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트롯'에서 함께 노래한 김다현(왼쪽)과 김태연./TV조선
아홉 살 김태연과 열한 살 김다현이 맞붙을 거라고 생각했고 역시 그렇게 됐으며 그 무대가 가장 흥미진진했다. 많은 독자들이 왜 그런 식으로 몰아가느냐고 묻는데, 적어도 나는 그렇게 몰아가지 않았다. ‘미스트롯’ 제작진에게 물어보니 그렇게 연출한 게 아니고 김태연이 김다현을 지목했다고 했다.
이 노래자랑에서 1, 2등 순위가 바뀐 것도 아니고 누가 누구를 지목했는지가 관심사로 떠오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나라에서 한 자리씩 하고 있는 자들이 벌이는 싸구려 시궁창 서커스를 보면서, 전유진이 인기투표 1위였는데 왜 준결에도 못 오른 것이냐고 물을 수밖에 없다. 공(公)이 죽었을 때 사(私)의 정의라도 살아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외치는 것이다.
그런 궁금증이 아직 소멸되지 않았는데 두 국악 신동이 맞붙었다. 철벽의 공(公)에 아무리 외쳐봐야 쇳소리만 나는데, 말랑한 사(私)의 영역에 종이비행기 날려보니 답장이 온다. 우리는 공에 아무런 기대를 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자신이 응원하는 사람이 탈락한 걸 두고 열불 내는 사람들은 체온 36.9도쯤이다. 행차가 불가능할 만큼 고열은 아니다.
참가자들 중 누구보다 김태연·김다현 이 두 아이의 대기실 표정이 리얼하다. 어른들 틈에 끼어 준결까지 올라오기까지 수많은 밤낮을 고생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들의 얼굴은 ‘아니면 말고’다. 이 아이들은 진짜 프로다. 얘들은 세계 권투 챔피언인 마이크 타이슨처럼 속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누구나 계획을 갖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나는 이 아이들이 귀엽고 예쁘면서 동시에 무섭다. 얘들은 지금 트로트 무대에서 알짱거릴 재목이 아니다. 이 두 아이가 상장된다면 나는 연리 1% 통장의 초라한 잔고라도 다 쏟아붓고 싶다.
두 아이가 부른 장윤정 노래 ‘어부바’는 하도 시중에 흘러나와서 모를 수 없는 노래였다. 그런데 이날 두 아이 무대를 보면서 처음으로 좋은 노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태연의 탁성과 김다현의 스트레이트 창법이 어우러져, 그 유치한 가사마저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미스트롯에서 심사위원들이 말하고 참가자들은 듣지만, 우리는 어디서 배움을 얻는가. 가수의 목청에서 하나라도 배운다.
10명의 심사위원 중 7명이 김태연에게 점수를 줬다. 210대 90이란 점수는 두 사람의 접전을 생각하면 놀랍게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점수로 가늠할 수 없다는 방증이다. 만약 조용필과 조동진을 두고 심사를 한다면 150대 150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승철과 김건모를 두고 채점을 하면 210대 90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장르와 창법과 악보에 대한 태도가 다른 사람은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그러나 지향하는 바가 비슷한 가수 두 명을 두고 평가를 하면 1점 더주고 안준 심사위원들 때문에 의외의 점수가 나온다.
은가은이 태진아의 ‘옥경이’를 불렀다. 조영수가 스윙재즈바 분위기로 무대 연출을 했다고 말했는데, 사실 트로트의 큰 두 줄기가 재즈와 블루스다. 엔카가 유행하던 시대 일본에 서양의 트로트가 들어와 ‘도롯또'가 됐고, 이 음악이 한국 대중음악에 영향을 미치다가 6.25 전쟁 이후 미국 음악의 영향을 받아 트로트로 자리잡았다. 4분의 4박자 ‘옥경이’도 1·3박이 아니라 2·4박에 강세가 있는 노래이므로, 스윙과 트로트는 친척 관계의 음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은가은처럼 성량이 풍부하고 표현력 강한 가수가 라이브 밴드를 업었으니 좀더 재즈풍이 강하게 편곡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한다.
미국인 마리아는 결국 탈락했다. 시원섭섭하다. 마리아를 최종 결선에 올린다고 해서 폭동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마리아가 이날 보여준, 트로트를 부르면서 한국인의 표정을 짓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최종 7인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보는 프로그램이다보니 시청 소감을 써 올리면 댓글은 물론 이메일도 쏟아진다. 그동안 이 프로그램을 본 횟수가 1억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데 내게 오는 반응은 왜 이렇게 편파적이냐, 왜 누구는 안 써주냐, 공정하지 않다, 같은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다들 화를 내면서 열심히 보고 있다.
미스트롯 심사위원석에 앉아있는 사람 중 이른바 고음을 제일 잘 내는 사람은 신지다. 그러나 그녀는 거들기만 할 뿐 절대 나서지 않는다. 고음은 64색 크레용 세트 중 한 가지 색에 불과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은 조성진을 발탁하는 폴란드의 쇼팽 콩쿠르가 아니다. 우리는 좀 느긋해질 필요가 있다. 진실이 실종된 시대에 우리는 예능 프로그램에 대고 “왜 진실하지 못하느냐”고 화를 낸다. 그런 세월이 슬프고 부끄럽다. 내가 아는 한 ‘미스트롯’은 예능의 진실에 가장 가까운 프로그램이다. 누가 아무리 뭐라 해도 이 프로그램의 결승까지 볼 생각이다.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다. 그래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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