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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잡록/수상록.에세이

王씨와 玉씨

by 靑野(청야) 2011. 9. 27.
그동안 수십년동안 무수히 들어온 질문,

'니들 조상이 왕씨라며? 왕(王)에다가 점하나 찍어 옥(玉)氏 가 되었다면서?"

수년전 티비 연속극에서 조선개국시 멸망한 왕조의 후손인 왕씨의 모반과 멸문지화의 수난사가 언급된 것도 더하여, 세인의 머리속에 관련된 퀘스쳔이 남겨 졌나보다. 오리네 족보를 지켜본 당사자인 내 입장에서도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다.

도대체, 왕씨와 옥씨사이에 무슨 내력이 있는 것인가?. 옥씨는 왜 거제도에만 집성촌이 있는가?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평양이나 개성에도 집성촌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왜 우리네는 족보기록은 고려-조선중기까지 끊어져 있는가? 어른들에게 물어보면, 신라시대 시조이후, 임진왜란 직후까지 족보를 잃어버렸다고 전한다. 한 가문의 족보도 아니고 한 씨족의 족보가 통째로 없어질 수 있나? 어느 성씨들 처럼, 어쩌다 때 만나 돈주고 족보를 산 상놈집안 출신인가?(우리 빈이가 이문장을 보면, 무슨 개소리 하고 있냐 하겠지만)

왜 왕씨와 옥씨는 쪽수가 그리도 적은가? 특히, 500년 왕조를 일궜다는 왕씨의 씨는 왜그리 가물었는가? 왕씨는 귀하디 귀하다는 옥씨의 1/2도 안되는 희귀성이 되어버렸다.

이런 의문은 나혼자만의 궁금증만이 아닐 것이다. 해서, 이래저래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도 뒤지고, 이런저런 생각과 기억을 더듬어 재구성 해본다. 물론 근거있는 것도 있을 것이고, 역사기록으로 인정 받지 못한 야사기록도 있을 것이다. 내 개인적인 추론도 간간히 끼여 있다.

史的기록상의 玉(옥)氏

옥씨(玉氏)는 중국에서 넘어온 성씨(姓氏)로 우리나라 옥씨(玉氏)의 연원은 고구려의 요청에 의해 당나라에서 파견된 8재사(八才士) 중의 한 사람인 옥진서(玉眞瑞)가 신라에서 국학교수를 역임하고, 의춘군(宜春郡), 현재 의령군에 봉해져 의령(宜寧)에 정착하여 살면서 부터이다.

그 후 문헌의 실전되어, 역사를 알도리가 없어, 할 수 없이 후손들이 고려때 창정(倉正)을 지낸 옥은종(玉恩宗)을 1세조로 하는 계통과,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옥여(玉汝)를 1세조로 하는 계통이 갈라져서 본관을 의령(宜寧)으로 하여 대를 이어왔다.
문헌에 나타난 옥씨(玉氏)의 본관(本貫)은 17본(本)으로 전하나 이는 거주지명을 나타낸 것에 불과한 것이며, 현재는 의령(宜寧) 단본(單本)으로 전한다.

또 다른 기록에는 개성, 거제, 경상남도 진양군의 반성면, 밀양 ,사천, 선영, 의령 , 의성, 주 총 9개의 본관이라 하는 데, 내가 알기로 우리 집안은 거제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지만, 본관은 '거제'가 아닌, '의령'이라 알고 있으니, 여기에 무슨 곡절이 있지 싶다.

오리지널 王(왕)氏의 유래

진의 시황제가 멸망시킨 제나라의 마지막 왕인 '건'의 손자 '안'을 항우가 제북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한의 고조가 흥하면서 '안'은 왕위를 상실하였지만, 제나라 사람들은 그 일족을 왕가(王家)라 불렀다. 이것이 왕씨의 유래라한다. 그러니까, 제나라 왕의 마지막 왕인 '건'이 성명을 복원하면, '왕건'이 되는 것이다. 고려시조 왕건과 상관은 없지만...

개성 왕씨는 고려의 왕족으로 시조는 고려 왕건의 할아버지인 의조(懿祖:호) 작제건(作帝建: 이름)이다. 의조 작제건때 왕씨성을 처음 사용하였다고 전하나, 박혁거세니, 김알지처럼 신화와 전설이 덧입혀지지 않고, 집안이 본디 송악지방의 호족이었다는 사실 이외는 그 선대에 대한 내력은 전해지지 않는다. 

고려 때의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에 의하면 왕건의 조부(이름 작제건)은 당나라 숙종의 아들로 서술하고 있는데,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은 ‘왕대종족기(王代宗族記)’를 인용하며 의조의 아버지가 당 숙종, 즉 의조가 당 숙종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허구로 규정하였다. 다른 학설에는 개성 왕씨가 당나라혈통이 아닌 고구려의 혈통을 가진 신라인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중국 당나라대, 안사의 난 시기는 산동지방에 신라방이 형성되기 시작한 때와 가까웠던 때로 이 지역에서 새로운 신흥 군벌로 자리잡은 고구려계 유민의 후손인 이정기의 후손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문헌의 부족으로 그 세계를 확실히 알수가 없다고 한다.

개성왕씨는 왕건의 4대조를 시조로 삼고 있지만, 태조 왕건이 제왕(帝王)이기 때문에, 개성 왕씨 세대를 헤아릴 때는 태조 왕건을 1세로 간주하고 있다.

당시에는 태조 왕건에게서 왕씨 성을  사성(賜姓, 임금이 신하에게 성을 내리는 것)받은 사람이 많았다. 각 지방의 호족들을 무마 포섭하기 위하여 그들과 혼연(婚緣)을 맺거나 왕성을 사성하였다. 때문에 순수혈통인 왕건에 사성받은 왕씨들이 많았다. 강릉 왕씨등이 그 대표적인 사성받은 왕씨다.

무신정권시절의 왕씨의 수난

고려 무신정권시절이 있었다. 정중부의 난으로 일컬어지는 정변을 통하여 무신들이 정권을 잡고 나라를 좌지우지 했으니, 왕씨성의 왕족들의 수모가 불을 보듯 뻔하다. 무신정권의 황금기는 경대승에 이어 이의민(~1196년) 시대라 한다.

1146년에 즉위한 고려 18대 의종은 무신 정권에 의해 폐위되어 3년간 거제도에 유폐되었다, 그 뒤 1173년에 김보당(金甫當) 등 의종 복위 세력이 무신 정권에 항거하여 거병하고, 유배된 의종을 모셔와 받들고 경주로 가서 웅거하였다. 그러나 무신 정권이 보낸 군대에게 그해, 모두 패하였다. 1173년 의종은 장수 이의민에 의해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지금도 거제도 둔덕면 거림리 우두봉에는 그당시 유폐되었던 '폐왕성' 이라는 성터가 남아 있는 데, 아마도 여기로 끌려온 주변인물들중에 왕족들이 많았을 것이다. 왕정복위운동의 결말이 왕의 살해로 끝나자, 폐왕성 주변 왕씨들이 일망타진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을 것이고, 이 때 일부 왕씨들이 지하로 숨어들어 변성하고 오랫동안 족보도 없이 숨어 지냈을 것이다. 아마도 기존의 성씨중에서 變姓하기 쉬운 옥씨로도 둔갑하지 않았을까?

<거제 둔덕면 거검리 우두봉 '폐왕성'에서 고려 18대 의종왕의 명복을 비는 추념식>

 

조선의 개국과 왕씨의 수난

그후, 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개국과 함께 멸족의 참변을 당했다. 왕손인 왕씨가 고려조 복위를 기도할 수 있으므로 후환을 없애려고 했던 것이다. 왕우의 모반사건 이후 태조는 왕손이 아닌 왕씨는 외가의 성을 따르라고 명령했다.

왕씨들이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는 조선실록 등에서 단편적으로만 찾아볼 수 있다. 추강 남효온이 남긴 글에 상당히 구체적으로 왕씨의 몰살당한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남효온에 의하면 조선조정은 왕씨들을 강화도와 거제도에서 서인으로 살게 해주겠다고 속여서 배에 태워 바다로 내보내 배를 가라앉혀 수장시켰다고 한다.

침몰하는 배에서 용케 헤엄쳐 나온 왕씨들이 있었으나 뭍에서 기다리는 관군에 붙잡혀 역시 무참하게 살해돼었다. ‘추강냉화’ 별지에도 “조선조 태조 3년 갑술 여름에 모든 왕씨를 바다 가운데 잠궈 죽이고 밖으로 명령하여 크게 왕씨의 남은 겨레를 찾아서 다 죽이다”라고 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살아남은 왕씨도 물론 있었다. 전국에 방이 나붙었으나 은둔하여 보지 못한 사람이 있고, 조선 조정의 왕씨 멸족 계획을 눈치 채고 피신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살아남은 왕씨들은 이때부터 변성명을 하며 근근이 목숨을 부지했다. 이때 田씨, 全씨, 玉씨, 車씨, 申씨 등으로 임금왕자를 숨기거나 아예 다른 성씨를 사용하며 살아남았다.

왕제구 개성왕씨중앙종친회 사무국장은 “그런 설이 있다. 하지만 다 그렇다는 확신은 없다”고 한다.

그러다 조선 5대조 문종 때 이르러 왕씨 멸족령은 해제됐다. 조선실록, 국조보감, 문헌비고 등에 의하면 왕씨가 다 죽고 없어 고려태조왕을 비롯하여 전왕조의 여러 왕들을 받들어 제사지내지 못하는 것이 결국 아버지 세종대왕과 할아버지 태왕의 위대한 업적과 높은 도덕성에 오점이 된다고 보고, 숭의전을 짓고, 왕씨를 수소문하여 배향하고, 제사를 모시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숨어 살던 왕씨가 세상에 나오게 되는데, 맨 처음 햇빛을 받은 이가 현재의 개성왕씨 대종을 이루고 있는 동양군파 중조가 되는 [왕미]이란다. 충주에서 외가의 성인 민씨로 살고 있던 왕미가 밭의 경계를 다투던 중 이웃사람의 고발로 관아에 붙잡혔으나 그때 이미 ‘방면하여 편히 살게 하라’는 명이 내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왕미 대부터 개성을 본관으로 삼은 고려왕조의 성인 개성왕씨가 명맥을 있게 됐다.

조선왕조가 멸족령을 해제하고, 숭의전 제사를 위해, 노비와 전답을 하사하며, 명맥을 있게 했지만, 왕씨들이 그 뒤 승승장구한 것 같지는 않다. 훗날 세조는 이렇게 살아남은 왕씨 후손을 세자의 생일잔치에 불러서 전왕조의 후손이니 자신의 신하가 아니라 손님이라면서 극진히 대접하기도 했으나 세조 이하 역대 조선왕조에서 개성왕씨가 크게 중용되지는 않았다. 인구수가 절대 부족했거니와 전왕조의 성씨라는 이유로 경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왕씨 성을 사용하며 살아갈 수 있었음에도 왕씨멸족령이 내려질 당시 변성명하며 목숨을 부지한 대부분의 개성왕씨 후손들이 끝내 왕씨로 환성하지 않았다. 왕제구 사무국장은 1918년에 발행된 무오보에 옥(玉)씨 성을 쓰던 일파가 환성한 것이 유일하다고 했다. 이것은 왕씨가 옥씨성으로 변성한 것이라는 기록적 증거가 되기도 한다.

본래 고려 왕실에서는 왕권에 피해를 주지 못하게 하도록, 태자를 제외한 왕자들을 승려로 출가시키거나, 아니면 모친의 성을 따게 했다, 거기에 앞서와 같이 2번이나 멸문지화의 질곡의 역사를 살아왔기 때문에, 500여년동안 한 왕조를 이루어온 왕씨가 지금에 이르러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소수씨족으로 전락한 것이다.

정리하면

-옥씨는 고구려의 초청으로 온 당나라 유학자가 신라에 눌러 앉은 것이 오리지널 이였다

-왕씨는 개성 송악지역의 호족이였으나 내력이 분명하지 않고, 태조 왕건의 4대조를 시조로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당나라 숙종의 아들이 직제건(왕건의 4대조)이라는 설도 있고, 고구려나 신라인이라기도 한다. 당시 풍습에는, 왕이 성을 내리는 사성이 유행하였는 데, 강릉왕씨등 여러 왕씨 갈래들이 이때 사성된 성씨 들이 많다.

-무신정권시절의 왕씨의 수난은, 무신정권때, 거제 폐왕성에 유폐되어 있는 동안왕정복위운동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가 무신정권에 패함으로써, 왕정복위세력 뿐만아니라 의종이 유폐되었던 거제 일원의 잔당(?) 소탕을 피하여 변성하여 지하로 숨어든 결과로 거제에 유독 옥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연유를 개인적으로(이부문 역사적 기록, 근거는 없음) 짐작해볼 뿐이다.

-이성계의 조선의 개국과 함께, 왕씨는 멸문의 화를 당하거나, 사성전 성씨로 복원하거나 이와중에서 살아남은 자는 지하로 숨어들고, 변성등을 통해 목숨을 부지했다. 추강 남효온이 남긴 글에 상당히 구체적으로 왕씨의 몰살당한 이야기가 있다고한다. 5대조인 문종 때 멸족령이 해제되었으나, 개성왕씨의 후손들은 많이 환성하지 않고 변성한 채로 역사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개성지역을 중심으로 개성지역, 평양지역 옥씨들은 원래 옥씨들도 있었겠지만, 왕씨들이 변성하였다가 환성하지 않은 이런 결과에 연유하지 않는가 짐작된다.

-앞서의 왕씨의 수난들에서 보듯이 변성하여 옥씨로 행세할 수 있었던 것은 오리지널 옥씨가 있었기 때문에 변성도 가능했을 터이다. 이를테면

'니 성이 뭐야 햇을 때, 옥씨입니다' 고 했을 때, 듣도보도 못한 성씨라면 당시 서슬퍼랬을 검문검색에서 살아 남았겠는가?

그러므로 왕씨와 옥씨는 오리지널은 분명이 틀리지만, 옥씨입장에서 보면, 여러차례 수난을 거치면서, 오리지널 옥씨, 무신정권시절의 왕씨 수난시에 살아남고 변성한 왕씨, 조선개국초기의 왕씨 수난시에 살아남아 변성한 왕씨등이 섞여 있을 터이다.

조선조에 관에 진출한 옥씨, 왕씨 기록을 보면 멸족령이 해제된고도 한참을 지난1700년 중반까지 3~400년동안 관에 진출한 사람이 거의 씨가 말랐었다. 아마도 벼슬길도 삼가한 것일 수도 있고, 숨어지내는 동안 변변한 교육과 재력을 키우지 못해 자식농사를 망친 경우가 아니였을까?

우리 족보에서도 시조 옥진서이후 선조때까지 기록이 없다. 한참을 핍박받은 역사의 흔적인지, 원래부터 족보도 제대로 작성하고, 간수하지 못한 졸판(?)인 집안이였는지 이 역시 알길이 없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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