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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잡록/수상록.에세이

성(姓)과 씨(氏) 小考

by 靑野(청야) 2011. 7. 30.
소크라테스등 그리이스 철학자들의 성과 이름이 궁금하여 촉발된 호기심으로 새벽에 인터넷 바다를 서핑하다보니 나름대로 정리가 된다.

앞선글에서 소개한 대로 그리이스시대에는 성이 없었고, 오늘날처럼 이름+씨족이름+가문이름 형태즉, 이름과 성으로 구분하여 발전한 것은 로마시대부터라고 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 아리스토 텔레스, 플라톤 등은 그리스 중반시대인들이기 때문에, 성이 없고 이름만 있었다고 전하는 것이다. 이 네들이 활동할 시기는 2500여년전, 그러니까 중국의 경우는 춘추전국시대이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고조선시대에 해당한다.

당시만해도, 우리 식이라면, 삼돌이, 삼순이, 삼식아들 개똥이, 뭐 이런 식으로 이름만 불러도 하등 식별에 문제가 없던 시대라, 굳이 씨족, 부족, 가문등 무리를 구분하고, 그 무리속의 소속임을 식별할 필요가 없이 이름만으로 식별이 가능했지 싶다. 아마도 누구네 아들, 손자등의 혈연의 식별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크라테스'라는 이름의 철학자가 있다. 히파르키아라는 여성철학자와 같이. 길거리에서, 개처럼 태연히 교접할 정도로 자유(?)롭게 살았다는 거지 철학자이다. 이 크라테스라는 글자만 들어 가는, 그리이스 역사에 등장하는 이름만 해도, 대충, 크라테스,소크라테스, 이소크라테스, 폴리크라테스, 크세노크라테스, 칼리크라테스등이 있었다. 이름만으로 식별한 그리이스시대의 당시사회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이를 보면, 당시, 인간들이 똑똑하였기는 하나, 교류하는 인간들이 몇 안되기 때문에, Identification(식별)의 어려움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또 강력한 정권의 부재로 국민들을 통제할 목적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국민들을 식별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면, 식별의 용이성이 절실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에, 뒤에 가문, 씨족으로 발전한 Grouping개념이 아직 정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이스인들의 이름이 긴 것은, 교류와 교환의 대상에 대한 Identification필요는 이름를 낳았기는 하지만, Grouping으로 발전하기전에 식별의 용이를 위해 이름이 길어지지 않았나 하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건을 설계할 때, 단순할 경우 그냥 식별분류코드만 부여하다, 물건이 복잡해지면, 모델, 상위Assembly, 하위 Assembly, 구성요소 부품의 상하연결관계를 규정하고 이를 표현하는 수단이 필요해지는 원리와 동일하다할 것이다.

그리이스 시대이후 그 후 로마시대로 들어서면서 정복지도 늘어나고, 인구도 늘어나면서, 인간관계나 인간관리를 위해 식별의 필요가 늘어나게 되었을 것이다. 제왕의 입장에서는 논공행상의 수단으로, 개별인간을 관리하기보다는 집단의 관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Grouping하고,국민들을 이 Grouping의 소속개념으로 파악하는 Identificatin의 수단일 등장하지 않았을 까?

그리하여 Grouping의 기본이 혈연계통이 우선적으로 고려되다보니 가문이 생기고, 그 가문의 연결관계가 확장되면서 씨족으로 Grouping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대중국에서는 성과 씨가 나눠어져 있었다고한다. 고문헌에 따르면 중국최초의 '성'은 풍(風)이고, 중국최초의 '씨(氏)'는 복희,신농.여와씨 등이다. 성과씨가 하나로 합쳐진 것은 진한(秦漢)시대에 들어와서 이라한다.

진한(秦漢) 이후 姓과 氏가 점차 하나로 합쳐져, 漢代에는 姓이라고 通稱되었다. 하지만 先秦時期에는 姓과 氏가 달랐다고 한다. 姓은 모계씨족사회 시기에 발생했다. 같은 姓을 가졌다는 것은 동일한 여자 조상을 가졌다는 의미이란다. 姓은 "明血緣", "別婚姻"하는 작용을 했단다. 氏는 姓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며. 부계씨족사회 초기에 姓과 氏는 부계씨족 혹은 부락을 표시했다고 한다.

계급사회에 들어와서 氏는 貴賤을 구별하는 의미가 있었으며 귀족 남자만이 가질 수 있었다. 춘추전국 시기에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생겨나면서 姓氏制度 역시 혼란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중국의 역사를 일견해, 보면 '하'나라는 BC21~16세기, '상(은')나라가 BC16세기~BC1066년. '주'나라중 동주가 BC 1066~BC771년, 서주가 BC770-BC256년, 춘추시대 BC770~BC476년, 전국시대BC475-BC221년, 진(秦)나라 BC221~BC206년, 서한(漢)이 BC206-AD23년,동한이 AD25-220년, 삼국(위촉오)시대가 AC220-280년,이다.

한편, 고대서양 문명을 훑어보면, 에게문명 BC20세기~BC14세기, 그후 무수한 역사적 부침을 거쳐  BC168년, 마케토니아 왕조 멸망까지 그리이스 시대가 이어졌다, 그후 마침내. BC146년 마케토니아가 로마의 속주가 됨으로써, 그리이스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로마시대가 도래 하였다고 한다.

대충 서양과 중국시대를 비교를 해보면, 중국의 공자 노자가 등장한 춘추전국시대는 그리이스에서 탈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등의 지성이 나타난 시대와 거의 비슷한 시기였다.

또, 그 후 성과씨가 합쳐져서 제대로 Identification이 확립된 시기는 중국은 진한(秦漢)시대라 하고 서양에서는 로마시대라 하는데, 이 역시 비슷한 시기이다

춘추전국시대을 거쳐 진한에 이르기까지나, 그리이스 시대를 거쳐 로마성립시까지, 동시대에, 유사한 환경이 동서양에 조성된 것은 인류문명사적으로 흥미 있는 현상이라 하겠다. 이 시기는 수많은 국가가 생겨나기도하고 이합집산, 합종연횡을 통해 부침과 흥망성쇠가 난무하였던 시기였다.

때문에, 무수힌 전쟁을 거치면서 인적, 문화적 교류와 제국의 권위를 세우면서, 농공행상의 합리적 관리를 위해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집단의 Identification을 부여하고 개별이름이 여기 소속되게 하였을 것이다. 집단의 Identification은 동류의 혈통, 지역, 직업등을 기준으로 하였을 것이나, 아마도 혈통(누구의 아들, 누구의 아들의 아들..)을 Grouping Identification화 한 것이 '씨' 였고, '가문' 이였을 것이다. 이른바 Familiy name의 연유이리라

고대중국에서는 성은 천자가 내리는 것이며 제후의 경우 그 출생지에 연유하여 성을 주고 그 封地에 연유하여 씨를 주는 것이라 했다. 또 관직자나 治邑者는 세공에 있을 때 그 관직명이나 고을 이름으로 씨를 삼게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초기의 성씨는 우선 황제의 지배를 전제로 그 영역 내의 인민을 출생의 지연에 따라 성별을 나누되, 다시 일족을 이룰 만한 지배 세력에게는 씨를 명함으로써 그 족계를 분명히 했던 것이다.

이것이 초기 '성'과 '씨'가 생긴 출발이였고 이런 프로세스는 중국이나 로마, 여타 지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필요에 의해서, 비슷한  과정을 거쳐나왔을 것이다.

이런 추론의 근거로, 한 성씨 기록을 살펴보자. 기록에 의하면,  주의 무왕이 상나라(은나라)를 이기고 마침내 태백(주 태왕 고공단보의 첫째아들)과 중옹(주 태왕 고공단보의 둘째아들)을 吳땅에 봉하니 서로 전하여 19世에 이르러서 수몽이 비로소 왕이라 일컬었다. 수몽의 아들이 저번이요, 저번의 아들은 합려요 그의 아들은 부차이다. 부차(춘추시대 吳王)에 이르러 월왕 구천에게 멸망하게 되었으니 모두 25世에 이르렀는데 월이 吳를 멸망하고 부차의 아들 이의를 吳에 봉하여 식읍으로 2읍을 내려 그 선조를 제사하게 되었다. 그뒤에 이의 의 아들 루양이 위나라에 들어가니 위후가 이르기를 본시 오나라 사람이다하고, '吳'라는 성을 내리니(사성 賜姓하니) 이로부터 오씨가 비로서 세상에 드러났다'

즉, 역사책에서 보듯이 수몽,저번, 저번의 아들 이른바 오왕 합려, 합려의 아들 부차, 부차의 아들 이의등은 이름뿐이였음을 알 수 있다. 후일에 '오'씨가 드러난 것이라는 것이다. 이후 문명화된 오씨 가문은 당연히 족보를 구성하고, 조상대대로 제대로 된 성과 아름을 부여하였을 것이다. 즉, 오씨는 시조부터 오씨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대대로 이어져 전승되어 오던 핏줄의 계통이 앞서와 같은 '오'라는 성씨로 사성(賜姓)되어 Grouping되고 이것이 체계를 이루면서 발전하여 가문으로 성립한 것일 것이다.

어디 오씨만 그러하였겠는가? 대부분의 성씨나 가문은 이와 같이, 전승과 신화로 전해오던 것이, 어떤 계기로 Identification의 목적으로 grouping되고, 그 Grouping의 대표를 '씨족대표이름', '가문대표이름' 으로 정착하면서 이른바 후손들은 족보제구성을 통해 선조대대로 성씨를 꺼꾸로 부여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대체적으로 그런 작업이 이루어진 시기가 중국에서는 진한(秦漢)시대, 서양에서는 로마시대가 아닌 가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초기 시대가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심득이 있는 데, 역사적으로도, 한국에서 중국식 성씨가 사용된 것은 삼국시대 이후로 추측된다고 한다, 처음에는 소수의 지배계급들이 그 신분의 고귀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하였고, 고려시대로 들어오면서 점차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알에서 났느니, 어쩌구저쩌구 하는 것은 처음부터 사실을 기록하면서 전해온 것이 아니라, 신화와 전승이 결국 문자로서 성씨와 가문의 뿌리를 재구성하면서 꺼꾸로 탄생한 또 다른 전승과 신화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신화와 전승이 허구라는 말은 아니다. 프로세스상 전승과 신화가 먼저고 기록으로 재구성이 뒤에 이루어졌다는 의미다. 그러다보니, 허구처럼 보이는 기록도 있을 것이고, 오래전부터 그런 서실이 있었던 것처럼 기록하였지만, 사실은 오류나 허구의 기록도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돌이켜보면, 성과 이름이 합쳐져 인간의 Identification을 '성명'으로 나타난 것을 살펴보면, 진한(秦漢)이전의 역사적 인물중에는 합려, 부차, 법려등의 이름만 전해오는 경우도 있지만, 공구(공자)처럼 성과 이름이 전해내려오는 경우도 있다. 즉, 성은 '공', 이름은 '구', 이른바 공자의 경우가 그러하다

'공'이란 씨족의 Identification을 가지고 초기부터 집단을 이루며, 식별관리된 조직이 있을 수 있다만, 통상의 이런 사회 형태가 될려면 기록상 진한시대 약 BC 200년 경이니, 공자가 태어난 것은 이보다 300~400여년전. 물론,수천년 역사에 비해, 200~400년정도는 큰 세월의 격차가 아니라서, 초기부터 '공'이라는 씨족에, '구'라는 이름을 가진 Identification을 가진 인물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공구'라는 인물의 명성이 전승과 신화로 이어져 오다가 '공'이라는 씨족의 'Identification'이 생기고 부터, 즉 후손들에 의해 공씨집안의 족보가 재구축되면서 형성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삼국초기 왕의 호칭등이 후에 재구성것도 비슷한 논리이다.

인류문명의 초기역사기록은  모두 이런 식으로 전승과 신화를 문자화 과정에서 꺼꾸로 재구성되어 기록으로 담게된 것이다. 그러니 재구성이 훗날,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기도 하고, 오류가 생기기도 할 것이지만, 오류가 생기면, 신화로 취급하거나 뭔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 것처럼 '오류'라고 결론짓기보다는, 미지의 대상으로 취급하고,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면(부합하는 것처럼 해석하고), 신주 모시듯이 하는 것은 일반적인 인간의 본성아닌가?

어떤 경우에는 신화와 전승기록이 종교의 신앙의 대상으로 승격하다보니, 이것이 마치 무오류의 절대적 진리인양 대접받고 있는 것들이 있다. 전승과 신화의 재구성기록이 오히려 첨단과학마저 구축(驅逐)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문명사적 넌센스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참고로, 중국에는 姓氏가 몇 개나 있을까? 後漢의  風俗通義 에는 고대 姓氏가 대략 500개정도 보인다. 宋代 鄭樵의 통계를 보면 당시에는 약 1,745개가 있었다. 淸代 張澍는 5,129개를 나열하였다. 현재에도 여전히 3,000여 개가 있다고 한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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