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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수상잡록/수상록.에세이

멜론이 먹고싶소...-이상한 이상(李箱)

by 靑野(청야) 2021. 10. 17.

"멜론이 먹고 싶소..."

이 한 마디가
죽음을 앞둔 천재 작가 이상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이란다.
천재이자 극도로 괴팍하고, 불행했던
시인이자 건축학도 치고는 소박한 마지막 말이다

오감도(烏瞰圖) 시 제4호/이상(李箱)
ㅡ환자의容態에관한문제

이는 1934년 7월 어느 날,
[조선중알일보] 연재된 이상의 시 오감도중 4번째 시이다

신문이 배포된 지 채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조선중앙일보사’에는 빗발치는 항의와 문의 전화가 쇄도한다.
이미 문단 일각에는 괴팍하고 상식에서 벗어난 문제아로 알려져 있었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그 이름조차 생소한
이상이 시 「오감도(烏瞰圖)」를 발표한 직후의 반응이다

“무슨 미친 놈의 잠꼬대냐.”,
“무슨 개수작이냐.”,
“당장 신문사에 가서 오감도의 원고 뭉치를 불살라야 한다.”,
“이상이란 작자를 죽여야 한다.”······

이처럼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한다.

이 수의 괴상한 나열은 무슨 의미일까?
이것을 시(詩)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일제감정기, 암울한 시기에 살다
스물일곱 나이로 요절한 천재 작가 이상.

“한국 현대시 최고의 실험적 모더니스트"
"한국 시사 최고의 아방가르드 시인”
이라 불렸던 이상, 그의 본명은 김해경,

이상(李箱)은
경성고등공업학교(서울공대의 전신)를 나온
건축학도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hoH1GrumJ58
 
지난 2021년 9월 23일, 문학계와 과학계를 동시에 달군 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바로 천재시인 이상의 난해시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을 파헤친 논문이 발표됐다는 것이었다.
화제의 주인공은 이수정 광주과학기술원(GIST) 기초교육학부교수와
오상현 미국 캘리포니아대 머세드 물리학 박사과정 연구원.
이들은 저널오브코리안컬쳐 54호에
‘이상 시의 4차원 시공간 설계 및 건축: 「삼차각설계도」와 「건축무한육면각체」의 연결, 그리고 차원 확장’
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상 시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작품으로 꼽히는
‘삼차각 설계도’(1931)와 ‘건축무한육면각체’(1932)에 등장하는 일부 용어를 해석한 논문이다.
핵심은 시에 등장하는 ‘삼차각’이라는 조어가
4차원 공간상의 방향을 초구면좌표계로 나타낼 때에 쓰이는 세 개의 각도값을 의미한다고 본 것.
이를 통해 이상이 글로 4차원 시공간을 구현하려 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출처: 한국일보 입력2021.10.06 04:30)

이 기사를 읽고, 이상이 ‘날개’ 라는 시를 썼다는
지식 밖에 없다고 기억하는 내가
이상의 시에 관심을 가져 들여다 보게 되었다.

아라비아 숫자와 기하학 기호,,
건축과 의학 전문 용어,
주문(呪文)과도 같은
해독 불능의 구문으로 이루어진 시들.

자의식 과잉의 인물,
도저한 퇴폐적 소재 차용,
악질적인 띄어쓰기의 거부,
위트와 패러독스로 점철된
국한문 혼용의 소설들.

이상의 시와 소설의 특징들이라 소개한다

오감도(烏瞰圖) 역시
이러한 특징이 잘 들어나 있다
(첨부한, 오감도 전편 시 제1호~ 시제15호 참조)

수 13, 과 11
13은 시 제1호에 등장하고,
시 제4호는 서두에 올린 이미지이다

시 제4호에는 0,1,2,3,4,5,6,7,8,9이
11번을 반복해 등장한다.

괴상하게(?) 나열된
이 수의 무리들은 무슨 의미를 나타낼까?
불안정하고 불안한 내심에서
솟아오르는 대로,
낙서하듯이 써 갈긴 것일까?

건축설계를 하듯
정교하게 설계된 시일까?

본래 건축학도 였던 이상이
기하학적 사고에 집중하다
정신이 엇갈린 것인지 이상을 바라 보는
일반인들의 머리가 헷갈리는 것인지...

만27살에 요절한 시인이면서
전혀 독자들 수준을 의식하지 않고
지꼴리는 데로
천재성을 발휘한 시인의 시라 보여지는 데

아마도, 인터스텔라에서
5차원시공간에서 4차원시공간에 사는 딸 머피과
대화를 시도하는 쿠퍼의 답답함 처럼
5차원의 시공간적 시각으로 바라 보는
답답한 시인의 정신상태의 소용돌이가
터져 나오는 것을 나름대로 다듬어 낸 시가 아닌가 싶다
그래도 일반인들은 난해하니
시도 아닌 뭣이라 했다니...

시 제4호의 투영된 이미지는
0~9의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인다.
왜 뒤집고, 반복를 11번을 하였을까?

뒤집으면 아래와 같은 형태이다

1 2 3 4 5 6 7 8 9 0 ㆍ1 2 3 4 5 6 7 8 9 ㆍ 01 2 3 4 5 6 7 8 ㆍ 9 01 2 3 4 5 6 7 ㆍ 8 9 01 2 3 4 5 6 ㆍ 7 8 9 01 2 3 4 5 ㆍ 6 7 8 9 01 2 3 4 ㆍ 5 6 7 8 9 01 2 3 ㆍ 4 5 6 7 8 9 01 2 ㆍ 3 4 5 6 7 8 9 01 ㆍ 2 3 4 5 6 7 8 9 0ㆍ 1 2 3 4 5 6 7 8 9 0

ㆍ 과 0~9를 이용한 수열의
11번반복이 아니면,
기하학적 배치불균형 생긴다
기하학적 배치의 불균형이 생기지 않기 위해서는
11번의 반복?

일제강점기에
폐결핵을 앓던 환자인 그의 눈에 비친
세상 모습의 이면이
마음의 눈에 선연히 그려졌을지 모를 일이다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면
해답이 안보이는 현실
절박하고 암울한 현실에
탈출구라고는 오로지
머리속에 그려지는 관념의 세계로의
사고여행이라고나 할까

동서고금에 있어왔던
우주는 ‘수(數)’로 표현할 수 있다는 수 철학,
건축공학도로서 수철학과 기하학과 수학에
눈을 떴을 시인은
세상을 수로 표현하고,
수를 시(詩)어 표현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0’은 태초(의 무)를 뜻한다.

'진단은 0.1' 이라니?

이건 또 무슨 의미일까>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고
조그마한 틈바구니가 있다면,
틈바구니가 없다면
틈바구니라도 만들어서
이 틈바구니를 비집고
탈피하고 싶은 심리상태

모든 틈바구니가
닫힌 상태라면 이는 ‘0’
무의 세상, 죽음의 세상이나 다를 바 없다
무는 텅빈 공간, 죽음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완성의 공간이다
동양에서 완성은 십(十)으로 구분한다
온전한 세상, 우주를 뜻한다

무(無)인 ‘0’에서부터
최초의 ‘1’이 탄생하고
그것은 2,3,4,5,6,7,8,9로
분화하기도 하고 변화하기도 하여
마침내 온전한 십(十)으로 완성된다.
0과 10사이에서 만물은 변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변화는 무수히 반복된다.
그 무수함의 기본은 11이다

수학에서 11은
회문 소수(回文 素數)이다
오른쪽, 왼쪽에서 읽어도 동일한 회문이면서 소수인 글자
이는 소수 중에서 회문(回文)이 되는 소수중에서
2자리 수중 첫번째인 것이다


세상을 뒤집에 보는 이미지에
0과1그리고 변환 통해 완성(10)을 이루는
우주변화시도의 최소한의 횟수(11)의 배치

또, 시 제4호배치는
ㆍ11111111111
ㆍ22222222222
ㆍ33333333333
ㆍ44444444444
ㆍ55555555555
ㆍ66666666666
ㆍ77777777777
ㆍ8888888888
ㆍ99999999999
ㆍ00000000000ㆍ

로 표현할 수 있다. 각 숫자마다
11을 반복하는 형태,
최소 2자리 회문소수11번을 반복한 형태,

11111111111의
2개는 22222222222
3개는 33333333333
....
9개는 99999999999

그 변화의 기본은 0, 과1이다
0.1은 모든 변화의 기본이고 근본이 된다
모든 변화는, 어떤 변화든
0과 1로 돌아가라 또는
0과1 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진단은 0, 1?

폐결핵으로 상태가
점점 악화됨을 느낀 그가
진단0,1라 한 것은

암울한 시대상황과
숫자놀음으로
조여드는 현실의 압박에
우주의 근본에 대해
고뇌한 흔적이지 않았을까?

당시 물리학과 우주론이
백가쟁명으로 튀어 나오던 시기
이상은 공학도로서
무와 우주를 수리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통해

답답한 의식의 틈바구니를 만들어
현실을 탈출하고 싶은 탈출구를 희망하며
시 제4호가 탄생하지 않았을까?

"멜론이 묵고 싶소..."

시인은 0에서 태어나
파란만장의 세상을
돌고돌아
다시 그 텅빈 세계로
가는 길에 목마름을 대비해
멜론 한조각을 기대하며...


2021년 10월18일
靑野쓰다



첨부

오감도(烏瞰圖)/이상시 제1호
13인의 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시 제2호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니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시 제3호
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고또싸움하는사람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었기도하니까싸움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고싶거든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싸움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나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였으면그만이다.

시 제5호
전후좌우前後左右를재除하는유일唯一의흔적痕跡에있어서
익은불서翼殷不逝 목불대도目不大覩
반왜소형矮小形의신神의안전眼前에아전낙상我前落傷한고사故事를유有함.
장부臟腑라는것은침수浸水된축사畜舍와구별區別될수있을는가.

시 제6호
앵무鸚鵡 ※ 2필
2필
※ 앵무는 포유류에 속하느니라.
내가2필을아아는것은내가2필을아알지못하는것이니라. 물론나는희망할것이니라.
앵무 2필
"이소저小姐는시사이상李箱의부인이냐""그렇다"
나는거기서앵무가노한것을보았느니라. 나는부끄러워서얼굴이붉어졌었겠느니라.
앵무 2필
2필
물론나는추방당하였느니라. 추방당할것까지도없이자퇴하였느니라. 나의체구는중축中軸를상실하고또상당히창량하여그랬든지나는미미하게체읍涕泣하였느니라.
"저기가저기지""나""나의-아-너와나"
"나"
sCANDAL이라는것은무엇이냐."너""너구나"
"너지""너다""아니다너로구나"
나는함뿍젖어서그래서수류獸類처럼도망하였느니라. 물론그것을아아는사람혹은보는사람은없었지만그러나과연그럴는지그것조차그럴는지.

시 제7호
구원적거久遠謫居의지地의일지一枝·일지一枝에피는현화顯花·특이特異한사월四月의화초花草·삼십륜三十輪·삼십륜三十輪에전후前後되는양측兩側의명경明鏡·맹아萌芽와같이희희戱戱하는지평地平을향向하여금시금시낙백落魄하는만월滿月·청간淸澗의기氣가운데만신창이滿身瘡痍의만월滿月이의형당刑當하여혼륜渾淪하는·적거謫居의지地를관류貫流하는일봉가신一封家信·나는근근僅僅히차대遮戴하였더라·몽몽 한월아月芽·정밀靜謐을개엄蓋掩하는대기권大氣圈의요원遙遠·거대巨大한곤비困憊가운데의일년사월一年四月의공동空洞·반산전도槃散顚倒하는성좌星座와성좌星座의천열千裂된사호동死胡洞을포도逋逃하는거대巨大한풍설風雪·강매·혈홍血紅으로염색染色된암염岩鹽의분쇄粉碎나의뇌腦를피뢰침避雷針삼아침하반과沈下搬過되는광채光彩임리한망해亡骸·나는탑배塔配하는독사毒蛇와같이지평地平에식수植樹되어다시는기동起動할수없었더라·천량天亮이올때까지

시 제8호
ㅡ 解剖
제일부시험第一部試驗 수술대手術臺 일一
수은도말평면경水銀塗抹平面鏡 일一
기압氣壓 이배二倍의평균기압
온도溫度 개무皆無
위선마취爲先痲醉된정면正面으로부터입체立體와입체立體를위爲한입체立體가구비具備된전부全部를평면경平面鏡에영상映像시킴. 평면경平面鏡에수은水銀을현재現在와반대측면反對側面에도말이전塗沫移轉함. (광선침입방지光線侵入防止에주의注意하여)서서徐徐히마취痲醉를해독解毒함. 일축철필一軸鐵筆과 일장백지一張白紙를지급支給함.(시험담임인試驗擔任人은피시험인被試驗人과포옹抱擁함을절대기피絶對忌避할것)순차수술실順次手術室로부터피시험인被試驗人을해방解放함.익일翌日.평면경平面鏡의종축縱軸을통과通過하여평면경平面鏡을이편二片에절단切斷함. 수은도말이회水銀塗抹二回.
ETC 아직그만족滿足한결과結果를수득收得치못하였음.
제이부시험第二部試驗 직립直立한평면경平面鏡 일一
조수助手 수명數名
야외野外의진공眞空을선택選擇함. 위선마취爲先痲醉된상지上肢의첨단尖端을경면鏡面에부착附着시킴. 평면경平面鏡의수은水銀을박락剝落함. 평면경平面鏡을후퇴後退시킴.(이때영상映像된상지上肢는반드시초자硝子를무사통과無事通過하겠다는것으로가설假說함)상지上肢의종단終端까지. 다음수은도말水銀塗抹.(재래면在來面에)이순간공전瞬間公轉과자전自轉으로부터그진공眞空을강차降車시킴. 완전히이개二個의상지上肢를접수接受하기까지.익일翌日.초자硝字를전진前進시킴.연連하여수은주水銀柱를재래면在來面에도말塗抹함.(상지上肢의처분處分)[혹은멸형滅形]기타其他.수은도말면水銀塗抹面의변경變更과전진후퇴前進後退의중복重複등等.
ETC 이하以下미상未詳
진단 0,1 26.10.1931 책임의사 이상

시 제9호
ㅡ 총구
매일每日같이열풍烈風이불더니드디어내허리에큼직한손이와닿는다.황홀恍惚한지문指紋골짜기로내땀내가스며드자마자쏘아라.쏘으리로다.나는내소화기관消化器管에묵직한총신銃身을느끼고내다물은입에매끈매끈한총구銃口를느낀다. 그리더니나는총銃쏘으드키눈을감으며한방총탄銃彈대신에나는참나의입으로무엇을내배앝었더냐.

시 제10호
ㅡ 나비
찢어진벽지壁紙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그것은유계幽界에낙역絡繹되는비밀秘密한통화구通話口다.어느날거울가운데의수염鬚髥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날개축처어진나비는입김에어리는가난한이슬을먹는다.통화구通話口를손바닥으로꼭막으면서내가죽으면앉았다일어서드키나비도날아가리라.이런말이결決코밖으로새어나가지는않게한다.

시제11호
그사기컵은내骸骨과흡사하다. 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엿슬때 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接木처럼도치더니그팔에달린손은 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여부딧는다. 내팔은그사기컵을死守하고잇스니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과흡사한내骸骨이다. 가지낫든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前에내팔이或움즉엿든들洪水를막은白紙는찌저젓으리라. 그러나내팔은如前히그사기컵을死守한다.

시 제12호
때묻은빨래조각이한뭉텅이공중空中으로날라떨어진다.그것은흰비둘기의떼다.이손바닥만한한조각하늘저편에전쟁戰爭이끝나고평화平和가왔다는선전宣傳이다.한무더기비둘기의떼가깃에묻은때를씻는다.이손바닥만한하늘이편에방망이로흰비둘기의떼를때려죽이는불결不潔한전쟁戰爭이시작始作된다.공기空氣에숯검정이가지저분하게묻으면흰비둘기의떼는또한번이손바닥만한하늘저편으로날아간다.

시 제13호
내팔이면도칼을든채로끊어져떨어졌다.자세히보면무엇에몹시위협威脅당하는것처럼새파랗다.이렇게하여잃어버린내두개팔을나는촉대燭臺세움으로내방안에장식裝飾하여놓았다.팔은죽어서도오히려나에게겁怯을내이는것만같다.나는니러한얇다란예의禮儀를화초분花草盆보다도사랑스레여긴다.

시 제14호
고성앞에풀밭이있고풀밭위에나는모자를벗어놓았다.성위에서나는내기억에꽤무거운돌을매어달아서는내힘과거리껏팔매질쳤다.포물선을역행하는역사의슬픈울음소리.문득성밑내모자곁에한사람의걸인이장승과같니서있는것을내려다보았다.걸인은성밑에서오히려내위에있다.혹은종합된역사의망령인가.공중을향하여놓안모자의깊이는절박한하늘을부른다.별안간걸인은율률한풍채를허리굽혀한개의돌을내모자속에치뜨려넣는다.나는벌써기절하였다.심장이두개골속으로옮겨가는지도가보인다.싸늘한손이내이마에닿는다.내이마에는싸늘한손자국이낙인되어언제까지지어지지않았다.

시 제15호
1
나는거울없는실내室內에있다.거울속의나는역시외출중外出中이다.나는지금至今거울속의나를무서워하며덜고있다.거울속의나는어디가서나를어떻게하려는음모陰謨를하는중中일까.

2
죄罪를품고식은침상寢床에서잤다.확실確實한내꿈에나는결석缺席하였고의족義足을담은군용장화軍用長靴가내꿈의백지白紙를더럽혀놓았다.

3
나는거울속에있는실내室內로몰래들어간다.나를거울에서해방解放하려고.그러나거울속의나는침울沈鬱한얼굴로동시同時에꼭들어온다.거울속의나는내게미안未安한뜻을전傳한다.내가그때문에영어囹圄되어있드키그도나때문에영어囹圄되어떨고있다.

4
내가결석缺席한나의꿈.내위조僞造가등장登場하지않는내거울.무능無能이라도좋은나의고독孤獨의갈망자渴望者다.나는드디어거울속의나에게자살自殺을권유勸誘하기로결심決心하였다.나는그에게시야視野도없는들창窓을가리키었다.그들창窓은자살自殺만을위爲한들창窓이다.그러나내가자살自殺하지아니하면그가자살自殺할수없음을그는내게가르친다.거울속의나는불사조不死鳥에가깝다.

5
내왼편가슴심장心臟의위치位置를방탄금속防彈金屬으로엄폐掩蔽하고나는거울속의내왼편가슴을겨누어권총券銃을발사發射하였다.탄환彈丸은그의왼편가슴을관통貫通하였으나그의심장心臟은바른편에있다.

6
모형심장模型心臟에서붉은잉크가엎질러졌다.내가지각遲刻한내꿈에서나는극형極形을받았다.내꿈을지배支配하는자者는내가아니다.악수握手할수조차없는두사람을봉쇄封鎖한거대巨大한죄罪가있다.
<조선중앙일보>(1934.7)

 

 

 

특히 오감도라는 시를 읽었을 때의

충격과 황망함을 기억한다.

여타의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읽었을 때와는

달랐다.

그의 작품을 초현실주의로 분류한다.

그도 그럴만하다는 생각이다.

조용하고

기이한

어느 날에는

이상의 삶에 대해

말해 보고자한다.

33번지 유곽만큼 널부러진

그의 삶을!

[출처] 이상의 날개/현대소설|작성자 초록머리 ANNE

 

출생사망

1910년
1937년

1933년 늦여름 어둑어둑해질 무렵. 백단화(白短靴)에 평생 빗질 한 번 해본 적 없는 듯한 봉두 난발, 짙은 갈색 나비넥타이, 구레나룻에 얼굴빛이 양인(洋人)처럼 창백한 사나이, 중산모를 쓴, 키가 여느 사람의 반밖에 되지 않는 꼽추, 키가 훌쩍 큰 또다른 사나이, 이렇게 셋이서 종로를 걸어간다.

“어디 곡마단 패가 들어왔나 본데.”

“아냐. 활동 사진 변사 일행이야.”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기묘한 일행을 보고 한 마디씩 던진다. 백구두의 사나이가 갖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공연히 휘휘 돌려댄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카카카······!”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스스로 생각해도 저를 포함한 일행의 몰골이 우스꽝스러운 까닭이다. 얼마 전 그들이 백천 온천에 갔을 때도 경성에서 곡마단 패가 왔다고 애들이 뒤를 졸졸 따라다닌 바 있다. 이 세 사람 가운데 백단화를 신은 구레나룻의 사나이가 바로 이상(李箱, 1910~1937)이고, 중산모를 쓴 꼽추는 화가 구본웅이다.

1930년대 한국 문학 최고의 모더니스트로 꼽히는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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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 나이로 요절한 천재 작가 이상. “한국 현대시 최고의 실험적 모더니스트이자 한국 시사 최고의 아방가르드 시인”1) 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상은 어두운 식민지 시대에 돌출한 모던 보이다. 그의 등장 자체가 한국 현대 문학 사상 최고의 스캔들이다. 알쏭달쏭한 아라비아 숫자와 기하학 기호의 난무, 건축과 의학 전문 용어의 남용, 주문(呪文)과도 같은 해독 불능의 구문으로 이루어진 시들. 자의식 과잉의 인물, 도저한 퇴폐적 소재 차용, 악질적인 띄어쓰기의 거부, 위트와 패러독스로 점철된 국한문 혼용의 소설들. 그의 모더니즘 문학과 비일상적 기행(奇行)들은 이 스캔들의 원소를 이룬다.

이상의 육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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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7월 어느 날, 신문이 배포된 지 채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조선중앙일보사’에는 빗발치는 항의와 문의 전화가 쇄도한다. 이미 문단 일각에는 괴팍하고 상식에서 벗어난 문제아로 알려져 있었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그 이름조차 생소한 이상이 시 「오감도(烏瞰圖)」를 발표한 직후의 반응이다. 이상은 1931년 7월에서 9월에 걸쳐 『조선과 건축』에 「이상한 가역반응(可逆反應)」 외 5편과 일어로 된 「오감도」 8편, 그리고 「삼차각 설계도(三次角設計圖)」 등을 통해 우리 문학 사상 최초로 이성과 의지를 무시한 자동 기술법, 숫자와 기하학 기호의 삽입, 난해한 한자와 일어의 사용, 띄어쓰기의 무시 등을 감행한 시들을 선보여 기성 문인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준 바 있다.

그러나 이 때까지 그의 작품은 주로 문학 잡지가 아니라 한정된 독자를 가진 건축 잡지나 종교 잡지에 발표된 것이어서 크게 눈길을 끌거나 지은이의 이름을 널리 알리지는 못한다. 『조선중앙일보』의 학예 · 문예부장이던 이태준의 발탁으로 활자 세례를 받은 오감도 연작은 예정된 30회의 반밖에 싣지 못하고 8월 8일치 신문을 끝으로 15회 만에 중단되고 만다. 「오감도」가 나가는 동안 안주머니에 사표를 넣고 다니던 이태준은 이 사태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상의 「오감도」는 처음부터 말썽이었어. 원고가 공장으로 내려가자 문선부에서 ‘오감도(烏瞰圖)’가 ‘조감도(鳥瞰圖)’의 오자가 아니냐고 물어왔어. 오감도란 말은 사전에도 나오지 않고 듣도 보도 못한 글자라는 것이야. 겨우 설득해서 조판을 교정부로 넘겼더니, 또 거기서 문제가 생겼어. 나중에 편집국장에까지 진정이 들어갔지만 결국 시는 나갔어. 그 다음부터 또 문제였어. “무슨 미친 놈의 잠꼬대냐.”, “무슨 개수작이냐.”, “당장 신문사에 가서 오감도의 원고 뭉치를 불살라야 한다.”, “이상이란 작자를 죽여야 한다.”······ 신문사에 격렬한 독자 투고와 항의들이 빗발쳐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지.

이처럼 당대 사람들에게 모독당한 「오감도」 연작은 뒷날 구태의 한국 문학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모더니즘 문학의 진경을 펼쳐 보인 ‘앞서간 문학’으로, 이상 문학을 한국 문학사에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게 만든 역작으로 평가된다.

1939년 고대문학회에서 나온 〈이상 전집〉 1 ·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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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중반 스위스 · 독일 · 프랑스에서 일체의 전통과 기성 가치를 부정, 파괴하고자 한 다다이즘(Dadaism), 이어서 1920년대 중반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을 바탕으로 브르통(Andre Breton)에 의해 시도된, 기성 윤리와 역사 및 현실 통념을 거부하고 주관적 내면 세계를 심리적으로 분석하는 기법을 차용한 초현실주의(Sur-realism). 이 두 가지는 일본에서 나온 이론을 1924년 고한용이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는 일본에서조차 불온시된 탓으로 우리 나라에 좀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다가 1930년대에 들어 건축 기사 출신의 한 젊은이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도된 것이다. 이상의 시는 현대인의 절망과 불안 심리를 형상화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찬사도 받지만, 기존 언어 체계와 질서에 익숙하던 일부 문인과 일반 독자에게는 문학에 대한 커다란 모독처럼 여겨진 것 또한 사실이다.

「오감도」 제1호에 나오는 ‘13인의 아해’라는 말은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예수의 13제자를 상징한다는 풀이를 비롯해 현실의 불안, 공포, 부조리, 혼란, 모순을 나타낸 것이라는 등 숱한 견해를 낳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주 들추어지는 하나의 보기일 뿐, 이상의 거의 모든 작품이 이처럼 고정 관념과 보편성을 무시한 파격으로 치닫는 까닭에 뒷날 끊임없이 비평가들의 다각적인 연구 대상에 오르게 된다.

본디 이상은 강릉 김씨이고, 이름은 해경(海卿)이다. 그는 우리 나라가 일본에 강제 병합되던 해인 1910년 음력 8월 20일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난다. 아버지는 구한말 궁내부 활판소에서 일하다가 손가락 셋이 잘린 뒤 이발소를 차린 김연창(金演昌)이다. 해경은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네 살이 되던 해 그는 총독부 상공과 기술관으로 있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의 양자로 들어간다. 이렇게 백부의 양자가 된 것은 해경이 태어날 무렵부터 급격히 기운 가세 때문이다. 백부는 어린 해경에게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운 부성애를 베풀지만, 백모는 이와 달리 증오와 소외를 맛보게 한다. “오빠는 세 살 때, 웃는 큰어머니를 보고 무서워했대요. 그렇다고 울거나 하는 일은 없고 슬금슬금 문 밖으로 숨었대요.” 누이동생 김옥희가 전하는 말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여느 아이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지나치게 흰 얼굴 때문에 동네 아낙네들이 “흰둥이, 흰둥이!” 하고 부른 것 정도가 얘깃거리랄까.

해경은 여덟 살 때 인왕산 밑에 있던 신명학교에 들어간다. 당시만 해도 취학 적령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아서 입학생 중에는 스무 살짜리 젊은이도 끼여 있었다고 한다. 교과목은 조선어 · 일본어 · 산수 · 지리 · 수신 · 체조 · 도화 · 습자로 짜여 있었는데, 해경은 지리(地理)와 도화(圖畵)에 뛰어난 소질을 보인 반면 체조는 몹시 싫어한다. 다음은 백모가 전하는 말이다. “그 애는 그림에 빠져 있기 일쑤였어요. 길가에 버려진 화투 목단 열 끗짜리를 똑같이 그려내서 사람들을 놀래기도 했지요. 내가 환쟁이는 상놈이라고 막무가내로 혼내고 말려도 소용이 없었어요. 그 애는 혼자 있을 때면 늘 무언가를 그리곤 했어요.”

해경의 그림 쪽 소질은 화가 고희동이 미술 교사로 있던 보성고보에 다니면서 꽃을 피우게 된다. 보성은 도상봉 · 이종우 · 장발 · 고유섭 같은 화가들을 배출한 학교다. 그런데 해경이 처음부터 보성에 진학한 것은 아니다. 먼저 다니던 동광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단체로 편입하게 된 학교가 보성고보인 것이다. 보성 시절에도 그는 여전히 체조를 싫어하고, 그림을 그릴 때만 마치 “강신(降神)한 것처럼” 눈빛이 번쩍거린다. 보성의 미술 친화적 환경 덕분에 그의 재능은 이윽고 빛을 보게 된다. 보성고보 교내 미술 전람회에서 「풍경」으로 1등상을 차지한 것이다. 몇 해 뒤 해경은 조선 미술 전람회에 「자화상」을 내놓아 입선하기도 한다.

화실에서의 이상

1929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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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탁하고 있던 백부의 가세마저 기울자 해경은 학교에서 현미빵을 팔아 고학 생활을 꾸려간다. 보성고보를 졸업한 그는 진로 문제로 고민에 빠진다. 그가 식민지 건축 기술자 양성을 위해 세워진 경성고등공업학교(서울공대의 전신)에 들어간 것은 백부의 소망 때문이다. 백부는 그를 설득한다. “해경아, 앞으로 너는 건축과를 가야 한다. 나도 병들고 네 아비도 늙고 가난하지 않느냐. 적선동(해경의 친가)은 식량이 떨어질 때도 많은 모양이더라. 세태가 아무리 바뀌어도 기술자는 배는 곯지 않는단다. 그러니 가난한 환쟁이는 안 돼.” 이상이 건축 용어와 숫자, 기하학 기호 등을 시어로 차용하고 수식(數式)보다 난해한 시들을 쓰게 된 것은 바로 이 고등공업 시절의 영향이다.

해경, 아니 이상의 내면에서 현실 도피나 자살을 추구하는 병적인 심리가 언제부터 꿈틀거린 것인지 알 길은 없으나 고등 공업 시절에 이미 증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런 부분은 건축이나 그림이 아니라 문학을 통해 표출되기 시작한다. 이 무렵의 소설 「12월 12일」 · 「휴업과 사정」과 시 「선에 관한 각서」 등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이상의 이와 같은 이상 심리가 다량 검출된다. 특히 이상의 작품치고는 기법 면에서 평이하지만, 운명처럼 허무주의의 늪에 빠지는 인간형을 그려낸 소설 「12월 12일」의 서문 2에서, 그는 몹시 강렬한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런 충동을 극복하기 위해 문학을 할 것이라는 “무서운 기록”2) 을 남기게 된다.

이상의 시가 최초로 활자화된 것은 1931년의 일이다. 1929년 3월 경성고공 졸업과 함께 월급 55원을 받는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技手)로 들어간 해경은 같은 해 12월 건축학지인 『조선과 건축』의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뽑힌다. 바로 이 『조선과 건축』 1931년 7월호에 「이상한 가역반응」 등을 발표한 것이다.

해경이 이상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 때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김해경이라는 오빠의 이름이 이상으로 바뀐 것은 1932년부터예요. 건축 공사장 인부들이 ‘이상’이라고 잘못 호칭한 데서 비롯된 것이지요.” 누이동생 김옥희의 말이다. 이상이라는 이름은 총독부 건축과 기수직에 있던 시절 공사장 인부들이 일본식 발음으로 ‘긴상(金樣)’이라고 해야 할 것을 ‘이상(李樣)’이라고 잘못 부른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1929년의 경성고공 졸업 앨범에 이상이라는 필명이 나온다. 따라서 이상이라는 이름은 고등 공업 시절 건축 공사장에 실습하러 갔을 때 인부가 해경을 이씨로 알고 잘못 부른 데서 비롯된 듯하다.

1933년 이상은 백부의 양자로 들어간 지 23년 만에 가족과 합치나 불과 보름을 견디지 못한다. 그는 백부의 유산으로 청진동 조선광무소 건물 1층을 전세내어 ‘제비’ 다방을 개업하고, 백천 온천 여행중에 만난 술집 여급 출신 금홍을 불러들여 마담으로 앉힌다. 아울러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하는데, 이 때 금홍은 겨우 스물한 살이었고, 금홍의 눈에 마흔이 넘은 것으로 비치던 이상은 알고 보면 스물세 살이었다. 이상은 어디엔가 “나는 추호의 틀림없는 만 25세 11개월의 홍안 미소년(紅顔美少年)이다. 그렇건만 나는 노옹(老翁)이다.”라고 쓴다. 찰나적인 행복감에 젖은 이상은 “우리 내외는 참 사랑했다. 금홍이와 나는 서로 지나간 일은 묻지 않기로 하였다. 과거래야 내 과거가 무엇 있을 까닭이 없고 말하자면 내가 금홍이의 과거를 묻지 않기로 한 약속이나 다름없다.”고도 쓴다.

‘제비’는 당대의 일급 문인들이던 이태준 · 박태원 · 김기림 · 정인택 · 윤태영 · 조용만 등이 즐겨 찾는다. 그러나 ‘제비’ 다방의 경영은 여의치 않았고, 금홍은 외간 남자들과 바람을 피우곤 한다. 이상은 “나는 금홍이의 오락을 돕기 위해 가끔 P군의 집에 가 잤다.”고 털어놓기도 한다. 여기서 ‘P군’은 아마도 박태원을 이를 터. 금홍의 문란한 남자 관계를 방임하던 이상은 때로 금홍의 난폭한 손찌검에 몸을 내맡긴 채 자학을 꾀한다. 어느 날 금홍이 때 묻은 버선을 윗목에 팽개쳐놓고 나가버리고, ‘제비’ 다방은 두 해 만인 1935년 9월 문을 닫는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는 연애까지 유쾌하오.”로 시작되는 소설 「날개」는 바로 금홍과의 동거 체험에서 건져낸 작품이다.

1933년 이상은 정지용의 주선으로 『카톨릭청년』 7월호에 시 「꽃나무」와 「이런 시」, 10월호에 「거울」을 발표한다. 김기림 · 이태준 · 박태원 같은 문인들과 어울리게 된 그는 1934년 초 ‘구인회’에 가입한다. 그는 곧 구인회 회지인 『시와 소설』의 편집에 관여할 뿐 아니라, 구인회 회원인 박태원의 신문 연재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 ‘하융(河戎)’이라는 이름으로 삽화를 그리기도 하는 등 글과 그림에 걸쳐 솜씨를 발휘한다. 같은 해 여름, 그는 『조선중앙일보』에 시 「오감도」를 발표해 물의를 일으키며 문제 작가로 떠오르게 된다. 이후에도 『중앙』에 「소영위제(素榮爲題)」, 『신여성』 · 『월간매신』 · 『신동아』 등에 「혈서 삼태(血書三態)」와 「산책의 가을」 등 파격적인 내용과 언어를 실험하는 작품을 잇달아 내놓는다.

〈아동세계〉 편집실에서

왼쪽부터 이상 · 박태원 · 김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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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자신의 작품만큼이나 여느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파행적 단면을 보인다. 처음에는 다방 ‘제비’의 얼굴 마담으로 금홍을 앉혀놓고, 문우들이 일명 ‘도스토예프스키의 방’이라고 하던, ‘제비’에 딸린 골방에 틀어박혀 술만 마시거나 수염과 머리도 깎지 않은 채 거리를 쏘다니더니, 나중에는 드러내놓고 매춘을 하는 금홍을 멀거니 지켜보기도 한다. 이처럼 피학성을 띤 극도의 자기 폐쇄성은 소설 「지주 회시(蜘蛛會豕)」에 이어 「날개」 · 「실화」 · 「봉별기(逢別記)」 등에서 거푸 나타난다.

특히 1인칭 독백으로 시작되는 「날개」 속의 ‘나’는 바로 작가 이상 자신으로, 철저하게 고립된 자아와 내면의 고독을 의식의 흐름에 따라 해부하고 있다. 주인공 ‘나’는 아무런 의욕도 없이 골방 속에 틀어박혀, 아내의 화장품 냄새를 맡아보거나 돋보기로 화장지를 태우면서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고 권태롭게 보낸다. 한편 이런 남편이 자신의 매춘 행위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 아내는 그를 “볕 안 드는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아스피린을 주는 척하며 수면제를 주기 시작한다. 아내가 하는 짓을 나무랄 뜻이 따로 없는 ‘나’는 아내와 연애 또는 아스피린과 아달린 등을 연구하거나, 자신이 자는 동안 아내가 무슨 짓을 했을까 궁금하게 여기며 공상을 일삼는다. 그러던 중 ‘나’는 문득, 날개가 돋아 현실 세계를 박차고 단 한 번만이라도 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1935년 가을 ‘제비’의 문을 닫은 이후 이상은 인사동에서 ‘카페 쓰루’, 종로 1가에서 다방 ‘69’ · ‘무기’ · ‘맥’ 등을 열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러는 동안 금홍은 도로 술집에 나가며 걸핏하면 외박을 하더니, 어느 날 영영 이상의 곁을 떠나고 만다. 얼마 뒤 이상은 다시 여급 출신의 권순옥과 사귀게 된다. 그러나 권순옥을 연모하며 괴로워하던 친구 정인택이 음독 자살을 기도하다가 미수에 그치는 일이 생기자, 이상은 권순옥과 정인택을 맺어주고 두 사람의 행복까지 빌어준다.

거듭된 경영 실패, 쇠잔한 몸, 연애의 후유증 등으로 말미암은 고독이 극에 이르자, 이상은 뒤늦게 구인회에 가입하며 절친한 사이가 된 김유정에게 같이 자살하자는 제안까지 한다. 그는 셋방을 전전하다가 방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기도 하면서, 청소부로 일하던 동생의 봉급으로 가까스로 생계를 꾸려나간다. 그러던 중 1935년 말, 화가 구본웅의 추천으로 구본웅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창문사’에서 문예 담당으로 일하게 되어 그나마 형편이 조금 풀린다. 그런데 이상은 여기서 구본웅의 서모의 소생인 누이동생 변동림을 만나게 된다.

금홍이나 권순옥과는 달리 이화여전을 나온 평범한 성격의 변동림과도 이상은 무슨 절차라도 되는 양 동거부터 한다. 얼마 뒤 두 사람은 신흥사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황금정(지금의 을지로)에 셋방을 얻어 신혼 살림을 차린다. 이 때부터 이상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글쓰기에 매달려 1935년 「정식」 · 「지비(紙碑)」 · 「산촌 여정」, 1936년 「작가의 호소」 · 「지비 1, 2, 3」 · 「이단」 · 「서망율도(西望栗島)」 · 「조춘 점묘(早春點描)」 · 「가외가전(街外街傳)」 · 「여상(女像)」 · 「명경(明鏡)」 · 「지주 회시」 · 「약수」 · 「에피그램」 · 「매상(妹像)」 · 「행복」 · 「위독」 · 「봉별기」 · 「동해(童骸)」 · 「황소와 도깨비」 · 「19세기식」 등 일일이 꼽기 어려울 만큼 많은 작품을 마구 쏟아낸다. 그러나 결혼한 지 석 달 만인 1936년 10월, 이상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일본으로 간다.

고서점들이 늘어선 거리 쪽에 하숙을 정한 이상은 도쿄에서 「종생기」 · 「권태」 · 「슬픈 이야기」 · 「환상기」 · 「실락원」 · 「실화」 · 「동경」 등을 써낸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도쿄에 환멸을 느끼고 서울에 있는 친구들에게 이런 심경을 편지로 알리기도 한다. 한동안 그는 초현실주의 색채를 보이던 유학생 그룹 ‘삼사 문학’의 동인들과 어울리며 그나마 위안과 자극을 받게 된다. 이상은 알고 보면 김기림과 함께 프랑스로 가겠다는 꿈을 안고 일본 땅에 발을 디딘 것이다. 그러나 이상은 그의 간절한 문학적 열망과는 달리 점점 악화되는 결핵, 여전히 따라다니는 서울의 가족에 대한 부채감과 생계 부담에 부대끼며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로에 찌들게 된다.

이듬해 2월 12일 이상은 일본 경찰에 불령 선인(不逞鮮人)으로 검거되고, 얼마 뒤 폐결핵의 악화로 병상에 눕는다. 뒷날 화가 김환기의 아내가 되어 변동림이 아니라 김향안으로 살기도 하는 동림이 소식을 듣고 급히 도쿄로 간다. 1937년 4월 17일 새벽 4시, 변동림의 품에 안긴 채, 한국 문학의 돌연 변이였으며 이단아이던 이상은 황음(荒淫)과 일탈(逸脫)의 기행으로 얼룩진 스물일곱 해에 걸친 삶을 접는다.

“멜론이 먹고 싶소······.” 이 한 마디가 요절 천재 작가 이상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이다.

생전의 이상에게 “우리가 가진 가장 뛰어난 근대파 시인”이라고 갈채를 보낸 바 있는 김기림은 그의 죽음에 대해 “제 스스로의 혈관을 따서 「시대의 서(書)」를 쓴 이상의 죽음이 한국 문학을 50년 후퇴시켰다.”며 크게 슬퍼한다. 김기림은 뒷날 자신의 시집 『바다와 나비』 속에 「우리들이 가졌던 황홀한 천재, 이상의 애도시」와 ‘이상의 영전에 바침’이라는 부제를 단 「주피터의 추방」이라는 시를 끼워넣는다. 이상의 요절은 김기림뿐 아니라 박태원과 최재서 등 그를 아끼던 많은 사람을 안타깝게 만든다.

오감도(烏瞰圖)

이상

시제일호(詩第一號)

13인(人)의아해(兒孩)가도로(道路)로질주(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適當)하오.]

제(第)1의아해(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第)2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3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4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5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6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7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8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9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10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11의아해(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第)12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13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人)의아해(兒孩)는무서운아해(兒孩)와무서워하는아해(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中)에1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운아해(兒孩)라도좋소.
그중(中)에2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운아해(兒孩)라도좋소.
그중(中)에2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운아해(兒孩)라도좋소.
그중(中)에1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운아해(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適當)하오.]
13인(人)의아해(兒孩)가도로(道路)로질주(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

― 『조선중앙일보』(1934. 7. 24.~8. 8.)

이상은 20세기 한국 문학사에서 명멸한 숱한 인물 가운데 가장 문제적 인물이며, 그의 연작시 「오감도」는 한국 현대 문학사 1백 년 동안 나온 작품 가운데 가장 문제적 작품이다. 이상 문학은 그 자체로 20세기 한국 문학사에 내장된 최고의 형이상학적 스캔들이다.

1933년 이상은 폐결핵에 따른 각혈로 총독부 기수직을 그만둔다. 이듬해 구인회에 가담한 이상은 ‘조선중앙일보’에 돌연 「오감도」 연재를 단행한다. 그러나 너무 앞서간 이상의 극단적 실험시는 단번에 독자들로부터 “무슨 미친 놈의 잠꼬대냐.”는 비난을 받게 되고,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빗발친 항의 때문에 신문사는 예정된 횟수의 반만 채우고 게재를 중단한다. 당대를 훨씬 앞지른 ‘첨단’, 이 도저한 정신 분열적 언어의 파행에 독자들은 이토록 거부감을 나타낸다. 당대 사람들의 의식과 정서로는 수용 불가능했던 시 「오감도」. 그러나 당대 사람들에게 모독당한 그의 시는 한국 현대 문학사에서 불멸의 자리에 각인되며, 후학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다. 뒷날 시인 이승훈은 이상에게서 “반리얼리즘적 태도, 실존의 현기, 추상성, 자아에 대한 회의”(이승훈, 『문학정신』1995 가을) 를 배웠다고 고백한다.

「오감도」 제1호에 나오는 ‘13인의 아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상 문학 연구자들은 이에 대한 온갖 해석을 내놓는다. “최후의 만찬에 합석한 기독 이하 13인”, “위기에 당면한 인류”, “해체된 기아의 분신”, “이상 자신의 기호”, “인간 역사의 한계성”, “일제하의 13도”, “언어 도단의 세계”, “시인의 공포가 아해의 불안으로 투사”······. 그러나 어떤 해석도 시대에 대한 반동 지향의 자의식에서 솟구쳐 나온 ‘13인의 아해’의 상징성을 다 풀어내지 못한다. 21세기의 문턱에 이른 현재까지도 이상은 온전히 이해되지 않은 아방가르드이며, ‘첨단’이다.

‘건축가’ 이상

이상이 경성고공 건축과를 나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건축가’로서의 그를 다룬 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문인이기에 앞서 이상은 일제 시대의 건축 기술 전문 인력 양성소이던 경성고공 건축과를 거친 직업 건축가다. 건축은 그의 삶을 떠받친 한쪽 기반이며, 그의 문학의 촉매 인자이자 발생론적 근거인 것이다. 우연히 한 일간지에서 「건축가로서의 닫힌 꿈 문학으로 발산한 이상」이라는 제목으로 쓴 짧은 글을 보게 되어 옮겨 싣는다. 눈밝은 한 기자가 ‘건축가’ 이상을 조명한 글이다.

건축은 세상을 짓는 일이다. 건축은 또 당대를 사는 사람들의 문화 삶 · 꿈을 담는다. 그러니 문학과 음악과 철학과 영화가 건축에 투영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런 건축과 문화의 만남에서 건축가이면서 시인인 이상(본명 김해경 · 1907~1937)을 빼놓을 수 없다.

이상은 1920년대 당시 유일한 기술 전문 인력 양성소였던 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 건축과 출신이다. 그러나 짧은 생애에 이룩한 문화적 광채에 가려, 그가 많은 일본인을 제치고 건축과 수석 졸업했으며, 졸업 작품으로 「수상 경찰서 겸 소방서 설계안」을 냈고, 이후 폐병으로 현장 활동이 불가능해진 1933년 말까지 조선총독부의 직원으로서 공사를 직접 감독 · 지휘했던 일 등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져 왔다.

또한 그가 지은 건물은 고사하고 설계도 한 장 남은 게 없어 그의 건축 활동을 추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상의 예술을 이해하는 데 건축은 빠질 수 없는 요소다. 최혜실 교수(과학기술대 국문과)는 이상이 한때 편집을 맡았던 건축 잡지 『조선과 건축』 머리글에서 그 흔적을 찾는다. 이상은 당시 이 잡지에 운문과 산문의 중간 형태 글을 실었는데, 이는 독일 예술 학교 바우하우스 교수였던 헝가리 출신의 건축 이론가 모홀리 나기의 이론을 응용한 것이라고 최 교수는 분석한다. 최 교수는 또 그의 글 전반에 건축적 대칭성이 나타나고, 「오감도」, 「삼차각 설계도」, 「건축 무한 육면각체」 등 건축과 깊은 관련을 지닌 표제어를 자주 썼다고 지적한다. 전문가들은 특히 내부와 외부를 기하학적으로 묘사하는 「신기함의 백화점」에서 ‘건축가 이상’을 읽어낸다.

“동경은 20세기인데 나는 19세기”라고 초조해했던 이상. 겁 없이 모더니즘의 바다를 항해했던 그에게 건축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인은 설계 사무소를 낼 수도 없고, 건축가가 될 수도 없었던 ‘19세기적인 식민지 조선’에서 그는 건축 현실의 닫힌 문을 시를 통해 풀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너는누구기에구태어닫힌문(門)앞에서탄생하였느냐.”(「정식」).

『한겨레신문』(1999. 3. 13.), 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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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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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인복 외, 『한국 문학 사상사』, 숙명여자대학교 출판부,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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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윤식 · 정호웅, 『한국 소설사』, 예하, 1993
  • ・ 김윤식 편, 『이상 문학 전』, 문학사상사, 1991

장석주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고려원’의 편집장을 거쳐 ‘청하’ 출판사를 설립해 13년 동안 편집자 겸 발행인으로 일했다. 그 뒤 동덕여..펼쳐보기

시 제1호

13인의 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시 제2호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니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시 제3호

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고또싸움하는사람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었기도하니까싸움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고싶거든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싸움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나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였으면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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