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지박(無名之樸)
이름없는 통나무의 쓰임의 경지,
이름없는 통나무의 쓰임을 아는 경지라 할까?
통나무에 이름이 없다.
통나무에 이름을 붙인다면 무슨 이름을 붙일까?
이름이 붙은 통나무는 이미 용도가 결정된 것
용도가 결정되었다는 것은 이미 그 가능성이 제한되었다는 것이다.
그 용도의 제한은 무한함을 유한함으로 제한한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그 가능성이 무한하고
그 용도의 변환이 무한히 자유롭다는 뜻 아니겠는가?
고금에 두사람 유명한 조각가가 있다
미켈란젤로와 로댕이다
로댕은 하잖은 건축장식공으로 지내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보고 크게 느끼고, 영감을 얻어
'생각하는 사람
이라는 걸작의 조각품을 남긴 이라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그 대표작으로 지옥에 스스로의 몸을 내던지기 전에
자신의 삶과 운명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팽팽한 긴장감과 사실성으로 표현한 작품이란다
이 작품은 르네상스의 거장인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생각하는 사람>과 비슷하다 한다.
말하자면, 쉬고 있는 헤라클레스(Heracles)라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로댕에 영감을 불어넣은 천재화가라 하네.
미켈란젤로가 동서고금의 불세출의조각작품중 하나인 '다비드상'에 대해
"나는 단지, 돌덩이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했을 뿐이다" 이라 했다한다.
머리속에 떠오르는 영감외 불필요를 제거헀다는 것
미켈란젤로, 로댕이 동서고금의 불세출의 조각가로 칭송받는 것이
'조각의 기교인가',
'無名之石을 뛰어 넣은 철학인가?'
예술은 현상이고 현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현상이고 현실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현상이고 현실도 충분히 아름답고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의 기본이고 본질일 수는 없는 것이다.
기본과 본질을 추구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하다 할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을 조각하기전이나,
로댕이 '생각하는 사람'을 조각하기 전의 돌덩어리
그 돌덩어리가 내포한 가능성은 미켈란젤로나 로댕이 조각하는 순간 사라졌다
오직 조각목적물의 재료로 쓰임새가 제한 되었을 뿐
도덕경 22장에 '曲即全(곡즉전)'이라는 말이 나온다.
[모교수는,‘曲則全, 枉則直’을 해석하여,
'꼬부라지면 온전하여지고,구부리면 펴진다' 하였다.
노자 이전부터 전해져 온 曲則全에 대한 노자의 견해에 다시 해석을 한 것인데,
‘曲’이란 꼬부리고 웅크리는 것이고, 온전한 것에 비해 과히 기분 좋은 것이 아니고,
‘全’에 비해 분명 손해보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손해볼 줄 아는 사람에게만 온전함이 찾아 온다고 한다
이 해석의 문맥을 보면, 분명하게 曲은 좋지 않은 것이고,
全은 좋은 것이어서 그렇게 되어져야 할 목표와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면서도 꼬부라지면 온전해진다고 한 것은,
꼬부라졌으니 온전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글은 인터넷에 유명인이 '노자가 도덕경 22장에서 말한 '曲即全' 을 설명한 글이라 소개한다.
실제로 그가 그렇게 해설했는 지 명확히지 않지만,
내가 직접 그의 듣기 거북한, 사이코 비슷한 목소리로 강의하는 동영상을 들어보면
이부분 뿐만아니라, 6장에 나오는 谷神不死, 37장에 나오는 無名之樸등을
시청하다가 이건 아니다 싶었던 경우를 여러번 겪었다.
'꼬부라졌으니 온전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꼬부라진 것을 현상으로 보고 온전함이 부족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내 견해로는 주객이 전도된 듯한 해석이라 생각한다.
꼬부라진 것 자체가 온전한 것이다.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曲即全의 제대로 이해하는 시각이리라
그러니, 다른 것은 몰라도.
도덕경에서만은 그의 강의가 여러곳에서
이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해설을 쏟아낸다.
曲은 자연의 본성이고, 直은 자연의 한 현상뿐인 것을
어찌 曲과 直을 비교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曲을 直이나 온전함에 이르는 과정으로 보다니...
천지인, 대자연의 근본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고 기교에 치우친 바 크다할 것이다.
無爲를 말하지만, 爲無爲, 無爲無爲, 道可道非常道를 어찌 말로 설명하겠는가?
그 유명인의 愚는 이를 굳이 설명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무명지박(無名之樸)이란 ?
통나무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통나무의 용도를 결정하고, 칼을 대는 순간
통나무의 가능성은 특정 목적물로 제한된다.
노자는 '道'란 통나무와 같아서 모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도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그 이름에 걸맞는 현상일 뿐이지
모든 사물과 자연의 기본이고 기반이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道可道 非常道'라
'도는 도라 불리우면 이미 도가 아니다' 한 것이다.
노자도 답답했을 것이다
말씀을 쏟아내자니 현상이요,
가슴속에 지니고 있자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눈에 가물거린다.
도덕경이 극도의 비유로 쓰여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할 것이다
비유의 깊이가 끝이 없으니
왕필, 톨스토이, 도올, 옥자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에 1,600본이 넘는 해설서가 존재한다 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해설서가 나올지 알 수 없다
'曲은 기본이요 直은 현상이다'
'曲은 자연이요, 直은 자연의 한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曲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直은 그 가능성의 중의 일부 현상라는 것이다
曲은 자연이요 直은 人工的이다.
그러므로 '曲即全(曲이 곧 온전한 것)'이라 하는 것이다.
무명지박도 이와 같아서
무명지박의 쓰임가능성은 무한하다
그 무한의 경지를 무명지박지용지경(無名之樸之用之境)이라 하고자 한다.
그대는 당대에 무언가 이루고 싶은가?
출장복귀전에 출장보고서를 멋지게 작성할 꺼리를 만들고 싶은가?
무명지박은 곧 자연이다
자연과 하나되는, 자연 그 자체로 사는 것이 무명지박의 삶이다
삶은 현상이다.
누구나 현상에 연연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현상을 충분히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무명지박으로 사는 삶이야말로 현상을 초월하는 曲的 삶이다
그것이 자연과 하나되는 삶이요
자연 그 자체로 사는 삶이다.
곡즉전(曲即全)
무명지박(無名之樸)
....
노자가 실천하고자 하는 삶은 이런 것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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