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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장막을 걷어내면, 비로소 심우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 與一利不若除一害, 生一事不若滅一事
수상잡록/수상록.에세이

초기 신라왕권의 변화

by 靑野(청야) 2011. 9. 26.

6. 新羅初期의 王統變動 狀況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본기(南解次次雄本紀)에 "남해차차웅은 혁거세(赫居世)의 적자(適者)다..중략..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하고 원년이라 칭하였다"라고 적혀 있고, 그 뒤 정변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왕자(王子)가 왕위(王位)를 계승한 것으로 보아, 신라의 왕위는 원칙적으로 왕자가 계승하였다. 그러나 신라초기에는 암살이나 정변 등에 의하여 왕자가 아닌 사람이 왕위를 계승한 경우가 많았다.

일부 사학자는 내란(內亂)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왕자(王子)가 아닌 사람이 왕위(王位)를 계승한 경우가 많았는 것은 신라의 화백제도(和白制度)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적혀 있는 은유법 문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자세히 살펴 보면 신라초기에는 왕(王)이 교체될 무렵에 정변이 자주 있었다. 따라서 신라초기에 왕자(王子)가 아닌 사람이 왕위(王位)를 계승한 경우가 많았는 것은 화백제도(和白制度) 때문이라기 보다 궁중(宮中)의 정변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적혀 있는 각 왕(王)의 왕위계승 직전 본기(本紀) 내용을 살펴본다.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B.C 57년 즉위

「시조의 성은 박씨요, 휘는 혁거세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4월 병진일(정월 15일이라고도 함)에 즉위하니 명칭은 거서간(居西干)이요 나이는 13세였다. 국호를 서나벌(徐那伐)이라 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의 유민이 산곡 사이에 나누어 살아 6 촌락을 이루었으니 1은 알천 양산촌, 2는 돌산 고허촌, 3은 취산 진지촌(간진촌이라고도 함), 4는 무산 대수촌, 5는 금산 가리촌, 6은 명활산 고야촌이다. 이것을 진한의 육부라고 하였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 나정(蘿井 : 삼국유사에는 鷄井) 옆의 수풀 사이에서 말이 엎드리어 울고 있음을 바라보고 쫓아가니, 어느새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 하나가 있어서 그 알을 짜개 보니, 어린아이가 들었으므로 거두어 기른바 나이 10여세가 되자 장대하여 숙성하니, 육부 사람들이 그가 신이하게 낳았다 해서 추존하더니 이제 와서 임금으로 들이세웠다. 진한 사람이 瓠(호:표주박)를 "박"이라고 칭하므로 처음 그 알의 크기가 표주박만 하였기 때문에 성을 박이라고 하였다는 것이요, 거서간은 진한의 말로 왕이다(혹은 귀인을 칭한다). 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一曰正月十五曰) 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 山珍支村(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高墟村長蘇伐公 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 而嘶 則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孀兒出焉 則 收而養之 及年十餘歲 岐祥然夙成 六部人 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 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故 以朴爲姓 居西干 辰言王(或云呼貴人之稱).」

「21년(B.C 37년) 서울에 성을 쌓고 금성이라 하였다. 二十一年 築京城 號曰金城」

「26년(B.C 32년) 봄 정월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二十六年 春正月 營宮室於金城」

「30년(B.C 28년) 여름 4월 그믐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 사람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 침입하다가 변방 백성이 밤에도 문을 닫지 않고 들에는 곡식이 쌓여 있음을 보고서 서로 이르기를 이 지방 백성은 서로 도둑질할 줄을 모르니 도가 있는 나라라 이를 만하다. 우리가 몰래 군사를 끌고 와 습격한다는 것은 도둑과 다름없는 짓이니 부끄러운 일이 아니냐 하고 돌아갔다. 三十年 夏四月己亥晦 日有食之 樂浪人將兵來侵 見邊人夜戶不0 露積被野 相謂曰 "此方民不相盜 可謂有道之國 吾0潛師而襲之 無異於盜 得不愧乎" 乃引還」

「38년(B.C 20년) 봄 2월 호공을 보내어 마한을 예방하니 마한왕은 호공을 꾸짖으며 진.변 2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들어 조공을 바친 일이 없으니 사대의 예가 이러할 수 있소 하였다. 호공은 우리나라는 2 성인(聖人)이 일어나고부터 인사가 닦여지고 천시도 화평하여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하고 백성들은 서로 공경하고 사양하여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왜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 없으되 우리 왕이 겸허하여 하신(下臣)을 보내어 방문하였으니 예로 보아 과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왕이 분하게 여겨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좌우의 신하들이 간언하여 중지하고,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옛적에 중국 사람들이 진나라의 난에 시달려서 동으로 온 자가 많았는데, 대개 마한의 동쪽에 터를 잡고 진한과 더불어 살다가 이에 이르러 차츰 번성해졌기 때문에 마한이 시기하여 문책이 있었던 것이다. 호공이라는 사람은 그 종족과 성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본래는 왜인이었다. 처음 박(瓠)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이라 칭하였다. 三十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 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對曰 "我國自二聖 肇興 人事修天時和 倉庾充實 人民敬讓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而吾王謙虛 遣下臣修聘 可謂過於禮矣 而大王赫怒 劫之以兵 是何意耶" 王憤欲殺之 左右諫止 乃許歸 前此 中國之人 苦秦亂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居 至是 盛 故馬韓忌之 有責焉 瓠公者 未詳其族姓 本倭人 初以瓠繫腰 渡海而來 故稱瓠公」

「54년(B.C 4년) 봄 2월 을유 혜성이 하고에 나타났다. 五十四年 春二月己酉 星于河鼓」

「60년 가을 9월 용 두 마리가 금성 우물 속에 나타나더니 소낙비가 쏟아지고 번개 치고 성 남문에 벼락이 떨어졌다. 六十年 秋九月 二龍見於金城井中 暴雷雨震城南門.」

「61년(A.D 4년) 봄 3월 거서간이 돌아갔다. 담암사 북쪽에 있는 사릉에 장사지냈다. 六十一年 春三月 居西干薨 葬蛇陵 在曇巖寺北.」

「전략.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되던 어느 날 왕은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 뒤에 그 죽은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러더니 왕후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한다. 나라 사람들은 이들을 합해서 장사지내려 했으나 큰 뱀이 나타나더니 쫓아다니면서 이를 방해하므로 오체를 각각 장사지내어 오릉을 만들고, 또한 능의 이름을 사릉이라고 했다. 담엄사 북릉이 바로 이것이다. 태자 남해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理國六十一年 王升于天 七日後 遺體散落于地 后亦云亡 國人欲合而葬之 有大蛇逐禁 各葬五體爲五陵 亦名蛇陵 曇嚴寺北陵是也 太子南解王繼位.」 三國遺事

 

고기(古記)에는 혁거세가 배를 타고 나을촌(那乙村)에 도착하였다고 적혀 있는 반면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혁거세가 나정 옆 수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구는 설화(說話)이고 고기(古記)는 구체성(具體性)이 있으므로, 혁거세는 고기(古記) 문구대로 눈수(嫩水) → 동옥저(東沃沮) → 나을촌(那乙村) 순서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소벌공(蘇伐公)이 혁거세(赫居世)를 거두어 길렀다는 것은 혁거세 무리가 이주하여 진한(辰韓) 6부 중 돌산(突山)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과 손을 잡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나이 10여세가 되자 벌써 장대(壯大)하여 숙성(夙成)하니, 육부(六部) 사람들이 그가 신이(神異)하게 낳았다 해서 추존(推尊)하더니 이제 와서 임금으로 들이세웠다는 것은 박혁거세 무리가 돌산(突山) 고허촌장 소벌공과 손을 잡은 지 10여 년만에 진한(辰韓) 6부를 장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혁거세가 임금이 된 후 거서간(居西干이라는 칭호로 불리었다. 이는 혁거세가 이주하기 전 이미 조선(朝鮮) 유민(遺民) 무리가 바다와 가까운 동해안 요지(要地)를 다 차지하고 있어 혁거세 무리는 바다와 떨어진 서쪽 내륙(內陸)에 터를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古代)에는 강이나 바다가 지금의 고속도로이기 때문에 수도는 반드시 강(江)이나 바다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박혁거세 30년 낙랑(樂浪) 무리가 신라를 공격한 후 혁거세왕은 왜(倭) 출신 호공(瓠公)을 등용하여 왜(倭)와 손을 잡았다. 이 왜(倭)는 구주(九州) 방면의 왜(倭)로 보인다.

호공(瓠公)이 신라의 사자로 마한왕(馬韓王)에게 갈 정도로 중책을 맡았는 것을 보면 호공(瓠公)과 연결된 왜(倭) 세력이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진한(辰韓) 6부 세력 + 혁거세(赫居世) 세력 + 왜(倭) 세력이 합쳐 세(勢)가 불어나자 사자인 호공(瓠公)은 마한왕(馬韓王)에게 대드는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위 호공의 말에서 주목되는 점은 당시 사로국(斯盧國) 주변에서 강한 세력은 변한(卞韓), 낙랑(樂浪), 왜(倭)였다는 것이다.

그 뒤 혁거세 54년조에 혜성(彗星)이 하고(河鼓 : 은하수)에 나타났다고 적혀 있다. 이는 누가 대 무리를 거느리고 신라의 수도 금성(金星) 옆에 있는 알천(閼川)에 나타났다는 것을 뜻한다. 이 무렵 신라 지역에 나타난 인물은 탈해(脫解)이므로, 이 문구는 탈해가 대 무리를 거느리고 알천에 나타났다는 것을 뜻한다. 탈해는 임인년(B.C 19년)에 아진포(阿珍浦)에 도착한지 약 15년 후 B.C 4년에 대 무리를 거느리고 신라의 수도 금성 옆에 있는 알천에 나타났다.

그 뒤 혁거세 60년 9월조에는 "용(龍) 2마리가 금성(金城) 우물 속에 나타나더니 성(城) 남문(南門)에 벼락이 떨어졌다"고 적혀 있다. 용(龍) 2마리는 후에 신라의 임금이 된 남해(南解)와 탈해(脫解)를 가리키고, 우물 속에 나타났다는 것은 강 또는 바다와 관련이 있는 세력이 나타났다는 뜻이며, 용(龍) 2마리가 금성(金城) 우물에 나타났다는 것은 남해와 탈해가 해상세력을 거느리고 금성(金城)으로 쳐들어왔다는 뜻이며, 벼락(震)이 떨어졌다는 것은 진(辰=용:해님의 아들 즉 임금)을 같은 음인 진(震)으로 은유법으로 적은 것으로, 새로운 임금이 나타났다는 뜻이다.

위 문구의 의미는 남해와 탈해가 동해(東海) 쪽에 있는 해상세력을 이끌고 금성(金城) 남문으로 쳐들어와서 혁거세를 쫓아내고 남해(南解)가 새로운 임금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 정변으로 혁거세는 사실상 폐위되었고 폐위된지 6개월 후 죽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적혀 있는 문구를 보면 헉거세는 자연사한 것이 아니고 살해당하였다.

위에 나온 삼국유사 문구에 혁거세가 재위 61년 되던 날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은 죽었다는 뜻이고, 7일 뒤 죽은 몸뚱이가 흩어져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살해당하였다는 뜻이며, 나라 사람들이 5체(五體)를 합해서 장사지내려 했으나 큰 뱀이 나타나더니 쫓아다니면서 방해했다는 것은 혁거세를 제거한 세력이 혁거세의 장례를 방해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큰 뱀은 혁거세를 제거한 세력을 비하하여 표현한 것이다. 혁거세가 제거된 뒤 세력를 잡은 인물은 남해와 탈해이므로, 큰 뱀을 이들을 은유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혁거세 60년조 문구나 삼국유사 문구를 보면, 남해왕(南解王)은 혁거세왕의 적자(適子)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만약 적자라면 자기 아버지 혁거세왕과 어머니 알영부인을 둘다 동시에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남해는 탈해처럼 동해 바닷가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천제의 아들을 칭한 무리로 혁거세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후 이를 합리화 하기 위하여 혁거세의 아들을 칭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우리 민족은 하늘에 하늘나라가 있고, 이 하늘나라를 하늘나라 임금인 해님과 달님이 다스린다고 믿었으며, 용(龍)을 하늘나라 임금의 아들이라 믿었고, 하늘나라 임금의 아들이 변신술(變身術)로 표주박(瓠)이나 알 속에 들어가 지상세계로 내려와 사람으로 변신(變身)하거나, 용(龍)의 정기(精氣)가 지상세계로 내려와 사람의 몸을 빌려 어린애로 태어나 뒤에 지상세계의 임금이 되었다고 믿었다. 또 바다, 우물, 하천, 연못 등은 지하(地下)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를 해님의 아들인 용왕(龍王)이 다스린다고 믿었다. 따라서 고대 우리 민족은 궁성이 바다나 강(江) 인근에 있지 않을 때는 궁성 안 또는 궁성 옆에 하늘나라 임금의 아들인 용(龍)이 궁성을 출입하는 통로(通路)인 우물이나 연못을 만들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신라의 초기궁성(初期宮城)인 금성(金城)에 우물이 있었고, 경주에 신금성(新金城) 서편 계림(鷄林)에는 나정(蘿井)이라는 우물이 있었으며, 경주 신월성(新月城) 동쪽에는 안압지(雁鴨池)라는 연못이 있었다. 그러나 대본리(大本里) 방면의 월성(月城)에는 대종천(大種川)과 바다가 있었기 때문에 별도로 우물이나 연못을 만들지 않았다. [註 안압지는 경주(慶州)에 신월성(新月城)을 축조하면서 대본리(大本里) 월성(月城) 앞바다에 있는 해님의 아들인 용(龍)이 신월성으로 와서 머무르기 편하도록 대본리 월성 주변의 지형을 본따 신월성 동쪽에 만든 연못이다. 후에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후 천제(天帝)의 아들인 용(龍)이 신라를 잘 지켜달라고 기원(祈願)하는 마음에서 재위 14년(674년) 2월에 연못을 확장하여 산을 만들고 화초(花草)를 심고 진기(珍奇)한 새와 짐승을 길러 용(龍)의 거처를 더욱 화려하게 꾸며주었다. 신라는 이곳에서 용(龍)이 신라를 보호하여 왜(倭)를 막아달라고 용왕(龍王)에게 제사(祭祀)를 지냈다. 고대(古代) 신앙(信仰)을 신봉(信奉)한 신라인들은 문무왕이 죽은 후 용(龍)이 되어 왜(倭)가 신라의 수도로 쳐들어 오는 통로인 대본리 월성(月城) 앞바다에 있으면서 왜(倭)를 막아달라고 월성 앞바다에 문무왕의 수중릉(水中稜)을 만들었다.] [註2 고대 우리 민족의 신앙은 지하(地下)의 우물은 용왕(龍王)과 통하는 상상(想像)속의 통로이고, 지상의 우물은 하늘나라 임금과 통하는 상상(想像)속의 통로이다. 따라서 지하의 우물인 나정(蘿井)은 용왕(龍王)과의 통로이고, 지상의 우물인 첨성대는 하늘나라 임금(天帝)과의 통로엿다. 고대 신라인들은 하늘나라와의 통로인 첨성대(瞻星臺)나 용왕(龍王)과의 통로(通路)인 나정(蘿井)에서 제사지냈다.]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A.D 4년 즉위

「남해차차웅(자충이라고도 한다. 김대문은 말하기를 '무당을 말하는 방언'이다. 세인이 무당으로써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기 때문에 두려워하여 드디어 존장자를 자충이라 하게 되었다 함)은 혁거세의 적자다. 몸이 장대하고 성질이 심후하며 지혜가 많았다. 어머니는 알영부인이요 비는 운제부인(혹은 아루부인)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하고 원년이라 칭하였다. 南解次次雄立[次次雄 或云慈充 金大問云 (方言謂巫也 世人以巫事鬼神 尙祭祀 故畏敬之 遂稱尊長者爲慈充)] 赫居世嫡子也 身長大 性沈厚 多智略 母閼英夫人 妃雲帝夫人 (一云阿婁夫人) 繼父卽位稱元」沈厚

「원년 가을 7월 낙랑의 군사가 와서 금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니 왕은 좌우더러 이르기를, "2 성인(聖人)이 나라를 버리시고 외로운 이 몸이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외람 되게 높은 자리에 앉게 되니 위태롭고 두려움이 큰 냇물을 건너는 것 같은데, 지금 이웃나라가 와 침범하는 것도 나의 부덕한 탓이니 이를 어찌 하오" 하니 좌우의 대답이 "적이 우리의 상사를 다행으로 삼아 함부로 군사를 끌고 왔으니, 하늘이 반드시 돕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윽고 적이 퇴군하여 돌아갔다. 元年 秋七月 樂浪兵至 圍金城數重 王謂左右曰 "二聖棄國 孤以國人推戴 謬居於位 危懼若涉川水 今 國來侵 是孤之不德也 爲之若何" 左右對曰 "賊幸我有喪 妄以兵來 天必不祐 不足畏也" 賊俄而退歸」

「3년 봄 정월 시조의 사당을 세웠다. 三年 春正月 立始祖廟」

「 5년(A.D 8년) 봄 정월에 왕이 탈해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맏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五年 春正月 王聞脫解之賢 以長女妻之 」

「7년 가을 7월 탈해로 대보를 삼고 군국정사를 맡겼다. 七年 秋七月 以脫解爲大輔 委以軍國政事」

「20년 가을 태백이 태미로 들어갔다. 二十年 秋 太白入太微」

「21년(A.D 24년) 가을 9월 누리가 일었다. 왕이 돌아가니 사릉원 안에 장사지냈다. 二十一年 秋九月 蝗 王薨葬蛇陵園內」

 

위 문구에는 차차웅(次次雄)이 무당(巫堂)이라고 적혀 있는데, 차차웅은 단순한 무당(巫堂) 이 아니고 부여(夫餘) 무리의 천신숭배사상에 따라 해 뜨는 동쪽에서 해님과 달님에게 지내는 제사를 주관한 신관(神官)의 명칭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이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적자(適子)라고 적혀 있지만, 박혁거세 60년조에 적혀 있는 은유법 문구에 의하면 남해차차웅은 석탈해(昔脫解)와 연합하여 박혁거세로부터 왕위를 빼앗았으므로, 적자(適子)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남해차차웅이 박혁거세의 적자로 적혀 있는 것은, 정변을 감추고 신라 왕통의 연속성을 가장하기 위하여 신라의 사가(史家)들이 그렇게 적은 것으로 보인다.

남해차차웅은 재위 5년에 장녀(長女)를 석탈해(昔脫解)에게 시집보내고 재위 7년에 석탈해를 대보(大輔)로 임명하여 석탈해에게 군국정사를 모두 맡겼다. 이때부터 신라의 실권(實權)은 왜인(倭人) 출신인 호공(瓠公)과 석탈해(昔脫解)에게로 넘어갔다.

그뒤 남해차차웅 20년조에는 태백(太白)이 태미(太微)로 들어갔다고 적혀 있다. 고대 우리민족은 태백(太白)이 태미(太微)로 들어가면 왕이 죽는다고 믿었는데, 위 문구는 남해차차웅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예언(豫言)하는 은유법 문구이다.

다음해 남해차차웅 21년(A.D 24년) 9월에 남해왕(南解王)이 죽을 즈음 탈해(脫解)는 신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바로 왕위에 오르지 않고 진한(辰韓) 6부 세력의 반발을 우려하여 유리(儒理)를 왕으로 즉위시켰다.

남해차차웅 문구에서 남해왕이 곧 죽을 것을 예언하고 그 다음해 죽었다는 것은 남해왕이 정상적으로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A.D 24년 즉위

「유리이사금은 남해의 태자다. 어머니는 운제부인이요, 갈문왕 일지의 딸이다(혹은 비의 성은 박이요 허루왕의 딸이라 함). 처음 남해가 돌아가고 유리가 들어서게 될 때 대보 탈해가 본래 덕이 있는 까닭으로 그 자리를 밀어 주니 탈해는 말하기를 "신기와 대보는 보통 사람이 감당 못하는 바요. 나는 듣건대 성스럽고 지혜 많은 인물일수록 이빨이 많다고 하니 시험 삼아 떡을 씹어보오" 하여 마침내 유리의 치리가 많았다. 이에 좌우와 더불어 받들어 세우고 호를 "이사금"이라 하였다. 儒理尼師今立 南解太子也 母雲帝夫人 妃日知葛文王之女也 或云妃姓朴 許婁王之女 初南解薨 儒理當立 以大輔脫解 素有德望 推讓其位 脫解曰 "神器大寶 非庸人所堪 吾聞聖智人多齒" 試以餠 三之 儒理齒理多 乃與左右奉立之 號尼師今 古傳如此 金大問則云 尼師今方言也 謂齒理 昔南解將死 謂男儒理壻脫解曰 '吾死後 汝朴昔二姓 以年長而嗣位焉' 其後 金姓亦興 三姓以齒長相嗣 故稱尼師今」

「2년 봄 2월 친히 시조의 사당에 제사하고 대사령을 내렸다. 二年 春二月 親祀始祖廟大赦」

「31년 봄 2월, 자궁에 혜성이 나타났다. 春二月 星孛于紫宮

「33년 여름 4월 용이 금성 안 우물 속에 나타나더니 이윽고 소낙비가 서북방에서 몰려왔다. 5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三十三年 夏四月 龍見金城井 有頃暴雨自西北來 五月 大風拔木

「34년 가을 9월 왕이 몸이 불편하게 되자 신료들에게 부탁하되 "탈해는 국척의 신분이요 대보의 지위로서 누차 공로와 명예를 나타냈소. 내 두 아들은 재질이 그에 비해 너무도 떨어지니 내가 죽거든 탈해를 대위에 서게 하오. 부디 나의 유훈을 잊지 마오" 하였다. 三十四年 秋九月 王不豫謂臣寮曰脫解身聯國戚位處輔臣屢著功名朕之二子其才不及遠矣吾死之後殺卽大位以無忘我遺訓」

「34년(A.D 57년) 겨울 10월 왕이 돌아가니 사릉원 안에 장사지냈다. 冬 十月 王薨葬蛇陵園內」

 

위 이사금(尼師今)은 임금이라는 뜻의 고대 말이다.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31년조(실은 21년조 A.D 44년)에 나오는 자궁(紫宮)은 왕궁(王宮)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며, 혜성(彗星)은 다른 곳에서 이동해 온 대무리를 뜻하는데, 이 문구에서는 군사를 거느리고 온 탈해를 가리킨다. 그런데 31년조(실은 21년조)부터 연도가 10년씩 늦추어져 적혀 있는 것은, 정변으로 인한 공백을 숨기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동 33년조(실은 23년조 A.D 46년)에 나오는 용(龍)은 해님의 아들 즉 임금을 뜻하고, 우물은 강 또는 바다에 근거지를 둔 세력을 뜻하며, "금성(金城) 안 우물 속에 용(龍)이 나타났다"는 문구는 석탈해(昔脫解)가 강 또는 바다에 근거지가 있는 세력을 이끌고 신라의 궁성으로 쳐들어 와 임금을 칭하였다는 뜻이다. 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는 문구는 왕궁의 서북쪽으로 소나기가 퍼붓듯 몰려든 탈해의 군사에 의하여 유리왕(朴氏로 보고 나무<朴>로 표현) 세력이 뿌리 뽑혔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동 34년조(실은 24년조 A.D 47년)에 유리이사금이 죽기 전 유언(遺言)으로 석탈해(昔脫解)에게 왕위를 양위(讓位)한 것처럼 적혀 있는 것은 탈해가 유리이사금을 죽이고 신라왕으로 즉위한 것을 숨기기 위한 것이다. 또 31년조부터 연도가 실제보다 10년씩 늦어져 있는 것은 정변으로 인한 공백기를 숨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탈해이사금은 유리이사금 31년(실은 21년)에 대 무리를 이끌고 신라로 온 탈해인지? 아니면 그 전인 혁거세왕 39년 즉 B.C 19년에 아진포구에 도착한 탈해인지? 분명치 않으나 가락국기(駕洛國記) 내용으로 보아 신라왕에 오른 탈해이사금은 B.C 19년에 아진포구에 온 탈해가 아니라 A.D 44년에 대 무리를 이끌고 신라로 온 탈해로 보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본기에 탈해왕의 즉위시기가 실제보다 10년 늦은 A.D 57년으로 적혀 있는 것은, 탈해가 정변을 일으켜 신라왕이 되었을 때 진한연맹의 여러 유력 소국들이 10년 동안 탈해를 신라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A.D 57년 즉위

「탈해이사금(吐解라고도 함]의 성은 석씨요 비는 아효부인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 소생인데 그 나라는 왜국 동북방 1천리에 있었다. 처음 그 나라 왕이 여인국 왕녀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던 바 태기가 있어 7년만에 큰 알 하나를 낳았다. 왕은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못한지라 버려 마땅하다"고 하나 그녀는 차마 못하여 비단으로 알을 싸고 보물을 아울러 싸서 독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갈 데로 가게 하였다. 그래서 그 독이 처음 금관국 해변에 밀리니 금관 사람들이 괴히 여겨 가져가지 아니하였다. 또 진한 아진포구에 닿으니 이 해는 시조 혁거세가 재위한지 39년이었다. 때마침 해변에 사는 노모가 줄로 끌어당기어 해안에 매고 독을 열어 본즉 작은 아이 하나가 들어 있으므로 노모가 데려다 길렀다. 장성하자 신장이 9척이요 풍신이 수려하고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누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성씨를 알 수 없는 즉 처음 독이 떠내려 올 때 까치가 울며 따랐으니 "鵲(작:까마귀)"의 한편을 떼어 석(昔)으로 성을 삼고 또 얽어 맨 독 안에서 풀려 나왔으니 탈해라고 이름하여 마땅하다"고 하였다. 탈해는 맨 처음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아 그 노모를 공양하되 조금도 게을리 하는 기색이 없었는데, 노모는 이르기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닌다. 골상이 특수하니 학문에 종사하여 공명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학문에만 힘써 지리마저 알 게 되었다. 양산 아래 있는 호공의 집터를 바라보니 길지이므로 꼬임수를 써서 빼앗아 살았다. 그 땅이 뒤에 월성이 되었다. 남해왕 5년에 왕은 그의 어짊을 듣고 사위를 삼았다. 7년에 등용하여 대보를 삼고 정사를 위촉하였다. 유리왕이 돌아갈 적에 하는 말이 "선왕의 유언에 '나 죽은 뒤에는 아들 사위를 막론하고 나이 많고 어진 자로 위를 계승케 하라'하였다. 이 까닭으로 내가 먼저 즉위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마땅히 이 자리를 물려주어야한다"고 하였다. 탈해가  즉위하니 그 때 나이는 62세였다. 脫解尼師今立一云吐解 時年六十二 姓昔 妃阿孝夫人 脫解本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 初其國王 娶女國王女爲妻 有娠七年 乃生大卵 王曰 "人而生卵不祥也 宜棄之" 其女不忍 以帛  卵  寶物置於 中 浮於海 任其所往 初至金官國海邊 金官人怪之不取 又至辰韓阿珍浦口 是始祖赫居世 在位三十九年也 時海邊老母 以繩引繫海岸 開 見之 有一小兒在焉 其母取養之 及壯身 長九尺 風神秀朗 知識過人 或曰 "此兒不知姓氏 初 來時 有一鵲飛鳴而隨之 宜省鵲字 以昔爲氏 又解 而出 宜名脫解" 脫解始以漁釣爲業 供養其母 未嘗有懈色 母謂曰 "汝非常人 骨相殊異 宜從學 以立功名" 於是 專精學問 兼知地理 望楊山下瓠公宅 以爲吉地 設詭計 以取而居之 其地後爲월성 至南解王五年 聞其賢 以其女妻之 至七年 登庸爲大輔 委以政事 儒理將死曰 "先王顧命曰 '吾死後 無論子壻 以年長且賢者 繼位' 是以寡人先立 今也宜傳其位焉"」

[탈해치질금(토해이사금이라고도 한다). 남해왕 때(고본에 말하기를 임인년에 왔다고 하였으나 이는 잘못이다. 가까운 일이라면 노례왕<유리왕>이 즉위한 처음보다 후일 것이니 서로 사양한 일이 없었을 것이요, 앞의 일이라면 혁거세 세대에 있었는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임인년은 틀림을 알 수 있다.) 가락국 바다 가운데 배가 와서 정박했다. 그러자 그 나라의 수로왕이 백성들과 함께 북을 울리며 나와 맞이해 머물게 하고자 하니, 배가 날듯이 달아나 계림 동쪽 아래의 서지촌 아진포(지금도 상서지촌과 하서지촌이라는 이름이 있다)에 이르렀다. 그 때 포구에 한 노파가 있었으니, 이름은 아진의선으로 혁거세왕의 해척이었다. 노파가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이 바다 가운데는 원래 바위가 없는데 어디서 까치가 모여들어 우는가?"하고 배를 저어가 찾아보니, 까치가 한 배 위에 모여 있고 배 안에는 궤 하나가 있는데, 길이가 20척에 넓이가 13척이었다. 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 아래 매어두고는 길흉을 알 수가 없어 하늘에 맹세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열어보니 그 안에는 단정한 남자가 있는데, 칠보와 노비가 그 배 가운데 가득히 있었다. 7일 동안 먹여 주니 이에 말하였다. "나는 본래 용성국 사람이다(또는 정명국 사람이라고도 하고 혹은 완하국 사람이라 하는데, 완하는 화하국이라고도 한다. 용성국은 왜의 동북쪽 1,000리 지점에 있다). 우리나라에 28용왕이 있는데, 사람의 태에서 출생하여 5,6세 때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만민을 가르치고 성명을 수정하며 8품의 성골이 있으나, 간택함이 없고 모두 대위에 오른다. 때에 우리 부왕 함달파가 적녀국왕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는데, 오랫동안 아들이 없자 자식 두기를 빌어 7년 후 한 개의 큰 알을 낳았다. 그러자 대왕이 군신들을 모아 묻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일은 고금에 없거늘 거의 길상은 아닐 것이다' 하고는 이에 궤짝을 만들어 나를 넣고 아울러 칠보와 노비를 배 가운데 싣고 띄워 보내며 축원하기를 '아무데나 인연이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집안을 이루어라' 하였다. 그러자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해 이곳에 이른 것이다". 말을 마치자 그 동자는 지팡이를 짚고 두 노비를 이끌고는 토함산 위로 올라가 석총을 만들었다. 7일 동안 머물고는 성 안의 살 만한 곳을 찾아보니 초승달처럼 생긴 한 봉우리가 있었는데 오래 살 만한 땅이었다. 그래서 내려가 살펴보니 호공의 집이었다. 이에 계책을 써 몰래 그 옆에다 숫돌과 숯을 묻고는 이튿날 이른 아침에 그 집 문앞에 이르러 말하기를 "이곳은 우리 할아버지 대에 살던 집이다" 하니 관에서 말하기를 "무슨 근거로 너의 집이라 하느냐?" 하였다. 그 아이가 말하기를 "나는 본래 대장장이인데, 잠깐 이웃 고을에 간 사이에 그 사람이 차지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청하건데 땅을 파 조사해 보소서" 하였다. 그 말대로 하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빼앗아 살았다. 이때 남해왕이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고 장공주로 하여금 아내를 삼게 하니, 이 사람이 아니부인이다. 하루는 토해가 동악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에 백의로 하여금 마실 물을 떠오게 하였는데, 백의가 물을 길어오며 중도에서 먼저 맛을 보고 바치자 그 각배가 입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꾸짖으니 백의가 맹세하기를 "이후 가깝고 먼 곳을 막론하고 먼저 맛보지 않겠습니다." 하자 비로소 떨어졌다. 이로부터 백의가 두려워하여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지금 동악 가운데 한 우물이 있는데 세속에서 요내정이라 하니 이것이 그 샘이다. 노례왕이 죽자 탈해가 이어서 광무제 중원 2년 정사 6월에 왕위에 올랐는데, 옛날에 내 집이라 하여 남의 집을 빼앗았기 때문에 성을 석씨(昔氏)로 하였다. 혹은 까치로 인해 궤를 열었기 때문에 "鳥" 자를 버리고 성을 석씨라 하였으며, 궤를 열고 알에서 벗어나 출생했기 때문에 탈해라 이름 하였다 한다. 재위 23년 건초 4년 기묘(A.D 79년 : 삼국사기와 1년 차이가 난다)에 죽으니 소천구 중에 장례하였다. 후에 신이 말하기를 "내 뼈를 조심해 묻으라" 하였다. 그 해골의 둘레가 3척 2촌, 신골의 길이는 9척 7촌에, 치아는 하나처럼 엉켰으며, 골절은 모두 사슬처럼 이어져 있어 이른바 천하무적의 역사의 골격이었다. 그것을 부수어 소상을 만들어 대궐 안에 안치하니, 신이 또 말하기를 "내 뼈를 동악에 두라" 하였기 때문에 그곳에 봉안하도록 하였다(혹 이런 말도 있다. 봉안 후 27세 문무왕 시대 조로 2년 경진 3월 15일 신유일 밤 태종의 꿈에 매우 위엄있고 무서워 보이는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탈해왕이다. 내 뼈를 소천구에서 발굴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라" 하여 왕이 그 말대로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국사가 끊이지 않고 있으니 바로 동악신이라 하였다. 脫解齒叱今(一作吐解尼師今) 南解王時(古本云 壬寅年至者謬矣 近則後於弩禮卽位之初無爭讓之事 前則在於赫居之世 故知壬寅非也) 駕洛國海中有船來泊 其國首露王 與臣民鼓牉而迎 將欲留之 而舡乃飛走 至於鷄林東下西知村阿珍浦(今有上西知下西知村名) 時浦邊有一垯 名阿珍義先 乃赫居王之海尺之母 望之謂曰 此海中元無石植 何因鵲集而鳴 拏舡尋之 鵲集一舡上 舡中有一櫃子 長二十尺 廣十三尺 曳其船 置於一樹林下 而未知凶乎吉乎 向天而誓爾 俄而乃開見 有端正男子 竝七寶奴婢滿載其中 供給七日 娆言曰 我本龍城國人(亦云正明國 或云琓夏國 琓夏或作花廈國 龍城在倭東北一千里) 我國嘗有二十八龍王 從人胎而生 自五歲六歲 繼登王位 敎萬民修正性命 而有八品姓骨 然無揀擇 皆登大位 時我父王含達婆 聘積女國王女爲妃 久無子胤 禱祀求息 七年後産一大卵 於是大王會問群臣 人而生卵 古今未有 殆非吉祥 乃造櫃置我 幷七寶奴婢載於舡中 浮海而祝曰 任到有緣之地 立國成家 便有赤龍 護舡而至此矣 言訖 其童子曳杖率二奴 登吐含山上作石塚 留七日 望城中可居之地 見一峯如三日月 勢可久之地 乃下尋之 卽瓠公宅也 乃設詭計 潛埋礪炭於其側 詰朝至門云 此是吾祖代家屋 瓠公云 否 爭訟不決 乃告于官 官曰 以何驗是汝家 童曰 我本冶匠 乍出隣鄕 而人取居之 請掘地咭看 從之 果得礪炭 乃取而居焉 時南解王知脫解是智人 以長公主妻之 是爲阿尼夫人 一日吐解登東岳 廻程次 令白衣索水飮之 白衣汲水中路先嘗而進 其角杯貼於口不解 因而瓓之 白衣誓曰 爾後若近遙不敢先嘗 然後內解 自此白衣 晹服 不敢欺罔 今東岳中有一井 俗云遙乃井是也 及弩禮王崩 以光武帝中元六(二)年丁巳六月 乃登王位 以昔是吾家取他人家故 因姓昔氏 或云 因鵲開櫃 故去鳥字 姓昔氏 解櫃脫卵而生 故因名脫解 在位二十三年 建初四年己卯崩 葬疏川丘中 後有神詔 愼埋葬我骨 其觸庺周三尺二寸 身骨長九尺七寸 齒凝如一 骨節皆連曈 所謂天下無敵力士之骨 碎爲塑像 安闕內 神又報云 我骨置於東岳 故令安之(一云 崩後二十七世文虎王代 調露二年庚辰三月十五日辛酉夜 見夢於太宗 有老人貌甚威猛 曰我是解脫也 拔我骨於疏川丘 塑像安於土含山 王從其言 故至今國祀不絶 卽東岳神也云)] 三國遺事

「2년 봄 정월 호공을 등용하여 대보를 삼았다. 2월 친히 시조의 사당에 제사하였다. 二年 春正月 拜瓠公爲大輔 二月親祀始祖廟」

「9년 봄 3월 왕이 밤에 들으니 금성 서편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울음소리가 났다. 새벽에 호공을 보내 보니 금색으로 된 작은 궤짝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린 채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으므로, 호공이 돌아가 보고하니 왕은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갖다 열어 본 즉 작은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었는데 얼굴이 매우 잘생겼다. 왕은 기뻐하며 좌우더러 이르기를 "이야말로 하늘이 내게 좋은 아이를 끼쳐 준 것이 아니냐" 하고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총명하여 지략이 많으므로 알지라 이름하고 금독에서 나왔기로 성을 김씨라 하고 시림을 고치어 계림이라 하고 따라서 국호로 삼았다. 九年 春三月 王夜聞金城西始林樹間有鷄鳴聲遲明遣瓠公視之有金色小독掛樹枝白鷄鳴於其下瓠公還告王使人取독開之有小男兒在其中姿容奇偉上喜謂左右曰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乃收養之及長聰明多智略乃名閼智以其出於金독姓金氏改始林名鷄林因以爲國號」 [註 닭은 십이지(十二支)에서 서쪽 방향이다. 이때 김씨의 시조 설화(說話)에 용(龍), 까마귀(烏), 백마(白馬), 알(閼) 등을 사용하지 않고 닭을 사용한 것은 이때 김씨계 무리가 금성(金城)보다 서쪽인 경주에 정착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11년(A.D 67년) 봄 정월에 박씨의 귀척으로써 나라 안의 주,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는데, 이름을 주주, 군주라 하였다. 2월에 순정을 이벌찬으로 삼아 정치의 일을 맡겼다. 十一年 春正月 以朴氏貴戚 分理國內州郡 號爲州主郡主 二月 以順貞爲伊伐飡 委以政事」

「理二十三年 王崩 水葬於(?)未召疏井丘中 塑骨安東岳今東岳大王」삼국유사1卷1王曆

「24년(A.D 80년) 여름 4월 서울에 태풍이 불었다. 성의 동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가을 8월에 왕이 들어가니 성 북쪽 양정 언덕에 장사지냈다. 二十四年 夏四月 京都大風 金城東門自壤 秋八月王薨葬城北壤井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의 이름이 탈해(脫解)로, 삼국유사에는 탈해(脫解) 또는 토해(吐海)로 적혀 있다. 탈해 또는 토해는 해(解=태양=천제)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뜻이므로, 이 명칭(名稱)에 의하면 탈해는 해님의 아들을 칭하였다. 이는 탈해가 "鵲"의 한쪽 글자를 떼어 성(姓)을 "昔"이라 지은 데서도 알 수 있다.

탈해(脫解)는 신라를 장악한 후 재위 2년에 역시 왜인 출신인 호공(瓠公)을 대보(大輔)에 임명하여 군국정사를 맡겼다. 그리고 재위 3년에 북쪽(검은 구름)에서 침략이 예상되자 왜국(倭國)과 우호관계를 맺고 사신을 교환하였다.

탈해이사금 9년(A.D 65년)에 김씨계(金氏系) 무리가 경주로 이주하였다. 김씨계(金氏系) 무리는 황금숭배 신앙(信仰)이 강한 만주의 내륙지방에서 배를 타고 경상도 동해안에 도착한 후 동해안과 가까운 곳에는 이미 먼저 이주(移住)한 무리가 거주하고 있자 내륙인 경주(慶州) 방면으로 이주하였다. 동조 문구로 보아 이때 탈해이사금은 호공(瓠公)을 보내어 김씨계(金氏系) 무리의 이주상황을 살펴보았고, 김씨계 무리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때 탈해왕(脫解王)이 호공(瓠公)을 김씨계 무리에게 보낸 것은 김씨계의 무력(武力)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동조에는 계림(鷄林)의 닭 울음소리가 금성(金城)에 들렸다고 적혀 있으나, 이 무렵 금성은 토함산(吐含山) 동쪽 방면에 있었고, 계림은 경주에 있었으므로, 금성과 계림은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이 문구의 의미는 김씨계(金氏系)의 위세가 금성(金城)에까지 알려졌다는 뜻이다. 고대 우리 민족은 닭은 영기가 많은 천조(天鳥)이고, 태양의 상징으로 인식하였다. 새벽에 울음으로써 빛의 도래를 예고하여 음귀(陰鬼)를 쫓아내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닭을 태양의 새로 인식하였다. 동조의 "鷄林" "닭 울음소리" "금색 궤짝" 등 문구는 뒤에 김씨계 후손(後孫)이 시조를 미화(美化)한 것이다. [註 어떤 분은 문무왕릉비문을 근거로 김알지(金閼智)는 휴도국(休屠國)의 왕자였다가 한무제(漢武帝)를 섬긴 김일제(金日磾)의 5대손 성한왕(星漢王)이고, 김수로왕(金首露王)은 김일제의 동생 윤(倫)의 5대손 탕(湯)이라고 주장한다. 이분 주장은 김씨가 왕망(王莽)이 신(新)을 세우는 것을 도왔다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보복을 피하여 각 신라와 가야로 왔다고 주장하나, 김수로가 온 시기는 A.D 42년이고, 김알지가 온 시기는 A.D 65년이므로, 광무제가 후한을 세운 A.D 25년과 많은 차이가 난다. 이는 김씨계가 후대에 가문을 미화(美化)하기 위하여 꾸민 것으로 생각된다.]

탈해왕(脫解王)은 진한(辰韓) 6부의 반발과 마한(馬韓)의 침범을 방지하기 위하여 금성(金城) 서쪽 경주 방면으로 이주한 김씨계 무리와 손을 잡고 나라 이름을 사로(斯盧)에서 김씨계의 시조 김알지(金閼智)가 태어난 시림(始林)을 따서 계림(鷄林)으로 바꾸어 이주세력이면서도 별다른 공(功)이 없는 김씨(金氏)를 박씨(朴氏), 석씨(昔氏)와 동일한 왕족급(王族級)으로 올려주고 석탈해(昔脫解)의 동맹세력으로 만들었다. 이는 당시 경주(慶州) 방면으로 이주한 김씨계(金氏系)의 세력이 강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 박씨(朴氏)와도 화해(和解)의 손을 벌여 박씨(朴氏)의 귀척(貴戚)으로 나라 안의 주(州), 군(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탈해이사금 24년(A.D 80년) 4월조의 "성의 동문이 저절로 무너졌다"는 문구는 금성(金城)에 정변이 일어났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탈해(脫解)가 김씨계(金氏系) 및 박씨계(朴氏系)와 손을 잡고도 정변에서 패배한 것은 왜인(倭人)의 독주로 인한 진한(辰韓) 6부의 반발 때문으로 보인다. 탈해이사금은 이 정변이 있은지 4개월 후 죽었다. 삼국유사 왕력(王歷) 문구는 탈해(脫解)가 정변으로 죽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A.D 80년 즉위

「파사이사금은 유리왕의 둘째 아들(혹은 유리왕의 아우 나로의 아들이라고도 함)이다. 비는 사성부인이니 갈문왕 허루의 딸이다. 처음 탈해가 돌아가니 신료들이 유리왕의 태자 일성을 세우려고 하던 차 어떤 사람 말이 "일성이 비록 적자이지만 위엄과 총명이 파사만 못하다"고 하므로 드디어 파사를 세웠다. 파사가 절검하여 씀씀이를 줄이고 백성을 사랑하니 국민이 아름답게 여겼다. 婆娑尼師今 立 儒理王第二子也 <或云儒理弟1)奈老之子也> 妃金氏史省夫人 許婁葛文王之女也 初脫解薨 臣僚欲立儒理太子逸聖 或謂 逸聖雖嫡嗣 而威明不及婆娑 遂立之 婆娑節儉省用而愛民 國人嘉之」

「2년 봄 2월 친히 시조의 사당에 제사하였다. 二年 春二月 親祀始祖廟」

「32년 여름 4월 성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5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三十二年 夏四月 城門自毁 自五月至秋七月不雨」

「33년(A.D 112년) 겨울 10월 왕이 돌아가니 사릉원 안에 장사하였다. 三十三年 冬十月 王薨葬蛇陵園內」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이 "파사매금(波沙寐錦)"으로 적혀 있다.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도 신라 임금이 "寐錦(매금)"으로 적혀 있는데, 매금(寐錦)은 신라 임금을 낮추어 부른 말로 보인다.

파사이사금 32년(A.D 111년) 4월조는 월성(月城)에 정변이 일어났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파사이사금은 이 정변이 있은지 1년 6개월 후에 죽었다.

 

지마이사금(祇摩尼師今)

A.D 112년 즉위

「지마이사금(혹은 지미라고도 함) 파사왕의 적자다. 어머니는 사성부인이요 비는 김씨 애례부인이니 갈문왕 마제의 딸이다. 처음 파사왕이 유찬의 늪으로 사냥 가는데 태자로 수행하였다. 사냥을 마치고 한기부를 지나니 이찬 허루가 음식 대접을 하여 술이 얼큰할 적에 허루 아내가 젊은 딸자식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니 이찬 마제의 아내 역시 그 딸을 끌고 나왔다. 태자는 마제의 딸을 보고 기뻐하니 허루가 마땅찮게 생각하므로 왕은 허루더러 이르되 "이 땅은 이름이 대포인데 공이 여기서 미주성찬으로 즐겁게 해주니 마땅히 주다(뒤에 각간이라 하였음)의 위를 주어 계급이 이찬의 위에 있게 해야겠다"하였다. 그리고 마제의 딸로써 태자의 짝을 정했다. 祇摩尼師今立 或云祇味 婆娑王嫡子 母史省夫人 妃金氏愛禮夫人 葛文王摩帝之女也 初婆娑王獵於楡飡之澤 太子從焉 獵後 過韓기部 伊飡 許婁饗之 酒 許婁之妻 携少女子出舞 摩帝伊飡之妻 亦引出其女 太子見而悅之 許婁不悅 王謂許婁曰 "此地名大 公於此 置盛饌美 以宴 之 宜位酒多 在伊飡之上" 以摩帝之女 配太子焉 酒多後云角干」

「2년 봄 2월 친히 시조의 사당에 제사하였다. 二年 春二月 親祀始祖廟」

「21년 봄 2월 궁의 남문이 화재를 입었다. 二十一年 春二月 宮南門災」

「23년(A.D 134년) 봄 여름이 가물었다. 가을 8월 왕이 돌아가니 아들이 없었다. 二十三年 春夏 旱 秋八月 王薨 無子」

 

지마이사금(祇摩尼師今) 21년조는 월성(月城)에 정변이 일어났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지마이사금은 이 정변이 있은지 2년 후 죽었다.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A.D 134년 즉위

「일성이사금은 유리왕의 장자(갈문왕 일지의 아들이라고도 함)요 비는 박씨이니 지소례왕(추존)의 딸이다. 逸聖尼師今 儒理王之長子(或云日知葛文王之子) 妃朴氏支所禮王之女」

「원년 9월 대사면령을 내렸다. 元年 九月 大赦」

「2년 봄 정월 친히 시조의 사당에 제사하였다. 二年 春正月 親祀始祖廟」

「20년 겨울 10월 궁문이 화재를 입었다. 혜성이 동방에 나타나고 또 동북방에 나타났다. 二十年 冬十月 宮門災彗星見東方又見東北方」 

「21년(A.D 154년) 봄 2월 왕이 돌아갔다. 二十一年 春二月 王薨」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20년 10월조는 금성(金城)에 정변이 일어났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20년 10월조의 궁문(宮門)이 화재를 입었다는 문구는 단순히 자연현상을 적은 것이 아니고 정변이 일어났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고, 혜성(彗星)이 동방(東方)과 동북방(東北方)에 나타났다는 것은 새로운 무리가 동방과 동북방에 나타났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이 정변 후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이 임금으로 되었고, 아달라이사금 원년에 계원(繼元)에게 군국정사를 모두 맡긴 것으로 보아,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을 쫒아내는데 계원의 공로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일성이사금은 이 정변이 있은지 4개월 후 죽었다.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A.D 154년 즉위

「아달라이사금은 일성이사금의 장자다. 신장은 7척이요, 콧대는 우뚝하고 기이한 상을 지녔다. 어머니는 박씨니 지소례왕의 딸이요, 비는 박씨 내례부인이니 지마왕의 딸이다. 일성이 돌아가니 위를 계승하였다. 阿達羅尼師今 立 逸聖長子也 身長七尺  準有奇相 母朴氏 支所禮王之女 妃朴氏內禮夫人 祇摩王之女也」

「원년 3월 계원으로 이찬을 삼아 군국정사를 맡겼다. 元年 三月 以繼元爲伊飡委軍國政事」

「2년 봄 정월 친히 시조의 사당에 제사하고 대사령을 내렸다. 二年 春正月 親祀始祖廟大赦」

「21년 봄 정월 흙 비가 내렸다. 2월 가뭄이 들어 우물이 말랐다. 二十一年 春正月 雨土二月旱井泉渴」

「31년(A.D 184년) 봄 정월 왕이 돌아갔다. 三十一年 春三月 王薨」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이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의 아들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아달라이사금은 정변을 일으켜 일성이사금을 쫓아낸 후 즉위하였으므로 일성이사금의 아들이 아닐 것이다. 만약 아달라이사금이 일성이사금의 아들이라면 계원(繼元)이 정변이 일으켜 일성이사금을 쫓아내고 아달라이사금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운 경우가 될 것이다.

 

벌휴(발휘)이사금(伐休<發暉>尼師今)

A.D 184년 즉위 

「벌휴이사금(발휘라고도 함)의 성은 석씨요, 탈해왕의 아들인 각간 구추의 아들이요, 어머니의 성은 김씨니 지진내례부인이다. 아달라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으니 나라 사람이 추대하여 세웠다. 왕은 풍운을 점쳐 홍수와 가뭄 및 풍년과 흉년을 미리 알며 또 사람의 간사하고 바름을 아니 사람들이 성인이라 하였다. 伐休<一作發暉>尼師今立 姓昔 脫解王子仇鄒角干之子也 母姓金氏 只珍內禮夫人 阿達羅薨 無子 國人立之 王占風雲 預知水旱及年之豊儉 又知人邪正 人謂之聖」

「2년 봄 정월 친히 시조의 사당에 제사하고 대사령을 내렸다. 二年 春正月 親祀始祖廟大赦」

「13년(A.D 196년) 봄 2월 궁궐을 중수하였다. 3월 가물었다. 여름 4월 대궐 남쪽 큰 나무에 벼락이 떨어지고 또 금성 동문에도 벼락이 떨어졌다. 왕이 돌아갔다. 十三年 春二月 重修宮室 三月旱 夏四月震宮南大樹又震金城東門 王薨」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13년조는 정변이 일어나 대궐의 남쪽과 동쪽 2 방면으로 쳐들어 온 세력이 벌휴이사금을 죽이고 새로운 임금으로 즉위하였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동 문구에는 왕을 뜻하는 "辰(진=용)"이 벼락을 뜻하는 "震(진)"으로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A.D 230년 즉위

「조분이사금(제귀라고도 함)의 성은 석씨요 벌휴이사금의 손자다. 아버지는 갈문왕 골정(홀정이라고도 함)이요 어머니는 김씨 옥모부인이니 갈문왕 구도의 딸이요, 비는 아이혜부인이니 내해왕의 딸이다. 내해왕이 돌아갈 적에 사위 조분에게 왕위를 계승하라는 유언이 있었기 때문에 들어서게 되었다. 왕은 키가 크고 풍채가 아름다우며 일을 당하면 밝게 처리하니 나라 사람이 경외하였다. 助賁尼師今立 一云諸貴 姓昔氏 伐休尼師今之孫也 父骨正 一作忽淨葛文王 母金氏玉帽夫人 仇道葛文王之女 妃阿爾兮夫人 奈解王之女也 前王將死 遺言以壻助賁繼位 王身長 美儀表 臨事明斷 國人畏敬之」

「원년 연충을 등용하여 이찬으로 삼고 군국정사를 맡겼다. 가을 7월 시조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元年 拜連忠爲伊飡委軍國事 秋七月 謁始祖廟」

「17년 겨울 10월 동남방에 백기가 필련 같이 떠돌았다. 11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十七年冬十月東南有白氣如匹練十一月京都地震」

「18년(A.D 247년) 여름 5월 왕이 돌아갔다. 十八年 夏五月 王薨」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17년(A.D 246년) 10월조는 조분이사금이 암살당했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조분이사금이 A.D 247년 5월에 죽었다고 적혀 있다. 이는 신라의 사가(史家)들이 궁중정변을 숨기고 신라 왕통의 연속성을 가장하기 위하여 조분이사금의 사망시기를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의 즉위시기에 맞추어 늦추어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조분이사금의 사망시기가 실제보다 7개월 늦어져 있다.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A.D 247년 즉위

「첨해이사금은 조분왕의 동복 아우이다 조분왕을 계승하여 즉위하였다. 沾解尼師今助賁王之同母弟也繼助賁立」

「원년 가을 7월 시조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元年 秋七月 謁始祖廟」

「3년 여름 4월 왜인이 우노를 죽였다. 가을 7월 남당(도당이라고도 함)을 대궐 남쪽에 지었다. 양부를 이찬으로 삼았다. 三年 夏四月 倭人殺舒弗邯于老 秋七月 作南堂於宮南 南堂或云都堂 以良夫爲伊飡」 

「7년(A.D 253년) 여름 4월 용이 대궐 안 동쪽 못에 나타났다. 금성 남쪽에 있는 누운(臥) 버들(柳)이 저절로 일어났다. 5월에서 7월까지 비가 오지 않으므로 시조의 사당 및 명산에 기도하고 제사하니 마침내 비가 왔다. 七年 夏四月 龍見宮東池 金城南臥柳自起 自五月至七月 不雨 禱祀祖廟及名山 乃雨 」

「15년(A.D 262년) 겨울 12월 28일 왕이 갑자기 병이 나서 돌아갔다. 冬 十二月二十八日 王暴疾薨」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은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이 암살당한지 7개월 후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첨해이사금은 재위 7년만에 미추이사금에 의하여 사실상 폐위되었다.

첨해이사금 7년조에 나오는 용(龍)은 첨해이사금 뒤에 왕이 된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을 가리키고, 금성(金城) 남쪽은 남당(南堂)을 가리키며, 臥(와)는 신하(臣+人)를 가리키고, 버들(柳=楊)은 양(楊)과 같은 발음인 양(良) 즉 양부(良夫)를 가리키며, 버들이 저절로 일어났다는 것은 미추이사금이 첨해이사금을 쫓아내는데 양부(良夫)가 스스로 앞장 선 것을 은유법(隱喩法)으로 적은 것이다.

위 문구의 전체적 의미는 미추이사금이 바다를 통해 신라로 온 세력을 이끌고 신라의 궁성(宮城)으로 쳐들어 와서 첨해이사금을 사실상 폐위(廢位)시키고 왕으로 즉위하였는데, 이때 남당(南堂)의 양부(良夫)가 스스로 나서 미추이사금이 첨해이사금을 쫓아내는데 앞장선 공로로 미추이사금의 신임(信任)을 받아 실권을 잡았다는 뜻이다. 첨해이사금기(沾解尼師今紀)에는 첨해이사금이 15년 동안 재위한 것으로 적혀 있으나, 위 문구를 보면 첨해이사금은 재위 7년만에 사실상 폐위되었고, 그때부터 미추이사금이 무력(武力)을 배경으로 스스로 왕이 되었다.

미추이사금이 첨해이사금을 쫓아내고 스스로 왕이 된 시기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실제연도보다 10년이나 늦어져 있다. 이는 미추이사금이 사실상 궁성을 장악하여 사실상 왕이 된지 10년만에 첨해이사금이 죽자 비로소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A.D 262년 즉위

「미추이사금(미조라고도 함<삼국유사에는 미조 혹은 미고로 적혀 있다>)의 성은 김씨이다. 어머니의 성은 박씨이니 갈문왕 이칠의 딸이요, 비 광명부인은 석씨이니 조분왕의 딸이다. 그 선조 알지가 계림에서 출생하자 탈해왕이 데려다가 궁중에서 길러 내어 뒤에 대보를 삼았다. 알지가 세한을 낳고 세한이 아도를 낳고 아도가 수류를 낳고 수류가 욱보를 낳고 욱보가 구도를 낳으니 구도는 바로 미추의 아버지다. 첨해왕이 아들이 없으니 나라 사람이 미추를 세웠다. 김씨가 나라를 차지한 것이 이에 비롯되었다. 味鄒尼師今立 一云味照 姓金 母朴氏 葛文王伊柒之女 妃昔氏光明夫人 助賁王之女 其先閼智 出於鷄林 脫解王得之 養於宮中 後拜爲大輔 閼智生勢漢 勢漢生阿道 阿道生首留 首留生郁甫 郁甫生仇道 仇道則味鄒之考也 沾解無子 國人立味鄒 此金氏有國之始也」

「원년(실제년도 A.D 253년) 봄 3월 용이 대궐 안 동쪽 못에 나타났다. 가을 7월 금성 서문에 불이 나서 민가 백여 호가 연소되었다. 元年 春三月 龍見宮東池 秋七月 金城西門災延燒人家百餘區」

「2년(실제년도 A.D 254년) 봄 정월 이찬 양부를 승진시켜 서불한으로 삼고 내외병마사를 겸임케 하였다. 2월 친히 국조의 사당에 제사하고 대사령을 내렸다. 선친 구도를 봉하여 갈문왕으로 삼았다. 二年 春正月 拜伊飡良夫 爲舒弗邯 兼知內外兵馬事 二月親祀國祖廟 大赦 封考仇道爲葛文王」

「23년(A.D 284년) 봄 2월 나라 서쪽의 여러 성을 순무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돌아가니 대릉에 장사지냈다(죽장릉이라고도 함). 二十三年 春二月 巡撫國西諸城 冬十月 王薨 葬大陵(一云竹長陵)」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이 정식으로 진한연맹왕으로 즉위한 해는 A.D 262년이지만 사실상 사로국의 왕이 된 해는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7년인 A.D 253년이다.

미추이사금 원년조와 2년조에 적혀 있는 사실은 미추이사금이 정식으로 왕으로 즉위한 A.D 262년과 263년에 일어난 사실이 아니라 미추이사금이 사실상 왕으로 즉위한 A.D 253년과 254년에 일어난 사실이다.

미추이사금 원년 7월조에 금성(金城) 서문(西門)에 불이 나서 민가(民家) 백여(百餘) 호(戶)가 연소되었다는 문구는 어떤 무리가 금성 서문으로 쳐들어오는 정변이 있었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5년 이후 미추이사금 이전까지는 신라의 수도(首都) 금성(金城)이 토함산(吐含山) 동쪽 방면에 있었는데, 미추이사금의 무덤이 경주 대릉(大陵)에 있는 것으로 보아, 미추이사금은 석씨계(昔氏系)인 첨해이사금을 쫓아내고 사실상 왕이 된 후 석씨계의 근거지인 토함산(吐含山) 동쪽 방면의 금성(金城)을 버리고 김씨계(金氏系)의 근거지인 경주(慶州) 계림(鷄林) 방면에 신금성(新金城)을 쌓고 신금성으로 궁성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미추이사금 뒤 석씨계(昔氏系)인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이 왕이 되었고, 유례이사금은 즉위 후 궁성을 김씨계(金氏系)의 근거지인 경주의 신금성(新金城)에서 석씨계(昔氏系)의 근거지인 대본리(大本里 : 감은사 방면) 방면의 월성(月城)으로 궁성을 옮겼다. 이로 보아 미추이사금은 정변으로 유례이사금에게 왕위(王位)를 빼앗긴 것으로 보인다.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A.D 284년 즉위

「유례이사금(고기에는 제3왕 제14왕의 휘가 모두 유리로 되어 있다. 혹은 유례라고도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은 조분왕의 장자다. 어머니 성은 박씨니 갈문왕 나음의 딸이다. 박씨가 일찍이 밤길을 걸을 때에 별빛이 입으로 들어오더니 이내 태기가 있었고 낳던 날 저녁에는 이상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미추왕이 돌아가니 위를 계승하였다. 儒禮尼師今立 古記第三第十四二王同諱儒理 或云儒禮 未知孰是 助賁王長子 母朴氏 葛文王奈音之女 嘗夜行 星光入口 因有娠 載誕之夕 異香滿室」

「2년 봄 정월 시조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二年 春正月 謁始祖廟 」

「15년(A.D 298년) 봄 2월 서울에 심한 안개가 끼어 사람을 구별 못하다가 5일 만에 걷혔다. 겨울 12월 왕이 돌아갔다. 十五年 春二月 京都大霧不辯人五日而霽 冬十二月 王薨」

 

유례이사금 15년조에 심한 안개가 끼었다는 것은 정변이 있었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유례이사금은 이 정변이 있은지 10개월 후 죽었다.

 

기림<기립>이사금(基臨<基立>尼師今)

A.D 298년 즉위

「기림이사금(기립이라고도 함)은 조분이사금의 손자다. 아버지는 이찬 걸숙(조분왕의 손자라고도 함)이다. 천성이 관후하여 사람들이 다 칭송하였다. 유리왕이 돌아가니 위를 계승하였다. 基臨一云基立尼師今立 助賁尼師今之孫也 父乞淑伊飡) 一云 乞淑 助賁之孫也 性寬厚 人皆稱之.」

「2년 봄 2월 시조의 사당에 제사하였다. 二年 春二月 祀始祖廟 」

「13년(A.D 310년) 여름 5월 왕이 병이 들어 낫지 않으므로, 내외의 죄인을 석방하였다. 6월 왕이 돌아갔다. 十三年 夏五月 王寢疾彌留赦內外獄因 六月王薨」

 

기림이사금기(基臨尼師今紀)에는 정변에 관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A.D 310년 즉위

「흘해이사금은 내해왕의 손자다. 아버지는 각간 우노요 어머니는 명원부인이니 조분왕의 딸이다. 우노가 임금을 섬겨 공을 세워 여러 번 서불한이 되었다. 그는 흘해의 용모가 준수하고 정신이 총명하여 하는 일이 보통 사람과 다름을 보고 제후더러 이르되 "우리 가문을 일으킬 자는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하였다. 이때 기림왕은 돌아가고 아들조차 없으므로 여러 신하가 상의하되 흘해가 어리지만 노성의 덕을 지녔다 하고 이에 받들어 세웠다. 訖解尼師今 立 奈解王孫也 父于老角干 母命元夫人 助賁王女也 于老事君有功 累爲舒弗邯 見訖解狀貌俊異 心膽明敏 爲事異於常流 乃謂諸侯曰 興吾家者 必此兒也 至是 基臨薨 無子群臣議曰 訖解幼有老成之德 乃奉立之」

「2년 봄. 정월 급리를 아찬으로 삼아 정무를 위촉하고 내외병마사를 겸관케 하였다. 2월 친히 시조의 사당에 제사하였다. 二年 春正月 以急利爲阿飡委以政要兼知內外兵馬事二月祀始祖廟」

「39년(A.D 348년) 대궐 안의 우물이 갑자기 넘쳐흘렀다. 三十九年宮井水暴溢」

「47년(A.D 356년) 여름 4월 왕이 돌아갔다. 四十七年 夏四月王薨」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39년조 문구는 내물이사금(奈勿尼師今)이 바다를 통해 신라로 온 세력을 거느리고 신라의 궁성을 장악하므로써 신라의 힘이 강성해 졌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흘해이사금은 내물이사금이 신라의 궁성을 장악한지 8년 후 죽었다.

 

내물<나밀>이사금(奈勿<那密>尼師今)

A.D 356년 즉위

「내물이사금(나밀이라고도 함)의 성은 김씨요 갈문왕 구도의 손자다. 아버지는 각간 말구요, 어머니는 김씨 휴례부인이요, 비는 김씨 미추왕의 딸이다. 내물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어, 내물이 계승하였다(말구는 미추이사금 과 형제간임). 奈勿一云那密尼師今立 姓金 仇道葛文王之孫也 父末仇角干 母金氏休禮夫人 妃金氏 味鄒王女 訖解薨 無子 奈勿繼之 末仇味鄒尼師今 兄弟也」

「3년 봄 2월 친히 시조의 사당에 제사하였다. 그때 붉은 구름이 사당 위에 서리고 신기한 새가 사당 뜰에 모였다. 三年 春二月 親祀始祖廟紫雲盤旋廟上神雀集於廟庭」

「37년(A.D 392년) 봄 정월 고구려에서 사신이 오니 왕은 고구려가 강성한 까닭에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보내어 인질로 잡혔다. 三十七年 春正月高句麗遣使王以高句麗强盛 送伊飡大西知子實聖爲質」

「46년(A.D 401년) 봄 여름 가물었다. 가을 7월 고구려에 인질로 잡혔던 실성이 돌아왔다. 春夏 旱 秋七月 高句麗質子實聖還」

「47년(A.D 402년) 봄 2월 왕이 돌아갔다. 春二月 王薨」

 

내물이사금(奈勿尼師今)은 흘해이사금 39년(A.D 348년)에 바다를 통해 신라로 와서 신라의 궁성을 장악해 있다가 A.D 356년에 정식으로 즉위하였다.

내물이사금은 신하(臣下)에게 정무(政務)를 위임하지 않고 직접 통치하였다. 이는 내물이사금의 힘이 그만큼 강하였기 때문이다.

내물이사금 37년조 문구는 신라가 고구려에 인질(人質)을 보내고 복속한 것을 적은 것이다.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A.D 402년  즉위

「실성이사금은 알지의 후손이요 이찬 대서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이리부인(伊는 企로도 썼음)이니 아간 석등보의 딸이요 비는 미추왕의 딸이다. 실성은 신장이 7척 5촌이요 밝고 통하여 원대한 견식이 있었다. 내물왕이 돌아가고 그 아들이 아직 어리므로 나라 사람들이 실성을 세워 위를 계승케 하였다. 實聖尼師今立 閼智裔孫 大西知伊飡之子 母伊利夫人 伊一作企 昔登保阿干之女 妃味鄒王女也 實聖身長七尺五寸 明達有遠識 奈勿薨 其子幼少 國人立實聖繼位」

「원년(A.D 402년) 3월 왜국과 우호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잡혔다. 元年 三月 與倭國通好 以奈勿王子未斯欣爲質」

「2년(A.D 403년) 미사품을 서불한으로 삼고 군국의 일을 위촉하였다. 二年 春正月 以未斯品爲舒弗邯 倭以軍國之事」

「3년 봄 2월 친히 시조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三年春二月親謁始祖廟」

「16년 여름 5월 왕이 돌아갔다. 十六年 夏五月 王薨」

 

실성이사금 원년조에 내물이사금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왜국(倭國)에 인질(人質)로 보냈다고 적혀 있다. 이는 신라가 임나연정(任那聯政)에 인질(人質)을 보낸 사실을 적은 것이다. 광개토왕은 A.D 400년까지 신라, 백제(百濟), 가야(加耶), 대마도(對馬島), 일본열도왜(日本列島倭)를 복속시키거나 정벌한 후 대마도에 임나연정을 설치하여 임나연정을 통하여 신라 등을 통제하였다.

눌지마립간기(訥祇麻立干紀)에 의하면 실성이사금은 눌지(訥祇)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고구려는 실성이사금과 원한이 있는 눌지를 왕으로 세워 눌지마립간계(訥祇麻立干系)와 실성이사금계(實聖尼師今系)를 대립시켜 신라를 분열시켰다. 

 

눌지마립간(訥祇麻立干)

A.D 417년 즉위

「눌지마립간(김대문의 말에 의하면 마립이란 방언에 궐이요 함조라고도 하는데 위에 준하여 설치한다. 즉 왕의 궐은 주가 되고 신하의 궐은 아래에 진열한다. 그를 본떠 이름이 된 것이라고 하였음)은 내물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보반부인(내례길포라고도 함)이니 미추왕의 딸이요 비는 실성왕의 딸이다. 내물왕 37년에 실성이 고구려에 인질 잡혔는데 실성이 돌아와 왕이 되자 내물왕이 자기를 인질 잡힌 것을 원망하여 그 아들에게 앙갚음 할 양으로 사람을 시켜 초청하여 비밀리에 알리기를 "눌지를 보거든 죽여 달라" 하였다. 드디어 눌지로 하여금 중도에 나가 마중하도록 하였던 바, 고구려 사람들은 눌지의 외양이 시원하고 마음이 바르며 군자의 풍도가 있음을 보고 드디어 말하기를 "귀국 왕이 나더러 그대를 죽이라고 하였으나 지금 그대를 보니 차마 죽이지 못 하겠다" 하고 이에 돌아갔다. 눌지는 원망하여 도리어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訥祇麻立干立 金大問云 <麻立者 方言謂궐也 궐謂함操 准位而置 則王궐爲主 臣궐列於下 因以名之> 奈勿王子也 母保反夫人 一云內禮吉怖 味鄒王女也 妃實聖王之女 奈勿王三十七年 以實聖質於高句麗 及實聖還爲王 怨奈勿質己於外國 欲害其子以報怨 遣人招在高句麗時相知人 因密告 “見訥祇則殺之” 遂令訥祇往 逆於中路 麗人見訥祇 形神爽雅 有君子之風 遂告曰 “爾國王使我害君 今見君 不忍賊害” 乃歸 訥祇怨之 反弑王自立」

「2년(A.D 418년) 봄 정월 친히 시조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왕의 아우 복호가 고구려에서 나마 제상과 함께 돌아왔다. 가을 왕의 아우 미사흔이 왜국에서 도망해 왔다. 二年 春正月 親謁始祖廟 王弟卜好自高句麗與堤上奈麻還來 秋 王弟未斯欣自倭國逃還」

「42년(A.D 458년) 봄 2월 지진이 있어 금성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가을 8월 왕이 돌아갔다. 四十二年 春二月 地震 金城南門自毁 秋八月 王薨」

 

눌지마립간(訥祇麻立干)은 즉위하자 말자 고구려에 인질(人質)로 가 있던 복호(卜好)를 불러들이고, 또 임나연정(任那聯政)에 인질로 가 있던 미사흔(未斯欣)을 몰래 빼내 온 후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벗어났다.

눌지마립간(訥祇麻立干) 42년조에 지진(地震)이 있어 금성(金城) 남문(南門)이 저절로 무너졌다는 것은 정변이 있었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눌지마립간은 이 정변이 있은지 6개월 후 죽었다.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A.D 458년 즉위

「자비마립간은 눌지왕의 장자로 어머니는 김씨니 실성왕의 딸이다. 눌지왕이 돌아가니 위를 계승하였다. 慈悲麻立干立 訥祇王長子 母金氏 實聖之女也訥祇薨繼之」

「2년 봄 2월 친히 시조의 사당에 참배하였다. 二年 春二月 親謁始祖廟 」

「4년(A.D 461년) 봄 2월 왕은 서불한 미사흔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를 삼았다. 여름 4월 용이 금성 우물 속에서 나타났다. 四年 春二月 王納舒弗邯未斯欣女爲妃 夏四月 龍見金城井中」

「21년(A.D 478년) 봄 2월 밤에 붉은 빛이 배나 북같이 되어 땅에서 하늘까지 닿았다. 겨울 10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二十一年 春二月 夜赤 光如匹練 自地至天 冬十月 京都地震」

「22년(A.D 479년) 봄 2월 3일 왕이 돌아갔다. 二十二年 春二月三日 王薨」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4년 4월조는 소지마립간이 바다를 통해 신라로 온 세력을 거느리고 신라의 궁성을 장악하였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자비마립간은 이때 사실상 폐위되었고, 소지마립간은 무력을 배경으로 사실상 왕이 되었다.

자비마립간 21년 2월조의 "붉은 빛이 배나 북 같이 되어 땅에서 하늘까지 닿았다"는 문구는 왕이 살해당하였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이를 보면 자비마립간은 사실상 폐위된지 17년 후에 살해당하였다.

 

소지<비처>마립간(炤知<毗處>麻立干)

A.D 479년 즉위

「소지마립간의 다른 이름은 비처마립간이다. 자비왕의 장자다. 어머니는 김씨니 서불한 미사흔의 딸이요 비는 선혜부인이니 이벌찬 내숙의 딸이다. 소지는 어려서부터 효행이 있고, 겸공으로 처세하니 사람들이 다 굴복하였다. 자비왕이 돌아가니 위를 계승하였다. 炤知一云毗處麻立干立 慈悲王長子 母金氏 舒弗邯未斯欣之女 妃善兮夫人 乃宿伊伐飡女也 炤知幼有孝行 謙恭自守 人咸服之」

「2년(A.D 480년) 봄 2월 친히 시조의 사당에 제사하였다. 二年 春二月 親祀始祖廟」

「22년(A.D 500년) 여름 4월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났다. 서울에는 누런 안개가 사방을 덮었다. 겨울 9월 왕이 날이군에 행차한 일이 있었는데 군민 파로가 딸이 있어 이름은 벽화, 나이는 16세 얼굴은 국색이었다. 그 아버지는 비단옷을 입혀 수레에 앉히고 채색 비단으로 덮어씌워 왕께 바치니 왕은 음식을 대접하는 줄로 여기고 열어보니 어린 계집애였으므로, 이상히 여겨 받지 않았다. 환궁한 뒤 생각이 나서 두세 번 미행하여 그 집에 가게 되었는데 길이 고타군을 경유하게 되어 어떤 할멈의 집에 자면서 "요새 사람들이 국왕을 어떻다고 하는가"하고 물으니 할멈이 대답하기를 "모두가 성인으로 여기지만 저는 홀로 의심합니다. 왜냐하면 왕이 날이의 딸을 가까이하여 자주 변복하고 다닌다고 하니 무릇 용이 고기의 탈을 쓰면 어부에게 잡히게 되는 것이거늘 이제 왕이 만승의 지위로서 자중할 줄 모르는데 그를 성인이라 한다면 누군들 성인이 아니겠소"라고 하였다. 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부끄러이 여겨 몰래 그 계집을 데려다 별실에 두었는데 이제 와서 아들 하나를 낳았다. 겨울 11월 왕이 돌아갔다. 二十二年 春三月 倭人攻陷長峰鎭 夏四月 暴風拔木 龍見金城井 京都黃霧四塞 秋九月 王幸捺已郡 郡人波路有女子 名曰碧花 年十六歲 眞國色也 其父衣之以錦繡 置轝 以色絹獻王 王以爲饋食 開見之 斂然幼女 怪而不納 及還宮 思念不已 再三微行 往其家幸之 路經古抒郡 宿於老 之家 因問曰 "今之人 以國王爲何如主乎" 對曰 "衆以爲聖人 妾獨疑之 何者 竊聞王幸捺已之女 屢微服而來 夫龍爲魚服 爲漁者所制 今王以萬乘之位 不自愼重 此而爲聖 孰非聖乎" 王聞之大慙 則潛逆其女 置於別室 至生一子 冬十一月 王薨」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22년조에 "여름 4월 용(龍)이 금성(金城) 우물에 나타났다. 서울에 누런 안개가 사방을 덮었다"는 문구는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이 바다를 통하여 신라로 온 세력을 거느리고 신라의 궁성을 장악하는 과정에 신라의 수도(首都)가 전란에 휩싸였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소지마립간은 이 싸움에 패(敗)하여 날이군(捺已郡 : 봉화) 방면으로 피신하였다가 그 해 11월에 죽었다.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A.D 500년) 즉위

「지증마립간의 성은 김씨요 휘는 지대로 혹은 지도로 혹은 지철노다. 내물왕의 증손이요 갈문왕 습보의 아들이요 소지왕의 재종제이다. 어머니는 김씨 조생부인이니 눌지왕의 딸이요 비는 박씨 연제부인이니 이찬 등흔의 딸이다. 왕은 체격이 커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소지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으므로 위를 계승하였다. 그때 나이는 64세였다. 智證麻立干 姓金氏 諱智大路(或云智度路 又云智哲老) 奈勿王之曾孫 習寶葛文王之子 照知王之再從弟也 母金氏 鳥生夫人 訥祈王之女 妃朴氏 延帝夫人 登欣 伊飡女 王體鴻大 膽力過人 前王薨 無子 故繼位 時年六十四歲.」.

「3년(A.D 502년) 봄 3월 순장을 금지하라는 영을 내렸다. 전에는 국왕이 돌아가면 남녀 각 5명씩을 순장하였는데 이제 와서 금지하게 된 것이다. 친히 신궁에 제사하였다. 三年 春三月下令禁殉葬前國王薨則殉以男女各五人至是禁焉 親祀神宮三月分命州郡主勸農 始用牛耕」.

「15년 가을 9월 왕이 돌아가니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다. 신라의 시호법이 이에서 처음으로 비롯되었다. 十五年 秋九月 王薨 諡曰智證 新羅諡法 始於此.」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은 A.D 500년 4월에 바다를 통해 신라로 온 세력을 거느리고 신라의 궁성을 장악하였고,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이 날이군(捺已郡) 방면으로 피신하였다가 그 해 11월에 죽자 정식(正式)으로 즉위하였다. 지증마립간기에는 정변에 관한 문구가 없으나 법흥왕기에 의하면 지증마립간 말기에 정변이 있었다.

 

법흥왕(法興王)

A.D 514년(실제 516년) 즉위

「법흥왕의 휘는 원종(책부원구<冊府元龜>에는 성이 모<募> 이름은 태<泰>로 되었음)이요 지증왕의 장자다. 어머니는 연제부인 비는 박씨 보도부인이다. 왕은 키가 7척이요 성품이 관후하여 사람을 사랑하였다. 지증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諱原宗 (冊府元龜 姓募名泰) 智證王元子 母延帝夫人 妃朴氏 保刀夫人 王身長七尺 寬厚愛人.」 [註 양서(梁書)에는 이름이 진(秦)으로 적혀 있다.]

「3년 봄 정월 친히 신궁에 제사하였다. 용이 양산 우물 속에 나타났다. 三年 春正月 親祀神宮龍見楊山井中」

 

법흥왕(法興王) 3년조의 "용(龍)이 양산(楊山) 우물 속에 나타났다"는 문구는 법흥왕이 바다를 통해 신라로 온 세력을 거느리고 신라의 궁성을 장악하여 임금이 되었다는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이를 보면 법흥왕은 지증왕이 죽은지 3년째 되는 해에 신라의 궁성을 장악하여 임금이 되었고, 지증왕이 죽은 A.D 514년 9월부터 법흥왕이 실제로 즉위한 A.D 516년 정월까지는 왕위(王位)의 공백기가 있었다. 법흥왕이 A.D 514년에 즉위했는 것처럼 적혀 있는 것은 신라의 왕통이 연속되었는 것처럼 가장하기 위하여 신라의 사가(史家)들이 그렇게 적은 것으로 보인다.

법흥왕기(法興王紀)에는 법흥왕이 지증왕의 아들이라 적혀 있고, 한편으로는 책부원구(冊府元龜)를 인용하여 법흥왕의 성(姓)은 "募"이고 이름은 "泰"라고 적혀 있다. 법흥왕이 지증왕의 아들이라 적혀 있는 것은 왕통의 연속성을 가장하기 위하여 신라의 사가(史家)들이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이고. 은유법으로 적혀 있는 문구에 의하면 법흥왕은 지증왕의 아들이 아니므로, 법흥왕의 성(姓)은 책부원구에 적혀 있는대로 "募"가 더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법흥왕(法興王)은 신라의 궁성을 장악한 후 만주의 발달된 제도를 채용하여 즉위 다음 해 병부(兵部)를 만들고, 그 2년 뒤 율령(律令)을 선포(宣布)하고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정하는 등 나라 체계를 바로 잡았다. 이후 신라는 발달된 제도로 더욱 강성해져서 법흥왕 때부터는 왜인(倭人)이 침범치 못하였으며, 강성해진 힘을 바탕으로 금관가야(金冠加耶) 등 가야국들을 병합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라초기(新羅初期)는 정변의 연속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정변을 숨기기 위하여 정변이 은유법으로 적혀 있고, 정변으로 인한 왕위(王位) 공백기(空白期)를 숨기기 위하여 일부 왕은 전왕(前王)이 사망(死亡)한 후 바로 즉위했는 것처럼 즉위시기가 소급되어 있다. 그 때문에 정변으로 왕위(王位)를 빼앗거나 빼앗긴 왕의 재위기간이 실제보다 적게는 수개월, 많게는 10여 년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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