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언제였던가. 아마 80년대 어느 때쯤되지요?, 현대 불교의 대선사이셨던 성철스님깨서 이런 법어를 남겨, 인구에 회자했지요.
이 법어는 700년전, 중국에서 발간한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란 책에 소개된 冶父(야부)스님이 쓴,
'산시산(山是山), 수시수(水是水) 불재하처(彿在何處)(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부처를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라는 시귀를 인용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고 합니다. '금강경오가해'는 금강경에 다섯 명의 선지식이 붙인 주석서란 것인데, 육조혜능대사, 부대사, 야부대사, 종경대사, 규봉대사라하네요. 또, 중국의 당나라 때, 청원유신(靑原維信)선사의 어록에서 유래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노승이 30여년전 참선하기 이전에는 산은 청산이요 물은 녹수였다. 그러던 것이 뒤에, 큰스님을 만나 깨침에 들어서고 보니 산은 산이 아니오, 물은 물이 아니더라. 마침내 진실로 깨치고 보니, 이제 산은 오로지 산이요, 물은 오로지 물이더라.
고승대덕들이 인용하는 이 법어의 근원은, 부처께서
'나는 밤을 밤으로 인식하고, 낮을 낮으로 인식한다' 는 말씀에 있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이, 선지식이고 선각자, 선지자들이라 하지만, 부처가 누굽니까? 이른바, 선지식, 선지자의 원조아닙니까? 해서, 이분들이 부처의 말씀에서 깨달음의 모티브를 얻었지 않았나 나름대로 생각해봅니다.
달라이 라마와 더불어 현존하는 세계2대불승으로 추앙받는 틱낫한 스님이 말씀하셨지요.
'마음이 산에 머물러 있을 때 마음은 곧 산이 된다'.
'마음이 바다에 머물러 있을 때 마음은 곧 바로 바다가 된다.'고,
'낮은 낮이고 밤은 밤이다'는 부처님의 말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고승들의 법어나, 마음이 머물러 있을 때, 마음은 곧 그곳이 된다는 틱낫한 스님의 말씀은. 나름대로 이해컨데, '삼라만상의 천변만변이 마음에 달렸다는 것' 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마음이 흘러가는 물에 머물면, 마음은 곧 흘러가는 물이 된다.' 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하여, 흐르는 강물처럼, 마음이 물처럼 흘러가면, 마음구석에 찌거기가 머물지 못할 겁니다. 모든 것을 흘러보내고, 마음을 비우면, 과도한 욕심, 집착, 미련의 부산물인 마음의 찌거기가 머물곳이 없어질 것니다.
마음의 문을 닫으면, 무엇인들 가슴에 와닿겠습니까? 닫힌 그릇이라면 마음의 그릇이 아무리 크다한들, 한줌의 세상밖에 더 담겼읍니까? 저 넓은 세상모습, 추하기도하고, 아름답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한, 각양각색의 많은 세상모습들은 닫힌 마음을 비켜갈 것입니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모른다고 하여 세상이 아는 것 만큼의 크기가 아닐 것임을 지당하게 알고 있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길들여져온 세상일에만 집착하고, 그밖의 세상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고, 의미를 두지 않으려하는 경향이 있음(인생살이 피곤하니까)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너도나도의 마음, 마음의 수준이겠지요
그런점에서 해넘이라면, 붉은 노을만 알고 있는 지구인들에게, 화성의 푸른 해넘이는 세상의 일반적 상식과 지식의 경계가 허물어 질 수 있다는 하나의 의미있는 단초를 제공하지 싶습니다.
-화성에서의 해넘이-
NASA의 화성탐색선 오퍼튜니티가 찍어 보낸 사진이라는 데요,
5월 19일 저녁 6시 7분경, 화성에는 황혼이 아니라
청혼 즉, '푸른 저녁노을'이라하네요
'Open Mind' 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진정한 Open Mind라면, 진정으로 마음의 문이 열려 있으면, 모든 것의 의미들이 산허리에 맴도는 구름처럼, 흐르는 물처럼 '때와 장소와 크기를 제약없이 내마음의 모습따라 잠겨들기도 하고,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기도 할 것'입니다.
이윽고, 내 마음에 경계를 없앤다면, 무엇이든, 내 마음과 교감할 수 있고, 내마음은 '바다가 되기도 하고, 산이 되기도 하고, 흐르는 물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
정월초하루 눈보라를 무릅쓰고, 설악산주변을 일주하고 왔습니다.
떠나기전 내리던 함박눈이, 천기를 조정하여,
머무는 동안 청명한 모습을 유지한 것으로 떠벌린 설악산 (울산바위측) 모습,
그날이 1월2일, 저녁부터 다시 폭설이....
태평양을 마음속에 담으면, 굳이 태평양을 가지 않아도 마음은 곧 태평양이 한가운데 있는 것과 같아지고, 마음속에 히말라야를 담으면, 굳이 히말라야를 오르지 않아도, 히말라야의 모든것이 곧 마음속에 있을 터인데,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태평양, 히말라야 고봉의 느낌과 비교되겠냐마는, 마음먹기에 따라, 대양과 산맥을 넘나드는 것과 같은 무한한 자유, 마음의 자유를 얻을 터인데,
굳이 길을 떠난 것이지요. 아직은 걸림이 많은 마음의 경계를 넓혀 보고자, 년초에 기회를 잡아, 눈보라가 휘몰아친다는 동해안쪽으로 무작정, 떠난 것이였습니다.
무작정이라....이런저런 생활의 굴레을 벗어버리듯 폼은 잡았지만, 돌아올 걱정이 더 큰 굴레가 되어 갤럭시폰의 날씨예보를 신주모시듯이 의지하였습니다. 때문에 같이 떠난 친구는 마음고생 꽤나 했겠지요?. 아니면, 나보다 두루두루 걸림이 없는 주류무체(周流無滯)의 마음이 더하여, 나보다 더욱 자유로웠을 수도....
부처가 '낮은 낮으로 인식하고, 밤을 밤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누구는 낮이 밤이 아니고, 밤이 낮이 아님을 모른다고 하는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분별은 또 다른 분별을 낳으니, 있는 그대로, 세상의 천변만변 모습그대로 인식하라 그 말씀?,
아마도, 그 말씀이 전하고자 하는 본디 의미는, 마음의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지면, 분별의 인식마저 없어지면, 바람과 구름이 어울러지듯, 내마음이 곧 밤이 되기도 하고 낮이 되기도 하고, 내마음이 곧 자연이 되고, 세상의 천변만변이 내마음속을 자유로이 어우러질 것', '나는 그런 자유인, 대자연인이니라' 그런 의미 아니였을까?
하지만, 세속일에 쪼그라 들어버린 마음, 그럴싸(?) 흉내는 낼지언정, 아직은 경계가 좁은 속인의 심중에 끊임없는 분별심이 바람처럼 구름처럼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할 뿐, 어찌, 언제 그런 경지에 수이 도달하리오?
부처의 말씀이 마음의 분별심이 일으키는 작용을 경계하였다 하지만, 어미잃은 초등학교 4학년 우리 꼬맹이, 방학이라 혼자 지내는 시간을 걱정하여 '잘있냐?' 라고 전화라도 할라치면
'나혼자 잘 할 수있다, 나를 물로 보지마라'
하고 단호하게 대들듯 제놈의 인생수준을 정의하 듯, 속인(?)의 좁은 마음에야, '밤을 밤으로 인식하고, 낮을 낮으로 인식하지 어찌,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인식할 것이며, 그럴 인식의 파격과 걸림없는 용기가 있으리요?'
또한, 여러 선각자 선지자들이, 마음이 산에 머물면, 마음은 곧 산이 되고 마음이 물에 머물면 마음은 곧 물이 된다. 하지만,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이 될 수는 없는 일?
'산을 물로 보지마라'
정월초하루 무모하게 떠난 여행길에서, 새삼 한줄기 깨달음(?)이 속인의 마음속으로 자꾸 들고 나는군요.
다시 쏟아진 눈때문에 우리가 다녀온 날만 빼고, 교통이 엉망이였다지요? 때문에, 잠시 '천기를 조정했다' 고 떠벌리기는 했지만, 아마도....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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