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漢 이후 姓과 氏가 점차 하나로 합쳐져, 漢代에는 姓이라고 通稱되었다. 하지만 先秦時期에는 姓과 氏가 달랐다. 姓은 모계씨족사회 시기에 발생했다. 같은 姓을 가졌다는 것은 동일한 여자 조상을 가졌다는 의미이다. 姓은 "明血緣", "別婚姻"하는 작용을 했다. 氏는 姓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부계씨족사회 초기에 姓과 氏는 부계씨족 혹은 부락을 표시했다. 계급사회에 들어와서 氏는 貴賤을 구별하는 의미가 있었으며 귀족 남자만이 가질 수 있었다. 춘추전국 시기에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생겨나면서 姓氏制度 역시 혼란이 발생하였다.
중국에는 姓氏가 몇 개나 있을까? 後漢의 應 가 지은 風俗通義 에는 고대 姓氏가 대략 500개정도 보인다. 宋代 鄭樵의 통계를 보면 당시에는 약 1,745개가 있었다. 淸代 張澍는 5,129개를 나열하였다. 현재에도 여전히 3,000여 개가 있다.
원래 姓은 어떤 한 씨족이 숭배하던 토템이나 혹은 거주지를 나타내었다(熊·姜). 하나의 씨족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인구의 증가로 몇 개로 갈라지게 되고, 이 새로 갈라져 나온 씨족은 다시 새로운 토템이나 거주지를 자신들의 명칭으로 함으로써 姓의 가지가 생겨났다. 부계씨족사회에 이르러 인구가 증가하고 활동 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姓의 지파는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이에 각 지파마다 하나의 특수한 칭호를 갖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氏이다. 따라서 姓은 舊來의 族號이며, 氏는 후에 나타난 族號라고 할 수 있다. 계급사회에 진입한 후 氏는 貴賤을 구분하는 표지가 되었다. 氏는 귀족남자 만을 일컽는 전문적인 호칭이었다. 귀족 여자들은 姓을 칭했으며, 이것은 족외혼이 가능하게 했다. 결혼 전의 여자는 姓 앞에 순서 등을 나타내는 이름을 붙였고(孟姜·叔 ), 출가하면 姓 앞에 국명을 붙이기도 했다(秦姬). 卿大夫에게 시집갈 경우 대부의 氏를 姓 앞에 붙이기도 했다(趙姬).
氏를 얻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제후는 분봉 받은 국명을 자신의 氏로 했다(夏氏·周氏). 卿大夫는 하사 받은 采邑을 氏로 했다(제나라의 崔씨·鮑씨). 官職을 氏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司馬氏·司空氏). 이 외에 祖父나 父의 字(孟孫氏·叔孫氏), 諡號(文氏·武氏·昭氏), 爵位(王氏·侯氏), 居處(南宮氏·百里氏)를 氏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춘추시기에 귀족 남자들이 姓을 칭하지 않았던 것은 姓은 태어나면서 얻는 것으로 氏만 말하면 곧 姓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始祖의 姓이 이미 오래 되어 단지 始祖의 姓만 말해서는 현재 자신의 신분을 나타낼 방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에게 그 祖父가 어떤 사람인지 알릴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氏를 칭하게 된 중요한 이유이다. 氏는 신분을 나타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변화가 심했다. 특히 제후와 卿大夫의 경우 1대 사이에 氏가 바뀌기도 하였으며, 동일한 사람이 서로 다른 氏를 갖기도 했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귀족이 몰락하여 천민이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귀족 신분을 표시하는 氏는 존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한대에 이르러 점차로 평민들도 姓氏를 갖게 되었다. 한편, 여러 가지 이유로 姓氏가 바뀌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賜姓, 避諱, 소수 민족의 改姓, 音訛, 劃數나 글자의 생략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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