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을 만들어
현대인들의 삶을 바꿔 놓았다.
잡스가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당시 MP3와 핸드폰을 따로 따로 쓰던 시대였다.
두 개를 따로 쓰면서 누구도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컴퓨터와 핸드폰이 따로 있었으나 누구도 그것을 불편하게 느끼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 스티브 잡스는 거기서 불편함을 느꼈다. 예민한 것이다.
그는 자기가 발견한 문제, 즉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덤볐고
따로 있는 것들을 서로 연결했다.
문제 해결 방식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유’(有)들끼리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창의력의 핵심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두 개를 연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이 나오고,
그것 때문에 새로운 흐름이 형성된다.
변화가 야기되는 것이다.
변화를 야기하려면 정답이 아니라 우선 불편함(문제)을 느껴야 한다.
스티브 잡스는 세계에 변화를 야기한 사람이다.
그가 위대한 이유다.
◇장자의 '吾喪我' 낡은 자기와 결별하는 것…진짜 자기와 만난다
“창조성을 키우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
-세상에 대해 호기심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불편함을 느끼는 예민함이 있어야 한다.
부처도 예수도 공통적으로 강조한다. 깨어 있으라고….
생각하라는 뜻이다.
예민하고 민감하고 생각을 해야 문제를 발견하고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무던하고 무딘 사람은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 어렵다.
또 창의적이기 위해서는 버릇이 없어야 한다.
정답이라고 정해진 틀을 깨고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젊은이가 버릇이 없으면
기성세대와 갈등이 요인이 된다.
창의성을 키우기 위해 버릇이 없어야 하나?”
-고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도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다.
어느 시대에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
버릇이 없어야 한다.
버릇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고,
젊은이들은 자신들만의 새로운 세계를
새롭게 열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생각을 확대해보면,
젊다는 것과 버릇이 없다는 것은 거의 동의어다.
버릇은 이미 만들어진 기준이다.
젊은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만들어졌다.
그래서 젊은이라면
이미 정해진 모든 것에 짜증을 내는 것이 당연하다.
만약 기존의 정해진 것이 편안하게 느껴져서
그 한 귀퉁이를 남보다 일찍 크게 잡으려고 안달한다면
젊은이가 아니다.
이미 정해진 모든 것들을 불편해하는 것이
젊은이의 진실한 자세다.
이 진실에서 창의력이 나온다.
철학은 인간이 신이 주인이던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주인 노릇하겠다고
신의 세계에서 이탈하면서 생겨났다.
신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품을 벗어나려는 생각을 가진 인간들이
얼마나 버릇없이 보였겠는가?
“자신을 죽이는 것이 황홀한 삶의 시작이라고 하셨다.”
-진짜 자기를 발견하려면
낡은 자신을 죽여야 한다.
자신에게 물어보자.
내가 누군가인지,
나를 구성하는 것들이 남들이 준 것이거나
사회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내가 생산한 것인지?
바람직한 것으로 자리 잡은 것들인지
아니면 내가 바라는 것들인지.
해야 하는 것들인지
하고 싶은 것들인지. 좋은 것들인지 좋아하는 것들인지.
그 정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각성해야 새로워질 수 있다.
장자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려면
우선 ‘자신을 장례 지내야’(吾喪我)한다고 했다.
‘자기 살해’이다.
외부의 것들로 채워진
낡은 자기와 결별하지 않고는
절대 새롭고 진실한 자기를 만날 수 없다.
예수나 부처가 왜 그렇게
회개와 참회를 강조하는지 알 수 있다.
자기 살해는 남들과 공유하는 가치와 이념으로 꽉 채워진
폐쇄적인 자기를 벗어나 개방적 자아로 깨어나는 것이다.
자신만의 욕망으로
자기를 새롭게 건설하는 순간이 바로 황홀경이다.
그래야 자신이 진짜 자기로 등장한다.
“독립적인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바로 고독이라고 강조했다.
현대인들은 SNS를 통해 쉼 없이 외부와 소통한다.
그런 현대인들은 독립적인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인가?”
-고독과 외로움은 구별돼야 한다.
외로움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심리이다.
나 말고 다른 것에 의존해야 만족스럽고 편안하고,
그것이 없을 때 결핍이나 불안을 느끼는 것이 외로움이다.
고독은 외부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로 존재할 때 느껴지는 독립적인 심리이다.
독립은 익숙한 것이
갑자기 낡고 불편하게 느껴지면서
거기로부터 벗어나려고 용기를 발휘해 얻은 선물이다.
독립된 주체는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단절’을 감행한다.
이 단절을 기반으로 자신이 새롭게 발견되고,
그 힘으로 새로운 연결이 가능해진다.
연결을 통해 발휘되는 창의력은
기존의 정해진 관념과 과감하게 단절된
독립적 주체에게만 일어날 수 있다.
고독한 존재는 꿈을 꾼다.
외로운 존재는
현실의 한 귀퉁이를 붙잡으려고 애를 쓴다.
고독한 존재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려 하고,
외로운 존재는 익숙한 세계에 남으려 한다.
◇소확행이 행복의 전부라면 큰 착각…예능 아닌 예술에 집착했으면
“젊은이들 가운데는
소확행 즉, 사소한 것에 확실한 행복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
-소확행은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 말이다.
하루키라는 이름이 주는 폭과 높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세계를 노래하는 작가이다.
어느 날 그가 서랍을 열어보니
앙말이 가지런히 정리돼 놓여 있고,
옷장에는 깨끗한 와이셔츠가 걸려 있었다.
그때 엄청 행복함을 느꼈다.
이런 일상의 작은 일들이 주는 행복이
세계를 노래하는 그가 누리는 행복의 전부가 아니다.
큰 행복에만 빠져 있다가
작은 행복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작은 행복을 연료로
큰 행복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작은 행복이 그의 행복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자잘한 행복이 전부인줄 알면
하루키에게 완전히 속은 것이다.
하루키 정도 되니까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소확행이 전부인 젊은이는
자기의 포부나 꿈이 없이
자본주의의 부스러기나 먹으며 얻는
심리적 만족감이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다.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삶을 살려면
평소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나?”
-핵심은 용기를 내어 자신을 향해 걷는 것이다.
인생이 매우 짧다는 것을 절실히 인식 한다.
그러면 묻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어떻게 살다가고 싶은가.
이런 질문이 없으면 더 이상의 삶은 없다.
묻는 행위를 하지 않는 인간은 쪼그라든다.
헤르만 헤세는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 이상이다’고 말한다.
자신 이상을 욕망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자신 이상을 꿈꾸지 않으면
우주에서 어떤 선물도 주지 않는다.
“요즘은 재미있는 예능 프로그램의 홍수이다.
예능 프로그램에 빠진 젊은이들을 어떻게 보나?”
-젊은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른들도 그런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예능에만 ‘빠진다’는 것이다.
예능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은 생각하며 즐겨야 쾌락이 온다.
반면 예능은 생각하지 않으며 즐겨야 쾌락이 온다.
깊은 생각을 하며 예능을 보면 재미가 없다.
예능을 즐기는 이유는
생각하는 수고를 하기 싫어서다.
생각하는 데는 힘이 든다.
누군가 예능에만 빠진다면,
그는 분명히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생각하는 수고를 많이 하다보면,
쉬고 싶을 때가 있다.
예능은 그럴 때 즐겨도 충분하다.
큰 폭과 높은 높이가 없이
소확행에만 빠지면
사람이 작아져버리듯이,
예술 없이 예능에만 빠져도
사람은 쉽게 작아진다.
“나이들면서도 꼰대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문명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문명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흐른다.
자신이 가진 문명적 식견이나 태도를 고집하면
시대에 뒤처지는 꼰대가 된다.
지적 게으름에 빠지면
사고가 굳어가고, 결국 깡통이 된다.
힘들다고 흐름을 따라가는 것을 포기하면
지금 이상(以上)이 없다.
부단한 학습과 적응력이 요구된다.
결국 부단한 건너가기밖에 없다.
“평소 책을 읽으라고 강조하시는데,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책을 읽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수련이다.
인간은 탐욕스러울 정도로 지식욕이 있어야 한다.
일단 많이 알아야 한다.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려고
만든 장치 가운데 가장 효율적인 장치가 지식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 가운데
지식 이상의 도구는 없다.
지식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어야 내공이 쌓인다.
내공 없는 지식은 답답하고,
지식 없는 내공은 경박하다.
지식과 내공을 함께 증가시킬 수 있는 것으로는
독서가 최고다.
◇운동하고 남는 시간에 공부하라…독서 통해 지식 쌓아야 세계로 항해
“육체적인 운동은 철학적 삶에 어떤 의미가 있나? 평소에 운동하라고 강조한 이유는?”
-운동은 힘들다.
하지만 운동을 한다.
왜냐하면 운동을 하면
더 나아진다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나 힘들다고 하지 않으면
삶이 1인치도 성장하지 못한다.
만약 한정된 시간에 공부를 할 것인가,
아니면 운동을 할 것인가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운동을 하라고 권한다.
운동이 자기 통제력을 잘 키워준다.
지적 습관이 어느 정도 된 사람이라면
공부하고 남는 시간에 운동하는 것보다,
운동하고 남는 시간에 공부하는 것이
삶의 완성도를 높인다.
공부는 제3자의 생각이나 지식과 만나는 일로 시작한다면,
운동은 오로지 자기를 만나는 일이다.
운동은 지식을 증가시켜주지는 않지만,
지력을 키워준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다루고 생각하는 능력인 지력이다.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건국이라는 어젠다를 수행했고,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국가적 어젠다를
온 국민이 함께 진행했다.
이제 어떤 어젠다를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고 보는가?
통치의 시선을 어느 높이로 올려야 하는가?”
-이제는
그동안 따라하기로 살아온 삶을 넘어서서
독립적이고 선도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어젠다를 가져야 할 때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삶과 세상을
아주 강하게 욕망해야 한다.
욕망하지도 않으면 시작도 못한다.
지난 20년간 대한민국은 이미 있는 것을 재평가하는데 머물러 있었고,
그 이상을 꿈꾸지 않았다.
미래를 꿈꾸는 역량을 배양하지 못했다.
미래를 꿈꾸려면
질문하는 내면을 가져야 한다.
대답은 멈추게 하고,
질문은 건너가게 한다.
우리는 건너가는 힘을
아직 키우지 못했다.
생각을 하는 힘이 약한 것이다.
심리적으로 이미 있는 것을 뛰어 넘어,
다음을 꿈꾸고 욕망하는 준비를 하지 않으면
선진국이나 선도국도 공염불이 될 수 있다. 생
각하는 능력을 서둘러 길러야 한다.
“교수님은 중국 철학자 장자(莊子) 전문가이다.
장자가 살던 시대는 이미 2300년 전이라
지금과 시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그 시대를 살던 장자의 생각을 배우고 따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나?”
-장자의 생각을
그대로 따라서 살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장자의 콘텐츠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유의 높이를 배워서
그 높이를 자신의 삶으로 응용하여
가장 멋지게 살려고 도전할 뿐이다.
장자는 진짜 자기를 발견하여
그것을 우주의 넓이로 키우고
우주의 높이로 승화하려 했다.
이런 포부와 크기가 매력적이다.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원칙이나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내용이 분명한 어떤 선명한 원칙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다만 나만의 비밀스러운 각성이 있다.
내가 금방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 각성을 철저히 했다.
그래서 어떻게 사는 것이
진짜 나를 지키고
진짜 나를 살리는 길인지에 관심이 많다.
진짜 내가 되는데 도움이 안 되는 것은
과감하게 버렸고,
도움이 되는 것은 과감하게 선택한다.
“젊은이들에게 인생을 사는데 도움이 되는 조언 한다면?”
-인간은 건너가는 존재다.
탐험하고 도전하는 존재란 뜻이다.
인생 짧다.
되도록 황당무계하게 거침없이 살아볼 필요가 있다.
무슨 뜻인지 설명하지 않겠다.
화두로 남겨주고 싶다. 황당무계…
'철학.에세이.한시.기타자료 > 유익한 글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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