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春望(춘망)-杜甫(두보) >>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 : 조정은 망했어도 산하는 그대로요 城春草木深(성춘초목심) : 성안은 봄이 되어 초목이 무성하네 感時花淺淚(감시화천루) : 시대를 슬퍼하여 꽃도 눈물 흘리고 恨別鳥驚心(한별조경심) : 한 맺힌 이별에 나는 새도 놀라는구나 烽火連三月(봉화연삼월) : 봉화불은 석 달이나 계속 오르고 家書抵萬金(가서저만금) : 집에서 온 편지 너무나 소중하여라 白頭搔更短(백두소갱단) : 흰 머리를 긁으니 자꾸 짧아져 渾欲不勝簪(혼욕불승잠) : 이제는 아무리 애써도 비녀도 못 꼽겠네 <감상1>=오세주 우선 이 시는 안녹산의 난이라는 전쟁이 배경으로 깔려있다 인간의 이기심이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조성되어,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일시에 폭발하듯 나타난 것이 전쟁일 것이다 전쟁이 일단 터지면, 그것은 전쟁의 논리와 생리로 진행된다. 철저히 강자만이 살아남는 잔인하고 몰 이성적이고 비참하고 처절한 모습으로 말이다. 어느 한쪽이 다 없어질 때가지 계속되는 것이다. 철저하게 비인간적이고 파괴적인 것만이 인정받는 이상한 가치 질서를 가진다. 그러나 전쟁은 양념처럼 인류의 역사를 따라다닌다. 어느 시대고 전쟁이 없는 시대는 없었다. 과연 전쟁의 발생에 대한 신의 섭리는 무엇일까. 인류의 행복에 대한 신의 질투인가 그토록 수 많은 인간의 목숨을 빼앗고 고통과 파괴를 요구하는 전쟁을 인간은 왜 계속하는 것일까? 신은 왜 전쟁이란 비극에 대하여 침묵하는가? 전쟁을 통하여 달성할 무슨 다른 목적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 시 “春望”의 작가 두보는 전쟁을 직접 보고 체험한 작가다. ------------------------------------------------ http://cafe.daum.net/kim0/4J0/4666
--------------------------------------------------------------------------------------------------- 春日憶李白(춘일억이백) / 杜甫(두보) 白 也 詩 無 敵 (백야시무적) 飄 然 思 不 群 (표연사불군) 淸 新 庾 開 府 (청신유개부) 俊 逸 鮑 參 軍 (준일포참군) 渭 北 春 天 樹 (위북춘천수) 江 東 日 暮 雲 (강동일모운) 何 時 一 樽 酒 (하시일준주) 重 與 細 論 文 (중여세론문) 봄날에 이백을 생각함 이백이여, 당신의 시와 견줄 이 천하에 없으니 그 시상은 범속을 초월하여 너무나 뛰어납니다. 맑기는 유신의 시와 같고 기교는 포조의 시와 같습니다. 지금 저는 장안에서 봄철 나무 아래 있는데 당신은 강동에서 해 저물녘 구름을 보고 계시겠지요. 어느 날에나 당신과 술잔을 주고 받으며
두보가 이백을 만난건 그의 나이 33세때 방황하던 시절이다. 이 당시 이백의 시는 천하에 이름을 남기고 있었다. 벼슬조차 없는 방랑의 몸인 그가 이백을 흠모하고 찬사하는 내용이 가득한 글이다. 두보의 35세때 작품이다. ***술잔을 기울이며 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을 다시 전개하고 싶은 희망이 강렬하게 표현~~!! 박혜순도 술 한잔 들고 ...把酒....란 단어 좋아합니다. ㅎㅎㅎ 渭北 위수의 북쪽이며 장안을 지칭함. 작자 두보가 살고 있던 장안은 실제로는 위수의 남쪽에 있지만, 다음 구절의 '강동'과 대비시키려는 의도에서 사용됨. 江東 장강[양자강]의 동남쪽. 지금의 강소성 남쪽을 지칭하는데 이백이 유랑하고 있던 곳임. 何時 이제나저제나, 이별할 때 장래에 만날 기약이 없음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 [참고] 이 시로부터 渭樹江雲이니, 暮雲春樹니, 雲樹之懷니 하는 성어가 유래한다. 李白(이백)과 杜甫(두보) 모두 5만여 수에 달하는 唐詩(당시)는 기원전의 周(주)대부터 남북조시내까지의 1천6백여년 동안 생산된 시가 보다 양적으로 두세배가 될 뿐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다양성과 창조성이 그 어느 시대보다 풍부했다. 이렇듯 화려한 唐代(당대)에 활약했던 이백과 두보야말로 각기 개성과 업적을 남긴 중국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을 수 있다. 이백의 자는 太白(태백)으로, 701년 중앙아시아에서 한족 출신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西川(서천)으로 옮겼으나, 25세에 집을 떠나 세상을 홀로 떠다니던 그는 40여세에 즈음하여 잠시 관직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다시 방랑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당의 역사는 물론 중국사의 향방을 바꾸어 놓은 安綠山(안록산)의 난(755-763)에 관여하여 형벌을 받게 되는 처지에 이르렀다. 이때 그는 다시 유랑의 길에 올라, 마침내 762년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詩仙(시선)」이라 불리는 이백은 생애를 거의 방랑길에서 보냈으며, 주로 낭만적인 성향의 시를 1천 수 이상 남겼다. 그의 시는 대개 시풍이 호방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언어 사용이 명쾌했으며, 그 사상적인 기반은 도교였다. 비록 낭만적인 색채가 강하지만, 당시의 귀족정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짙게 담겨져 있다. 두보는 712년 河南(하남)에서 당대의 시인이었던 杜審言(두심언)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는 거의 관직에 기웃거리지 않고 일생을 가난과 방랑 속에서 보냈다. 약 1천4백수에 달하는 그의 시는 강한 사회성을 띠고 있었다. 즉 부패한 사회와 비참한 현실, 불합리한 윤리 등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국가와 민중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그대로 노출시겼던 것이다. 특히 그는 시를 통해 안록산의 난 동안 전화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고통을 대변했다. 이백이 시선이라는 별명을 가진 반면 두보가 시성(詩聖)「詩史(시사)」라고 불리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사회성 때문이다. 또한 이백이 현실보다는 일상을 벗어난 환상의 세계를 묘사하는데 주력했다면, 두보는 보다 현실적인 소재를 보다 현실적인 기법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대조적인 성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두 시인은 서로 끈끈한 교분을 지니면서 지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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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登金陵鳳凰臺 ( 등금릉봉황대) >> 이백(701-762) 謫仙 鳳 凰 臺 上 鳳 凰 遊 봉황대상봉황류
吳 宮 花 草 埋 幽 徑 오궁화초매유경
三 山 半 落 靑 天 外 삼산반락청천외
總 爲 浮 雲 能 蔽 日 총위부운능폐일
이백(701-762) 謫仙(하늘나라에서 귀향 온 신선이라 칭힘) 봉황대 위에 봉황이 놀더니 봉황은가고 대는 남았는데 아래로 강물만 흘러 가네 오나라 궁 화초는 오솔길에 묻히고 진나라 의관들(의관속대를 하던 왕경대부들) 도 옛무덤이 되었고야 삼산은 푸른 산 밖으로 반쯤 걸려있고 이수는 백로주로 나뉘는 구나 이 모든 것 뜬구름이 해를 가리매 장안은 보이지 않고 나그네 수심에 젖게 하네
鳳凰: 百鳥의 王으로 聖天子의 治世에 나타나는 祥瑞(상서)로운 瑞鳥(서조)라고 한다. 半落(반락): 구름밖으로 세 봉우리만 남아있음을 표현 이백이 최호의 황학루시를 보고 감복하여 황학루에서는 이후로도 최호의 황학루 시를 능가할 자가 나오지못한다고 하고 봉황대로 가서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런고로 형식이나 聲調)(성조)가 많이 닮아있다. 이시는 삼국(오나라 손권의 궁궐) 東晋의 古都와 역사를 懷古(회고)하는 情이깊다
登黃鶴樓 (등황학루) 崔顥(최호)
昔人已乘黃鶴去 석인이승황학거 此地空餘黃鶴樓 차지공여황학루 黃鶴一去不復返 황학일거불부반 白雲千載空悠悠 백운천재공유유 晴川歷歷漢陽樹 청천력력한양수 芳草萋萋鸚鵡州 방초처처앵무주 日暮鄕關何處是 일모향관하처시 烟波江上使人愁 연파강상사인수
옛사람은 황학을 타고 가버리니 이 땅에는 헛되이 황학루만 남았구나 황학은 한번가고 돌아올 줄 모르고 흰 구름만 천년을 부질없이 흘렀나니 내 건너 한양의 나무들 개인하늘에 역력하고 봄풀 무성한 저곳은 앵무주가 아니 더냐 해 저무는 하늘아래 내 고향은 어디 멘가 안개 옅은 저녁 강은 시름 젖게 하는 구나
崔顥(704?~754) 당의 변주(河南) 사람, 젊어서는 賭博(도박)을 즐겼고, 酒色(주색)에 깊어 詩도 輕薄(경박)하였는데, 만년에 風骨(풍골)이 뛰어난 시를 지었다. 官은 司勳員外郞(사훈원외랑). 시집1권이 전한다. 이詩는 그야말로 絶唱(절창)이라해도 손색이 없는 唐詩(당시)의 白眉(백미)라 할 수 있다. 그 構成(구성)과 修辭(수사) 등을 본 이태백은 이후도 이와 같은 시는 아무도 지을 수 없다고 탄복하고 黃鶴樓(황학루)에서 詩를 짓기를 포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봉황대로 가서 이시와 필적할 絶唱 登金陵鳳凰臺를 지었다고 한다. 그시절 이곳에 辛씨의 酒幕(주막)이 있었는데 한 道人이 와서 술값대신 술집 벽에 鶴(학)을 한 마리 그려주고 학이 내려와 도와줄 것 이라고 했다. 그 후 이 주점은 門前成市를 이루었는데 10년후 그 도인이 나타나 피리를 불며 벽속의 황학을 타고 선계로 올라갔다한다.
신씨는 그곳에 황학루를 지었다고 전한다. 중국 강남의 3대 누각은 악양의 岳陽樓(악양루) 남청의 騰王閣(등왕각) 무한의 黃鶴樓를 꼽는다. 이후 李太白은 이곳을 들려 2미터가 넘는 큰 碑石에 글을남겼는데, 壯觀(장관) 오직 단 두자 라고 한다 더 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黃鶴樓는 오층의 전각으로 鶴이 나는 듯한 처마 끝과 20미터가 훌쩍 넘는 대규모의 전각으로 높은 바위위에 세워져 그 위용이 가히 凜凜(늠름)하다. 首聯(수련)의 전설의 仙人(선인)에 대한 憧憬(동경)과 頸聯(경련)의 그것이 부질없음을 한편 구름에 物托(물탁)하고 頷聯 尾聯(함련 미련)에서는 一轉(일전)하여 저무는 江上(강상)에서 나그네 시름을 述懷(술회)했다.
정말 보기 드문 秀作(수작)이다
이태백이 무창의 황학루에 올랐다가
崔顥(최호)의登黃鶴樓를 읽고서
감탄하여 붓을 내던졌다가 .......
이 시를 완성한 후에 안도의 숨
을 내숴?ㅆ다고 함
. 동진의 고도였던 금릉의 봉황대에 올라
최호의 '등황학루'를 비기면서 쓴 시이다.
三山半落靑天外
二水分中白鷺洲
구절은 너무나 유명하다.
삼산은 하늘 끝에 반쯤 솟아 있고 라고 표현했을 법한데 이백은 반쯤 떨어져있다고 표현하는 '반락'이라는 시어를 사용했다.
다만 최호의 황학루 시는 신인과 인간의 교감와 경관의 미가 있고, 三山 二水의 대비되는 眼前(안전)의 풍경과 靑天 白鷺(청천백로)의 색감 과 半落 中分의 형상적인 對比도 뛰어나 웅대한 조망과 心情을 조화시킨 절창이다. 이백이 당 玄宗의 총애를 잃고 물리침을 입은 후이라 마지막 구 에서는 임금의 寵愛(총애)를 아직도 그리워하는 작자의 심정이 배어나 있다.
浮雲(부운)=양귀비, 안록산등등이 해== 당 현종 를 가린것은 간사한 신하들이 天子의 총명을 가리어 李白은 이렇게 나그네 되어 떠도니 王朝의 운명이 근심스럽다라고 간접적으로 표현하였다.
金陵은 지금의 江蘇省의 南京을 말한다. 古都로 많은 유적이 있어 시인 묵객들이 많이 찾았는데 심지어 우리나라의 金泉의 금릉도 그 금릉에서 이름을 따오고 삼산과 이수까지 지정 이름 붙였다하니 옛 시절 금릉의 영화를 짐작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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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읽은 詩, 詩賦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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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백의 시 "산중문답(山中問答)"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어찌하여 푸른산중에 사느냐고 묻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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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시냇가에서
- 우계 성혼(조선시대) -
五十年來臥碧山(오십년래와벽산)
푸른 산 속에 살아온 지 벌써 오십년
是非何事到人間(시비하사도인간)
인간세상 시비에 말려들 것이 무언가
小堂無限春風地(소당무한춘풍지)
자그만한 집이지만 봄바람 끝없는 곳
花笑柳眠閒又閒(화소류면한우한)
꽃은 웃고 버들은 잠들어 한가하기만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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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현연옥 | |
TITLE | [한시] 봄 비 / 허난설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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留春洞(봄이 머무는 마을)
- 이서구(조선시대) -
林花香不斷(림화향부단)
숲 꽃에는 향기가 끊이지 않고
庭草綠新滋(정초녹신자)
뜰 풀은 새롭게 푸르름이 더해지지만
物外春長在(물외춘장재)
보이는 것 밖에 언제나 있는 봄은
惟應靜者知(유응정자지)
오직 고요한 사람이라야 알 수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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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춘(逢春)-정도전(鄭道傳)
봄맞이-정도전(鄭道傳)
錦城山下又逢春(금성산하우봉춘) : 금성산 아래서 또 봄을 맞으니
轉覺今年物象新(전각금년물상신) : 금년에도 물상이 새롭도다
風入柳條吹作眼(풍입류조취작안) : 가지로 바람 불어버들눈트이고
雨催花意濕成津(우최화의습성진) : 비는 꽃을 재촉하여진을만든다
水邊草色迷還有(수변초색미환유) : 물가라 풀색은 없는 듯 있고
燒後蕪痕斷復因(소후무흔단부인) : 밭 불탄자국 끊어졌다이어진다
可惜飄零南竄客(가석표령남찬객) : 가련하여라,남방에귀양나그네
心如枯木沒精神(심여고목몰정신) : 마음은 고목처럼정신이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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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만났지만 평생을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듯 한번 읽은 시귀인데 가슴에 필이 꽂혀 잊혀지지 않는 구절도 있군요. 오늘 그런 시 얘기 하나 할께요. 꽃 같은 시절 처음 읽고난 후 나이가 들어감에 해석과 감동이 새로워지군요.
공자님 얘기부터 해야겠군요. 공자님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사서오경에 담겨있지요. 그 중 사람들의 마음을 순화시키기 위해 305수의 시가를 수록한 책이 시경인데,
이 시경의 맨 처음 나오는 시가 관저(關雎)랍니다. 누구든 한번은 들어보셨겠지요.
‘요조숙녀는 군자호구로다'는 말. 재미있어 옮겨 적어 봅니다만 약간 학구적으로 보이나 근거는 없고 저 혼자서 세월 속에 삭혀서 해석한 것이니 가볍게 이해하세요.
關雎(관저)
關關雎鳩 (관관저구) 꾸우꾸우 물수리새
在河之洲 (재하지주) 물가에 노니네
窈窕淑女 (요조숙녀) 아릿다운 아가씨는
君子好逑 (군자호구) 군자의 좋은 배필
參差荇菜 (참치행채) 물위의 노랑어리연꽃 (參差: 물건이 길고 짧은 모양)
左右流之 (좌우류지) 이리저리 흐르네
窈窕淑女 (요조숙녀) 아릿다운 아가씨를
寤寐求之 (오매구지) 자나깨나 그리워하네
求之不得 (구지부득) 찿아봐도 만날 수 없네
寤寐思服 (오매사복) 자나깨나 그리워하네
悠哉悠哉 (유재유재) 긴긴 밤 언제나 만날까
轉轉反側 (전전반측) 잠 못이뤄 뒤척이네
參差荇菜 (참치행채) 물위의 노랑어리연꽃
左右采之 (좌우채지) 이리저리 따왔네.
窈窕淑女 (요조숙녀) 아릿다운 아가씨와
琴瑟友之 (금슬우지) 비파와 거문고 타며 다정하네
參差荇菜 (참치행채) 물위의 노랑어리연꽃
左右芼之 (좌우모지) 이리저리 삶았네
窈窕淑女 (요조숙녀) 아릿다운 아가씨와
鐘鼓樂之 (종고락지) 북과 종 울리며 즐겼네
이 시는 남녀간의 사랑을 아름답게 노래한 중국 황하강의 상류 주남지방에서 불리워진 민요입니다. 황하 상류의 강가가 무대이지요. 아릿다운 아가씨가 흰 종아리를 드러내고 바구니를 들고 나물을 뜯는 장면이 펼쳐지지요. 강이란 사람들이 몸을 정결히 하고 여인이 머리를 감고 빨래를 하는 곳으로 남녀의 사랑과 밀회가 이뤄지는 낭만과 서정의 장소지요.
공자는 기원전 551년 주나라의 제후국 노나라에서 태어났고 전국시대의 혼란을 경험하며 유학을 완성시켜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사고와 의식을 장악하고 있지요. 이 시들은 당시에 채록된 것을 공자가 정리한 것이니 시가 만들어진 것은 지금부터 최소한 2600여년 전의 일이라 할 수 있지요. 그 때 이 시는 공자의 가슴을 그토록 감동시켰고 사람들의 심금을 장악하게 되었지요. 한편의 시를 가슴에 담고 그 의미를 되새기고 때때로 들춰내어 새로운 해석을 해 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요. 이 시가 우리에게서는 먼 이역지방에서 쓰여졌고 언어가 달라 아무리 해석해도 현지인의 의미와는 차이가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시는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만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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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邊塞詩-----
< 凉州詞 > - 王翰
葡 萄 美 酒 夜 光 杯
아름다운 포도주를 야광 백옥술잔에 담아 마시려는데
欲 飮 琵 琶 馬 上 催
말 위에서 출정을 재촉하는 비파소리 들리네.
醉 臥 沙 場 君 莫 笑
취하여 모래밭에 누워 있음을 그대는 비웃지 말라.
古 來 征 戰 幾 人 回
예로부터 전쟁터에서 살아돌아온 사람 몇이나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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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凉州) : 지금의 중국 감숙성 무위현.
* 야광배(夜光杯) : 밤에 빛을 내는 백옥술잔. 술잔이 정교함을비유
* 비파(琵琶) : 여기서는 출정을 재촉하는 비파소리로 쓰임.
중국은 지리적 특성으로 여러 이민족들과 잦은 전쟁을 치러야했습
니다. 자기 내부적으로 전쟁을 벌인 경우도 있지만.
변방 지역에 사는 이들은 전쟁의 직격탄을 수없이 받고 살아했지
요. 사람사는 꼴이 말이 아니었음은 不問可知였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자연히 전쟁과 관련된음악이나문학이발달되었구요
[이처럼 변방 지역의 전쟁을 노래한 시를
문학사에서는
변새시(邊塞詩) 라 합니다.]
변새시인으로는 고적(高適), 잠삼(岑參) 등이 유명합니다.
변새시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소개해드릴 일이 있겠는데 오늘은
변새시인(邊塞詩人) 왕한(王翰)의 시를 적어보았습니다. 왕한 시인에
대해서는 기록이 소략하여 아직 자세하게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현존
하는 작품 수도 다른 시인에 비해서 다소 적은 편입니다.
시의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다소 쓸쓸하고 무겁지요?
살아돌아올 기약이 없는 전쟁터,
이제 출정을 앞둔 작중화자(作中話者)
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지요?
아름다운 양주땅, 그러나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비극.
화창한 봄 날씨에도 늘 마음에 남는 글...
古 來 征 戰 幾 人 回
예로부터 전쟁터에서 살아돌아온 사람이 몇이나 있었던가
'철학.에세이.한시.기타자료 > 한시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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