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의 한계 양자로 해결한다
리처드 파인만.
1959년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 1918~1988)은 캘리포니아공대(칼텍)에서 ‘바닥에는 아직도 더 넣을 여지가 많이 있다’라는 강연을 했다. 이 강연은 나노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수 cm 크기의 진공관 스위치는 수 nm(나노미터, 10억 분의 1m) 크기의 트랜지스터로 대체되면서 메가바이트(MB), 기가바이트(GB), 테라바이트(TB)의 시대로 발전해 왔다.
그런데 이런 소형화 또는 반도체 소자의 집적화가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스위치가 원자 크기에 가까워지면 미시세계에서 통하던 여러 가지 양자역학적 효과가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0과 1이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아 정보가 불분명해지는 상황이 왔다.
1981년 파인만은 학생시절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던 로스알라모스 국립연구소 40주년을 기념해 강연을 했다. ‘양자역학 법칙을 따르는 아주 작은 컴퓨터들’이라는 이 강연은 양자컴퓨터의 시대를 열었다.
원자나 전자 같은 양자역학법칙을 따르는 시스템은 개수가 늘어나면 비트를 사용하는 디지털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전자 한 개를 스핀만 따져서 ‘업(↑또는 1)’과 ‘다운(↓ 또는 0)’으로 나타낸다고 생각해 보자. 전자 두 개는 00, 01, 10, 11의 네 가지 상태만 있지만, 전자의 개수가 늘어남에 따라 계산해야 할 상태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디지털 컴퓨터로는 감당을 할 수가 없다. 전자가 10개이면 210, 즉 1024개의 상태, 20개이면 220, 즉 104만 8576개의 상태를 계산해야 한다.
파인만은 양자시스템은 디지털컴퓨터가 아니라 ‘양자역학을 따르는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디지털컴퓨터는 컴퓨터 자원을 늘리면 계산공간이 비례적으로 늘어난다(이를 ‘선형병렬성’이라고 한다). 하지만 양자컴퓨터는 계산공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또는 지수함수적으로 늘어난다(이를 ‘양자병렬성’이라고 한다). 계산공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은 양자의 특성을 이용해서다. 양자컴퓨터가 쓰는 정보의 단위는 비트가 아니라 ‘양자비트(quantum bit)’ 또는 ‘큐비트(qubit)’다. 비트는 0 또는 1을 나타내지만, 큐비트는 0인지 1인지 결정할 수 없는 상태, 즉 양자역학적으로 ‘중첩’된 상태를 나타낸다. 그런데 이 중첩 상태를 이용하면 더 크고 빠른 계산을 할 수 있다. 비트는 원자 크기에 가까워지면서 0과 1이 불분명해져 한계에 도달하지만 큐비트는 반대인 것이다.
창과 방패의 대결, 양자컴퓨터와 양자암호
새로운 컴퓨터의 능력을 테스트하는 문제로 ‘큰 수의 소인수분해’가 있다. 디지털컴퓨터로는 이 문제를 풀 때 숫자가 커질수록 계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자릿수에 따라 계산시간이 거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암호통신을 하는 데에 이용된다. 아무리 성능 좋은 컴퓨터를 동원하더라도 소인수분해로 만든 암호를 쉽게 풀 수 없기 때문이다.
1989년 만든 세계 최초의 양자암호장치.
이것이 요즘 많이 쓰는 ‘공개키 암호방식’이다. 보내는 사람은 공개된 문제를 이용해 자신의 메시지를 암호문으로 만들어 보내고, 받는 사람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답으로 암호문을 메시지로 복원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어려운 문제는 누구나 다 가질 수 있는 공개된 자물쇠다. 물건을 꺼내려면 열쇠를 만들어야 되는데, 자물쇠 설계도가 있어도 열쇠를 만드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현재 디지털컴퓨터로는 문을 열 수 없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에 벨연구소의 응용수학자 피터 쇼어(Peter Shor, 1959~)가 양자컴퓨터로 소인수분해를 쉽게할 수 있는 양자알고리즘을 개발했다. 만약 이런 알고리즘을 수행할 수 있는 양자컴퓨터가 실제로 만들어진다면 소인수분해 방식의 공개키 암호문은 모조리 뚫리게 된다.
지난 8월 말 부산 부경대에서 열린 아시아양자정보과학 학술대회에 참석한
질 브라사드 캐나다 몬트리올대 교수(왼쪽)와 찰스 베넷 IBM 박사(오른쪽).
소인수분해 암호가 방패라면 양자컴퓨터는 새로운 창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같은 양자원리를 이용한 강한 방패가 나타 났다.
어떤 방식으로도 도청할 수 없는 양자암호다. 양자암호는 심지어 양자컴퓨터보다 먼저 실용화될 예정이다.
찰스 베넷 IBM 박사와 질 브라사드 캐나다 몬트리올대 교수가
1984년 발명한 이 암호는 통신당사자들이 양자역학을 이용해 일회용 난수표를 나누어 가지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어 1989년에는 최초로 양자암호통신 실험에 성공했다.
양자암호는 3D 영화를 볼 때 쓰는 특수안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극장에서 제공하는 편광안경의 왼쪽은 수직편광(↕)만, 오른쪽은 수평편광(↔)만 통과시킨다.
따라서 편광안경을 쓰고 영화를 보면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이 보는 화면이 달라서 3차원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동규가 제시카에게 비트 0이나 1을 보내기 위해
각각 대각편광(↗↙)과 역대각편광(↘↖)을 쓴다고 가정해 보자(수평편광과 수직편광을 쓸 수도 있다).
우리 한글 자음 모양을 이용하여 수평/수직편광 방식을 ‘ㄱ방식’, 대각/역대각 방식을 ‘ㅅ방식’이라고 하자.
양자암호통신에서는 비트 하나를 표현하기 위해 광자 하나, 즉 단일광자를 사용한다.
ㄱ방식으로 보낸 단일광자는 ㄱ방식으로 측정하면 보낸 대로 비트가 정확하게 전달된다.
하지만 ㅅ방식으로 측정하면 비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다.
편광 방식과 양자 암호 방식. 수직/수평편광과 대각/역대각편광을 읽을 수 있는 필터를
각각 ‘ㄱ방식’과 ‘ㅅ방식’이라고 한다.
만약 동규가 ㄱ 또는 ㅅ방식을 마구 섞어서 비트를 보내고(a), 제시카는 두 방식을 마구 섞어서 측정한다(b).
그러고 나서 갑과 을은 어떤 비트를 보내고 어떤 비트로 측정됐는지를 밝히지 않은 채,
각 비트(광자)에 대해서 송수신 방식이 ㄱ인지 ㅅ인지만 밝힌다(c).
만약 두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보내고 받은 비트는 100% 같을 것이고,
다른 방식으로 주고 받은 비트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둘 중 하나가 선정되기 때문에 50%의 확률로 맞거나 다르다).
이제 두 사람은 같은 방식으로 주고 받은 비트만 골라서 난수표를 만든다(d).
이렇게 만들어진 난수표는 세상에서 두 사람만이 갖고 있다.
다른 사람은 해독할 수 없는 맞춤형 암호가 생긴 셈이다.
양자 암호와 도청. 양자암호를 만들고 전달하는 과정이다.
동규가 제시카에게 암호를 보내기 위해 편광필터를 무작위로 골라 비트를 보낸다(a).
제시카는 동규가 어떤 필터를 쓰는지 모르는 채 ㄱ 또는 ㅅ방식으로 측정해 기록한다(b).
서로의 송수신 방식을 비교한 후, 도청 여부 확인을 위해 일부 비트를 비교한다(c).
같은 필터를 썼을 경우 비트가 정확하다.
정확한 비트만 골라 난수표를 만들면 다른 사람은 해독할 수 없는 난수표가 된다
(d). 도청하면 잘못 읽는 경우가 50%여서 쉽게 찾아낼 수 있다(e).
도청도 불가능하다!
암호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중간에서 정보를 가로채는 행위, 즉 도청이다.
양자암호도 혹시 중간에 도청자가 ㄱ 또는 ㅅ방식으로 몰래 측정해 왜곡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양자상태는 측정하기 전과 측정한 후에 달라질 수 있다.
수평편광(ㄱ방식으로 측정해야 옳게 측정하는)인 단일광자를 ㅅ방식으로 측정하면
대각 또는 역대각편광으로 잘못 측정되며 확률은 똑같이 50%씩이다.
수평, 수직편광 수를 일부러 딱 맞추지 않는 한 우연히 나타나기 힘든 수치다(e).
또 이렇게 한 번 대각편광으로 측정되면 정보가 완전히 바뀌어 그 전에 어떤 편광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동규와 제시카는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중간에 도청이 있었는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양자정보학과 암호통신은 ‘병 주고 약 주는’ 관계에 있다.
양자컴퓨터가 나오면 현재의 공개키 암호방식은 무너지므로 ‘병 주는’ 관계이고,
양자암호로 도청이 불가능한 암호통신방식을 제공하므로 ‘약 주는’ 관계다.
미국의 국가안보국(NSA)을 비롯해 세계각국의 정보보안기관들은 암호를 풀기 위해 양자컴퓨터의 개발에,
절대안전한 암호통신을 하기 위해 양자암호의 개발에 주목하고 있다.
디지털 정보에서 양자정보로의 전환은, 실수의 수학에서 복소수의 수학으로 전환하는 것 같은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양자역학이 자연의 궁극적 원리인 만큼 궁극적인 정보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양자암호 연구
양자암호 실험연구로는 필자(고등과학원)와
부산 경성대 노태곤 교수(당시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연구팀이
2005년 25km 양자암호통신 실험에 성공한 것이 대표적이다.
최근 국내 통신회사 한 곳이 양자암호 개발에 착수했다.
홍정기 포스텍 교수는 1987년에 단일광자의 양자얽힘에 관한 실험을 세계 최초로 했고,
황원영 전남대 교수는 양자암호 전송거리를 획기적으로 늘리는 미끼(decoy) 양자암호방식을 연구했다.
노태곤 교수는 광자가 실제로 가지 않고도 간 것처럼 보이는
‘반(半)사실적 양자암호’ 방식을,
필자는 큐비트가 아닌 ‘큐디트’ 양자암호방식을 발명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자암호 - 난공불락 양자암호에 도전하다 (물리산책, 김재완, 과학동아)
50년전 아일랜드 출신의 물리학자 존 스튜어트 벨은 “Physics, Physique, Fizika”라는 한 이름없는 논문지에 짧고 특이한 논문 한 편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당시 연구년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있었고, “피지컬 리뷰(Physical Review)”라는 저명한 논문지에 실을 돈을 동료에게 부탁하기는 너무 수줍었던 것입니다. 그가 투고한 논문지는 몇 년 뒤 사라졌지만 그의 논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그 논문은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벨의 논문은 양자얽힘이라는, 우리의 상식과 크게 배치되는 양자이론 중에서도 가장 기이한 특징에 관한 것입니다. 얽힘(entanglement)이란 과거에 서로 상호작용했던 전자와 같은 작은 입자들이 서로 멀리 떨어진 뒤에도 어떤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한 입자의 위치나 운동량, 스핀과 같은 특성을 측정했을 때 그들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다른 한 입자의 해당 특성이 “즉시” 바뀌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 변화가 “즉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두 입자의 거리가 은하만큼 멀어진다고 하더라도 한 입자를 측정하는 순간 다른 입자의 변화는 빛보다 빠르게 일어납니다.
이 얽힘이라는 현상은 물리학의 다른 이론과는 맞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이론이 이런 비상식적인 결론을 이야기한다는 데 대해 불만을 토로한곤 했습니다. 그는 1948년 한 동료에게 “유령 같은 원격작용(spooky actions at a distance)”이라고 이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벨은 자신의 논문에서 양자이론에는 얽힘이 있어야만 함을, 즉 이 괴상한 현상이 양자이론의 필연적인 결과임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벨은 자연이 실제로 그렇게 행동함을 실험으로 보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양자이론의 수식에 따르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보였을 뿐입니다. 따라서 질문은 남아있었습니다. 정말 양자얽힘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일까요?
70년대 초반, 소수의 대담한 물리학자들은 이런 “철학적”연구는 괴짜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연구했고, 그 답이 긍정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첫 번째 연구자는 로렌스 버클리 국립연구소의 젊은 포닥이었던 존 클라우저였습니다. 그는 실험실의 남는 부품과 종이테이프만으로 양자얽힘을 측정할 수 있는 장치를 고안해냈습니다. 대학원생 스튜어트 프리드만과 함께 그는 수천 쌍의 광자를 양쪽 반대 방향으로 쏘았습니다. 그리고 그 양쪽 끝에서 광자의 특성인 편광을 측정했습니다.
벨은 양쪽의 편광을 어떻게 측정하느냐에 따라 두 광자가 서로 독립적으로 행동한다면 나올 수 없는 특별한 상관관계를 가짐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클라우저와 프리드만은 벨이 예측한 상관관계가 실험으로 나타남을 확인했습니다.
다른 실험들이 이어졌습니다. 프랑스의 물리학자 알랭 아스펙트는 그 변화가 ‘즉시’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였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안톤 자일링거는 셋 혹은 그 이상의 입자들이 얾힐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공에도 불구하고 밝혀야 할 일들은 아직 남아있었습니다. 위의 모든 실험들은 양자얽힘이 가능함을 보였지만, 양자얽힘이 아닌 다른 설명, 즉 아인슈타인의 직관에 보다 일치하는 설명으로도 그 실험결과를 해석가능한 여지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스펙트의 실험에서는 측정장치 자체가 한 입자의 정보를 다른 입자에 전달했고 따라서 두 입자 사이에 상관관계가 발생했다는 설명이 가능했습니다.
가장 까다로운 문제는 바로 “실험장치의 독립성”입니다. 나와 자일링거, 앨런 H. 거스, 앤드류 S. 프리드먼, 그리고 제이슨 갈리치오는 피지컬 리뷰 레터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험을 제안하는 논문을 실었습니다.
어떤 얽힘실험에서도 연구자는 자신이 어떤 측정기준을 선택할지를 – 예를 들어 입자의 스핀을 어느 방향으로 측정할지와 같은 – 결정해야 합니다. “실험장치의 독립성”문제란 곧, 연구자는 자신의 측정기준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의 선택에 있어 자유를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과거의 어떤 원인에 의해 연구자의 측정기준이 정해져 있거나, 또는 한 측정기준이 다른 기준보다 더 높은 확률을 가지게 되고 이것이 두 입자 사이의 상관관계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미묘한 상관관계를 가정함으로써 우리는 양자이론을 받아들이지 않고도 지금까지의 실험결과를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이 설명이 맞다면 양자얽힘은 그저 환상일 뿐인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물론 우리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그 대신 우리는 다른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우리는 얽힘실험에서 연구자가 측정기준을 선택 하지 않고, 우주에서 가장 오래된 빛이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주 먼 퀘이서에서 오는 빛이 홀수 마이크로초에 오는지 짝수 마이크로초에 오는지를 보았지요.) 이 빛은 수십억년 전에 출발했고, 또 우리가 측정한 그 순간이 되어서야 지구에 도착한 빛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적어도 측정기준에 어떤 인과관계나 편향이 있다면, 그것이 적어도 140억년 전 빅뱅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할 것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실험의 결과가 우리가 예상하는 것처럼 양자이론과 일치한다면, 우리는 양자이론이 아닌 다른 대안들에 대해 더 엄밀한 잣대를 들이댈 수 있게 됩니다. 만약 결과가 다르다면, 우리는 새로운 물리학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되겠지요.
어떤 경우이든, 이 실험은 벨의 논문 50주년을 기념하기에 적절한 흥미로운 실험이 될겁니다.
(뉴욕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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