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아인시타인)
‘宇宙는 외부로부터 宇宙가 무엇이어야만 한다는 아무런 入力도 받지 않습니다. 그대신 宇宙의 萬物은 科學의 法則과 “宇宙 안에서” 구르는 주사위에 의해 決定됩니다.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것이 저와 많은 科學者들이 믿고 있는 것입니다.(스티븐 호킹)’
‘우리 宇宙가 100억광년이 넘는 크기와 100億年이 넘는 나이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은 훨씬 더 크고 오래된 ‘全體 宇宙’속의 작은 하나에 불과하다’ (서스킨드)
‘나는 지난밤 冥想에 잠겨 자연의 深淵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속된 사람들은 敬拜할 줄 모르는 이 無限한 天體를 생각하며 그 廣大한 運行을 나는 崇拜하였다.’ (볼테르)
너무나 가까이 있으면서 너무나 巨大한 것,
수100億年을 빛의 速度로 달려도 달려도 닿을 수 없는, 실제로는 빛의 速度로 擴張해 간다는 宇宙.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先入觀은 거대한 宇宙에 壓倒당하여 숫제 宇宙이야기는 우리의 日常 觀心에서 제껴 두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生命體를 이루는 것은 物質, 그 物質은 生命體의 本源要素이다. 物質이란 무엇인가? 物質의 本質, 物質의 근원은 바로 宇宙의 本質, 宇宙의 根源이다. 生命體는 어디서 왔는가? 어떻게 왔는가? 生命體는 어떻게 維持되는가? 生命體가 살아가는 條件은 무엇인가? 많은 疑問이 있기 마련이지만, 生命體를 이루는 本源要素의 하나가 物質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東西古今에 生命現象을 다스리고자 하는 養生의 方法, 養生의 原理를 추구하는 人間의 노력과 人間의 技術은 끊임없이 發展되어 왔다. 하지만, 養生은 生命現像의 올바른 理解의 바탕 위에서 구현되어야 하며, 生命現象은 宇宙의 本質의 相互作用을 제대로 理解하였을 경우 그 原理를 제대로 把握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宇宙의 本質에 대한 통찰력이 生命現象을 제대로 理解하고 接近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며, 生命現象의 理解를 바탕으로 하여야만 우리는 제대로 된, 生命原理를 構成할 수 있을 것이다.
宇宙의 本質은 아주 特別하고 稀貴한 것이 아니다..
[가장 普遍的인 것이 가장 本質的인 것이다] 라는 人間의 思考가 결론의 白眉처럼,
宇宙의 本質은 眞實로 가장 普遍的이어야 한다. 모든 것의 根源이 어느 特定한 것만을 代辯해서야 되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宇宙가 아니라, 극히 一部分, 宇宙의 一部分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人間事는 人間事에서 가장 普遍的인 現像은 가장 本質的인 것, 가장 宇宙의 本質的인 要素에 지배받고 있다 하겠다..
과연 그런가?
東西古今에, 神과 宇宙와 나 ! 그리고 生命은.....후후, 흥미 있는 思惟의 對象이 되어 왔다
누군가가 한탄해 가로되,
'세상이 있으므로 해서 내가 있는가 내가 있으므로 해서 세상이 있는가? 내가 없어도 이 세상은 繼續 있게 될 것이다라는 普遍的 事實은 이 세상이 있음으로 해서 내가 있게 됨을 自明하게 해준다. 그처럼 너무나 自明한 내용을 굳이 主觀的인 感想을 加味해 存在論的 想念에 젖는 것은 한 個人을 부질없이 만들고 價値가 없게 만든다. 생각할 수 있는 自我의 現實은 거의 主觀에 가까울 뿐이어서 存在에 대한 恨歎은 時間이 흐름으로써 잊혀진다.’ 하였다.
‘神이 存在함으로써 내가 存在하는가? 내가 存在함으로써 神이 存在하는가?
우리가 세상의 땅을 밟고 살고 있다는 事實처럼, 神의 存在도 지극히 普遍的 存在이어야, 神이 있슴으로써 내가 存在한다는 것을 自明하게 해줄 것이다. 특정한 信仰은, 特定한 信仰的 神은 普遍的 人類의 思想體系의 産物이 아닐 것이다. 땅을 밟고 살고 있다는 것이 누구나에게나 普遍的인 事實인 것처럼, 特定한 信仰이 그 정도의 普遍性을 確保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는 것은 조금만 주위를 둘러봐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神이 存在함으로써 내가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存在함으로써 神이 存在하게 된다
만약에 지극히 普遍的인 神이라면, 내가 부정한데도, 神의 存在가 부정되겠는가? 내가 땅을, 宇宙를 부정해도 땅과 宇宙는 나의 思惟와는 完全히 自由롭지 않겠는가?
그러나 비록, 내가 있슴으로써 비로소 神이 存在한다 하여도,, 모든 人間의 그러한 神觀을 無理없이 受用할 수 있는 神이 存在한다면, 그 정도 神이라면, 마땅히 그것은 大宇宙, 大自然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神이 存在함으로써 내가 存在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오직 人間들이 特定한 人間의 信仰心이 神이 있슴으로써 내가 있도록 하여, 그렇게 저들만의 神으로, 지극히 普遍的이어야 할 神을 矮小하게 한다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神이 人間을 創造하는 것이 아니라, 人間들이 矮小한 神을 創造하는 것과 다름아니게 하는 것이 아닐까?.
或者는,
‘宇宙는 외부로부터 宇宙가 무엇이어야만 한다는 아무런 入力도 받지 않습니다. 그대신 宇宙의 萬物은 科學의 法則과 “宇宙 안에서” 구르는 주사위에 의해 決定됩니다.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것이 저와 많은 科學者들이 믿고 있는 것입니다.(스티븐 호킹)’
‘우리 宇宙가 100억광년이 넘는 크기와 100億年이 넘는 나이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은 훨씬 더 크고 오래된 ‘全體 宇宙’속의 작은 하나에 불과하다’ (서스킨드)
‘나는 지난밤 冥想에 잠겨 자연의 深淵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속된 사람들은 敬拜할 줄 모르는 이 無限한 天體를 생각하며 그 廣大한 運行을 나는 崇拜하였다.’ (볼테르)
너무나 가까이 있으면서 너무나 巨大한 것,
수100億年을 빛의 速度로 달려도 달려도 닿을 수 없는, 실제로는 빛의 速度로 擴張해 간다는 宇宙.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先入觀은 거대한 宇宙에 壓倒당하여 숫제 宇宙이야기는 우리의 日常 觀心에서 제껴 두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生命體를 이루는 것은 物質, 그 物質은 生命體의 本源要素이다. 物質이란 무엇인가? 物質의 本質, 物質의 근원은 바로 宇宙의 本質, 宇宙의 根源이다. 生命體는 어디서 왔는가? 어떻게 왔는가? 生命體는 어떻게 維持되는가? 生命體가 살아가는 條件은 무엇인가? 많은 疑問이 있기 마련이지만, 生命體를 이루는 本源要素의 하나가 物質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東西古今에 生命現象을 다스리고자 하는 養生의 方法, 養生의 原理를 추구하는 人間의 노력과 人間의 技術은 끊임없이 發展되어 왔다. 하지만, 養生은 生命現像의 올바른 理解의 바탕 위에서 구현되어야 하며, 生命現象은 宇宙의 本質의 相互作用을 제대로 理解하였을 경우 그 原理를 제대로 把握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宇宙의 本質에 대한 통찰력이 生命現象을 제대로 理解하고 接近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며, 生命現象의 理解를 바탕으로 하여야만 우리는 제대로 된, 生命原理를 構成할 수 있을 것이다.
宇宙의 本質은 아주 特別하고 稀貴한 것이 아니다..
[가장 普遍的인 것이 가장 本質的인 것이다] 라는 人間의 思考가 결론의 白眉처럼,
宇宙의 本質은 眞實로 가장 普遍的이어야 한다. 모든 것의 根源이 어느 特定한 것만을 代辯해서야 되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宇宙가 아니라, 극히 一部分, 宇宙의 一部分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人間事는 人間事에서 가장 普遍的인 現像은 가장 本質的인 것, 가장 宇宙의 本質的인 要素에 지배받고 있다 하겠다..
과연 그런가?
東西古今에, 神과 宇宙와 나 ! 그리고 生命은.....후후, 흥미 있는 思惟의 對象이 되어 왔다
누군가가 한탄해 가로되,
'세상이 있으므로 해서 내가 있는가 내가 있으므로 해서 세상이 있는가? 내가 없어도 이 세상은 繼續 있게 될 것이다라는 普遍的 事實은 이 세상이 있음으로 해서 내가 있게 됨을 自明하게 해준다. 그처럼 너무나 自明한 내용을 굳이 主觀的인 感想을 加味해 存在論的 想念에 젖는 것은 한 個人을 부질없이 만들고 價値가 없게 만든다. 생각할 수 있는 自我의 現實은 거의 主觀에 가까울 뿐이어서 存在에 대한 恨歎은 時間이 흐름으로써 잊혀진다.’ 하였다.
‘神이 存在함으로써 내가 存在하는가? 내가 存在함으로써 神이 存在하는가?
우리가 세상의 땅을 밟고 살고 있다는 事實처럼, 神의 存在도 지극히 普遍的 存在이어야, 神이 있슴으로써 내가 存在한다는 것을 自明하게 해줄 것이다. 특정한 信仰은, 特定한 信仰的 神은 普遍的 人類의 思想體系의 産物이 아닐 것이다. 땅을 밟고 살고 있다는 것이 누구나에게나 普遍的인 事實인 것처럼, 特定한 信仰이 그 정도의 普遍性을 確保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는 것은 조금만 주위를 둘러봐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神이 存在함으로써 내가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存在함으로써 神이 存在하게 된다
만약에 지극히 普遍的인 神이라면, 내가 부정한데도, 神의 存在가 부정되겠는가? 내가 땅을, 宇宙를 부정해도 땅과 宇宙는 나의 思惟와는 完全히 自由롭지 않겠는가?
그러나 비록, 내가 있슴으로써 비로소 神이 存在한다 하여도,, 모든 人間의 그러한 神觀을 無理없이 受用할 수 있는 神이 存在한다면, 그 정도 神이라면, 마땅히 그것은 大宇宙, 大自然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神이 存在함으로써 내가 存在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오직 人間들이 特定한 人間의 信仰心이 神이 있슴으로써 내가 있도록 하여, 그렇게 저들만의 神으로, 지극히 普遍的이어야 할 神을 矮小하게 한다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神이 人間을 創造하는 것이 아니라, 人間들이 矮小한 神을 創造하는 것과 다름아니게 하는 것이 아닐까?.
或者는,
“대낮부터, 술도 안 마셨는 데, 完全히 돌았군. **야, 뭐, ‘내가 存在함으로 해서 神이 存在한다’고라고라…. 이런 엄청난 망발을, 귀를 씻어야 겠다. 그 소릴 안들은 걸로 하겠다. 우와, 天地를 創造하신 분 앞에서 할 소리 안 할 소리 따로 있제? 마음속 깊이 迎接은 못할 망정……”
이런 분도 있을 터.
”或者야, 걱정말어라, 그대가 믿는 神은 그렇게 矮小한 神이 아니라고. 나가 비록 그런 소릴 했고, 그대가 지나가다 그런 소릴 흘러 들었다 해서, 지나가다 힐끔 쳐다보았다고, 시비걸고 사람패는 그런 組暴的 神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包容하는 너그럽고도 너그러운, 그야말로 天地를 創造한 神이기 때문에, 그 정도에 一喜一悲 할 神이 아닐 것이야. 그대가 그런 생각을 한다면, 偉大한 神을 정작 그대 水準으로 矮小하게 맹그는 것일 게다.”
宇宙는, 너무나 가까이 있으면서 너무나 巨大한 것.
그러므로, 우선, 무턱대고 思惟를 계속할 수 없으니 몇 가지 話頭부터 整理해보자.
-빛은 무엇인가?
-빛의 速度는 常數값(약 29만9천 km/sec), 왜 그 常數값인가? 50만, 100마도 아니고?
-萬有引力이란 무엇인가?
-萬有引力은 왜 常數이고, 왜 그 값을 가지는 가?
-物質은 무엇인가?
-物質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어디로 가는가? (消滅하면).
E는 mc제곱?, 에너지로 돌아간다? . 그렇다면 에너지는 ?
-宇宙는 有限한가? 無限한가?
-空間과 時間은 무슨 意味를 가지나?
-宇宙가 有限하다면 그 有限의 境界는 어떻게 說明되나? 境界란 意味는 ? 무언가 구분 짓는 다는 게 境界라면 그 境界의 너머는?
-時間은 有限한가 無限한가? 有限하다면, 그 始作과 끝은?
……
宇宙의 視野를 現生宇宙가 아닌 또 다른 宇宙, 空間과 時間을 擴張한 또 다른 次元 으로 擴張하여 說明하는 시도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초끈이론의 10의 500승個의 또 다른 宇宙, 11次元의 世界등에 관련된 이바구들이 그것이다.
당연히 그러해야겠지? 現生宇宙만으로는 모든 것들의 根本을 說明하기에는 걸림이 많을 게다.
‘宇宙는 有限하며 境界가 없다?’, ‘宇宙는 膨脹한다. 그러나 中心이 없다? 등등……’
空間이 膨脹함으로써 銀河끼리의 距離가 멀어질 뿐이다라고 하는 데, 空間의 槪念도 아직 흐지부지 한데 거기에 膨脹이라는 現像의 物理槪念을 갖다 붙이니 더욱 아리송(?)하다.
어쩌면 現生宇宙에 모든 解答이 숨겨 있을 지도 모른다. 단지 人類의 知識이 밝혀내지 못할 뿐? 아니면, 現生宇宙는 정말로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아주 사소한 것일 지도 모른다. 너무나 全體 宇宙는 巨大하고, 끝없는 時間의 歷史를 가지므로….
어쨌거나, 우리가 理解하고자 하는 宇宙의 모습은, 우리 宇宙力學에 基礎한 說明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족한 說明에 完全한 解答과 定義가 露出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음이 最先이라!
하지만, 우리의 知識과 表現에 상관없이 巨大한 宇宙는 그 모든 것을 包容할 것이다. 우리가 說明이 不足하다고, 우리가 宇宙를 잘못 理解하고 있다고, 宇宙自體가 바뀌는 것이 아닐 터이고, 그 때마다 宇宙力學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야. 宇宙는 宇宙의 本質은 우리의 說明과 無關하게, 그 自體로서 存在할 것이기 때문이다.
宇宙가 사람이라면, 미소 한 모금을 머금고 人類가 노는 꼴을 언제까지나 지켜볼 것이다. 결코 나서지 않고….宇宙가 스스로 宇宙力學을 바꾸고자 하기 전에는...
或者는
”或者야, 걱정말어라, 그대가 믿는 神은 그렇게 矮小한 神이 아니라고. 나가 비록 그런 소릴 했고, 그대가 지나가다 그런 소릴 흘러 들었다 해서, 지나가다 힐끔 쳐다보았다고, 시비걸고 사람패는 그런 組暴的 神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包容하는 너그럽고도 너그러운, 그야말로 天地를 創造한 神이기 때문에, 그 정도에 一喜一悲 할 神이 아닐 것이야. 그대가 그런 생각을 한다면, 偉大한 神을 정작 그대 水準으로 矮小하게 맹그는 것일 게다.”
宇宙는, 너무나 가까이 있으면서 너무나 巨大한 것.
그러므로, 우선, 무턱대고 思惟를 계속할 수 없으니 몇 가지 話頭부터 整理해보자.
-빛은 무엇인가?
-빛의 速度는 常數값(약 29만9천 km/sec), 왜 그 常數값인가? 50만, 100마도 아니고?
-萬有引力이란 무엇인가?
-萬有引力은 왜 常數이고, 왜 그 값을 가지는 가?
-物質은 무엇인가?
-物質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어디로 가는가? (消滅하면).
E는 mc제곱?, 에너지로 돌아간다? . 그렇다면 에너지는 ?
-宇宙는 有限한가? 無限한가?
-空間과 時間은 무슨 意味를 가지나?
-宇宙가 有限하다면 그 有限의 境界는 어떻게 說明되나? 境界란 意味는 ? 무언가 구분 짓는 다는 게 境界라면 그 境界의 너머는?
-時間은 有限한가 無限한가? 有限하다면, 그 始作과 끝은?
……
宇宙의 視野를 現生宇宙가 아닌 또 다른 宇宙, 空間과 時間을 擴張한 또 다른 次元 으로 擴張하여 說明하는 시도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초끈이론의 10의 500승個의 또 다른 宇宙, 11次元의 世界등에 관련된 이바구들이 그것이다.
당연히 그러해야겠지? 現生宇宙만으로는 모든 것들의 根本을 說明하기에는 걸림이 많을 게다.
‘宇宙는 有限하며 境界가 없다?’, ‘宇宙는 膨脹한다. 그러나 中心이 없다? 등등……’
空間이 膨脹함으로써 銀河끼리의 距離가 멀어질 뿐이다라고 하는 데, 空間의 槪念도 아직 흐지부지 한데 거기에 膨脹이라는 現像의 物理槪念을 갖다 붙이니 더욱 아리송(?)하다.
어쩌면 現生宇宙에 모든 解答이 숨겨 있을 지도 모른다. 단지 人類의 知識이 밝혀내지 못할 뿐? 아니면, 現生宇宙는 정말로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아주 사소한 것일 지도 모른다. 너무나 全體 宇宙는 巨大하고, 끝없는 時間의 歷史를 가지므로….
어쨌거나, 우리가 理解하고자 하는 宇宙의 모습은, 우리 宇宙力學에 基礎한 說明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족한 說明에 完全한 解答과 定義가 露出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음이 最先이라!
하지만, 우리의 知識과 表現에 상관없이 巨大한 宇宙는 그 모든 것을 包容할 것이다. 우리가 說明이 不足하다고, 우리가 宇宙를 잘못 理解하고 있다고, 宇宙自體가 바뀌는 것이 아닐 터이고, 그 때마다 宇宙力學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야. 宇宙는 宇宙의 本質은 우리의 說明과 無關하게, 그 自體로서 存在할 것이기 때문이다.
宇宙가 사람이라면, 미소 한 모금을 머금고 人類가 노는 꼴을 언제까지나 지켜볼 것이다. 결코 나서지 않고….宇宙가 스스로 宇宙力學을 바꾸고자 하기 전에는...
或者는
"야야! 도저히 짐작하지 못하겠다. 짐작할 必要도 없을 거 같고오. 제대로 된 이바군지, 헛소리하는 건지? 혹시 **의 입에 거품물고 떠드는 모습이 도라이 된 거 아니가?. 가만 있자 그러고 보니, **!, 혹여, 이 宇宙의 創造主이신 하늘에 계신 분한테 따지는 거 아니겠지? ‘빛이 있으라’ 해서 빛이 있었다 하는 디, 넌 그걸 묻고 있잖아? 이런 저런 요상한 이바구들을 엮어서 ‘고로, 하늘에 계신 분이 어쩌구 저쩌구… 아서라, 집어치워라’ 이렇게 분기탱천하는 분도 있을 터이지 싶은 데..
맞는 말이지, 맞는 말이고 말고. 헌데, 나가 와 이런 또라이 짓을 계속하는가? 또라이 짓에 나오는 이바구들이 論理的이고 아니고, 眞實이고 아니고를 떠나 왜 끝없는 疑問과 씨름하고,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解答이 있을 수 없을 것 같고, 所得없을 것 같은 그 意味에 매달리는가? 그러므로 나는 진정한 意味의 또라이인가?
덧없이 저 宇宙를 바라다보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없이 좋겠건만 세상에 대한 好奇心, 많은 理性的인 理解는 交感만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理解를 바라는 것은 感性의 범위를 벗어난 理性的 行爲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바라다만 보아도 그저 神秘하고 浪漫的이었던 저 宇宙가 이제는 옛날의 그 單純한 空間과 時間槪念을 뛰어넘어 보다 複雜한 양상을 바뀌어가고 있다. 눈으로 바라다본 저 세상은 恒常 보이는 대로 理解할 수 있는 世界는 아니다.
그리하여, 초롱초롱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지난 過去와 現在,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未來를 생각하며, 矮小해지는 人間自身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好奇心만으로 가득 차 아무 생각없는 어린이의 쳐다봄과 별반 差異가 없으며 단지 個人的 自我가 누릴 수 있는 普遍的인 自由일 뿐이다.
나는 수시로 冥想과 思惟를 통해 大宇宙의 深淵속으로 다가 가고자 한다. 人間은 보잘 것 없으나 人間의 思惟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 마치 宇宙가 萬物을 包容하듯이.
거기에는 空間도, 時間의 흐름도, 빛의 速度도 아무런 제약을 주지 않는다. 時間의 境界, 宇宙의 境界를 넘나드는 思惟의 自由로움이 얼마나 크나큰 지 알지 못한다.
‘빛은 무엇이고 物質이 무엇인가?...' 하는 話頭는
맞는 말이지, 맞는 말이고 말고. 헌데, 나가 와 이런 또라이 짓을 계속하는가? 또라이 짓에 나오는 이바구들이 論理的이고 아니고, 眞實이고 아니고를 떠나 왜 끝없는 疑問과 씨름하고,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解答이 있을 수 없을 것 같고, 所得없을 것 같은 그 意味에 매달리는가? 그러므로 나는 진정한 意味의 또라이인가?
덧없이 저 宇宙를 바라다보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없이 좋겠건만 세상에 대한 好奇心, 많은 理性的인 理解는 交感만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理解를 바라는 것은 感性의 범위를 벗어난 理性的 行爲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바라다만 보아도 그저 神秘하고 浪漫的이었던 저 宇宙가 이제는 옛날의 그 單純한 空間과 時間槪念을 뛰어넘어 보다 複雜한 양상을 바뀌어가고 있다. 눈으로 바라다본 저 세상은 恒常 보이는 대로 理解할 수 있는 世界는 아니다.
그리하여, 초롱초롱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지난 過去와 現在,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未來를 생각하며, 矮小해지는 人間自身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好奇心만으로 가득 차 아무 생각없는 어린이의 쳐다봄과 별반 差異가 없으며 단지 個人的 自我가 누릴 수 있는 普遍的인 自由일 뿐이다.
나는 수시로 冥想과 思惟를 통해 大宇宙의 深淵속으로 다가 가고자 한다. 人間은 보잘 것 없으나 人間의 思惟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 마치 宇宙가 萬物을 包容하듯이.
거기에는 空間도, 時間의 흐름도, 빛의 速度도 아무런 제약을 주지 않는다. 時間의 境界, 宇宙의 境界를 넘나드는 思惟의 自由로움이 얼마나 크나큰 지 알지 못한다.
‘빛은 무엇이고 物質이 무엇인가?...' 하는 話頭는
그 實體를 밝히려는 노력보다, 大宇宙의 深淵속으로 빠져 들게하는 징검다리 役割이 크다 하겠다.
佛敎의 觀無量壽經(觀無量壽經)이라는 經典에서
‘불신고육십만억나유타항하思惟순 신장팔십만억나유타유순 신량대소역여관세음.’
‘阿彌陀佛(無量壽佛)의 신장은 60만억 나유타 항하사 유순이고, 觀世音菩薩의 신장은 80만억 나유타 유순이며, 대세지보살의 신장은 觀世音菩薩과 같다.’
부처는 여기서 부처 즉 宇宙의 크기를 詳細하게 表現하고 있는데, 이 經典의 名稱을 考慮해볼 때 釋迦牟尼는 이 구절로써 宇宙의 實體에 대하여 確定的(?)으로 설파하고 있다 하겠다.. 부처는 無限한 宇宙라 하더라도 한낱 티끌에 불과하며, 하나의 티끌 속에도 無量宇宙가 담겨져 있다고 가르친다.
티끌속에 宇宙라고? 티끌이 곧 宇宙라서, 부처가 티끌속에 宇宙가 담겨 있다 하였겠는가? 티끌 같은 한 조각의 思惟가 無量한 宇宙를 담을 수 있다는 比喩을 말하고자 함이지 않을까?
宇宙原理라는 게 있다.
1) 一般性의 原理
우리 근방의 宇宙 모습이 보다 멀리 있는 宇宙의 여타 部分과 다를 바가 없다는 原理.
2) 均質性, 等方性의 原理
宇宙는 局部的인 非均質性을 除外한다면 宇宙는 어느 位置에서 보든지 同一하다는 原理.
森羅萬象이 充分한 時間 속에서 充分한 空間 속의 宇宙라는 울타리 속에서 녹아든 모습은 어디서나 비숫비슷 하다는 것이겠지? 보는 모습이 각기 다르면, 어디 充分한 時間과 充分한 空間의 宇宙라 하겠는가? 充分한 空間과 時間이 아니라면, 어디 大宇宙라 할만하겠는가!
充分한 時間과 充分한 空間의 宇宙라 하드라도 언젠가는 壽命을 다할 터, 그 壽命이 數十 億年, 數百 億年에 걸쳐 進行될 터이므로, 日常的인 宇宙는 充分한 時間이 흐르고 充分한 空間을 가진 宇宙일 것이다.
세포를 數百萬 倍, 數億 倍로 확대해보자. 아마 이 宇宙처럼 局部的으로 텅빈 空間, 별들처럼 物質의 集合所인 原子核이나 電子 알갱이, 그 사이 드문드문 空間, 原子核을 더욱 더 擴大해보자. 그러면 陽性子와 中性子가 뛰엄뛰엄 외롭게 虛空을 지키고 있을 터이다. 現代 物理學에서는 말한다. 이중의 99.99%가 虛空이라고. 물론 虛空이 虛空이 아니라 한다. 物質的으로는 虛空이라지만, 充滿한 그 무엇이 있다 한다. 에너지라 하기도 하고, 非物質의 무엇....
擴大鏡을 걷어치우면, 대상은 다시 오밀조밀한 均質한 物質의 덩어리로 바뀔 것이다.
宇宙도 그와 같아서, 物質은 뛰엄뛰엄 별들의 행태로 宇宙에 점점이 흩어져 있을 것이나, 平均的으로는, 또는 보다 크다란 視角으로 보면, 즉. 宇宙的 視野로 보면 均一한 物質의 분포를 보일 것이다.
宇宙原理는 너무나 單純하다. 宇宙原理가 複雜하다면 이미 宇宙 原理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보는 밤하늘의 宇宙가 너무나 그리고 充分히 巨大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 속에서 녹아난다. 그러므로 宇宙 原理는 單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宇宙를 보는 視角이 宇宙的이지 못할 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
佛敎의 觀無量壽經(觀無量壽經)이라는 經典에서
‘불신고육십만억나유타항하思惟순 신장팔십만억나유타유순 신량대소역여관세음.’
‘阿彌陀佛(無量壽佛)의 신장은 60만억 나유타 항하사 유순이고, 觀世音菩薩의 신장은 80만억 나유타 유순이며, 대세지보살의 신장은 觀世音菩薩과 같다.’
부처는 여기서 부처 즉 宇宙의 크기를 詳細하게 表現하고 있는데, 이 經典의 名稱을 考慮해볼 때 釋迦牟尼는 이 구절로써 宇宙의 實體에 대하여 確定的(?)으로 설파하고 있다 하겠다.. 부처는 無限한 宇宙라 하더라도 한낱 티끌에 불과하며, 하나의 티끌 속에도 無量宇宙가 담겨져 있다고 가르친다.
티끌속에 宇宙라고? 티끌이 곧 宇宙라서, 부처가 티끌속에 宇宙가 담겨 있다 하였겠는가? 티끌 같은 한 조각의 思惟가 無量한 宇宙를 담을 수 있다는 比喩을 말하고자 함이지 않을까?
宇宙原理라는 게 있다.
1) 一般性의 原理
우리 근방의 宇宙 모습이 보다 멀리 있는 宇宙의 여타 部分과 다를 바가 없다는 原理.
2) 均質性, 等方性의 原理
宇宙는 局部的인 非均質性을 除外한다면 宇宙는 어느 位置에서 보든지 同一하다는 原理.
森羅萬象이 充分한 時間 속에서 充分한 空間 속의 宇宙라는 울타리 속에서 녹아든 모습은 어디서나 비숫비슷 하다는 것이겠지? 보는 모습이 각기 다르면, 어디 充分한 時間과 充分한 空間의 宇宙라 하겠는가? 充分한 空間과 時間이 아니라면, 어디 大宇宙라 할만하겠는가!
充分한 時間과 充分한 空間의 宇宙라 하드라도 언젠가는 壽命을 다할 터, 그 壽命이 數十 億年, 數百 億年에 걸쳐 進行될 터이므로, 日常的인 宇宙는 充分한 時間이 흐르고 充分한 空間을 가진 宇宙일 것이다.
세포를 數百萬 倍, 數億 倍로 확대해보자. 아마 이 宇宙처럼 局部的으로 텅빈 空間, 별들처럼 物質의 集合所인 原子核이나 電子 알갱이, 그 사이 드문드문 空間, 原子核을 더욱 더 擴大해보자. 그러면 陽性子와 中性子가 뛰엄뛰엄 외롭게 虛空을 지키고 있을 터이다. 現代 物理學에서는 말한다. 이중의 99.99%가 虛空이라고. 물론 虛空이 虛空이 아니라 한다. 物質的으로는 虛空이라지만, 充滿한 그 무엇이 있다 한다. 에너지라 하기도 하고, 非物質의 무엇....
擴大鏡을 걷어치우면, 대상은 다시 오밀조밀한 均質한 物質의 덩어리로 바뀔 것이다.
宇宙도 그와 같아서, 物質은 뛰엄뛰엄 별들의 행태로 宇宙에 점점이 흩어져 있을 것이나, 平均的으로는, 또는 보다 크다란 視角으로 보면, 즉. 宇宙的 視野로 보면 均一한 物質의 분포를 보일 것이다.
宇宙原理는 너무나 單純하다. 宇宙原理가 複雜하다면 이미 宇宙 原理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보는 밤하늘의 宇宙가 너무나 그리고 充分히 巨大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 속에서 녹아난다. 그러므로 宇宙 原理는 單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宇宙를 보는 視角이 宇宙的이지 못할 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
이제 冥想과 사유를 통해 다가선 大宇宙의 深淵속에서는 時間도 停止하고, 훨훨 空間의 제약을 벗어 던진 지 오래다. 거기에 티끌이 있어, 그 속에 宇宙를 쑤셔 넣기도 하고, 大宇宙의 深淵에서 건저 내는 여러 宇宙의 모습들을 , 빨래감을 이곳저곳 울타리에 널 듯 이리저리 冥想속에 던져보기도 한다.
누군가 말하기를 ‘알려진 것은 有限하고, 알려지지 않은 것은 無限한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려고 한다면, 無限에 挑戰해야 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안다면, 宇宙는 有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宇宙는 無限하다는 것은 아니다.
天地는 創造될 수 있다 한다.
天地는 티끌속에 쑤셔 넣을 수 있다 한다.
빛이 있어라’ 해서 빛이 있었다 하지 않는가?
……
이제, 宇宙는 그 빛으로
나에게 새벽이 가까워 짐을 알리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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