양진이고왕) 좋은때라 생각되면 혼자 거닐고,
或植杖而耘耔(혹식장이운자) 때로는지팡이 세워 놓고 김을 매기도 한다.
登東皐以舒嘯(등동고이서소)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臨淸流而賦詩(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聊乘化以歸盡(요승화이귀진) 잠시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樂夫天命復奚疑(낙부천명복해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리오
(출처: https://poslink.tistory.com/entry/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어릴 때 살았던 우리 동네는 초가(草家)와 돌담, 싸리대로 만든 출입문, 마구간과 소와 돼지 울음소리, 떼를 지어 다니는 강아지, 개짖는 소리, 우분, 돈분 냄새, 기승을 부리는 파리, 모기떼, 허름한 헛간과 변소, 돌담 밑에 심어, 지붕을 타고 올라간 박, 곳곳에 집을 짓고 사람들을 위협하는 땡벌, 말벌, 왕벌, 대청마루 밑을 기어 다니다가 간혹 벌어진 틈새로 혀를 날름거리는 구렁이, 돌담을 타고 넘는 모습이 예사로 목격되곤 했다.
<옛 우리집과 비슷한 분위를 풍기는 초가집(퍼옴)>
양철지붕이나 기와집이 있기는 하였지만, 우리 동네뿐만아니라, 거제도의 대부분의 시골마을은 조선시대 드라마나 풍속도에나 나올 법한 그런 환경의 동네들이였다.
아마, 그런 동네가 이른바 '새마을 운동'때, 지붕개량, 집도 도회의 판자촌 비슷한 벽돌.슬레트집으로 바뀐 것이 고등학교 이후 시절인 것 같다. 아마도 고등학교때까지는 사진의 분위기보다 훨씬 허름한 초가동네 였을 것이다.
옛시골살이 때는 땡벌, 말벌에 쏘이는 경우는 매년 연래행사처럼 겪어 왔다. 그런데,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벌에 쏘이는 시골생활을 하다니, 참, 내 인생이 기구하다. 누구의 노래 말처럼
"...미안하다 나의 인생아, 앞만보고 걸어 왔구나..."
라고 외치고 싶어도 문득 나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가사를 바꿔 부르기를 즐기곤 한다
"...미안하다 나의 인생아, 옆만보고 걸어 왔구나..."
'앞'이 아니라 '옆' 만 보고 걸어온 세월, 내일 모레면 어언 70년, 미안한 것은 나의 인생 뿐만아니라, 앞만보고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 앞뒤 다 처다보며, 지혜롭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더욱 민망한 감정이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는, 동시에 7마리땡벌에 쏘여봤고, 2년전에 말벌종류 중 좀 작은 3마리 말벌에 동시에 쏘인 적이 있다. 한 두마리 쏘이는 것은 뭐 매년 겪는 일이다. 그 때마다 나는 우리 할매한테 태연한 척 가장한다.
“비싼 돈주고 봉침도 맞는다 쿠는 데, 오리지널 봉침 맞았다.”
말벌 한마리가 쏠 때의 따끔함은, 정관수술할 때 살을 뚫는 아픔이상이다, 어떤 이들은 그 아픔과 침독으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신문지상에 간혹 등장하는 기사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 할매는 기겁을 한다. 집안 구석에 벌들이 집을 짓기 시작하면, 6.25 전쟁났다는 소리듣는 것보다 더 난리일성 싶다. 내로서도 왜 그런 통증이 없겠는가? 쏘이는 순간 저절로 ‘악’ 외마디 소리가 자동발사로 터져 나온다.
어릴 때 벌에 쏘이면, 쏘인 자리에 어른들이 소주를 붓던 기억이 나서, 최근의 여러 번, 벌에 쏘였을 때, 잽사게 소주 술 저장고(?)로 달려가서 반은 쏘인 곳에 붓고, 반은 단번에 마셔 버린다. 단숨에 소주 한병을 작살을 내는 것이다. 참으로 무식한 방법이라 생각되겠지만, 나에게는 그게 특효약이다. 벌의 독이 어떻게 중화되는 지는 모르겠고, 진통역활을 하는 것은 크게 있는 것 같다. 꿩잡는 것이 매라고 나는 그 술처방으로 효험을 보니 어쩌랴? 겸사겸사 합법적(?)이유를 대며, 마눌의 눈총을 안받고, 술도 마실 수 있고, 일거양득?
“뭐 그게 효과 있겠나, 그저 술 마시고 싶어 그러겠지?”
반신반의하면서, 믿어준다. 아마도 속아주는 것이리라. 딱히 처방할 방법도 없고, 저 할배가 벌에 그렇게 쏘여도 멀쩡하니 긴가민가 할 것이다.
봄에는 농사준비를 하고, 여름에는 농사를 짓고, 가을에는 농산물의 결실을 거두는 시기라면, 겨울에는 내년 농사에 필요한 여러가지 도구를 정비하고 준비한다. 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본 프로세스는 동일하다. 다만, 기계화의 정도 문제일 것이다.
옛날 농촌에서는 겨울은, 무엇보다도 1년을 지탱할 연료, 즉 땔감을 확보하는 시기이다. 땔감은 나무, 나뭇잎, 벼를 타작하고 난 볏짚 등이 주재료였다. 나무를 베서 큰 덩치는 쪼개고 말리고, 잔가지는 그대로 말려서 비축한다. 떨어진 솔잎을 갈고리로 모아서 비축해두면, 그 자체로 가벼운 화력의 연료로 사용하거나 불쏘시개로 더 없이 좋다.
겨울이 되어, 땔감을 비축해두지 않으면 일년 내내 연료 부족을 겪어야 하기 때문에, 집집마다 겨울이면 전쟁을 치르듯 매일 가솔을 총동원한다. 남자는 땔감을 지게에 지고, 여인네는 머리에 이고 집으로 이동시켜야 최종 확보되는 것이다
땔감을 구하려면 산으로 가야 한다. 산을 소유하지 못하면, 그런 땔감을 확보하기 어려워서 고생이 배가 된다. 저 멀리, 주인없는 산이나, 주인이 허락하는 산으로 원정가서 땔감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즈음 도회 인근 산에는 건강, 오락, 놀이를 위해 이동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위해 등산로가 잘 뚫려 있지만, 당시 시골의 산들은 땔감확보를 위해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의 들락거림 때문에, 뻔질나게 길이 날 뿐만 아니라, 산 전체로 잡목, 소나무 나무까지 도벌되어 헹한 산들이 많았다. 때문에, 여름 장마 때는 장마빗물을 잡아두는 환경이 부족하여, 빨리 흘러가버려 산사태가 나기도 하고, 가뭄이 들면 쉽게 물 부족으로 지역 전체가 난리를 치르곤 했다. 요즈음은 모르지만, 얼마전 연료확보를 위해 대부분 민둥산이 되어버린 북한의 홍수나 장마시 페해가 방송되기도 했는 데, 옛 시골의 모습에 비견된다.
모두들, ‘산림녹화’ 가 국가의 주요 에너지 정책, 홍수.가뭄 예방을 위한 주요 추진 한 정책이였다고 기억할 것이다. 당시 산림은 요즈음처럼, 휴양, 공기정화, 풍취 등의 문제가 아니라 연료공급과 홍수예방, 가축 사육 등 생존을 위해 필요한 기반이였다
농사를 지을려면, 요새는 트랙터 등 기계장비를 이용하지만, 당시에는 전부 인력 아니면 축력을 이용했다. 축력은 대부분, 소(牛)가 사용되었다. 밭갈이, 논갈이, 짐 옮기는 데는 모두 소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소는 가보 1호라 할만 했다. 소가 없으면, 이웃 소 부자집에서 송아지를 빌려와 키워서 농사짓는 데 사용한다. 소를 사용한 대가는 키워서 돌려주는 것으로 갚는다
내가 살던 거제는 섬이지만, 높고 낮은 산이 많은 지역이다. 높이 400m급 이상의 산이 십수개가 된다. 500m급 산도 여럿이다. 이런 높이라면, 해발1,000m 산이라도, 해발 500m정도의 지역에서 바라보는 높이와 비슷한 것이다. 그러니, 거제는 산악지형이라 할 수 있다., 크고 작은 산들 사이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거제도는 이처럼 산악지형이라 온 천지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땔감을 구하기는 평야지대보다 유리하였지 싶지만, 소나 염소 등 가축을 키우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전문목장이 아닌 일반 가정에서는, 소를 키우는 것은 아이들의 몫이다. 지역마다 소를 키우는 방법이 틀릴 수 있으나. 들판이 좁고, 1,000미터이하지만, 산과 계곡이 많은 거제 대부분 지역에서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소를 산등성이로 끌고 가서 산등성이의 풀밭에 방목한다. 방목하고, 해가 지기 전에 소를 찾아 오는 방식이 매일 반복된다.
소를 찾아, 적당한 초지(草地)에 놀게 하고 아이들은 모여 놀다 오는 것이 당시 소 먹이는 아이들의 아마도 유일한 놀이였고, 큰 즐거움이였다.
2. 사(蛇)
어릴 때, 냇가에서 종종 민물장어를 잡았다. 민물장어는 보약중에 보약이라, 언젠가 제법 큰 민물장어를 잡아 아버지께 드렸더니, 아버지가, 동네 친척 아저씨 불러, 그것을 고은 것과 소주를 마시며 크게 담소하며 친척아저씨가 칭찬하시던 기억이 있다.
“고놈 참, 기특하다. 어른 들도 잡기 힘든 민물장어(‘이하 ‘장어’ 또는 ‘짱어’)를 우찌 잡았을까”
아마도 이런 대화가 오간 것을 어렴풋이 짐작한다. 그 전후로 틈틈이 민물장어 잡는 것을 시도하였다. 아마 초딩 고학년이나 중학시절, 수시로 즐기던 놀이였던 것이다.
좁은 냇가의 굴속에 숨어 있는 장어는 낚시에 장어 미끼를 끼어 장어굴 입구에 넣고 숨죽여 기다리면, 장어가 덥썩 물면 꺼집어 된다. 제법 버티는 녀석을 온전히 확보하려면, 낚시기술같은 꺼집어내는 기술도 필요하다. 앞서 잡은 녀석들도 대부분 그렇게 잡은 것이었다.
그러나 폭이 넓은 개천에 사는 장어를 잡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때는 그물로 잡거나 물을 퍼내어 숨쉬려 나오는 놈을 잡는다. , 어쨋튼, 굴속으로 숨어버린 장어를 잡기에는 어린 애들의 놀이 삼아 하기에는 시간과 노력이 너무 걸린다.
당시, 시골에서 무슨 나무 열매를 두부를 만들려고 콩을 찡고 갈듯 돌로 그렇게 만든 액을 이용해서 고기를 잡곤 했다. 열매를 간 그 액을 냇가 상류에 풀어버리면, 고기들이 기절을 하던지, 동작이 느려져 물위에 뜬다. 이때 달려들어 건져 올리면 되는 데, 시간이 지나면, 고기들이 정신을 차려 팔팔해버리니 무슨 치명적인 독은 아닌 것 같고, 고기들에게는 천연의 마취제 같은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인체에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잡은 고기 먹고 어찌 되었다는 사례는 듣지 못했다.
이렇게 나무 열매의 마취(?)를 피해 굴속에 숨거나, 마취될 것을 알고 굴속에 숨은 민물장어를 굴속에 손을 넣고 잡아내기도 한다, 그러다 잡다가 종종 물리는 경우도 있다.
내 또래 어린 친구들도 그 방법을 이용했다. 나무열매를 갈아 상류에 뿌려 놓고, 시간이 좀 지나, 물고기들이 배를 뒤집고 기절을 할 즈음, 장어가 있을 만한 굴을 뒤지며 손을 넣는 데, 손에 물커덩 하는 물건이 잡혔다. 그때 뭔가가 손가락이 물렸다. 따끔, 제법 아프다. 옳거니 ‘장어’다 모처럼 잡은 장어를 놓칠 수 있나?
“짱어다, 짱어가 손가락을 문다”
아마도 그렇게 소리치며 그놈을 움켜진 채 손을 내빼니, ‘손가락에 딸려 나오는 것은 아뿔사, 장어가 아니라 뱀이였다. 뱀을 닮아, 뱀장어라 부르는 짱어가 아니라, 짱어를 닮은 물뱀이었던 것이다.
물뱀은 뱀이다. 그러니 형태는 뱀과 똑같고 물가에 살면서 물위를 헤염치며 노는 놈이다. 그 놈은 독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뱀은 뱀이다. 뱀을 맨손으로 잡다니, 그리고 물리기 까지? 그때 놀람은 아직도 기억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비록 독이 없고, 물리면 따끔하기만 할 뿐이라는 것을 놀랍게 경험한 것이다.,
산내 시골에 살면서부터, 봄, 여름, 가을, 뱀장어를 닮은, 뱀장어보다 훨씬 화려한 색깔의 뱀이 심심찮게 집 주변에 출몰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경험으로 볼 때, 독사나 구렁이류는 아닌 것 같고, 대부분, 겉모습이 화려 하여 꽃뱀이라 하는 뱀이다. 독사 같은 독종은 습기나, 곤충 등 먹이가 풍부한 나무둥치 밑이나 수풀덤불 속에 웅크리고 앉아 먹이를 낚아채기를 잘하고, 집 부근에는 잘 출몰하지 않는다,
뱀이 겨울 잠을 자고 나온 때가 아마도 4월말이나 5월초 정도이지 않을까? 이때쯤이면, 바깥세상으로 기어나온 뱀은 힘을 제대로 못쓰고 동작이 굼뜨다. 아마도 겨울잠 자는 동안 양식을 축내고 허기진 상황이든지, 아침저녁으로 싸늘한 기온에 기를 못 펴서 온기가 느껴지는 집 주변으로 이동하는 것인지, 아니면, 잠자다 깬 사람처럼, 나름대로의 GPS가 혼란을 일으켜, 주제를 파악 못하는 것인지, 아직 할성화 되지 않은 먹이 생태계 땜에 먹거리 찾아서 일지, 아무튼 화단이나 마당 가장자리에 웅크리거나 기어가는 모습이 종종 발견된다.
요놈들은 한번 출몰하면, 인근 어딘가에 보금자리가 있다는 말인데, 매년, 부근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그 보금자리를 파괴하던가, 그 놈을 잡아버려야 하는 데, 대부분 놓친다.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면 잽사게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6마리가 발견되어 3마리를 잡았고, 올해는 5마리가 설치는 것을 1마리만 잡고 4마리는 놓쳤다. 어딘가에 잠복하거나 멀리 더 넓은 수풀 속으로 갔을 것이다. 여름이 무르익어가는 7월이 되면, 생태계가 완전히 복원되고, 나름대로 주변환경에 적응되기 때문에, 굳이 인간의 집주변에서 얼쩡거리는 일이 없어진다.
봄, 여름,가을에는 아침마다 일찍, 막대기를 하나들고, 집 주변을 걸어다니면서 혹여 주변에 있다면, 인기척을 알려 놈들이 숨어버리게 하거나, 눈에 띄면 막대기로 잡아버리는 것이 내 일상이 된지 오래다, 경험컨데, 초여름이 지나면,
“너거 집구석 아니라도 내 때꺼리 해결할 데, 많다’
고 하는 듯이 집 주변에서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초여름까지, 간혹 뱀의 왕림을 겪은 놀람 때문에, 우리 할매가 문제다. 이웃집 시골고양이나, 강아지들이 다가와도 부들부들 떠는 사람이, 도회지만 살다가 시골생활을 하니 모기, 벌에 시달리고, 뱀의 출몰에 기겁을 한다. 일단 한번 뱀의 출몰에 깜작 놀라면, 한여름 내내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할매 고생이 말이 아니다,. 그런 할매 안심시키느라 내고생도 말이 아닌 것이다
뱀의 출몰이 잦을 때나, 그 시기를 지나도 그런 할매를 달래고, 안심시킬려고 나는 항상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늦여름이 지나, 특히, 가을이 되면, 독이 오른 독사의 출몰은 거의 가정에서 발견되지 않지만,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것이다.
“겁내지마라. 저 놈들 한테는 인간이 저들의 神이다. 저놈들을 갑자기 놀라게 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낌새가 느껴지는 순간 저놈들은 천리만리 도망가게 되어 있다”
“그러니 풀이나 화초가 우거진 곳에 갑자기 발을 딛지 말고, 디딜려면, 호미나 막대기로 주변을 몇 번 쳐서 신이 왕림했다는 것을 알리고 발을 디뎌라..”
혹시 주변에 머물고 있을 놈들이 사람의 낌새를 느끼고 도망갈 기회를 주라 그 말이다. 말은 그리 하면서도 나 자신 그 흉측한 몰골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여간 두려운 게 아니다. 하지만, 내마저 두렵다는 이야길 못한다. 우리 할매 앞에서는 해서도 안되는 일이다. 언제나 나는 이런 류의 생물의 출몰에 초연한 듯, 대범한 듯 가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뱀의 출몰을 막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고 고민도 한다. 물론, 이런 일은 우리 할매 앞에서는 별일 아닌 듯이 태연하게 모색한다. 야영족들이 텐트 주변에 뿌려, 잘 때 뱀의 출몰을 막기 위해 즐겨 사용한다는 ‘붕사’라는 백색가루를 뿌려보기도 하고, 나프탈린 알갱이를 구석구석 뿌려두기도 하고, 살충제를 물에 찐하게 타서, 뱀이 지나 다닐 만한 구멍에 부어, 뱀이 싫어 할 만한 냄새(근거는 없다. 내가 그리 생각한다는 것이지)를 오래도록 풍기게 한다든지, 나무나 풀을 베고 나면 주변 구덩이에 놓았다가 마르고 나면 한번씩, 불을 질러, 집안전체에 연기냄새가 스며들게 한다.
고등학교 어느 여름방학 때였다. 아침에 소 한 마리 몰고 뒷산에 방목하고, 이른 오후 소를 찾아서 아이들 노는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는 데, 인근에서 여자애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내가 허급지급 뛰어갔더니,
“오빠, 뱀에게 물렸다”
동네 친구의 여동생, 당시 중학생이었는데, 이 녀석이 소먹이러 왔다가 뱀에 물렸다는 것이다.
“어디, 어디냐”
했더니, 발목과 장단지 사이 어디란다.
지금 이때쯤의 뱀이라면, 독이 제법 오른 독사 아닐까? 뱀은, 겨울잠 준비를 하는 가을에, 겨울 잠을 자는 동안 영양을 공급해야 해서, 겨울 잠 자러 가기 직전인 가을에 영양을 가득 채운다. 즉, 독사라면 독이 가장 오른 상태이지만, 아직은 그 정도는 아닐 지라도, 우찌 되었던 상황이 심각하다.
허급지급 달려간 나는, 상황을 파악하고, 가느다란 칡넝쿨을 급하게 구해서 질긴 칡 넝쿨을 어떻게 끊었는지 기억은 없다, 돌로 쳐서? 이빨로 끊었든지 그랫을 것이다. 아마도 치마였지? 치마를 걷어 올렸다. 어디를 묶어야겠는 데, 어디를? 너무 아래 묶으면, 이미 독이 묶은 윗쪽으로 올라 왔을 수도 있겠다 싶고, 아직 중학생이지만, 여자로서 성숙한 티가 완연하니 너무 위를 묶은 것은 치마를 더 걷어 올려야 하기 때문에 순진하던 나에게 그렇고…
순간적으로 ‘그래도 너무 위는 아니라도, 민망함을 피해, 허벅지와 무릎사이 쯤 묶자 ‘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적당히 묶은 다음, 물렸다는 곳에 입을 떼고 몇 번 강하게 빨아 내 뱉고는, 소고 뭐시고 냅다 등에 업고, 마을로 허겁지겁 죽을 힘을 다해 내려 갔다. 비록 중학생이라지만, 시골애들은 성숙을 빨리하기 때문에, 무슨 소프트한 느낌이 있었을 것이지만, 아마도 당시에는 그런 느낌을 느끼기 전에 오직, 빨리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을 것이다. 단숨에 내려 갔는 지, 몇번을 쉬고 내려 갔는지, 기억은 희미하지만...
우쨋튼, 죽을 고생을 하여, 그녀의 집에 인계하였다. 그 후 그 집에서 삼거리에 있는 시골의원에게 갔나 본데, 그후, 전하는 말에 의하면,
“누가 이렇게 묶었느냐? 이렇게 묶지 않았으면, 독이 퍼져 큰일 날 뻔했다”
의원이 대충 이런 의미로 말했다는 소리를 전하며, 부모들이, 나에게 엄청 고마워 한다는 소릴 들은 적이 있다. 의원의 말대로라면 나는 그녀의 '생명의 은인?'. 글코, 동네 중학교에서, 5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 부산의 명문고(?)를 다니는 동네 오빠가, 소 먹이러 가서 독사에 물린 나를 구해주고…
그녀의 심정에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을 지? 그 집에서 그런 사연을 소문 낸 뜻이, 정말 생명의 은인이라서?, 고맙기만해서 그랬을 지? 순진한 나는 그 후, 고딩을 졸업하고 서울가서 대학을 다니면서, 그때 사연의 있었슴직한 뒷담화(?)를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대학말년인지 언제인지, 그 시기에, 어찌 저찌 연락이 되어 그녀를 만났다. 서울 부근 회사의 취직해서 다니고 있다나? 서울 아니라도 취직 할 곳이 많았을 텐데, 굳이 서울까지? 몇 번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녀와 그때 일을 회상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반응은 기억이 안난다.
그때 어쩌면, 독사에 물렸다는 것이 연극까지는 아닐 것이고, 의사가 했다는 말이 정말일까? 정말로 독사에 물렸다면, 어설픈 나의 조처에, 그 정도로 끝났을까? 아니면, 어린 나이에 뱀한테 물린 것으로 오해한 것은 아니였을까? 뱀보다 덜 위험하지만, 사람을 까무라치게 할 만한 벌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가 직접 그녀를 물었다는 뱀을 본 것은 아니니까….
그후로 까마득히 잊고 지낸 세월이 반세기를 넘겨 지나왔다. 만약, 서울서 그녀와 재회하던 때, 어린시절의 '생명의 은인' 값을 받는다고, 덮석 그녀의 손이라도 잡았더라면, 내 인생은 또 다른 어떤 벌판을 걸어 갔을 지?.
내년이면 고딩친구들은 졸업50주년에, 많은 이들이 칠순을 겸한다고 법석인데, 나는 어떤 벌판을 걸어 왔길래, 돌고 돌아,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생활하다 도회생활을 거처 다시 시골생활로 접어든 지, 어언 7년!
나는 왜 시작이나 끝이 이어져 둥근 원을 그리듯, 그런 인생의 벌판을 지금도 서성이는 것인지?
"...미안하다 나의 인생아, 앞만보고 걸어 왔구나..."
앞만보고 살아와도 미안하다는 누구의 노래가락, 나는 정면으로 앞을 보며 부딪쳐 헤쳐나가지 않고, , 옆만보며 살아온 듯하기에, 나는 내 인생 앞에서 고개를 들기 힘들구나.
2022년 7월10일
靑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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