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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동양철학/老子別義(下)

老子別義(下)_38장_上德不德(상덕부덕)

by 靑野(청야) 2014. 1. 27.

[도덕경 38장]

 

[최상의 德은 德이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德이 있는 것이다.

낮은 德은 德을 잃지 않으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德이 없는 것이다. 

높은 德은 함이 없으니, 하지 않는 것이다.  낮은 德으로 그로 인하여, 함이 있는 것이다. 

높은 仁은 그로 인하여. 함이 있는 것이다. 높은 義는 그로 인하여, 함이 있는 것이다. 

높은 禮는 그로 인하여 응함이 없으니, 소매를 걷어부치고 禮를 강요한다. 

 

그러므로 道를 잃으면 德이 나타나고, 德을 잃으면 仁이 나타나고,

仁을 잃으면, 義가 나타나고, 義를 잃으면 禮가 나타난다.

 

무릇 예를 차리는 것는 충성과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고,

그것은 어지러움의 우두머리이다. 이전의 아는 것은

道의 겉모습의 화려함이고, 어리석움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대장부는 두터움에 머무르고, 얕은 것에 머무러지 않는다.

실질적인 열매속에 머무르고, 화려한 껍데기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 즉, 낮은 德, 높은 仁, 높은 義 높은 禮, 껍데기의 화려함을 버리고

저것 즉, 실질적인 果實, 높은 德이나 道를 취한다.]

 

上德不德(상덕부덕), 최상의 德은 德이아니다,

是以有德(시위유덕), 그렇기 때문에, 德이 있는 것이다.

下德不失德(하덕부실덕), 낮은 德은 德을 잃지 않으려 한다.

是以無德(시위무덕), 그렇기 때문에 德이 없는 것이다.

上德無爲而無以爲(상덕무위이무이위), 높은 德은 함이 없으니, 하지 않는다

下德爲之而有以爲(하덕위지이유이위), 낮은 德은 그로 인하여, 함이 있는 것이다.

上仁爲之而有以爲(상인위지이유이위), 높은 仁은 그로 인하여. 함이 있는 것이다.

義爲之而有以爲(상의위지이유이위), 높은 意는 그로 인하여, 함이 있는 것이다

上禮爲之而莫之應(상례위지이막지응), 높은 禮는 그로 인하여 應함이 없으다,

則攘臂而扔之(즉양비위잉지), 즉 소매를 걷어부쳐 강요한다.

故失道而後德(고실도이후덕), 그러므로 道를 잃으면 德이 나타나고,

失德而後仁(실덕이후인), 德을 잃으면 仁이 나타나고,

失仁而後義(실인이후의), 仁을 잃으면, 義가 나타나고,

失義而後禮(실의이후예), 義를 잃으면 禮가 나타난다.

夫禮者(실예자), 무릇 禮를 차리는 것는

忠信之薄(충신지박), 충성과 믿음이 약하고.

而亂之首(이란지수), 어지러움의 출발이다

前識者(전식자), 이전의 아는 것은

道之華(도지화), 道의 겉모습의 화려함이고

而愚之始(이우지시), 어리석움의 시작이다.

是以大丈夫處其厚(시위대장부허기후),그러므로 대장부는 두터움에 마무르고,

不居其薄(불거기박), 얕은 것에 머무러지 않는다.

處其實(허기실), 실질적인 열매속에 머무르고,

不居其華(불거기화), 화려한 껍데기에 머물지 않는다.

故去彼取此(고거피취차). 그러므로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한다.

 

주) * 爲之: 위지-> 그것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그것을 위하여

* 莫 : 없을 막, 저물 모-> 없다. 부정이나 금지의 조사(助辭). 아득하다. 쓸쓸하다.

* 攘 : 물리칠 양, 어지럽힐 녕->물리치다. 물러나다. 덜다. 제거함. 훔치다.

* 臂 : 팔 비->팔꿈치와 손목 사이

* 臂: 양비-> 팔소매를 걷어 올리다.

* 扔 : 당길 잉->당기다. 책망하다. 부수다

 

이 세상에 道가 넘쳐나면 무위자연의 상태이니,

德이고 仁이고 義고, 禮가 발붙일 틈이 없을 것이다.

넘쳐나던 道가 사라지면,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德이 나타나게 된다.

무위자연의 도리를 세상에 구현하고자 德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점점 각박해져, 이런 德의 작용을 잃게 되면,

仁, 義가 필요해진다. 德이 철철 넘치는 세상이라면,

仁, 義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仁,義가 필요하다는 것은 德이 부족한 세상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德을 잃어가기 때문에 仁이 필요하고, 仁을 잃게 되면, 義라도 필요하게 된다.

그래야만 세상을 유지하고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義마저 땅에 떨어지면, 禮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높은 禮가 필요한 것은 충성심과 믿음이 땅에 떨어진 경우이니, 응함을 방해한다.

그럴 경우, 소매를 겉어붙쳐서라도 응함을 강요하게 된다.

즉, '충성심과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더욱 禮를 차리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억지로 충성심과 믿음을 가시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 즉, 높은 禮가 필요한 것은 세상이 어지럽기 때문이다.

높은 禮는 세상의 어지러움의 으뜸을 보여줄 뿐이다.

 

굳이 禮를 차리지 않드라도 잘 굴러가는 세상,

굳이 義를 행하지 않드라도,

굳이 義를 행할 필요가 없는, 義가 불필요한 세상,

굳이 仁을 행하지 않드라도 仁을 행할 필요가 없는, 仁이 불필요한 세상,

그런 세상은 높은 德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는 德이 드러나지 않지만, 德이 있는 세상인 것이다.

그런 세상에는 함이 없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는 세상인 것이다.

 

이 도리를 모르는 이전의 앎은,

道의 겉모습의 화려함을 보았을

뿐이고 어리석음의 시작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도리를 아는 대장부는 두터움 즉 근본의 도리,

즉 실질적인 果實, 높은 德이나 道를에 머무르고,

낮은 德, 높은 仁, 높은 義 높은 禮와 같은 앏팍한 껍데기 지식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孔子의 儒家에서 '仁義禮知信'은 다음의 다섯 가지의 마음을 말한다. 즉,

 

仁은 측은지심으로 불쌍한 것을 가엽게 여겨 정을 나누는 너그러운 마음, 도덕적 품성을 을 말하고,

義는 수오지심으로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 타인을 돕는 마음과 의협심 말하며,

禮는 사양지심으로 겸손하여 남을 위해 사양하고 배려하는 마음, 타인을 존중하고 예의와 예절을 말한다.

知는 시비지심으로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지혜로움을 말하며,

信은 광명지심으로 중심을 잡고 가운데 바르게 서 밝은 빛을 냄으로 믿음을 주는 마음, 언행일치의 마음이다.

 

孔子에게는 이것이 수양하고 닦아 바른 사회로 나아가는 마음가짐, 마음의 자세를 말한다.

그중, 老子에게 仁,義,禮는 德이 없는 세상에 나타나는 사회현상이다.

禮가 필요한 것은 禮가 무너진 사회에 필요한 것이며,

義나 仁도 義나 仁의 사회가 무너졌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그 상층의 개념으로 上德과 道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仁義禮知信' 의 도리를 설파한 공맹 사상의 추종자들에게는

얼핏 老子의 말씀에 가슴에 와 닿지 않을 있는 것이다.

인간세상의 개조를 통하여, 信과 知와 禮와 義와 仁을 갖춘 인간세상의 건설을

지상의 이상적인 목표로 추구하는 儒家의 프로세스,

道가 무너지면 德이 나타나고 德이 무너졌기 때문에 仁이 필요해지고,

仁이 무너졌기 때문에 義가 필요해지고, 禮가 나타난다는 道家,

특히나 老子의 반어법적 프로세스는 얼핏 양립할 수 없는 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 노자나 공자나 결과적으로는

인간의 깨달음의 최고의 수준에 이르는 길을 말하고 있지만,

그 과정을 보면, 노자의 방식은 연역법적 프로세스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무위자연] 의 도의 수준을 말하고,

도 즉 도리의 작용, 그 수준에 따라, 도리가 유지되고,

무너지는 결과에 따라 덕이 나타나고 인의예지신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도를 이루기만 하면, 그 하위는 도에 이르기 위한 방편일 뿐이지,

굳이 불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반면에, 공자의 방식은 귀납법적 프로세스에 가깝다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올바른 성장을 거치면서,

신과 지와 예와 의와 인을 거쳐 덕과 도를 이루는 방식이다.

각 단계의 닦음과 완성을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또 다른 각도로 보면,

선불교의 깨달음에 이르는 방식인 '돈오돈수'나 '돈오점수'와도 비견된다.

깨달음은 수양의 기간이나 강도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문득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렀다면, 더 이상의 수양이 불필요하다.

만약, 깨달음 위해 더 수양이 필요하다면,

원래 깨달음이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라는 돈오돈수식,

그에 비해, 수양과정에서, 수양 강도에 따라

점차로 깨달음을 더해간다는 돈오점수식 깨달음의 프로세스와 비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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