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明과 未來와 나
목차
● 변화, 변화의 속도
● 다가오는 미래, 다가가는 미래
● 미래의 환경의 조명
● 가까운 미래의 기술들
● 진퇴양난 국면을 맞이한 현대문명
● 인류는 언제까지 살아남을 길이 있는가?
● 당대의 책무_이 세상과 후대를 위하여
● 당대의 책무_이 세상과 후대를 위하여
'대지의 신 '가이아'의 지구제어능력이 한계를 넘어셨다'
'지구자원의 고갈사태는 당대 말미나, 바로 다음 세대에 닥칠 일이라는 게 명약관화하다'
20세기 말부터, 지구환경문제, 지구자원의 유한성 문제로, 지구가, 그 지구속에 살고 있는 깨어난 자들로부터 끊임없이 경고음이 발해져 오고 있다.
'미래는 준비하면, 희망과 비전으로 다가오지만, 그렇지 않으면 두려움과 불안으로 다가올 것이다.'
나로서는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치고 싶지 않다. 비록 턱없이 작고 미미한 역량이 지만, 나름대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것이 내가 살아 있는 의미이다. 언젠가, 내가 눈을 감을 때, 우리 늦둥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유일한 유산이다.
돌이켜 보건데,
그 동안 세상이 참 많이 그리고, 참 빠르게 변해왔다. 앞으로는 더욱 변화의 가속도가 붙어 그야말로 미친듯한 광속의 변화시기일 것이다. 속된 말로, 문명사회현장에선 ‘졸면 죽는다’ 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변화지 않으면, 변화의 속도에 따라가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것이다. 졸고서야 그 변화를 우찌 감지할 것이며, 그 변화의 속도에 우찌 대응하리요?
허나, 모든 것이 그렇게 미친 듯이 변해간다면, 남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변화지 않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이대로 간다면 변화지 않는 것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변화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있을 필요가 있겠느냐? 모든 것이 변해간다면, 세상이 그렇게 변해 간다면…
내 당대만 보드라도, 시골출신들은 대부분이 다 그렇겠지만, 대여섯살이면 토끼 몇마리 먹여 살리고, 예닐곱때이면, 염소 한 마리 나 송아지 한마리 먹여 살리는 책임이 부여되던 그런 인생초장의 시절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언젠가 외부인이 동네에 들어와 진을 치고, 뱀을 잡아오면 돈을 준다는 데 현혹(?)되어, 산으로 들로, 독하고 희귀한 뱀일 수록 비싸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뱀을 잡으로 다니던 생생한 기억도 있다. 실제 뱀을 팔아 팔아 용돈을 벌었던, 그런 길밖에는 용돈을 구할 수 없었던 그런 시골시절들에 비하여, 겨우(?) 반세기가 지난 요즈음의 세상은 어떤가?
세상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나같은 시골출신이 아니라해도, 우리 당대인들에게는 현기증이 나고 어지러운 세상이다. 굳이 현기증나는 현실을 일일히 열거하지 않드라도 누구나 매일 피부로 절감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그렇다고 애써 변화에 둔감하다보면, 애써 변화에 둔감할 수밖에 없는 처지고 보니, 결국은 세상물정 모르는 퇴물로 전락하고 있지 않는가? 서글픈 현실이지만,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 는 '자연의 섭리', '세월의 몽둥이' 앞에 고개를 떨굴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네 인생들의 모습들이다.
우리 당대에 이루어 질 이런 변화의 모습이 이렇게 엄청난데, 저 천사 같은 어린 녀석들의 세상, 미래세대의 모습이 어떠할까,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남겨 주어야 하나?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이 쉰을 넘기고 내일,모레, 이순(耳順)에 가까워지다 보니, 우리 사는 세상 걱정보다,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보다, 어린자식들 사는 세상 걱정이 앞선다. 내 자식들이 살아야 할 미래모습을 그려보고, 자식들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갈까? 그런 환경을 위해서, 지금 나는, 우리 세대는 무얼 해야 할까? 비록 제대로 된 해결책을, 그네들을 행복하게 해줄 제대로 된 처방은 내어주지 못하더라도, 미래의 변해갈 모습의 상상화와 같은 그림이라도, 그런 단초라도 전해줘야만 되겠기에, 그네들에게 무슨 현실적인 도움이 되겠냐마는, 오히려 나자신을 위해서, 나름대로 애를 써 본다.
그냥저냥 세월이 흘러가다 보면, 저네 들이 스스로 깨닫고, 적응하고, 헤쳐 나갈 터인데, 이 시점에서 우리가 고민한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고, 우리는 우리대로 최선을 다하면 되겠고, 저네 들 세상은 저네들 몫이니, 지네들이 알아서 할거고, 우린, 열심히 벌어서, 저놈들에게, 우리처럼 고생 않고 잘 묵고 잘 살도록, 상속이나 두둑히 해놓으면 되지, 문제는 돈이제, 돈…..” 이런 생각들을 하실 분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지당한 말씀이다. 세상 잘 돌아가고, 앞으로도 뭐 조금은 소용돌이가 있겠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변화라는 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변해가는 것은 사필귀정이고, 인간사에, 여러 시대, 여러 세대에 걸쳐 항상 있어오는 일, 그런 것에 신경 쓸 것 없이, 사람이 대범하게 살아야 하는 데....
나로서는 그러질 못한다. 저 어린 녀석때문에 만은 아니다. 우리 문명세대의 연속성에 대한 나름대로의 확신과 해결방안이 나름대로 안심할 수준으로 확립되지 않는 다면, 나로서는 이 만큼 살아온 내 인생이 참으로 무가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는 안타까움과 두려움이 내 심중에 팽배하다. 한 조각 구름처럼 사라지는 인생이라면, 굳이 이렇게 애써 어려운 길을 돌아올 이유가 없었지 않는가? 그래서, 결국은 쓰잘떼기 없는 넋두리가 되어버릴지도 모를 그런 메시지를, 공허한 메아리로 될 망정, 외로운 메아리로 될 망정, 간혹 미친놈 발작하듯, 소릴 질러보곤 하는 것인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렸다는 갈릴레이 같은, 갈릴레이를 미치게 한 그런 차원 높은, 당시로서는 천지개벽 못지 않는 그런 고차원적인 내용을 지꺼리진 못해도, 요즈음, 다락같이 치솟는 석유와 수년전부터 100년만의 더위가 낭설이 아닌 듯 한 여름이면, 연일 불가마처럼 대지를 달구고, 북극해의 빙하가 녹아 북극길이 열렸다는 지구의 온난화, 자원의 고갈등, 자연환경의 변화가 두렵기 그지 없는 데 ,
철없는 늦둥이, 엄마잃고 당분간 이 애비만을 바라보며, 험난한 생활을 헤쳐나가야 할 녀석을 둔 나로서, 비록 미친놈 소리 들을지언정, 주절거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로서는, 내 기준으로는, 도덕의 위기, 인문의 위기, 정신의 문제라면은 걱정을 덜하지. 할 필요가 없던가. 그리이스 시대에도 미래를 걱정하는 노.장층들이 “요즈음 젊은이들 하는 꼬라지들 보니, 아테네의 미래는 없다. 말세다 말세야” 라고 당시 젊은 층의 타락과 도덕적 해이등에 적이 걱정하고 실망감을 표출했다고 하잖는가?. 그래서, 그리스는 가고, 로마시대가 도래 했을 것인가?.
크게 보면, 긴 세대로 보면, 문화야 말로, ‘正反合’, 흥망성쇠가 반복되는 것이니, 이 시대가 가면, 다음세대는 또 다른 모럴로, 나름대로 대를 이어 갈 것이며, 도덕적, 인문적 역사는 돌고 돌겠지?
하지만, 자원과 문명은 다르지 않겠어?. 자원은 어짜피 한정적일 수밖에 없으니까. 한정된 지구자원이 그 고갈의 현저한 징후가 예측될 때부터, 지구문명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이 올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동서고금의 어느 성현, 예언자도 자원의 위기에 따른 지구 문명의 종말가능성을 인류에게 제대로 알리기나 했나? 이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우쨋튼,
불행하게도, 그런 자원의 고갈사태는 우리시대 말미나, 바로 다음 세대에 닥칠 일이라는 게 명약관화하다는 것이다, 앞선글에서 누누히 설명하였듯이, 우리 당대안에 그런 징후가 나타날 것이고, 아니 나타나고 있고, 지금의 우리 세대가 고민하지 않으면, 바로 다음세대, 여러 세대가 지난 수 백년 후의 세대가 아닌 바로, 당대, 자식대에 닥쳐올거라는 것이다. 손자세대에까지 갈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대로는 다음세대가 다가오기전에 혼란이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지구자원의 고갈의 대책은 지구자원의 고갈의 원인제공을 한 당사자들인 우리 당대에 반드시 해결하든가 해결의 기반을 구축하든가,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야 한다.
당연히, 현세대들이, 이런 저런 해결책을 모색을 해주어야 하고, 다음 세대들에게, 이 문명의 위기를 타고 넘도록 기술과 지혜를 전해주어야 하고, 적어도 그네들이 위기 극복을 위한 시간벌기용 자원정도는 남겨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죄를 짓는 것이고, '참으로 이기적인 세대였구나' 하고 후세들에게 원망을 바가지로 듣지 않겠어? 아니,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후세대라면, 그런 불평마저도 할 겨를이 없던지, 숫제, 그런 불평을 할 후예들마저 없을 지도 모르지.
“여러분, 지구는 지금 죽어 가고 있습니다. 지구 자원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답니다. 지금부터, 조금씩 나누어서 아껴 쓰면서, 과학기술자들이, 새로운 자원을 만들어 내던지, 새로운 행성에서 새로운 자원을 찾아내어 채굴하던지, 할 때까지 우리 모두 아끼면서 버팁시다”
누군가 이렇게 외치면,
“그래 그럽시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 모두 아끼고, 서로서로 도와야지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덜 낭비하고, 두루두루 나누어서 시간을 벌었어야 하는 데….”
이렇게 호응하는 세계 인민들이 있을랑가?
전 세계인민들이 모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이제사 정신차리고 그런다 한들, 미안한 말씀이지만, '너무 늦었소이다' 라고 말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지 않도록 미리미리 나누어 고민도 하고, 대책도 세워야 할 것이다.
자원낭비적인 서구문명이 세계문명을 지배하기 시작한 이래로, 문명이 가속화 할 수록, 자원의 낭비도 가속화하니, 그 불행의 씨앗은 서구문명이 세계문명을 지배하기 시작한 그 때, 오래 전에 뿌려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이 문명은 최고도로 그 물질적 성장을 향유하지만, 바로 그런 시점에, 이 문명의 위기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고뇌해야 된다 고 생각하니....
"안하면 되지? 씰데없이! 시간이 흘러가면, 해결될 껴! 답답헌 놈 우물 판다고, 답답한 누군가들이 멋지게 해결할 껴!" 이런 낙천가들도 많겠지? 아니, 이런 낙천적 사고를 할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 우짜라꼬?”
우리 늦둥이 녀석이 논리에 궁하든지, 이것저것, 녀석의 버릇없슴이나, 잘잘못을 훈육겸 가르치러 들면, 자슥이 겸허히(?) 받아드릴 생각은 안하고, '그래서 우짜라꼬'를 외치면서 왕 짜증이다.
오늘의 세계만민들은 자원의 고갈, 문명의 위기 운운하면, “그래서 우짜라꼬?” 마치 우리 집 늦둥이처럼, 왕 짜증을 낼 것 같은 분위기라는 것, 짐작은 된다!.
대책 없는 인민들 보고, 문제, 문제 하는 데, 지금 그런 이바구 해봐야, '실컷 따가운 햇살에 김도 매고, 비료도 주면서 고생고생 하면서 가꿔놓아도 나락 석섬에 씨도 안 들어가는 짓, 허튼 짓'이라는 것 알지.
하지만, 오늘도 태양은 어김없이 떠올라서, 하루를 불사르고 서쪽으로 지고 있는 데, 내가 사는 세상, 우리가 사는 세상 걱정보다,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보다, 자식들 사는 세상, 자식세대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사는 동안, 내 편하게 살다 가면 그뿐, 후대들은 후대들 알아서 하겠지? 그것은, 재산을 탕진하고, 곡간을 비워두고, 알아서 먹고 살아라? 그렇다면, 무책임한 망나니 행동에 다름 아니다.
얼렁뚱당 우리 늦둥이에게 바가지 씌워, 미래로 보낸다면, 그 녀석은 어찌 자기 아들이라고 명명한, 내 손자인 ‘청명’이 에게 암울한 상황을 또 떠 넘길까?
후대가 먹고 살 자원을 아작을 낸 세대라면, 마땅히, 자원고갈과 환경파괴를 극복할, 과학기술이라도 남겨줘야 하지 않겠는가? 하다못해, 그럴 ‘가능성과 희망’ 만이라도 전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이왕, 서구문명이 세계문명을 좌지우지, 빼도박도 못하는 처지인 이상, 우선은, 오히려, 과학기술을 더욱발전시켜, 수소핵융합발전이 보편화되기전까지, 원자력 발전확대, 태양광, 풍력, 바이오매스(Biomass)등 을 이용한 이른바 신재생에너지를 에너지원으로 개발하고 ,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여, 남는 화석연료는 인류문명의 지속을 연장하기 위한 재료로 사용하여야 한다.
빈번하게 발생하는 원자력 재앙으로 각국이 안티원자력 풍조가 만연하나, 성장을 희생하는 문명구조가 아닌 이상, 원자력을 회피해서는 성장을 도모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문명이, 원자력에 의존하든 안하든, 삶의 질의 급격하고 과도한 향상과 성장위주의 문명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특히,중국,인도등 인구대국의 자원소모를 줄이기 위해, 성장을 희생하드라도 저자원소비산업 위주로 산업구조를 재편하여야 하며, 성장을 하드라도, 자연친화적, 자원재생적 산업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가까운 미래에는 자가발전주택, 자동경작시스템등 이 그런 유형의 산업이고, 미래산업으로 각광받을 산업이 될 것이다. 그것은 문명사적 필연이다.
또, 지구문명이 더욱 오래 지속하기 위해서는 먼 미래를 대비하여, 쉽지는 안겠지만, 행성탐사와 행성간 자원이송, 태양에너지 채취및 이용등이 차근차는 준비되어야 한다.
언젠가는 인류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지구밖의 행성에서 자원을 채취하여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마치 마젤란, 컬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오늘날의 문명사회로 발전하였듯이, 이런 우주과학기술의 발전이 언젠가 지구를 구원하는 구세주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미국이나 중국등 특정국가의 패권에 지배받지 않도록, 적절한 국제적 합의와 제어노력이 필요하다.
동시에, 전세계적으로 어떤 방법이든, 인구조절을 정책이 시행되어야 하고, 슬로우시티, 슬로우칸트리 운동이 요즈음의 성장위주정책처럼 추진되어야 한다.
앞선글에서 누누히 설명허였듯이, 자원의 고갈과 환경의 파괴로 인하여, 결국 스스로 개체를 줄여 사회를 지탱하고 유지하는 곤충세계처럼, 이대로는 인간이 인간을 줄여야 하는 종말적 상황에 몰리게 될 것이다.
다시한번 당대의 인간들에게 묻노니,
'자원이 유한하다는 것에 동의 하는가? 그렇다면, 자원에 기반한 문명의 성장과 지속, 좁게는 지금 향유하고 있는 이 싯점의 풍요와 행복(?)이 앞으로 몇세대나 지속될 것 같은가? 내 자식이나 후손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질 것으로 생각하는가'
대지의 신 '가이아'의 지구제어능력이 한계를 넘어셨다 하지 않는가? '과학기술기술 유한한 자원문제, 환경문제를 해결을 해줄 것이라 믿는가?'
'다음 세대야 우찌되든, 내 당대만 괜찮으면 된다고 생각하는가?'
요즈음 세상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미래세상이야 우찌되던, 인간의 욕심만은 끝이 없어 보인다. 권력을 탐하고, 무리를 지어 세력을 키우면서, 사회를 지배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거나, 부귀영화가 자손만대에 전해질 것처럼, 재물에 연연하고, 심지어 재산을 불리는데 부정한 방법이 꺼리낌없이 동원 되기도 하고, 자식이 살 세상과 환경은 관심도 없으면서, 악착같이 자식공부에 올인하는 세대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한두마디 묻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권력과 부에 대한 탐욕은, 세상의 변화 미래에 대해, 인간정신의 불안과 두려움의 표출일지도 모른다. 불안과 두려움이 클 수록, 여유는 없어지고, 더욱 권력과 부나 정신적 안정을 구하는 집단에 매달리는 것은 인간의 본연의 모습 아니겠는가?
나역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여느 인간들 못지 않다. 더구나 늦둥이의 현재까지 걱정해야 하고, 나 스스로의 현실 생활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주제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데카르트가 왜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가 아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고 사유했을까?
내가 존재하여도, 반드시 생각한다고 볼 수 없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다하여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역시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명제의 역은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 아니라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두려움과 불안도 없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는 가정자체도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 은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즉, 내가 살아있기 위해서이다.
'살아있슴이 곧 기적이다' 이라고 틱닛한은 말한다. 생명이야 말로 그 자체가 기적이고 경이이다. 어디서, 무엇에서 생명이상의 기적을 바라겠는가? 생명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여기에 비하여, 욕심과 욕망은 하찮은 것이다. 부와 권력은 더욱 하찮은 것이다.
우리 늦둥이와, 딸래미, 그 또래의 후대들 세상에는, 귀뚜라미 소리, 풀벌레 소리,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어우러진 세상, 한층 한가롭고도 아름다운 그런 세상속에서, 하찮은 욕심과 욕망보다는, 더욱 하잘 것없는 부와 권력보다는 하루하루 '살아 있슴의 기적' 을, '살아 있슴의 경이' 를 몸으로 마음으로 깨닫고 즐기도록,
그런 세상에 대한 꿈, 그런 세상에 대한 당대의 소망이 그들에게 전해 지도록, 나름대로 애를 써 본다만...
ㅋㅋㅋ
(끝)
'수상잡록 > 수상록.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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