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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수상잡록/회상단상

문사심서(蚊蛇心緖) I

by 靑野(청야) 2022. 7. 29.

오늘도, 여느 주말처럼, 노구(?)를 이끌고 종일 뙤악볕 아래 집 주변을 정리했다.

 

몇 주째 이어진 담장작업 마무리, 담장에 조명을 다는 날이다. 집안 전기공급 콘센트에서부터, 외부에 노출하지 않게 전선을 끌어오고, 중간중간에 조명을 지지할 기둥을 세우고, 조명이 설치되는 부위에 분지(分枝)를 하면서 비나 물기, 햇볕에 노출되지 않도록 단단히 쌌다. 당연히, 여러 개의 조명을 연속으로 달 때, 전선에 무리가 가지 않는 지, 확인하고, 혹시 물이 새어 들어 합선이 되거나 전기부하에 무리가 갈 때, 차단기가 작동하여 전기를 끊도록 조처하는 것은 기본이다.

미리 준비해둔 야외 담벼락용 조명등들을 꺼집어 내서 지지대에 고정하고, 미리 까둔 전선들을 연결하여 절연테이프로 단단히 싸서 담벼락 위에 쒸운 시멘트 갓과 지지대 사이의 좁은 공간에 밀어 넣어, 비와 햇빛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도록 이중으로 안전처리를 한 것이다

뉘엇뉘엇, 여름 해가 서산을 넘어갈 즈음, 모든 작업이 끝났다. 어제, 2022년7월10일날 일이다. 그나마 우리 할매의 보조와 지도편달(?)때문에 빨리 끝낼 수 있었지만, 시도 때도 없는 간섭 때문에 늦어진 것도 있으니, 우리할매 역할을 우찌 평가해야 할지!

그날 저녁, 중노동에 지친 심신을 쉬게 하고 있는 중에, 우리 할매의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고,  문득, 오래 전부터 친했던 친구,오랫동안 서울 토박이로 살다가, 지금은 의왕에산다는 H가 생각났다. 바로 핸폰을 집어들고 전화를 했다. 아마도 3년만이다.

“어이, 잘 있나?”

전화기에서 들여오는 H의 목소리는 정말 오래간만에 통화하는 친구답게 반가움이 잔뜩 묻어 나온다.

“하이구, 살아 있네, 그래, 잘 있다. 니도 잘 있나?”

그리고,

“흐흐흐”

동시다발적으로 둘은 전화기에 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게 반가움의 극단적 표현이라는 것을 이심전심으로 안다

“**이는 어찌 지내고? 둘째는이름이 머더라”

내가 물었다.

H의 첫째는 딸이고, 둘째는 남자인데, 모두들 평범한 집안 이상으로 잘 성장해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 자식 농사 잘 지었네? 사모님도 건강 하시고?”

느닷없이 전화를 건 내가, 말을 이어나갔다. 평소에는 제수씨라하는 데, 하도 오래간만에 전화하다보니 얼떨결에 사모님 쏘리가 먼저 나와버렸다(제수씨가 들었다면, 무척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처음 있는 일이니). 

“내가 말이야, 머시냐…우리 할매 (너거형수)랑 올 여름, 집 주변 정리하면서 여차저차 한 일을 겪었는 데, 그때 니 하고 나가 겪은 것과 똑 같은 기막힌(?)현상을 시방 나가 겪고 있는 데, 오늘 그때 일이 생각나서 전화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때 일을 회상 했다.

“ㅎㅎㅎ, 마자, 그때 그랬었지….” 

돌이켜보면, 반세기前, 그러니까 1973년, 입학하고, 서울의 어떤 대학 1학년교양과정때, 班대표(반장?)선거가 있었다. 입후보자로 27회 동기인 故조경환 동기와 맞붙은 이는 경복고 출신 H였다. 반원들이 경복고 출신이 갱고출신보다 많았지 싶운데,  갱고는 부산고나 지방 명문출신들의 지원을 받은 대신, 경기고나 서울고 출신들은 경복고 출신들을 지원하지 않아서 인지, 故조 모가 班대표가 되었다고 분석된다. 그 후 班대표에서 떨어진 H는 그 일을 계기로 우리 갱고 출신들과 친해졌다. 경기나, 서울 출신들은 코드가 맞지 않았는지 어땠는지!

아마도, 반세기전인 73년 7월이 되어 여름방학이 시작되었을 때다. H랑 둘이서 여행을 갔는 데, 거의 무전여행이다시피 했다. 홍도를 다녀온 것으로 기억한다. 흑산면 소속으로 흑산도를 지나 홍도가 있는 것으로, 남동쪽 끝의 해금강이 내 고향 거제에 있었으니, 남서해의 끝 홍도를 다녀오면 전국일주가 되는 셈, 아마 그러고 싶은 호기와 호기심이 발동했으리라

당시 홍도를 다녀오는 길에 흑산도에 기착했던 것인지, 73년에는 홍도,74년에 흑산도를 다녀온 것인지 불분명하다만, 두 해에 걸쳐, 홍도와 흑산도를 모두 다 다녀온 것은 분명하다.

당시, 서울역을 출발한 목표행 완행열차를 타고 목포로 가서 거기서, 아마도, 배를 8시간 넘게 타고 남서해의 끝자락 홍도에 다녀오는 여정이었다. 홍도를 구경하고 목포로 나와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완도까지 갔다. 당시 보길도 가는 배는 완도에서 출발했다. 홍도를 다녀오면서 오는 길에, 완도, 보길도를 거치게 된 것은  ‘어부사시가’를 지은 윤선도 귀향처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보길도 선착장에 내려 여차저차 물어보니, 보길도의 어느 초등학교(당시는국민학교로 불림, 정확한 교명은 모르겠음) 선생을 찾아 가란다. 여행으로 후줄그레해진 모습으로 찾아갔지만, 그 선생, 우리에게 윤선도의 세세한 당시 보길도 생활모습과 주변 지리를 일일이 설명하고 안내하며 열강을 토해낸다. 그는 초등학교선생이면서 향토사학자였던 셈이였을까?  선생의안내를 공짜로 받은 것이다.

“보길도의 윤선도 자취를 관광으로 찾아준 이는 당신들이 처음이다” 

“여기가 어부사시사에서 배 뛰운 곳이다. 지금은 허물어져 줄어 들었지만, (바다가 아니라) 여기에 배를 띄우고 풍류를 즐겼던 곳이다”

그선생은 조그마한 못의 주변에서 못을 가르키며,  대충 이런 조로 말한 것으로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니 그 선생이 열강을 쏟아낸 배경이 짐작이 된다.

 

어부사시가는 1651년(효종 2)에  윤선도가 지은 연시조. 지은이가 65세 때 벼슬을 그만두고 전라남도 보길도 부용동에 들어가 한적한 나날을 보내면서 지은 노래이다. 세상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과 한몸이 되어 강호한정에 빠지는 것이 주제이다. 4계절을 각 10수씩 40수로 하고 여음이 붙어 있다. 여음은 배를 띄우는 것에서부터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따라 말을 붙였다. 고려 후기의 〈어부가〉를 이어받아 다시 창작한 것으로, 이현보의 〈어부사〉나 그밖의 어부가에 속하는 노래는 한시에 여음이 붙어 있는 것이 보통이나 이 노래는 순 우리말로 새롭게 썼다. 〈오우가 五友歌〉와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며 〈고산유고 孤山遺稿〉에 실려 전한다.(출처: daum백과)
...

간 밤에 눈 갠 후에 景物 다르구나
배 저어라 배 저어라
앞에는 유리바다 뒤에는 첩첩옥산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仙界인가 佛界인가 人間界인가 아니로다

잎에 밥을 싸고 반찬일랑 장만 마라
닻 들어라 닻 들어라
삿갓은 썼다마는 도롱이는 갖고 오냐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무심한 갈매기는 나를 쫓는가 저를 쫓는가

 

어부사시가에 나오는 바다를 연상시키는 구절들이다. 갈매기, 바다…단어들이 나오는 것을 보니 바다를 연상할 수도 있으나, 이를 제외하고는 어부사시사 전편에 걸쳐,  딱히 ’바다’ 라고 한정할 수는 없다. 바다든, 호수든 고기잡이 놀이판의 풍류를 노래한 것이긴 할 것이다. 그때까지, 어부사시가는 보길도 앞바다에 배를 띄우고 풍류를 즐기는 모습을 노래한 것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배운 것으로 기억하는 데, 여기 x만한 연못에서 배를 띄우고는, 큰 강이나 바닷가에서 고기잡이 하는 어부를 상상하며, 배 띄어 노닐듯이 상상력을 발휘했다니....

 

바다니, 호수니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을 수 있으나, 굳이 그 선생이 그런 말을 하니, 그때의 기억이 얼마나 생생했으면 아직도 그때 그 선생의 관광안내(?) 모습이 눈에 선하고, 당시의 색다른 느낌이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또렷이 남아 있는 것이다.  (사학적으로 그 선생의 말이 참인지, 상상인지 나로서는 판단의 능력이 없다)

 

보길도로 가는 배에는 우리처럼 보길도에 '놀러 가는 손님' 이 우리 2명외 오직 2명이 더 있었다. . 전라남도 어디 여고생이였다고 기억하는 데, 2학년인지, 3학년인지, 기억은 없다만. 다른 손님이 없으니, 금방 말을 터고 친해졌다. 나이는 우리가 한 살 아니면 2살위? 어쨋거나 개네들과 마을에서, 저녁을 일찍 사먹고, 당연히 술 한잔 걸치고, 보길도 산등성이를 오르게 된다. 산 이름은 잊었지만, 산등성이 가까이 ‘남은사’ 라는 절이 있다기에, 거기를 목표로 올라간 것이다.

 

남은사로 오르는 중에, 여러 곳에 토굴을 파고 얼굴을 내미는 사람들을 보고 기겁을 한 기억이 난다.

 

마을에서 일러준 사전 지식에 의하면, 당시 그들은 폐병환자들로 가족, 이웃을 떠나 홀로 여기서 뱀도 잡아먹고, 약초도 캐서 먹으며, 병과 씨름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가족과 격리해서 병에 걸린 생을 여기서 마감하려 하는 것 아닌가 비감함에 떨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페병은 거의 불치의 병이였다.  주변에서 옮을까봐 극도로 꺼리는 병이였다. 

 

어찌 어찌하여, 남은사에서 하루를  신세지기로 하였다. 남은사에는 오직 한명의 승려만 있었는데, 우리는 그를 주지스님이라 불렀다. 잠자리가 결정되었으니 슬그머니 또 술판을 벌렸다. 우리가 술을 꺼냈는지, 주지가 술을 꺼냈는지, 아마도 우리가 주지의 허락을 받고, 가져간 소주를 꺼냈을 것 같고, 주지가 동참하면서, 5명이 판을 벌린 것이다.  지금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당시로는 스님이 술을? 놀라 자빠질 뻔했었지.  지금 같으면 몇 마디 대화로, 돌 중이 아니면, 세속의 틀을 파계한 선승이 아니였을까? 판단이 되었겠지만. 당시는 그저 하루 밤 몸을 뉠 수 있게 해주, 술판까지 동참해준 주지가 고마웠을 뿐

 

같이 간 그녀들이 몸을 사려 안마셨는지,  아니면, 술을 마셨는지, 마셨다면, 우리와 대작했는 지, 기억은 없다만, 주지와 대작한 기억은 생생하다. 그녀들은 고딩이였으니, 그녀들이 술마셨는 지 어떤지 기억이 없다면,  술은 안마셨거나 많이는 마시지 않았을 것으로 유추된다. 어쨌든 우리 남자들은  가져간 술을 다 마시고, 주지가 다시 내온 소주 1.8리터리 큰 병을 헐어 마시다가,  어느 순간, 상당히 취해 혀가 꼬부라진 주지가, ‘그만’ 하면서 소주병을 잠그고 다시는 열지 않아, 술판이 끝났다. 

 

나이 지긋한 주지가 술 동무도 좋지만, 20대 초반의 젊은 우리와 어찌 밤새 맞짱을 뜨겠는가?   ‘소주 큰병의 두껑을 잠그던 노승의 모습이, 가물가물하던 기억 모퉁이에서  뚜렷이 떠오른다. 너무도 외로운 절해고도의 산등성이에서 수도를 하다 보니 이른바, 곡차를 가까이 하게 된 것인지, 조계종 12대 대강사였으며, 파계승이면서, 정약용과 수시로 대작을 한 해장 스님류의 자유 분망한 구도자처럼, 구도의 방편이였을 지?,  

 

밤을 새운 우리는, 다음 날, 섬을 떠나 아마도 완도터미널 부근에서 그녀들과 빠이빠이 하고 하염없이 걷기를 게속했다. 이후, 그녀들과의 그날 밤의 경험을 기억너머 묻어버리고 반세기를 지났지만, 간혹 지금쯤  ‘어찌 지낼까’ 기억 이쪽으로  궁금증이 넘어오는 때가 있곤 했다.

 

당시에는, 남해안 고속도로 건설공사가 한창이였다.

 

남해고속도로는  1972 1월 10 전구간 착공하여, 1973 11월 14, 전구간 왕복 2차로 고속도로로 개통되었다고 기사에 쓰여있다. 

 

완도에서 곡성, 강진 등을 거쳐 충무, 목적지 거제에 이르는 국도와 공사중인 도로를 번갈아 이용하며 걸었다. 우리가 어느 구간부근에서 공사중인 도로를 따라 걸었는 지 모르지만, 일부는 완공되어 있고 일부는 흙먼지를 날리고, 일부는 포장중이라 사람구경겸, 세상구경겸 국도와 공사도로를 오가며 걸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하동과 진주인근 공사판 부근이였지 싶은 데, 공사판에 인부들이 이용하는 음식점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 공사판으로 가는 그에게 말벗이 되어 따라다니면서, 몇 끼를 얻어 먹었다. 어느 때,  공사판 음식점에서 세명이서 식사를 하고, 쉬는 데, 그 사람이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보여준다. 돈다발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일정 구간 공사를 담당하는 책임자였던지. 아니면 인부를 부리는 사장이였던지!.  거지 같은 몰골로 여행중인 우리에게  억만금이 든 돈다발을, 왜, 무슨 배짱으로 보여 줬는지? 아마도 당시에 즐거히(?) 달고 다니던 대학 뺏지 덕분이였을 지? 대학 다닌다는 놈들이 몰골이 그게 뭐냐라고 조롱하는 의미였을지? 지금도 궁금하다.

 

충무에 도착하였으나 거제 우리 집으로 가려면, 팔다리만으로는 바다를 건널 수 없으니, 그 핑계로 버스표를 샀다. 버스표를 사고나니 동전 10원짜리 몇 개밖에 남지 않았다. 배를 쫄쫄 굶고, 저녁무렵에  마침내 집에 도착 했다.

 

서울-목포-홍도-완도-보길도-남해고속도로(공사중)-충무-거제…아마도 열흘이 넘게  쏘아 다닌 것이다. 대부분 걸어 다녔다.  그 이후 장거리 걷기를 지금까지 지속했었더라면, 달리기는 몰라도, 홍걸翁 못지않는 걷기체력을 가꾸지 않았을까?

 

매일 밤, 술도  많이 마셨다. 두주불사를 여러 번 경험한 것이다. 거제 우리 집에서 해금강을 다녀와서 시골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H는 부산을 거쳐 서울로 갔을 것이다. 참으로 피곤한 여행길이였을 텐데도, 그 친구는 그 후 여덟번이나 서울서, 머나먼 우리 집과 거제, 부산을 다녀 갔으니, 요즈음 우리가 동남아 소수부족을 소개하는 방송을 보고 느끼듯이, 서울생활과 너무나 거리가 먼 시골의 삶을 경험하고 문화적 충격이 컸었었던 모양이다. 

 

그 중에, 그 H나 내한테서, 두고두고 사건 하나가 회자(膾炙)된다.

 

 

1. 문()

 

 

7월말, 8월초면, 년중 더위가 최고조일 때다. 하지를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달구어진 대지가 열을 내 품어 낮에 상승한 기온들은 밤까지 이어져, 이른 바  열대夜가 지속된다. 이때쯤이면 날파리, 모기 등 여름 곤충.벌레들도 덩달아 기승을 부린다.

 

당시 도회의 부잣집에서느 에어컨이 있었을랑가(나는 잘모름), 초가로 지은 시골의 우리 집에 에어컨이 있을 리가 없다. 선풍기라도 변변히 있었을지? 당시면, 전기가 공급된 지도 수년 안팎이거나 비싼 초대신 등유로 밤을 밝혔을 것이고, 선풍기도 비쌀 뿐더러, 선풍기가 있다 해도, 이용할 엄두를 못내고, 대부분 부채로 견뎠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 집은 실제로 그랬다. 가족 수대로 부채 하나씩, 바람을 일으켜 더워도 식히고, 모기나 날파리 등도 쫓고…

 

그런데 취침 때가 문제이다. 요즈음의 가옥이나 아파트 문처럼. 문틀과 문이 딱 맞지 않는 엉성한 시골집의 방문은 사람 피와 땀냄새에 환장한 모기들에게는 있으나마나한 수준. 게다가  창호지로 바른 문에 듬성듬성난 구멍으로, 또는 여닫을 때, 모기들의 출입이 자유롭다.  대부분 모기향 피워 놓고, 더우니, 차라리 문 자체를 열어놓고 자기도 한다.  방안이 아니라 텐트나 오픈 된 평상에 자기도 한다.

 

H가 우리 집에서 며칠을 자면서, 그때 우리 집 모기들은 포식을 했다. 어디에 눕던 나와 H가 나란히 누워 있으면 집안모기 다 몰려 H에게로만 간다. 바로 옆에서 자는 나는, 어릴 때 삼베 팬티 하나만 딸랑 입고 여름을, 산으로 들로 쏘아다니며, 지낸 경험이 많았는 데, 그때도 삼베팬티는 아니라해도 팬티 하나만 입고 H옆에서 잤지만, H는 달려드는 모기들 방어 하느라, 우리 어머니가 준 담요로 몸을 칭칭 감고 자도  아침에 눈뜨고 보면, 온몸에 모기의 공격으로 H의 몸은 초토화되어 있고, 옆에서 자던 나는 모기 총 몇 발 맞는 수준이였다. H는 날마다 거의 밤을 세웠다.  거의 밤을 세울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땀을 잘 흘리지 않으니 모기들이 잘 오지 않는 것인지, 모기한테는 시골 촌놈의 피가 깡보리밥 택인데, H의 피는 호텔식당이상의 진수성찬택이라 그리로 몰려 간 것인지…

 

변변한 모기약도 없고 무방비의 우리 집을 이후, 6년동안 8번을 왔다 갔으니,  나나 H가 그 유별난 모기와의 전쟁기억이 희미해지지 않고 반세기가 지나도 뚜렷할 수밖에. ,

 

그 후로 반세기가 지난 요즈음, 나는 경주시 산내면 산골에 터를 잡고 산다.  주변이 온통 잡초 밭이고 덩굴이고 수풀이다. 텃밭과 화단은 집을 싸고 있고, 온갖 나무와 화초와 잡초가 자라 모기가 기승을 부린다. 

 

우리 할매는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화단에 물주기, 텃밭에서 상추나 고추를 따와서 담그기, 화단에 풀매기 등으로 보낸다. 내가 회사를 나가지 않는 날에는 내 없을 때, 고생 덜 하라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밥 먹을 때 빼고는, 우리 할매대신, 텃밭 풀을 매고 집안정리 등을 대신하기도 하고,  밀린 작업들을 한다. 그렇다고 우리 할매는 방안에 들어앉아 내가 일을 끝내고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처럼 내 옆에 와서 보조를 맞추기보다는 일을 감독, 지휘한다. 그 댓과(?)로, 일과를 마무리하고 결산을 하다 보면, 언제나 우리 할매는  전신에 모기에 물린 자국 범벅이다.

 

모기에 물린 곳은 너무나 가려워서 오래 긁다 보면 살갖이 헤져서 상쳐가 나기도 한다. 내 같으면 상처가 나도 시원하게 긁어버리는 데, 우리할매는 긁으면 상처난다며, 물파스를 문지르며 참고 참는다. 참으로 대단한 인내력이다.

 

 

 /용재(容齋) 이행(李荇) 1506

 

七月猶蒸溽 칠월에도 찌는 듯이 무더워
群蚊日暮廻 모기 떼가 날 저물면 찾아든다.
膚攢利棘 날카로운 가시처럼 살갗을 물고
亂耳殷輕雷 가벼운 우레인 양 귓전을 맴돈다.

欲起燈還盡 일어나려니 등잔불 외려 다하고
無眠枕屢推 잠이 없어 목침을 자주 밀치노라
嚴霜雖不遠 된서리 내릴 때가 멀지 않지만
蘭蕙恐先摧 난초 혜초 먼저 꺾일까 걱정일세.
<
출처 :,거제시민뉴스(http://www.geojesiminnews.co.kr)

 

2000년 설립 이래 빌 게이츠 부부가 세운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은 한 해 동안 인간의 생명을 가장 많이 앗아간 생물을 밝히는 연례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매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동물 1위는 모기다. 비교적 최근인 우리 인류의 출현 이래 20만 년 동안 존재했던 1,080억 명의 인류 중 약 520억 명의 목숨을 모기가 앗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모기 그 자체가 치명적인 생물인 것은 아니다. 모기가 옮기고 다니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와 질병들 때문에 위협적이다. 그 바이러스와 질병들은 모기가 아니었으면 인류에게 전염되지 못하거나 광범위하고 주기적인 확산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기는 인류에게 가장 치명적인 살인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모기』에서 티모시 C. 와인가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몽골 제국 등 시대를 호령한 제국들이 어떻게 모기로 인해 흥망성쇠를 겪었는지, 이후 대항해시대로 인해 세계적으로 치명적인 모기가 퍼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생기게 된 오늘날 인류 역사의 변화까지 모기가 우리 인간의 역사에 준 영향을 모두 정리해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우리가 흔히 보는 사소한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지 깨닫게 해준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장마 뒷끝이라 어제 그제도 유달리 무덥고 더웠다,

 

집주변 정리를 하고 저녁에 집에 들어오니 역시 우리 할매는 초토화되어 있다. 며칠전 인터넷에 팔에 차는 시계처럼 생긴 모기퇴치기를 사서 차게 했는 데, 모기가 싫어하는 초음파? 무슨 전자파(?)를 발생해서 모기를 퇴치한다기에 우리 할매 생각해서 사주었더니, 그걸 너무 믿고 방심한 탓인가? 불량인가? 그걸 차기 전보다 더 물렸다. 때문에, 기껏 올려 논 점수도 대폭 깎기고…

 

그런데 나는? 

 

나는 올 여름, 무수한 날들을, 무수한 모기들이 내게 달려들었지만, 적어도 오늘, 2022년 여름 7월10일까지는 한방의 모기 총도 나를 맞추지 못했다. 작년만 해도 제법 총을 맞았지만, 올해는 전무. 그러니 우리 할매가 기겁을 할 수밖에, 날 보기를 왠 괴물 쳐다보듯 하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고 이상하다. 모기 총을 맞는 것은 일상적이고 일반적이니 이상할 것 없는 것이거늘…

 

내가 진짜 괴물일까? 내 몸이 비정상일까?

 

문득

 

그 옛날, 우리 집에서 H가 모기와의 전쟁에서 초토화된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만해도 H에 비해서 몇 방의 모기 총밖에 맞지 않는 생각이 떠오른다, 문득 H와 연락을 한지가 몇 년이 흘러갔다. 불현듯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 전화기를 들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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